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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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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끝자락에 태어나 많은 종교화를 남겼던 특이한 사람, 보스의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실은 책이다. 그가 나타내고자했던 의미는 중세적이었지만 그림의 테크닉은 르네상스적이었다. 보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당시의 보편적인 상식이나 풍습을 통해서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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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끝자락에 태어나 많은 종교화를 남겼던 특이한 사람, 보스의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실은 책이다. 그가 나타내고자했던 의미는 중세적이었지만 그림의 테크닉은 르네상스적이었다.

보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당시의 보편적인 상식이나 풍습을 통해서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 놓았는데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당시에는 상식이었지만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징도 있고 당시에도 어려운 알레고리를 즐겼던 분위기였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난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스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좌와 벌'에 매우 집착했던 것 같다. 아주 카톨릭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당시의 많은 저자들의 '좌와 벌에 대한 책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세밀화, 크기의 역전, 여러 생물체의 융합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의 감정을 유도했다. 후대에 마그리트도 이미지의 여러 융합을 시도했지만 그의 그림은 공포스럽지는 않다. 

대표 그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시기적으로 그림의 발달을 설명해주어 좋은 것 같다. 또 세부 그림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있어 좋다. 워낙 크고 복잡한 그림이라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에는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면 해상도가 높은 사진을 제공한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이 책을 읽으면 더 도움이 된다. 책의 사진들은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들이 섞여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쾌락의 정원'은 너무 유명한 그림이라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건초 수레'에 대해 자세히 알게되어 기쁘다.

https://en.wikipedia.org/wiki/Hieronymus_Bosch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paintings_by_Hieronymus_Bosch

 

일곱가지 대죄

 https://en.wikipedia.org/wiki/The_Seven_Deadly_Sins_and_the_Four_Last_Things

33쪽

보스는 이러한 중세적 태도에서 영감을 받아 <가나의 혼례>의 주제를 변형시켰고,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마드리드, 프라도) 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좀더 포괄적으로 전개하였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상황과 운명이 일련의 순환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동심원을 이루는 원형의 중앙 이미지는 '신의 눈'을 나타내며, 그 동공에서는 석관에서 모습을 나타낸 그리스도가 관자에게 성흔을 보여주고 있다. 동공 둘레에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느님이 지켜보신다."라고 적혀 있다. 신이 보고 있는 바는 눈의 바깥 고리에 반영되는데, 일상 생활의 생생하고 사소한 장면 속에서 행해지는 일곱 가지 대죄를 담고 있다. 죄명은 라틴어로 하단부에 분명히 적혀 있지만, 명문은 프랑크푸르트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처럼 부수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가 식탁에 가져온 모든 음식을 탐욕스레 먹어치우는 남성은 대식'을 나타내고. 불가에서 졸고 있는 포식한 신사가 나태를 나타낸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 '나태 의 경우 신사가 종교적 의무를 무시하고 있음은 묵주를 들고 방 왼편에서 들어오는 여성에 의해 알수 있다. '사음'은 천막 안에 있는 몇 쌍의 연인으로 보여준다. "오만'에서는 화려한 보닛을 쓴 악마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허영에 찬 여성이 뇌물을 받는다. '질투(거절당한 구혼자가 질투에 찬 눈으로 노려본다.) '분노'(술집 앞에서 두 남성이 싸운다), 탐욕(판사가  뇌물을 받는다.) 이처럼 비근한 드라마는 대부분 네덜란드 전원이나 세세한 가정용품이 가득한 정돈된 실내를 배경으로 한다.

키가 작고 건장하며 다소 어색한 인물들은 보스 작품에서 만날 수 있던 인물 들과는 다르다. 굳은 표정, 짙은 윤곽선, 녹색과 황토색이 지배적인 단조롭고 밝은 색채 또한 비전형적이다.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작업 방식이 미숙하여 초기 작 품으로 간주되었지만, 후대의 연구자들이 프라도의 일곱 가지 대죄>에서 의상 세부를 관찰한 결과 1490년경까지는 유행하지 않은 양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지적 하였다. 따라서 보스의 중기 (1485년경 -1500)에 작업장에서 제작된 작품으로 보는 편이 좀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디자인은 보스가 맡았음이 분명하 며, 탐욕과 질투 장면의 몇몇 인물과 같은 수준 높은 부분에서는 그가 실제 작 업에 참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보스가 그렸든 그의 조수가 그렸든간에 이 장면들은 놀라운 생동감과 심리적 관찰력을 보여준다. 펠리페 데 게바라는 '질투의 장면을 에티커(Ethike)'라는 고대 회화 양식에 비교하였고 에티케를 "인간 영혼의 습성과 정열을 주제로 담은 그림"이라고 설명하였다.

일곱 가지 대죄의 원환형 배치는 전통적인 형식을 따른 것이다. 예를 들면 14세기 영국의 프레스코 벽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디자인을 볼 수 있다도.. 많은 연구자들이 이 바퀴 같은 배치는 전세계에 만연한 죄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보스가 원형 디자인을 '신의 눈. 즉 신의 눈으로 본 바를 반영하는 거울로 변형하면서 이 모티프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지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도 많은 전례를 찾을 수 있다. 신을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중세 문학 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이다. 보스는 독일의 신학자 니콜라스 폰 쿠사(Nicholis of Cust)의 '신의 비전 Vision of God '(1453)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콜라스는 삼라만상을 반영하는 위대한 거울이라는 그를 감탄케 한 장엄한 이미지에 '신의 눈을 견주었다. 신이여, 오, 당신의 눈길은 얼마나 놀라운지요….당신을 사랑하는 만인에게는 그 얼마나 공정하고 고결합니까. 구세주, 신이여, 당신을 저버리는 만인에게는 그 얼마나 두렵습니까.

프라도의 <일곱 가지 대죄 중앙의 이미지 위아래에 펼쳐진 띠에는 신을 저버린 인간들이 신의 눈길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적혀 있다. 위쪽띠에는 "이 생각없는 민족, 철없는 것들아. 조금이라도 슬기로웠더라면 알아차렸을 터인데, 저희 들이 장차 어찌될는지 깨달았을 터인데"라고 되어 있고, 아래쪽 띠에는 "그들에 게 내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결국 어찌되는가 두고 보리라.라고 되어 있다(신명기 32장 28-29절, 20절). 이들이 결국 어찌되는지는 패널 귀퉁이 조그만 네 원에 제시된다. 여기에는 죽음, 최후의 심판, 천국 지옥이 묘사되어 있는 데, 이는 보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이해하던 인간의 네 가지 종말(四終)로, 네덜란드 수도원에서 말년을 보낸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수사 드니스(1-120-1471)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 장면들의 처리 방식은 일곱 가지 대죄보다 훨씬 미숙하여, 전적으로 보스의 작업장에서 제작된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일곱 가지 대죄가 각기 처벌받고 있는 지옥 장면은 시골 장터처럼 주의 깊게 분류 나열되어 보스의 묵시록적 악몽에 대한 암시는 엿볼 수 없다도 28

신이 하늘에서 인류를 감시한다는 개념은 우리에게 불쾌할 수도 있지만, 중세인들에게는 죄를 억제하는 유익한 것이었다. 독일의 인문주의자 야코프링 (Jakob Wimpheling, 1450-1528)은 에르푸르트의 교회에서 "하느님이 지켜보신다"라고 새겨진 명문을 보고 젊음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경건한 생활로 향하였 다고 한다. 보스의 '신의 눈은 이와 유사한 효과를 의도하였다. 묘사된 일곱 가지 대죄는 관자로 하여금 악에 의해 왜곡된 자신의 영혼을 대면하게 하는 거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관자는 눈의 중앙에 자리한 그리스도 상 에서 이러한 추악함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음을 본다. 프라도의 <일곱 가지 대죄 는 묵상, 특히 모든 선한 기독교인이 고백에 앞서 행하는 양심에 대한 엄격한 검 증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이 그림은 티벳 탕카의 'Wheel of life'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구도와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제도하려는 의도도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Bhavacakra
 

건초수레

https://en.wikipedia.org/wiki/The_Haywain_Triptych

70쪽

 사실 건초는 전통적으로 상징되어 온 바대로 인간의 나약한 면을 나타낸다. 1470년경 네덜란드에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신은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을 건초더미처럼 지구에 쌓아두었건만 인간은 혼자 전부를 차지하려 한다." 그러나 건초의 가치가 없어진 이후에는 건조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1550년 이후 플랑드르 엔그레이빙에 묘사된 우의적인 건초 수레는 이러한 의미였음이 분명하다. 건초 수레는 또한 1563년 안트베르 펜의 종교 행렬에도 등장하였다. 당대 기록에 의하면, 수레에는 '기만'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탔고, 세속적 소유물은 모두 건초(al boy)'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건초를 뽑으며 뒤따랐다. 이는 '결국은 모두 건초'라 는 당대 노래를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건초 수레는 모두 보스의 사후 몇 년간 등장하였는데, 대부분이 보스의 <건초 수레 세 폭 제단화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 역시 보스의 작품에 못지 않은 중요성을 갖는다. 1563년의 건초 수레가 카니발 수레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오히려 보스가 이와 비슷한 장식 수레에서 영향을 받 았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러 수행자가 따르는 건초 수레의 배치는 우의적 행렬, 특히 페트라르카의 <사랑의 승리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행렬은 15세기와 16세기의 태피스트리와 엔그레이빙에서 자주 등장하였다. 
보스는 '죄의 승리' 를 구상할 때 이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일곱 가지 대죄>처럼 <건초 수레는 죄에 몸을 내맡기고서 신의 법에는 전혀 마음쓰지 않고 자신들 앞에 놓인 운명을 망각한 인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서 보스는 일곱 가지 대죄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속적인 소유에 대한 욕망, 즉 탐욕이다. 미덕과 악덕에 대한 옛 핸드북에서처럼 '탐욕' 에 부수되는 죄는 주변의 인물상에서 구체화된다. 로렌트 갈루스(Iaurent Gallus)의 '왕의 꿈 King's Dream '(1279)에서 경고한 대로 탐욕은 불화, 폭력, 심지어 살인을 이끈다. 이 모든 행위는 건초 수레 앞의 넓은 공간에 묘사되고 있다. 왕자와 고위 성직 자는 이러한 소동과 동떨어진 채 만족한 모습으로 수레를 따르고 있지만 이는 이들이 이미 건초를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탐욕은 또한 사람들을 사기와 기만으로 이끈다. 왼편 아래 높은 모자를 쓰고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남성은 드릴비유의 '인간 생애의 순리'에서 탐욕의 보호를 받는 자와 같은 걸인인 듯하다. 중앙의 돌팔이 의사는 탁자에 차트와 약병을 늘어 놓고 사람을 안심시킨다. 오른쪽 아래에서는 수녀가 커다란 주머니에 건초를 넣고 있고 의자에 앉은 수도사가 이를 감독하는데 그의 뚱뚱한 허리는 탐욕스런 성향을 나타낸다.

다른 그룹의 의미는 불명료한데, 건초더미 위의 연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프라도의 '일곱 가지 대죄'와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아들이 사음의 죄를 나타낸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육체적인 즐거움의 추구는 세속적 이익 을 축적한다기보다는 소비와 관련되므로 탐욕과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찍이 15세기에 프루덴티우스는 사음과 탐욕의 밀접한 관계를 언급하였고, 이는 중세 조각상에서 빈번히 함께 등장하였다. '기독교인의 거올 Minur of the Christing'의 익명의 저자는 성 그레고리오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 이 설명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애쓰는 악마의 전당을 만든다. 부와 명예를 얻은 후에는 육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색정은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탕진한다.' 관목 숲에서 입을 맞추는 촌스러운 남녀와 우아하게 차려입고 연주하는 그룹은 신분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도 분명 육욕의 음악이다. 근처의 악마가 코로 음탕한 음조를 불어대며 연인들로 하여금 쪽의 기도하는 천사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부는 보스의 기본 주제인 탐욕의 승리를 강화해준다. 건초 수레 자체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은유적 기능도 갖는다. 16세기에 건초는 거짓과 기만의 의미를 함축하였고 '건초 수레를 몬다는 것은 속이거나 조롱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1563년의 카니발에서 건초 수레에 탄 악마를 '기만'이라 불렀고 프라도의 건초 수레>에서 수레 위에서 연주하는 악사 악마가 전통적으로 위선을 나타내는 색채인 푸른색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스의 건초더미가 의미하는 바는 자명해진다. 세속의 재산이나 명예란 본질적인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사탄과 그 의 무리가 인간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끌기 위해 사용하는 미끼인 것이다.

 

쾌락의 정원 

https://en.wikipedia.org/wiki/The_Garden_of_Earthly_Delights

80쪽

중앙 패널에서 우리는 우선 보스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전원을 만나게 된다. 공원 같은 넓은 풍경에는 누드 남녀가 가득한데. 이들은 커다란 과일을 먹거나 새와 동물과 놀거나 물 속에서 희롱하거나 부끄럼없이 공공연히 여러가지 사랑놀이에 몰두한다. 동물을 탄 남성들은 처녀들이 있는 중앙의 연못 주변을 회전목마처럼 돌고, 하늘에는 섬세한 날개를 단 인물이 떠다닌다. 이 세 폭 제단 화는 보스의 대제단화 중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중앙 패널의 느긋한 분위 기는 선명하고 고른 조명, 그림자의 부재, 밝고 높은 명도의 색채에 의해 고조된 다. 거주자들의 창백한 신체는 검은 피부의 인물들에 의해 두드러지며, 낙원의  과 나무 사이사이에 핀 꽃처럼 빛을 발한다. 원경 호수에 보이는 경쾌한 색채의 샘과 누각 뒤로는 언덕의 부드러운 능선이 저 멀리 사라진다. 작은 인물과 크고 환상적인 식물 형태는 그 원천이었을 중세의 장식 도어처럼 악의가 없다. 그림 앞에 서면, 누드 연인들은 "조용한 동산에서 식물 같은 순수함으로 평화로이 장난하 고 동식물과 하나가 되며, 이들에게 활기를 주는 섹슈얼리티는 순수한 기쁨. 순수 한 축복으로 나타난다."는 프랑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우리는 '헤시오도스가 황금 시대라고 기술한 인간과 동물이 평화로이 공존하며 노동없 이도 대지가 풍성하게 과실을 생산하는 세계의 유년기를 만나게 된다. 좀더 현대적인 언어로 말하면보스의 동산은 일종의 보편적인 러브인(lovein. 연애를 위 한 히피들의 집회) 이다.

그렇지만 벌거벗은 연인 군상은 순수한 섹슈얼리티 숭배를 의도한 것이 분명 아니다. 20세기에는 성행위를 정상적인 인간 조건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배우지만 중세에는 천사의 상태에서 인간이 타락한 증거로 좋게 보면 필요와 로 나쁘게 보면 대죄로 여겼다. 보스와 그의 후원자도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연인들이 등장하는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동산이 건초 수레 처럼 에덴과 지옥, 죄의 근원과 벌 사이에 자리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건축 수레가 세속의 부나 탐욕을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쾌락의 동산>은 관능적인 삶. 특히 사음의 죄를 묘사한다.

왼편 하단의 거품 속에 갇힌 남녀나 근처 홍합조개 안에 숨어 있는 남녀처럼 사람의 죄의 여러 측면은 직설적으로 묘사된다. 다른 인물들은 도착적인 사랑의 행위를 보여준다. 음부를 손으로 가리고서 물 속에 거꾸로 선 남성과 오른편 하단에서 상대방의 엉덩이에 꽃을 집어넣는 젊은이가 그 예이다. 이처럼 명백 한 표현과 더불어 관능적 삶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도 암시된다. 풍경에서 눈에 띄는 딸기는 육체적 쾌락의 허망한 속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는 곧 시구엔사의 결론이기도 한데, 그는 "그저 지나칠 때는 향을 맡을 수 없는 딸기와 그 열매의 순간적인 맛, 헛된 영예"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딸기는 <건초 수레의 건 초와 유사하다.

<지상의 쾌락의 동산> 세 폭 제단화를 세밀히 연구한 디르크 박스는 옛 네덜란드 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과일, 동물, 원경의 이국적인 광물성 구조물 등 중앙 패널의 여러 형태가 당시의 유행가, 속담, 속어에서 영감을 받은 에로틱한 상징임을 확인하였다. 예를 들어 동산에서 연인들이 먹거나 들고 있는 많은 과일은 성기의 은유로서 사용된 것이다. 전경에 두 번 등장하는 물고기는 옛 네덜란드 속담에서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과일 (또는 꽃)을 따다'는 성행위 의 완곡한 표현이었으므로, 오른편 중경에서 과일 따는 청년과 처녀 군상은 에로틱한 의미를 함축한다. 아마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인물들이 들어가 있는 크고 털 반 과일과 과일 껍질일 것이다. 박스는 이를 중세 네덜란드어 schel 또는 schil로 본다. 이 단어는 과일의 껍질' 또는 '싸움', '논쟁'을 의미하므로 Schel 안에 있다는 것은 적과 싸우는데 몰두하는 것이며, 좀더 쾌락적인 사랑의 다툼을 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또한 텅 빈 껍질 자체는 무가치함을 뜻한다. 결국 과일은 아담의 타락을 초래하므로, 보스는 죄를 나타내는 데 이 이상 더 적절한 상징을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세한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긴 하였지만, 박스의 해석은 대부분 신빙성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며 보스의 도상의 복잡성과 예술적 원천의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박스가 찾아낸 내용을 모두 나열하는 것은 네덜란드 민속백과사전을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 패널화를 이해 하는 데 중요한 것은 보스가 무수한 상징적인 인물과 형상의 틀로서 채택한 기본 주제이다.

우선, 육체적 쾌락의 이미지를 거대한 공원 또는 동산 같은 풍경으로 그렸다는 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동산은 수세기 동안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였다. 중세의 '사랑의 동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3세기의 장편 우의시 '장미 이야 기 Romance of the Rose'로, 이는 네덜란드어를 포함하여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이후 문학과 예술에 있어 수많은 모작을 낳았다. 사랑의 동산에서는 보스 당시의 태피스트리와 엔그레이빙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아름다운 꽃이 피고 새가 감미 롭게 노래하며 연인들이 중앙의 샘 주위를 걷거나 노래한다. 보스가 이 전통에 익숙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생행로 The Path of Life aka The Pedlar.(Outside panels of The Haywain Triptych)

건초수레의 바깥쪽 패널

101쪽

<건초 수레>와 <지상의 쾌락의 동산은 인류의 오랜 적인 세속, 음욕, 의미에 의해 덫에 걸린 인류를 보여준다. 한편 <건초 > 세 폭 제단화의 바깥쪽 패널에서는 다소 다른 견지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 영혼의 위험한 상황을 제시한다. 이 패널들은 세 폭 제단화의 다른 부분에 비해 수준이 떨어져 작업장의 조수가 세 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구성은 보스가 디자인하였음이 분명하다.

 전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야위고 해진 옷을 입은 젊지 않은 남성이다. 그는 고리버들 바구니를 끈에 매어 등에 지고 위험 지역을 지나가는 중이다. 왼편 하단에는 두개골과 뼈가 놓여 있다. 추한 들개는 발치에서 덤벼들고 그가 건너려는 다리는 매우 부실해 보인다. 그 뒤로는 도적이 또 다른 여행객에게서 물건을 뺏고는 나무에 묶고 있다. 오른편에서는 백파이프 소리에 맞춰 농민들이 춤을 준다. 원경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이 거대한 교수대 주변에 몰려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바퀴를 올려놓은 높은 장대가 보이는데, 이는 처형된 죄인의 시를 전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빈의 <최후의 심판> 바깥쪽 패널에도 성 야고보의 뒤로 폭력이 난무하는 유사 한 전원이 펼쳐진다. 이는 성 야고보가 여행의 안전을 기도하는 순례자의 수호성인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중세에는 누구나 정신적인 의미에서 순례자였고 지상 어디에서나 이방인이며 잃어버린 고국을 찾는 방랑자였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이렇듯 통렬하게 그린 이미지는 기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정 베드로도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을 기술한 바 있고, 후대의 문인들에 의해서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이제는 인간을 '추방되어 매우 비참하게 방랑하는 불쌍한 걸인'으로 보았고, 드릴비유는 '인간 생애의 순례'에서 순례를 수도 생활과 정신적 유혹을 아우르는 틀로 사용하였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지상의 이방인이 되고 순례자가 되어라. 그러면 이 세상의 일에 고민하지 않게 된다."고 훈계하였다. 이러한 순례자의 이미지는 브란트, 에라스무스, 그리고 보스 시대의 다른 문인들에게도 마찬가지 보스가 목판화의 정교한 설명적 장치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건초 수레>의 바깥쪽 패널에서 의도한 바는 분명 다르지 않다. 순례자는 방심할 수 없는 위험한 세계를 여행하고 그 변화무쌍한 세계는 풍경에서 제시된다. 도적이나 으르렁거리는 개처럼 신체적인 위험도 있다. 사악한 말은 종종 짖어대는 개에 비유되었으므로 으르렁대는 개는 비방자나 중상가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춤추는 농민은 도덕적 위험을 함축한다. 이들은 건초 수레 위의 연인처럼 육욕의 음악에 굴복한다. 모든 인간의 정신적 고난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순례자는 '에브리맨 Everyman, 보통사람, 이에 대응되는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는 Elckerlic와 Jetlemann) 과 유사하다. 이들의 정신적 순례는 당대 도덕극의 주제가 되었다.

한 장면으로 인간의 운명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 외벽에 그려진 그림과 주제가 비슷하다. 

https://blog.daum.net/tree1655/7546534

 

황야의 세례 요한

https://en.wikipedia.org/wiki/St._John_the_Baptist_in_the_Wilderness

 

우리나라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https://blog.naver.com/brilliantyj21/222396955296

 

 


 

e******s 2021.08.1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히에로니무스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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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쉬의 비밀]을 읽고서 다 풀리지않은 그림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본 책이다. 소설 속의 그림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어서 정통적인 해설을 듣고싶었다는 것이 본 마음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소설 속의 해석은 일부 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주장이었고 거의 책 내용 전체에 걸쳐 그의 그림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는 정통 교리를 그림으로 그렸음이 명백해졌다.     부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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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보쉬의 비밀]을 읽고서 다 풀리지않은 그림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본 책이다. 소설 속의 그림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어서 정통적인 해설을 듣고싶었다는 것이 본 마음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소설 속의 해석은 일부 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주장이었고 거의 책 내용 전체에 걸쳐 그의 그림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는 정통 교리를 그림으로 그렸음이 명백해졌다.

 

  부제로 '중세말의 환상과 엽기'라고 붙어있는데 사실 그의 그림 중 일부를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형태의 사람과 동물, 장치들이 그려져있다. 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다만 놀라울 따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동시대인이었는데 이토록 다른 그림을 그렸다니. 그러나 그 시대상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압박감과 절망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진실한 바람이 가득했던 시대였으므로 그림 속에 그러한 세계관이 진하게 녹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연금술이나 환각제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거나 종교적 이단에 속했다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다만 그 시절의 민간풍속과 우의등을 알아야만 그림 속의 은유적 표현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을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어있으며 그림도 풍부하게 들어있어 책을 읽고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보쉬(이 책에서는 보스라 불리웠다. 어떤 게 제대로 발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의 그림들 중에는 엽기라고 불리는 괴상한 모양의 악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런 것들만 너무 강조되어서 본래의 보쉬 그림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된 듯 하다. 그러니 프라이 호세 데 사구엔사가 주장한 것처럼 펠리페 2세에게는 보스의 작품이 부조리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스의 예술은 위대한 지혜와 예술적 가치를 지녔으며 실제로 그러하다. 만일 부조리함이 있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부조리함이지 그의 부조리함은 아니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은 인간의 죄와 망언을 그림으로 풍자한 것이다." (본문 167p)

 

  그림에는 문외한이며 그저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으면 좋아하는 단순한 독자로서 하나하나 꿰뚫어보고싶게 만드는 보쉬의 그림을 보고 의문을 해결해볼까하는 심정으로 읽었지만 매우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중세말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고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YES마니아 : 로얄 k********i 2009.03.01.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승리는 광기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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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였나? 백과사전에서 보스의 그림을 처음보고, 엄청... '무서운'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요사이 서양중세에 대해 공부하다가 새롭게 발견..   찾아보니, 그에 대한 그림은 인터넷에 정말 '널려' 있더라. (근래의 '엽기' 코드에 맞아서일까?) 하지만 역시 한 작가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책이 최고인 듯. 기브슨이 쓴 <히에로니무스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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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였나? 백과사전에서 보스의 그림을 처음보고, 엄청... '무서운'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요사이 서양중세에 대해 공부하다가 새롭게 발견..

 

찾아보니, 그에 대한 그림은 인터넷에 정말 '널려' 있더라. (근래의 '엽기' 코드에 맞아서일까?)

하지만 역시 한 작가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책이 최고인 듯. 기브슨이 쓴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바로 그런 책.

 

작가는 보스의 초기작 <일곱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에서부터 중기의 <최후의 심판>,<건초수레>를 지나

만년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에 이르기까지 그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적절하게 소개하고 안내해준다.

예컨대 

 

 

...<건초수레>는 죄에 몸을 내맡기고서 신의 법에는 전혀 마음쓰지 않고 자신들 앞에 놓인 운명을 망각한 인간을 보여준다.(70)

 

설명을 보면 알수 있듯이, 작가는 대체로 보스가 신비주의라던가, 악마주의라던가 하는 세속의 평가에 대해 일축하고,

그가 실제 속했던 '성모마리아형제회'의 회원으로써, 지극히 종교적인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보스의 그림이 주로 '탐욕의 승리'를 나타내긴 하지만, 그 목적은 물론 '탐욕에 대한 경계'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후기작품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에서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주제는 바로 '성인들의 승리'

 

보스는 악마에게 고통받고 유혹당하는 안토니오를 비롯한 성인들을 묘사하면서,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듯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세계가 동등한 힘을 가진 선과 악이 갈등을 벌이는 무대라고 보지는 않았다.

이는 신의 전능에 위배되기 때문일 것이다. (149)

 

과연, 그럴듯한 설명이다.

 

.

.

 

 

나는 보스의 그림을 보면서,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해 생각해본다.

보스 역시 젊은 시절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을까. 하고.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그림이 나왔을까!)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 그의 그림과 같이 자신 또한 단단해 졌겠지..

 

아니, 어쩌면 반대일수도.

어쩌면 죽을때까지 욕망 속에서 어쩌지 못해 하는 게 바로 인간이 아닐까.

성인들의 삶에 비추어 우리 또한 단단해지려고 노력하지만, 분명 쉬운 일은 아닐테다.

더군다나 당시(15세기 말)는 분명 '광기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세계는 보편적 광란 속에 빠져든다. 신도 악마도 승리하지 못한다. 승리는 광기의 것이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중

 

YES마니아 : 플래티넘 s*****w 2008.05.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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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교훈과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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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이지만 국내 번역명은 그 앞에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라는 말이 더 붙는다. 사실 이 책에 나와있는 도판들로만 봐도 지금 21세기 초엽을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들은 환상을 넘어 엽기적으로까지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누누이 강조하듯 보스의 그림들이 엽기나 환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교훈과 상상" 내용보기
이 책의 원제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이지만 국내 번역명은 그 앞에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라는 말이 더 붙는다. 사실 이 책에 나와있는 도판들로만 봐도 지금 21세기 초엽을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들은 환상을 넘어 엽기적으로까지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누누이 강조하듯 보스의 그림들이 엽기나 환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강렬한 천국과 지옥의 묘사조차 동시대의 개념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보스의 그림들이 그 시대에는 보편적이었던 교훈과 설교를 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를 생각했다. 그는 소설 속의 다른 인물에 비해 진보적이고 개방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에코의 미묘한 주의에 의해) 중세인으로써의 범주는 벗어나지 않는다. 보스 또한 현대인인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이건 간에 그 당시의 시대 개념을 자신의 안에서 녹여서 자신 나름의 표현을 해냈을 뿐 중세를 살았던 중세인인 것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도판들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창조적이고 기괴한 악마들이 드글거리는 지옥이나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보스의 드로잉들이었다. 펜과 잉크와 붓으로만 그려진 그 드로잉들은 보스의 창조력과 필력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컬러로 나온 어떤 도판보다도 오히려 (저자가 그 연결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흑백의 드로잉들이 현대의 조현실주의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중세 말기의 사회를 지배했던 개념들을 눈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4***e 2001.07.0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