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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끝자락에 태어나 많은 종교화를 남겼던 특이한 사람, 보스의 그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실은 책이다. 그가 나타내고자했던 의미는 중세적이었지만 그림의 테크닉은 르네상스적이었다. 보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개인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당시의 보편적인 상식이나 풍습을 통해서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 놓았는데 정반대의 해석도 있다.
당시에는 상식이었지만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징도 있고 당시에도 어려운 알레고리를 즐겼던 분위기였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난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스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좌와 벌'에 매우 집착했던 것 같다. 아주 카톨릭적인 사고방식일 것이다. 당시의 많은 저자들의 '좌와 벌에 대한 책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세밀화, 크기의 역전, 여러 생물체의 융합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의 감정을 유도했다. 후대에 마그리트도 이미지의 여러 융합을 시도했지만 그의 그림은 공포스럽지는 않다. 대표 그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시기적으로 그림의 발달을 설명해주어 좋은 것 같다. 또 세부 그림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있어 좋다. 워낙 크고 복잡한 그림이라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에는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면 해상도가 높은 사진을 제공한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이 책을 읽으면 더 도움이 된다. 책의 사진들은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들이 섞여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쾌락의 정원'은 너무 유명한 그림이라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건초 수레'에 대해 자세히 알게되어 기쁘다. https://en.wikipedia.org/wiki/Hieronymus_Bosch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paintings_by_Hieronymus_Bosch
일곱가지 대죄 https://en.wikipedia.org/wiki/The_Seven_Deadly_Sins_and_the_Four_Last_Things 33쪽 보스는 이러한 중세적 태도에서 영감을 받아 <가나의 혼례>의 주제를 변형시켰고,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마드리드, 프라도) 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좀더 포괄적으로 전개하였다. 여기에서는 인간의 상황과 운명이 일련의 순환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동심원을 이루는 원형의 중앙 이미지는 '신의 눈'을 나타내며, 그 동공에서는 석관에서 모습을 나타낸 그리스도가 관자에게 성흔을 보여주고 있다. 동공 둘레에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하느님이 지켜보신다."라고 적혀 있다. 신이 보고 있는 바는 눈의 바깥 고리에 반영되는데, 일상 생활의 생생하고 사소한 장면 속에서 행해지는 일곱 가지 대죄를 담고 있다. 죄명은 라틴어로 하단부에 분명히 적혀 있지만, 명문은 프랑크푸르트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처럼 부수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가 식탁에 가져온 모든 음식을 탐욕스레 먹어치우는 남성은 대식'을 나타내고. 불가에서 졸고 있는 포식한 신사가 나태를 나타낸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 '나태 의 경우 신사가 종교적 의무를 무시하고 있음은 묵주를 들고 방 왼편에서 들어오는 여성에 의해 알수 있다. '사음'은 천막 안에 있는 몇 쌍의 연인으로 보여준다. "오만'에서는 화려한 보닛을 쓴 악마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허영에 찬 여성이 뇌물을 받는다. '질투(거절당한 구혼자가 질투에 찬 눈으로 노려본다.) '분노'(술집 앞에서 두 남성이 싸운다), 탐욕(판사가 뇌물을 받는다.) 이처럼 비근한 드라마는 대부분 네덜란드 전원이나 세세한 가정용품이 가득한 정돈된 실내를 배경으로 한다. 이 그림은 티벳 탕카의 'Wheel of life'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구도와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제도하려는 의도도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Bhavacakra 건초수레 https://en.wikipedia.org/wiki/The_Haywain_Triptych 70쪽 사실 건초는 전통적으로 상징되어 온 바대로 인간의 나약한 면을 나타낸다. 1470년경 네덜란드에는 이런 노래가 있었다. "신은 모두를 위해 좋은 것을 건초더미처럼 지구에 쌓아두었건만 인간은 혼자 전부를 차지하려 한다." 그러나 건초의 가치가 없어진 이후에는 건조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무가치한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 1550년 이후 플랑드르 엔그레이빙에 묘사된 우의적인 건초 수레는 이러한 의미였음이 분명하다. 건초 수레는 또한 1563년 안트베르 펜의 종교 행렬에도 등장하였다. 당대 기록에 의하면, 수레에는 '기만'이라는 이름의 악마가 탔고, 세속적 소유물은 모두 건초(al boy)'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건초를 뽑으며 뒤따랐다. 이는 '결국은 모두 건초'라 는 당대 노래를 반영한 것이다. <일곱 가지 대죄>처럼 <건초 수레는 죄에 몸을 내맡기고서 신의 법에는 전혀 마음쓰지 않고 자신들 앞에 놓인 운명을 망각한 인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서 보스는 일곱 가지 대죄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속적인 소유에 대한 욕망, 즉 탐욕이다. 미덕과 악덕에 대한 옛 핸드북에서처럼 '탐욕' 에 부수되는 죄는 주변의 인물상에서 구체화된다. 로렌트 갈루스(Iaurent Gallus)의 '왕의 꿈 King's Dream '(1279)에서 경고한 대로 탐욕은 불화, 폭력, 심지어 살인을 이끈다. 이 모든 행위는 건초 수레 앞의 넓은 공간에 묘사되고 있다. 왕자와 고위 성직 자는 이러한 소동과 동떨어진 채 만족한 모습으로 수레를 따르고 있지만 이는 이들이 이미 건초를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탐욕은 또한 사람들을 사기와 기만으로 이끈다. 왼편 아래 높은 모자를 쓰고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남성은 드릴비유의 '인간 생애의 순리'에서 탐욕의 보호를 받는 자와 같은 걸인인 듯하다. 중앙의 돌팔이 의사는 탁자에 차트와 약병을 늘어 놓고 사람을 안심시킨다. 오른쪽 아래에서는 수녀가 커다란 주머니에 건초를 넣고 있고 의자에 앉은 수도사가 이를 감독하는데 그의 뚱뚱한 허리는 탐욕스런 성향을 나타낸다.
쾌락의 정원 https://en.wikipedia.org/wiki/The_Garden_of_Earthly_Delights 80쪽 중앙 패널에서 우리는 우선 보스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전원을 만나게 된다. 공원 같은 넓은 풍경에는 누드 남녀가 가득한데. 이들은 커다란 과일을 먹거나 새와 동물과 놀거나 물 속에서 희롱하거나 부끄럼없이 공공연히 여러가지 사랑놀이에 몰두한다. 동물을 탄 남성들은 처녀들이 있는 중앙의 연못 주변을 회전목마처럼 돌고, 하늘에는 섬세한 날개를 단 인물이 떠다닌다. 이 세 폭 제단 화는 보스의 대제단화 중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중앙 패널의 느긋한 분위 기는 선명하고 고른 조명, 그림자의 부재, 밝고 높은 명도의 색채에 의해 고조된 다. 거주자들의 창백한 신체는 검은 피부의 인물들에 의해 두드러지며, 낙원의 과 나무 사이사이에 핀 꽃처럼 빛을 발한다. 원경 호수에 보이는 경쾌한 색채의 샘과 누각 뒤로는 언덕의 부드러운 능선이 저 멀리 사라진다. 작은 인물과 크고 환상적인 식물 형태는 그 원천이었을 중세의 장식 도어처럼 악의가 없다. 그림 앞에 서면, 누드 연인들은 "조용한 동산에서 식물 같은 순수함으로 평화로이 장난하 고 동식물과 하나가 되며, 이들에게 활기를 주는 섹슈얼리티는 순수한 기쁨. 순수 한 축복으로 나타난다."는 프랑거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우리는 '헤시오도스가 황금 시대라고 기술한 인간과 동물이 평화로이 공존하며 노동없 이도 대지가 풍성하게 과실을 생산하는 세계의 유년기를 만나게 된다. 좀더 현대적인 언어로 말하면보스의 동산은 일종의 보편적인 러브인(lovein. 연애를 위 한 히피들의 집회) 이다. 세세한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긴 하였지만, 박스의 해석은 대부분 신빙성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며 보스의 도상의 복잡성과 예술적 원천의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박스가 찾아낸 내용을 모두 나열하는 것은 네덜란드 민속백과사전을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 패널화를 이해 하는 데 중요한 것은 보스가 무수한 상징적인 인물과 형상의 틀로서 채택한 기본 주제이다.
인생행로 The Path of Life aka The Pedlar.(Outside panels of The Haywain Triptych) 건초수레의 바깥쪽 패널 101쪽 <건초 수레>와 <지상의 쾌락의 동산은 인류의 오랜 적인 세속, 음욕, 의미에 의해 덫에 걸린 인류를 보여준다. 한편 <건초 > 세 폭 제단화의 바깥쪽 패널에서는 다소 다른 견지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 영혼의 위험한 상황을 제시한다. 이 패널들은 세 폭 제단화의 다른 부분에 비해 수준이 떨어져 작업장의 조수가 세 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구성은 보스가 디자인하였음이 분명하다. 한 장면으로 인간의 운명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은 우리나라 사찰 외벽에 그려진 그림과 주제가 비슷하다. https://blog.daum.net/tree1655/7546534
황야의 세례 요한 https://en.wikipedia.org/wiki/St._John_the_Baptist_in_the_Wilderness
우리나라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https://blog.naver.com/brilliantyj21/22239695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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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쉬의 비밀]을 읽고서 다 풀리지않은 그림에 대한 궁금증으로 찾아본 책이다. 소설 속의 그림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어서 정통적인 해설을 듣고싶었다는 것이 본 마음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소설 속의 해석은 일부 학자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주장이었고 거의 책 내용 전체에 걸쳐 그의 그림은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는 정통 교리를 그림으로 그렸음이 명백해졌다.
부제로 '중세말의 환상과 엽기'라고 붙어있는데 사실 그의 그림 중 일부를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형태의 사람과 동물, 장치들이 그려져있다. 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다만 놀라울 따름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동시대인이었는데 이토록 다른 그림을 그렸다니. 그러나 그 시대상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압박감과 절망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진실한 바람이 가득했던 시대였으므로 그림 속에 그러한 세계관이 진하게 녹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연금술이나 환각제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거나 종교적 이단에 속했다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다만 그 시절의 민간풍속과 우의등을 알아야만 그림 속의 은유적 표현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을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어있으며 그림도 풍부하게 들어있어 책을 읽고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보쉬(이 책에서는 보스라 불리웠다. 어떤 게 제대로 발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의 그림들 중에는 엽기라고 불리는 괴상한 모양의 악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런 것들만 너무 강조되어서 본래의 보쉬 그림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된 듯 하다. 그러니 프라이 호세 데 사구엔사가 주장한 것처럼 펠리페 2세에게는 보스의 작품이 부조리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스의 예술은 위대한 지혜와 예술적 가치를 지녔으며 실제로 그러하다. 만일 부조리함이 있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부조리함이지 그의 부조리함은 아니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은 인간의 죄와 망언을 그림으로 풍자한 것이다." (본문 167p)
그림에는 문외한이며 그저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으면 좋아하는 단순한 독자로서 하나하나 꿰뚫어보고싶게 만드는 보쉬의 그림을 보고 의문을 해결해볼까하는 심정으로 읽었지만 매우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중세말을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고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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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였나? 백과사전에서 보스의 그림을 처음보고, 엄청... '무서운'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요사이 서양중세에 대해 공부하다가 새롭게 발견..
찾아보니, 그에 대한 그림은 인터넷에 정말 '널려' 있더라. (근래의 '엽기' 코드에 맞아서일까?) 하지만 역시 한 작가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책이 최고인 듯. 기브슨이 쓴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바로 그런 책.
작가는 보스의 초기작 <일곱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에서부터 중기의 <최후의 심판>,<건초수레>를 지나 만년의 <성 안토니오의 유혹>에 이르기까지 그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적절하게 소개하고 안내해준다. 예컨대
...<건초수레>는 죄에 몸을 내맡기고서 신의 법에는 전혀 마음쓰지 않고 자신들 앞에 놓인 운명을 망각한 인간을 보여준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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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제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이지만 국내 번역명은 그 앞에 [중세 말의 환상과 엽기[라는 말이 더 붙는다. 사실 이 책에 나와있는 도판들로만 봐도 지금 21세기 초엽을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들은 환상을 넘어 엽기적으로까지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누누이 강조하듯 보스의 그림들이 엽기나 환상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토록 강렬한 천국과 지옥의 묘사조차 동시대의 개념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으며 오히려 보스의 그림들이 그 시대에는 보편적이었던 교훈과 설교를 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를 생각했다. 그는 소설 속의 다른 인물에 비해 진보적이고 개방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에코의 미묘한 주의에 의해) 중세인으로써의 범주는 벗어나지 않는다. 보스 또한 현대인인 우리의 눈에 어떻게 보이건 간에 그 당시의 시대 개념을 자신의 안에서 녹여서 자신 나름의 표현을 해냈을 뿐 중세를 살았던 중세인인 것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도판들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창조적이고 기괴한 악마들이 드글거리는 지옥이나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보스의 드로잉들이었다. 펜과 잉크와 붓으로만 그려진 그 드로잉들은 보스의 창조력과 필력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컬러로 나온 어떤 도판보다도 오히려 (저자가 그 연결을 부인함에도 불구하고) 흑백의 드로잉들이 현대의 조현실주의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중세 말기의 사회를 지배했던 개념들을 눈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