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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 ‘새의 조상, 그 조상의 조상은 누가 뭐래도 바람이다. 새가 바람을 타지 않고는 날 수 없는 이유다. 바람의 무리 속에서, 밑도 끝도 없는 서러움을 견지지 못한 종자들만이 다리를 얻는다. 그것은 일종의 진화다. 밑도 끝도 없는 것을 견지지 못한 것들만 진화한다. 그래서 진화하는 것들은 절대 강하지 않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고구만리, 칙풍사재하의.(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 구만리를 날아올라야 날개 밑에 (충분한) 바람이 쌓인다. 거대한 새, 붕(鵬)은 자신을 실을 수 있는 바람을 얻기 위해 매미와 비둘기의 질시와 비웃음을 참으며 온 힘을 다해 구만리 상공으로의 비약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마침내 비상(飛上)에 성공한 붕은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명료한 시야를 얻어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밑도 끝도 없는 서러움‘을 견디고 날아올라야만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을 권하는 저자의 의도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 남덕현 작가의 소개는 의외로 간단하다. 1966년 대전 출생, 2013년 산문집 <충청도의 힘> 출간, 2013~2014 <중앙일보>에 ‘남덕현의 귀촌 일기’ 칼럼 게재. 그러나 그의 사진 아래에 있는 짧은 글을 통해 치장하나 없는 민낯의 저자를 만날 수 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글과 말로 먹고사는 일이 제일 추하다고 . 그 말씀의 뜻을 모르고도 잘 살다가, 뜻을 알고 나서 글을 쓰게 되었으니 그 죄가 참 크다. 속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속고, 속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속이는 헛 수작을 언제나 멈출까.’ <슬픔을 권함>에는 눈에 띄는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한다. ‘사투리, 슬픔, 해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는 보이지 않는 여백을 더 중시하던 한국화’처럼 그 사이에 숨은 것들을 이해해야만 온전히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개 팔러 가셔요? 맥일 만치 맥였으니께. 어미젖은 뗀 모양이죠? 먹을 만치 먹었슈. 얼마나 받으시려구요? 맥인 만치 받으야쥬. (중략) 어르신은 연세가? 먹을 만치 먹었슈. 세상 천지에 이런 똑떨어지는 대답을 들어 본 역사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빠져나갈 구석이 없지 않은가.’ 그의 글은 웃음을 머금고 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주고받는 대화 속에 예측할 수 없는 웃음이 툭하고 튀어나온다. 이를 세간에서는 ‘해학(諧謔)’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이 단어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혀 놓은 느낌이다. 단순한 해학이라고 부르기에는 차고 넘친다. 무심한 듯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가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이다. 아무런 집착 없이 상(象)을 여읜, ‘일체의 사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여 분별되는 모습이 없다.’는 무상관(無常觀)을 품은 이유이다. 그렇게 웃음으로 빠져 나간 자리를 눈치 챌 겨를도 없이 ‘슬픔’이 몰려야 메워버린다. 한참을 웃고 나서 나도 모르게 맺혀 있는 눈물의 이유를 저자의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슬픔 속에서 모든 의지를 상실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의지가 생겨난다면 그 의지야말로 불굴의 의지다. 어설픈 희망과 기쁨보다는 차라리 절절한 슬픔과 절망이 고단한 삶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프고 절망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늘 밝은 의지와 의욕으로 가득 차 있기를 강요하는 이 시대에 늙음과 죽음, 가난과 서러움이 불러오는 슬픔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세월호의 아이들, 굴뚝위의 노동자들까지 가슴에 품고 처연한 울음을 노래하고 있다. ‘배고픈 새들은 부리가 구부러져 우는 소리도 못 내고, 눈은 어둡고 깊어져 대숲 가지에 날개를 다치며 비틀 날다가, 달도 뜨기 전 둥지에 깃들어 몸을 둥글게 말고 스스로 깃털을 뽑는다. 하루를 굶으면 깃털 하나, 이틀을 굶으면 깃털 둘. 그나마 가벼워져 내일은 다시 날아오르리라.’ 오랜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남긴 글로 마무리를 한다. ‘모진 해풍(海風)이 불어 살을 에는 슬픔에도, 소리 없이 눈물 한 방울 뚝 떨구며 아무 일 없는 듯 호탕하게 웃을 수 있기를. 나 또한 그러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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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슬퍼할 권리를 찾자 연암 박지원의 글 중 사장(士章) 애사(哀辭)에는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다.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 게 아닐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어떤 모양이건대 생각만 하면 내 코끝을 시리게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건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남이 가르쳐주어야만 울 수 있다면 나는 으레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못 내겠지. 아하, 이제야 알았다. 이른바 그렁그렁 이 눈물이란 배워서 만들 수 없다는 걸.”라는 대목이 있다.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 물이 눈물인데 그 눈물이 나올 수 있는 근원에 슬픔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슬픔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눈물은 그 슬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는 슬픔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그와 동반되는 울음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강요하고 있다. 박지원은 눈물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눈물을 배워서라도 슬픔을 치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울음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강요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슬픔을 권하는 사람이 있다. 2013년 “충청도의 힘”으로 주목 받았던 남덕현이 그 사람이다. 그는 “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라며 슬픔이 가지는 본래적 의미를 인문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도처에 죽음, 가난, 차별 등으로부터 서러움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2014년은 세월호 사건 이후 대다수 국민들은 슬픔을 전재로 한 분노를 다스릴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요받은 위로와 희망에 슬퍼할 기회조차 빼앗겨 정당한 슬픔을 치유해야할 권리조차 상실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어설픈 희망과 기쁨보다는 차라리 절절한 슬픔과 절망이 고단한 삶을 치유할 수 있다며 남덕현은 그 슬퍼할 권리를 되찾자고 억설한다. 남덕현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하여, 묶인 개, 늙은 어미와 이웃 노인들, 스치는 바람뿐 아니라 수시로 자기 자신을 직시하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 질문 속에는 해학의 미학이 함께하기에 슬프지만 웃음이 동반한다. 남덕현은 이렇게 일상적인 자신의 주변 뿐 아니라 죽어간 세월호 아이들과 굴뚝 위의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 슬픔의 사회적 가치에 주목한다. 그냥 슬퍼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슬픔이 스며들어 있는 현장에 당당하게 서 있다. 억눌린 슬픔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기쁨과 희망을 권해도 환영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슬픔을 권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하지만 그 역설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곧 “나는 슬플 때 가장 착하고, 슬플 때 가장 명징하며, 슬플 때 가장 전복적이다.”라는 남덕현의 슬픔에 대한 성찰이 사람을 향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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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에 시작된 눈이 어둠 깊어지자 반은 물기 섞여 쌓이지도 못하고 떨어진다. 침대 곁 테이블에 놓인 책을 펼친다. 슬픔을 권함. 오늘 같은 밤에 읽기에 참 어울리는 문장들이다. 그의 슬픔은 간결하고, 깊다. 수식되지 않는 서러움은 한겨울 나목처럼 빈 몸으로 시리다. 때로 질펀한 해학에 웃음 베어문 뒤끝엔 남루한 삶의 비애가 명치를 누른다. 남덕현의 첫 책, '충청도의 힘'에서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때론 터무니없이 소박하고 터무니없이 낙관적이었다. 재미 하나도 없을 것같은, 아니 오히려 따분하고 권태에 질릴 것같은 일상을 생기발랄하고 뭉근한 이야기들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눈물조차도 햇볕 냄새 나는 까실까실한 그것이었다. 그런 그의 글이 무겁게 젖어든 물기를 그대로 드러내 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쌍차, 재능, 코오롱... 다 기억하기도 힘든 숱한 해고 노동자들이, 밀양의 할매들이, 강정주민들이 거리를 벗어나지 못한채 여전히 반복되는 겨울을 맞으면서였을까. 세월호가 잠기던 그 애간장 타던 봄날부터였을까. 아니면 저 십대 혹은 이십대의 어느날부터 유구했던 그의 통증이 더이상 무게를 못이겨 저절로 배어난 것인가. 어찌되었든 우리들 누구나 시작은 제 존재에서 비롯된 서러움에 운다. 또한 슬픔을 품어보지 못한 이가 다른 슬픔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시작이 무엇이든 그는 제 슬픔을 넘어, 이 시대 서럽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음 울고자 한다. 슬픔에 젖어 슬픔의 바닥으로 내려가 투명해진 모습이라야 이 고통의 시간들을 전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곧 슬픔은 성찰이고 연대이며 저항인 것이다. 전복. 이번 겨울도 여전히 환자스럽게 보내느라 소심할 대로 소심해진 내게는 새삼스럽고도 아련한 말이다. 또한 간절하게 품어보고도 싶은 뼈시린 소망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등불을 끄며 그저 헛될지라도 주문을 걸어본다. 아직도 거리에서 시대와 삶의 아픔을 버티고, 저항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는 오늘 밤 이 눈이 피해가기를. 더불어 차가운 눈 내린 자리, 나의 사소한 슬픔 한자락도 놓아두고 가슴과 이마에 흐르는 생각이 한가지로 명징해질 때까지 울음 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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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을 다녀 오던 날 거짓말 처럼 눈에 들어온 책<슬픔을 권함>. 선배보다 먼저 엄마와의 작별을 한 유경험자여서 해줄수 있는 말이였을까? 힘들고 슬프면 눈물을 참지 말라는 위로를 건내고 돌아왔다.펑펑 우는것도 나쁘지 않다고...엄마를 잃은 선배에게 해줄수 있는 최상의 말은 아니였을지 몰라도.뒤돌아 보니 참아내는 것이 최고의 능사는 아닌것 같다.그리고 놀랍게도 눈물은 무언가 마음을 비워내는 정화효과가 분명 있다고 믿는다.무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눈물은 필수요건이라 생각하는 편이라 '슬픔을 권함'이란 책이 반가웠다.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후 선배에게 선물로도 주면 좋을것 같고.해서 먼저 읽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 작가의 유머는 슬픔에서도 빛을 발하는 구나 싶었다.슬픈데..눈물도 나는데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요즘 유행하는 말로 '웃프다'라는 느낌이랄까.생각해 보니 슬픔 속에는 항상 슬픔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버틸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얼마전 방송에서 들었던 '블루'라는 색깔이 하나의 색깔로만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슬픔을 권함'이란 제목을 통해 나 역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죽음'이였다.그러나 슬픔이 하늘의 별만큼이나 수천가지로 우리 주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그리고 이것이 '슬픔의 권함'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만약 한없이 슬퍼해야 하는 까닭만을 나열했다만 그야말로 우울한 블루빛이였을 텐데,작가는 그것이 인생이고,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답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현학적이고 담론적이지 않아 좋았다.아니 오히려 작가의 가족,혹은 이웃,혹은 아는 이들의 등장으로 인해 더 깊은 울림과 공감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다.지난해 세월호로 우리모두는 힘들었지만,그 슬픔은 책의 제목 그대로 충분히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일 테고.때로는 자신의 삶 자체가 공허해서 혹은 외로워서도 우린 슬퍼할 이유가 있는 것 같다.그러니 슬퍼하면 큰일날 것처럼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강요만 할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말대로 슬퍼할 시간도 줘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런 줄이나'알고 살면 오죽 좋을 것인가 아니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희망 고문보다는 차라리 깊은 절망이라도 하게 내버려 둔다면 오죽 좋겠는가 이 말이다 어설픈 희망 고문이 넘쳐 나는 이 세상은 경우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것이 아니다.도대체 절망할 틈을 주지 않는 이 시대는 얼마나 잔인한가./240
덧붙임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는 중이다. 말그대로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인생'에 관한 이야기 라는 느낌을 받는다.그것도 끝나지 않을 전쟁 같은 우리의 삶.2권까지 읽으면서 끝나질 않을 전쟁에 대해 톨스토이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신 걸까? '슬픔을 권함'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생각을 발견했다.아닐수도 있고 맞을수도 있지만 작가의 정리된 글을 만나니 이렇게 반가울수가. "사람이라는 게 사는 꼬락서니가 늘 '그럴 수밖에' 없으니 생각이란 걸 하게 되느니라.곰곰 생각해보니 사람 사는 꼬락서니가 '그럴 리가'없거든 그래서 삶이 '그럴 수밖에'없을지라도 '그럴 리가'없는 본질적인 세계는 따로 있다고 자위하는 게지.아르떼 이데아 보편 절대 순수 뭐 이런 것들이 다 세상이 '그럴 리가'없다는 비명인게지"/167~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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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장에 별 의미는 없고 그냥 몇몇 군데 사이트에 읎자가 올려지지 않는 거 같아 희안해서 올려봤다.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밥을 드신 다음 자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며, 할아버지는 평생 들락날락하신 병원에서 지병이
완쾌되었다는 판정을 받은지 얼마 안 되서 점심을 드시고 한 잠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특히 할아버지는 중간에 벌떡 일어나셔서 "가슴이
아프다"라고 하셨다는데, 그게 최후의 한마디가 되었다.
이 책의 명구절들을 필사하는 건 174 페이지 이후로 끝났다. 여기가 끝인 것 같다.
내가 항상 어떤 책 맨 끝의 문장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상당히 빨리 끝난 셈인데, 뭔가 그 이후에도 쓴 시도 많고 추진력도 처음 글과
만만치 않게 좋긴 하다. 하나는 너무 허무주의에 찌들었고 또 하나는 자뻑 느낌이 들고 또 하나는 와카야마 보쿠스이의 시를 적절히 베낀 거 같은
느낌이 들고 또 하나는 불교와 기독교의 크로스오버이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너무 책을 많이 읽으셔서 무슨 글을 쓰셔도 다른 사람의 글을
적절히 베낀 느낌이 든다. 그러니 시 비슷한 느낌으로 글을 써도 에세이 이상이 되기엔 무리일 수밖에. 공감은 가지만 딱 그것 뿐이고 배울 게
없는, 그런 글이다. 오히려 내가 벗어나야 할 권태를 직시하게 해주는 글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