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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저녁
보고 싶어도 참는 것 손 내밀고 싶어도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 것 그런게 바위도 되고 바위 밑의 꽃도 되고 蘭 도 되고 하는 걸까? 아니면 웅덩이가 되어서 지나는 구름 같은 걸 둘둘 말아 가슴에 넣어두는 걸까?
빠져나갈 자리 마땅찮은 구름떼 바쁜 새로 생긴 저녁
p.15 장석남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중에서
난초가 바위밑에서 하늘하늘하는 장면이 보이는 듯해서 혼자 웃음을 깨물어 먹으며, 아니 얼음인가 위에선 찬 것 좀 그만 내려보내 하는데, 입안서 돌돌 굴려먹다 와자작 씹어 먹는 그 날카로운 찬기가 재미도 있고 시원함이 섬짓해서 자꾸만 한 알만 한알만 더 그러고 ......시원한 물이 침보다 먼저 목구멍을 통과할때 저 난초를 발견한 기쁨 같은 것 작게 꺠무는 희열 ... 물 웅덩이 멀거니 하늘을 마주하고 난은 흔들리며 저녁 오는 참을 바라보고 , 이쁜 시구나... 기다림도 있고 ...난 손가락을 놀려 시를 옮길 적에 누군 그저 만지작이고 ! 그러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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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길'을 좋아하는 게 맞나 보다. 이 시집에서 길에 관한 시 두 편 얻는다. '밤길'과 '새벽길'. 이 길마저 만나지 못했더라면 몹시 서운하고 허탈했으리라.
떠나는 길,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 완성된 상태로 놓여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진행 중인 길.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 어떤 식으로든 가능성도 열려 있는 공간이어서 비록 밤이어도 좋고 아직은 새벽이어도 좋다. 길이 보이기만 한다면.
실려 있는 시들은 대체로 소탈하다. 겨울 이미지가 잦아서 요즘 읽기 좋겠다는 느낌을 살풋 받기는 했지만 글자를 지나고 나면 특별히 남는 시어는 없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기가 수월했다, 마음은 무거웠어도.
읽어도 읽어도 애타는 시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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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과 거룩 사이
장석남의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 지성사, 2005)에는 사물이 있는 자리에서 사물을 바라보려는 시인의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그 라일락 밑에는 / 작은 돌멩이들이”(「그 라일락 밑에는」) 살고, “살구나무에 잎이 다 졌으니 그 잎에 소리 내어 울던 빗발들”(「겨울날」)은 눈이 되어 세상에 내린다. 시인은 보이는 사물만을 보려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물까지 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사물이므로, 시인은 사물의 심연(본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물의 심연은 사물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사물의 시선과 마주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봉평의 어느 시냇물을 건너며」에서 이러한 점이 잘 표현되는데, “저 햇빛의 찬란한 위로는 이편의 모든 것이 다 손잡고 맨발로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추측한 시인은 곧바로 “그러나 건너보면 / 햇빛은 뒤로 물러나며 조그만 징검돌을 올리고 / 징검돌은 기우뚱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도 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시냇물을 건너기 전에는 햇빛의 찬란함만 보이지만, 시냇물을 건너기 시작하자 햇빛과 “기우뚱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도” 하는 징검돌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물은 이처럼 시인이 사물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심연을 내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심연이 드러나는 순간을 시인이 항상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은 사물의 입장을 이해하는 존재에게만 자신의 심연을 내보인다. “숲에 나가면 숲은 의연하다. 숲 사이의 시냇물은 반짝이며 소리는 깊다. 새는 높고 수국(水菊)은 탐스럽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들을 살린다. 그것들이 지키는 것은 단지 제로〔無〕일 뿐인데도”(시집의 뒷날개에 실린 시인의 글에서 인용)라는 시인의 말에 주목하자. 사물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의미를 만드는 주체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이고, 인간에 의해 사물의 의미가 고정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해야 할 때, 사물의 본질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언어가 지닌 한계라면, 시인이 쓰는 시는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가? “나의 사치는 감추고 감추어도 / 치졸하고 치졸하다”(「나의 奢侈」)고 시인은 고백한다. “作爲라고는 없는 달이” “上部가 조금 이지러져서 / 제 사치를 완성한, 열이레 달”(같은 시)로 뜬다면, 시인(인간)의 사치에는 이러한 겸손이, 정지(停止)가 없다. 자연은 무언가를 만들려 하지 않고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석류나무 곁을 지날 때는」)을 완성한다. 열이레의 이지러진 달은, 스스로 깨어져야만 무르익을 수 있는 석류 열매의 겸손(정지)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못 보던 얼룩”(「얼룩에 대하여」)이 아니라, “맑게 /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 맑게 /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는 자연의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이다. 얼룩의 세상에서 시인은 “사치에도 정지가 있다는 눈치를” “울면서 울면서 / 받아들이기로 한다”. 얼룩과 거룩의 사이에 걸쳐 있는 시인의 일상은 이로써 “스스로 깨어지는 거룩”의 길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 세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나와 나 사이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전문
미소는 사이에 있고 항상 움직인다. 그래서 “돌을 만나면 돌에 스”미고,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갠다. 사물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도 있는 미소는 사물을 사물로써 존재하게 하는 근간이다. 시인은 사물과 사물 사이를 오가는 미소를 보고, 느낀다. 그것을 구태여 선(禪)적인 깨달음의 경지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소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지만, 사물 속으로 스며들어 사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이 또한 미소이다. 장석남은 이러한 미소가 지배하는 시의 세계를 꿈꾼다. 그것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시인이게 ‘바깥의 사유’를 요구한다. 세상의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시인일 수 있겠는가. 세상의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봐야만 사물들의 사이를 오가는 미소가 보이고, 그 미소로써 드러나는 사물의 심연이 보인다. 「낮은 목소리」라는 시에서 시인은 “더 작은 목소리로 / 더 낮은 목소리로” 말해 달라고 속삭인다. 그런데, “낮은 목소리”는 “저 폭포와 같은 소리”이고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이다. 내면에서 ‘크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내면으로」라는 시에서 시인을 자유롭게 하는 “영원히 새로운 풍경”으로 묘사된다. “낮은 목소리”는 시인이 사물의 심연과 마주하는 순간에 울려나오는 소리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선 살얼음이 반짝인다 빈 논바닥에 마른 냇가에 개밥 그릇 아래 개 발자국 아래 왕관보다도 시보다도 살얼음이 반짝인다 - 「살얼음이 반짝인다 - 첫 추위」전문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바위와 바위와 구름과 구름과 바위와 손 씻고 낯 씻고 앉아 있었다 - 「연못 - 山居」에서
살얼음이 반짝이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리”까지 미치는 겸손한 ‘눈’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눈이 있어야 “시보다도” 더 반짝이는 살얼음을 볼 수 있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연못」의 화자 역시 마찬가지다. “손 씻고 / 낯 씻고 / 앉아 있”는 화자의 모습은 바위와 구름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형상을 대변한다. 반복되는 시어들 속에서 피어나는 사물의 존재감은 “앉아 있었다”라는 완료 상태의 시구와 어울려 작위성이 배제된 “영원히 새로운 풍경”을 표현한다. 시인은 시인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구름은 구름대로 제 갈 길을 가고 있고, 제 갈 길을 가는 ‘사이, 사이’ 사물들은 제 의미를 서로에게 발산한다. 이것이 장석남이 이번 시집에서 가장 숨고르며 상상했던 시의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여전히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우리는 지금 / 엄동의 때를 기다”(「새 방에 들어 풍경을 매다니」)려야 한다. 왜 하필 엄동일까? “우리는 어느 절벽에 달라붙은 / 언 폭포로라도 맺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절벽에라도 달라붙어 있어야만 우리의 “가난한 사랑”은 “이 오후의 빛을 몸에 들여서” 머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심연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인은 “낮은 목소리”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간다. 그 결과가 엄동이고, 절벽일 것이다. 얼룩을 거룩으로 만들기 위해 실행되는 시인의 시작은 그러므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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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길 >ㅡ 장석남 밤길을 걷는다 걸음은 어둠이나 다 가져라 걸음 없이 가고 싶은 데가 있으니 어둠 속 풀잎이나 바람결이나 다 가져라 걸어서 닿을 수 없는 데에 가고 싶으니 유실수들 풋열매 떨어뜨리는 소리 이승의 끝자락을 적신다 그러하다가 새벽달이 뜨면 올올이 풀리는 빛에 걸음은 걸려라 걸려 넘어져라 넘어져 무릎에 철철 피가 넘치고 핏속에 파란 별빛들과 여러 날 시각을 달리해서 뜨 던 달 셋방과 가난한 식탁 옹색한 여관 잠과 마주치는 눈길들의 망초꽃 같은 세미나 꼬부라져 사라졌던 또다른 길들 피어날 것이다 환하고 축축하게 웃으면서 이곳이군 내가 닿은 곳은 이곳이군 조금은 쓰라리겠지 내가 밤길을 걸어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새 날이 와서 침침하게 앉아 밤길응 걸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벙어리가 되어야 하겠지 그것이 다 우리들의 연애였으니 p .30 /31 장석남 시집 ㅡ《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중에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범수 ㅡ노래 "서툰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새벽 무렵 산책 밤의 길은 낮의 환한 길보다 더 익숙하다 논 옆으로 난 길을 걸으며 밤 사이 부지런한 거미의 울타리를 예고치 못하게 망가뜨릴때 내 살갗에도 거미의 아픈 마음 만큼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들 처럼 피가 맺힌다 도르르 맺힌 밤의 피들을 스윽 닦아 내면서 깜깜한 밤길을 걷는다 어차피 아침이면 사라졌을 것들 아니냐 찰박찰박 논을 넘쳐 흐른 포장 길을 적시는 물길을 길이 낸 상처같다고 여기며 나는 길의 피조차 밟으며 거침이 없이 걷는다 멀리 돌아 오는 길엔 동녘의 산등성이가 비스듬하게 창백한 미소로 배웅을 한다 이 밤 길도 오늘은 안녕 하다 잘 들어가라고 논밭 사이 개구리들 와글와글 노래해준다 매일 새벽 4시 50분 성경 말씀을 들으며 운동하는 이는 내가 돌아 오기전에 운동을 마치고 가버렸다 . 발 걸음도 씩씩하게 돌아갔겠다 그도 거미줄을 휘휘 내저으며 돌아갔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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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에 대하여 ㅡ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千手千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돠 꿈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굴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p. 7/ 8 장석남 시인의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중에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천수다라니의 [ 千手千眼大悲心陀羅尼 ] ※ 천수다라니ㅡ (천수관음의 공덕을 찬탄하고 천수관음의 삼매(三昧)를 나타내는 다라니) |
| 모든 나이가 경계의 나이겠지만 마흔 살은 큰 경계의 나이인가 봅니다. 삶의 목차는 이미 끝났다며 '마흔 살을 불혹이라던가 / 내게는 그 불혹이 자꾸 / 부록으로 들린다'(강윤후, 「不惑, 혹은 附錄」)는 시인도 있고, '쭉정이든 알곡이든 /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고정희, 「사십대」)는 시인도 있으니 말입니다. 장석남 시인 또한 마흔을 넘기면서 변해 가는 자신의 속물화를 자꾸 바라봅니다. '더 낮은 소리로 말해' 달라며 '감정은 좁고' '꿈은 옹색'(「낮은 목소리」)하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반성이랄 것도 없이 그냥 배가 부르면 배가 부른 채로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稚拙堂記」) 현실을 드러냅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오르고 내리는 것의 섭리를 생각한다 국제 정세와 남북경협을 생각하기도 한다 위대한 진리인 미국을 생각하고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끽 소리 나지 않게 우아하게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목숨은 그래도 끝까지 부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찍 소리 나지 않게 나를 단속하고 간혹은 딴청을 부려야 한다는 기교까지 생각한다 - 「옛 친구들」 부분 그러나 시간을 인식하는 시인에게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시간에 저항하는 방법이 나올 수 밖에 없는데 장석남 시인에게 그것은 산에서 사는 일, '山居' 연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山居' 연작은 특이하게 부제로 알 수 있고, 시집 도처에 산재해 있는데, 원제를 살펴보면 「눈 그치고 별 나오니」, 「폭설」, 「눈 녹아」, 「산기슭에서」, 「발을 털며」, 「시 읽던 바위」, 「연못」, 「새 방에 들어 풍경을 매다니」 따위입니다. 그런데 '山居' 연작이 아니더라도 산과 같은 장소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세계의 비밀이 시집에 가득합니다. 시집 전체가 '山居' 연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라일락 밑에는 그 라일락 밑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산다 한해살이풀들과 깨진 벽돌 조각,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린 밤과 밀담과 욕지거리들이 부모 없는 아이들처럼 서로 다른 원색의 남루를 입고서 라일락이 주는 그늘로만 집도 하고 먹이도 하고 이얘기도 하고 때로 개 오줌을 맞으며 산다 내 자주 가보는 그 라일락 밑에는 돌멩이들이, 숨이 차서 간 때는 밭은기침들이 되어서 살고 고단해서 가는 때는 스님이 되어서 살고 연인이 되어보자고 가는 때는 꽃 계곡처럼 산다 목이 쉬어서 헌데 이상하기도 하지 이상하기도 하지 그 향기 이상하기도 하지? 한결같이 한결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