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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역사를 연구한 버나드 루이스의 삶과 그가 느끼었던 중동역사를 어떤 것이 있을까? 그는 언어에는 관심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중동의 언어를 배우게 되고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영국에서 최초의 중동역사학자인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말이 평화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이슬람인들은 어떤 느낌일까? 얼마전에 일어났던 파리의 테러나 9.11테러를 통해서 폭력을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슬람 민족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폭력적인 것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많은 중동인들도 억울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유럽에 넘쳐나는 시리아 난민들도 폭력적인 사람들을 피해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도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교의 2대 종파로서 수니파는 전 세계 이슬람교도의 88%를 차지하며 이집트, 북아프리카, 터키, 스페인 등 이슬람권의 주요 세력을 차지한다. 시아파는 10%의 비율을 차지하며 중심 지역은 이란이다. 두 파벌의 차이는 우선 교의에서 나타나는데,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계로서 4인의 칼리프(종교, 정치의 최고 지도자)를 모두 정통으로 지지하는데 반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며 사위만을 후계자로 인정한다. 코란의 해석이나 계율에 있어서는 수니파가 더 엄격히 따르고 시아파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중동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우리 미래의 폭력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중동은 IS에 의한 폭력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라앨과 팔레스타인들이 대립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다툼도 결국은 정체성의 문제이고 땅의 문제인 것이다. 단순히 국경의 문제였다면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한 국가의 성격과 정체성이 걸리다보니 해결하기가 쉽지는 않다. 인간은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만들어내지만 그것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여러가지 중동의 문제는 역사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중동의 평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간혹 불순한 생각으로 인해 조그만 틈을 크게 만드는 세력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중동의 이야기를 자신의 생활과 경험을 통해 풀어 낼 수 있는 버나드 루이스의 능력에 감탄을 한다. 자신의 100년의 세월속에서 그가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역사와 더불어 표현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말이다. 100년 동안의 많은 것을 공부했고 자료를 모아두었다가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는 그의 저력이 부럽기도 하다. 그런 그도 자신이 한 이야기 때문에 네 건의 소송에 연루되었다. 두 건은 형사소송, 두 건은 민사소송이다. 그 소송들의 요점은 '홀로코스트 부정'에 상응하는 범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는 두 가지 교 훈을 얻었다고 한다. 첫째, 법정이 역사적 문제를 토론하고 판결하는 최적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언론이 소송 사건을 논의하고 공방하는 펼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명한 그도 이처럼 역사와 관계된 일에 연루되는 것을 보면 역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위험한 일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역사를 논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말하는 사람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듣는 우리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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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알면 알수록 신비한 곳이다. 나에게 중동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예루살렘 전기/시공사>를 만나고 나서였다. 유대인이 저술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면서 그동안 서구역사에만 치중했던 세계사를 중동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던 책이다. 제목만 보고 <예루살렘 전기>와 같은 맥락일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 《100년의 기록》(원제: Notes on a Century) 은 학자의 관점에서 중동의 역사를 다루었다. 영국인 최초의 중동학자인 버나드 루이스는 아흔 다섯의 나이에 학자로서 근 100년의 삶을 이 책에 담아낸 필생의 역작을 남겼다. 영국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영국과 미국에서 보내며 저자는 중동을 안에서부터 이해하는 시각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히며 2차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터키어 뿐만 아니라 알바니아어를 터득하여 문서 해독가로 일하던 경험을 들려주기도 하고 전쟁국가들의 긴박한 상황들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중동의 역사전문가로 터키와 이집트의 대통령, 파키스탄 장성들과의 교류도 하며 이슬람학세계총회에 참석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이슬람 국가와 무슬림 성직자들과의 에피소드들이 저자의 삶의 궤적과 함께 한다.
무엇보다 의미있었던 것은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가졌던 가치관이 시대와 함께 행간에 도드라지는데 이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역사적 사건에 주목하여, 역사는 현재라는 시간에 충실함으로 공정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는 중동의 100년을 자신의 삶과 함께 엮음으로 역사가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오류인 '개인의 관점'을 배제하려 애쓴 흔적들이 곳곳에서 느껴졌고, 역사학자로서 가져야할 기본 자세를 가장 가치있게 여겼다. 역사학자의 책임과 의무는 자신이 확인한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 외에 다른 어떤 주장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전가가 되거나 선전가들에게 이용당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정치적으로 쉽게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유혹인 존재하는데, 이는 역사학자가 직면할 수 있는 큰 위험이다.-p191 "위대한 역사학자는 자신의 분야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추가해 더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정직한 역사 연구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가설은 분명한 목적과 인식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둘째. 학자는 증거에 따라 자신의 가설을 어떤 단계에서라도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학자도 인간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도 하고 실패할 수도 있다. 특정 이념과 권력에 대한 충성심과 편견이 학자의 역사 인식과 표현을 왜곡할 수 있다. -p199 역사가 사실인지 묻는다는 것은 역사가 때때로 거짓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왜 거짓일 수 있을까? 왜 그리고 어떻게 역사를 날조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모든 사회의 역사가들이 직면한 큰 문제들 중 하나다. -p202 역사의 주요 목적과 용도 중 하나는 정당화다.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p203 역사가가 미래를 예측해줄 거라 기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가가 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역사가는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까지 진행되어온 것을 관찰하고 발생하는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들을 제시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가 아니라 먼 미래의 역사적 흐름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목적과 동기에 의해 때로 역사가들이 현재에 집착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역사적 흐름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혹은 방향을 바꾸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p214 기독교와 이슴람 두 종교의 공통적 과제는 다름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옳고, 당신을 틀렸소. 지옥에나 가시오.”
나는 이 책이 역사학자로서 평생 살아온 연륜에서 묻어나는 역사관점의 지혜로 읽혀졌다. 무엇보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공정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집필된 저자의 관점에 따라 편향되어 있다. 역사는 공정성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정치성을 배제해야 한다.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영국에서 중동학자로 살아오면서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이 한몫 했던 것 같다. 현재를 살면서 역사에 대해 얼마나 공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던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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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책읽기도 인연 따라 가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마그레브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슬람과 유대교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그런 인연으로 만난 책입니다. 여기 더하여 이 책을 번역하신 서정민교수님을 오래 전에 만났던 인연을 가지고 있어, 번역하신 책을 통하여 서교수님을 반갑게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현존하는 최고의 중동역사학자인 버나드 루이 스교수의 삶과 학문의 세계를 집대성한 기록입니다. 1916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11 개월 정도 지나면 한 세기를 살아낸 셈이 됩니다. 들어가는 말에서도 짚고 있습니다만, 중동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이슬람의 기원과 경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니다. 저자는 학창시절부터 이미 쿠란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전기를 비롯하여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유대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보니 [북소리]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메카로 가는 길; http://blog.yes24.com/document/7929495>을 쓴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은 가톨릭과 함께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 사이라고 합니다. 중세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제국에서는 유대인들과 공존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나, 사회적 여건이 변하면 서로 개종을 하기도 하는 등 종교적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루이스교수는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자신이 역사학자이며 문명사에 관심이 있다고 밝히면서 현재 우리는 거대한 힘들이 역사를 위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역사란 집단의 기억인데 역사의 부재는 기억상실증이고 왜곡된 역사는 신경증을 일으킨다고 비유합니다. 따라서 역사학자는 ‘도덕적이고 직업적인 책임감을 바탕으로 과거의 진실을 정확히 찾아내고, 파악한 그대로를 제시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스스로 이런 책무를 다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왔다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의 저서를 보면 자신의 뿌리를 거슬러 밝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에서 시작해서 부모님들이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신이 출생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성장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읽는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학문적 배경에는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책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여겨 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책을 소유하면 그것을 읽는 기쁨이 배가 되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도서관이나 법적 소유권자에게 번거롭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특정 구절에 대한 감상과 이해가 더욱 쉬워진다.(27쪽)” 그래서 저자는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즐겨 부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어에도 익숙해 있었으며, 유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열세 살에 치루는 성년식 바르미츠바행사를 위하여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유대의 성년식 전통은 기원전 76년 즉위한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드라여왕이 유대민족의 내부단결을 도모하고자 모든 남자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로서 유대인 가장들 사이에서는 문맹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유대인들은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율법을 암기하였고, 성년식에서는 모세오경 가운데 한 편을 모조리 암송해야 했으며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준비한 강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교육방식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홍익히 지음, 유대인 이야기 161-162쪽, 행성:B잎새, 2013년; http://blog.yes24.com/document/7962142)
결국 저자는 런던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 특히 중동역사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이집트를 거쳐 팔레스타인, 시리아 그리고 터키를 여행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대학원과정을 마칠 무렵 터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저자는 정보부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중동에 파견되어 근무하면서 정보를 분석하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 무렵에는 러시아어, 아랍어, 터키어, 알바니아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를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언어적 능력은 역사학자라면 필수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원전자료를 독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역으로 인한 원전의 왜곡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셈입니다. 결국 1949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제국의 기록보관소를 방문하여 자료를 살펴볼 기회까지 얻어 중동역사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록보관소는 수 세기 동안 유지된 오스만제국의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쌓여 있다고 합니다. 1955년에는 UCLA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 무렵부터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모스크바 등지에서 열리는 이슬람관련 학회의 초청으로 무슬림국가들을 방문하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라는 제목의 장을 꼼꼼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자의 글제목을 보면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자의 학생들은 다양한 이유로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했다는데, 저자는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역사가로서 정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연구 역시 과학적으로 상당히 진화했으며, 무분멸한 자유보다는 검증 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은 정답이 하나인 수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는 과학이 아니며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일치하지 않거나 때로는 모순되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명확하지 않은 인류의 삶과 지식에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저자는 믿고 있습니다.
저자는 정직한 역사 연구에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가설은 분명한 목적과 인식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둘째, 학자는 증거에 따라 자신의 가설을 어떤 단계에서라도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중요한 목적과 용도의 하나는 정당화라고 합니다(202쪽).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 역시 인간인지라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피해야 할 일이지만, 특정 이념이나 권력에 대한 충성심과 편견이 학자의 역사 인식과 표현을 왜곡할 수 있는데, 진솔한 역사가는 이런 위험을 잘 알고 고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1974년 저자는 결혼생활을 청산하면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직장은 물론 조국까지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프리스턴대학교이 근동학과 학과장직과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의 연구원을 겸직할 수 있는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미국 정부의 중동정책에 관하여 자문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사이의 평화협정이 타결되는 과정이 요약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격주의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자는 처녀작인 <이스마일파의 기원>에서 이스마일파의 아사신(assassin)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이스마일파는 주류 수니파에서 떨어져 나온 시아파의 과격한 분파로 이단 중의 이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격목표는 십자군과 같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지배 엘리트와 지배이념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중세의 아시신에게 공격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슬람세계의 통치자들, 군주들, 장관들, 장국들, 그리고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들은 항상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였고, 공격 대상을 쓰러뜨린 후에도 자신은 도주하지 않았으며, 아시신을 보낸 세력 역시 아사신을 구하기 위한 구출작전도 없었다고 합니다. 임무를 끝낸 아사신은 살아남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자살폭탄테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민간인을 원격조종하여 무차별적으로 살상을 하고 인질납치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오늘날의 테러리스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교리, 전통, 법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슬람법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해 혹은 협박을 위한 인질납치와 같은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한다고 합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문명의 충돌의 대표적인 사례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제국이 건설된 것과,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 발칸반도를 점령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독특한 문명양식을 만들어냈고, 그 유적들이 현재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서는 거대한 이슬람사원의 일부를 뜯어내고 가톨릭성당이 자리 잡은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8세기 무렵에 작성된 에스파냐 주재 모로코대사관에서 작성된 문서에는 ‘알라께서 이곳을 이슬람의 품으로 빨리 회복하시길’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도 코르도바 메스키타를 방문하는 이슬람신자는 ‘한때 이슬람 사원이었던 이 신성한 곳에 오니, 오후 기도를 드리고 싶네요(339쪽)“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슬람 강경파들을 ‘이슬람 원리주의'로 칭하는 관행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새롭습니다. ’원리주의‘라는 용어의 근원은 1910년 무렵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주류 교회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든 <원리들: 진실에 대한 증언>이라는 팸플릿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에 대한 비판을 배격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는 문자 그대로 신성함을 가지며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원리주의가 1980년대 들어 특정 이슬람단체를 묘사하는데 동원되었는데, 이들 무슬림단체는 미국의 개신교 원리주의자들과 하등 유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100년의 기록>은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구적인 일방적인 시각으로 중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고루 보면서 학문적 활동을 해온 루이스 교수의 학문적 배경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대한 분량을 우리말로 옮긴 서정민교수님은 “<100년의 기록>은 루이스 교수의 학문적 삶을 모두 담아낸 책이다. 또 100년에 가까운 삶을 정리하며 집필한 개인적 회고록의 성격도 갖고 있다. 연구를 하면서 그가 직면한 학문적 고민과 논쟁에 대해서도 솔직히 담아냈다. 이혼이라는 개인사도 여과 없이 기술했고, 노년에 시작한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도 부끄럼 없이 진솔하게 밝혔다.(12쪽)”라고 이 책의 성격을 요약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신 서정민교수님은 이집트 카이로아메리칸대학교의 정치학과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중앙일보 카이로 특파원을 지냈습니다. 서정민교수님이 카이로에서 올리는 따끈따끈한 중동소식을 블로그에서 읽으면서 교감을 하다가 일시 귀국한 서교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안내로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중앙성원을 처음 방문한 작은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그의 노고가 밴 번역서 <100년의 기록>을 만나면서 서정민교수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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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세월, 시간이 쌓아온 중동의 역사 - 100년의 기록 _ 스토리매니악 인류의 역사는 늘 싸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역사에 대해 깊이 있게는 모르지만, 한 번이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온 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류는 늘 싸움을 반복해왔다. 지나 온 역사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우리는 20세기, 21세기 들어서도 많은 싸움을 하고 있다. 세계의 각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고, 테러와 내전,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만 해도 65년여 전 동족간의 전쟁을 겼었고, 지금 이 시간에도 아프리카에서는 끝없는 내전이 이어지고 있고, 중동 또한 내전과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IS를 중심으로 한 과격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몰고 오는 공포는 지금 이 시점에서 세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부분 아닐까 싶다.
우리는 중동 지역의 분쟁을 볼 때마다,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갖거나, 이슬람은 나쁜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면, 이슬람과 이슬람주의의 차이를 알 수 있고, 종교와 이념으로써의 이슬람과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이용되는 이슬람주의를 구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일반인으로써 이런 부분을 알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국내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종교 자체를 접할 기회가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우리에게 한 역사학자의 이야기는 중동과 이슬람의 현실에 대해 알기에 부족하지 않은 지식을 제공해주고, 이슬람권 문화에 대해 한층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의 저자 '버나드 루이스' 는 현존하는 최고의 중동학자로 꼽힌다. 10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 오면서 이루어낸 자신의 삶과 업적 그리고 중동의 역사를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데,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마치 한 편의 자서전 같은 느낌도 있으면서, 중동의 현안에 대한 전문가로써 그리고 역사학자로써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인문서로도 읽힌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은 물론, 성장 과정과 역사학자로써의 삶을 시작한 계기 등을 이야기한다. 또, 영국인으로써 중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이유,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고민들, 또 현재의 중동 지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털어 놓는다. 또, 중동 전문가로써 중동 지역의 주요 인물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또 우리가 잘 몰랐던 이슬람권에 대한 이야기까지, 우리가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 볼 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버나드 루이스' 라는 대 역사학자를 만났다. 그가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중동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 그 누구보다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중동을 바라 보았다는 점을 보았고, 서구권 인물로써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게 되었으며, 그가 걸어온 길을 통해 중동의 역사와 지금의 현실이 무엇에 기인했는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역사학자이자 중동 전문가로써 그가 제시하는 중동 문제의 접근은 들어볼 만 하다. 중동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서구적인 시선을 배제하고 중동 고유의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의 중동 문제를 해결하려는 서구의 방식에 오류가 있고 그 부분들을 시정하지 않는 한 지금의 분쟁이 꽤 길게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물론 저자의 생각이 모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가 말하는 중동 문제의 핵심만큼은 큰 공감이 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중동 내의 여러 현안들을 언급한다. 그 모든 현안들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언급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현안들이 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현안들이 역사적으로 참 오래 된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역사의 한 부분에서 꼬여버린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채 참 오래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이런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하게 하고, 지금도 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아 넣고 있는지, 이 책을 보면 그 핵심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꽤 두꺼운 책이라 읽기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속도가 붙고, 생각보다 읽기기 수월했다. 인문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이 아니라, 한 역사학자 개인의 일생을 다루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읽기가 편했지 않나 싶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이해시켜주는 필력이 저자에게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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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요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로 ‘중동’이라는 단어를 어느 때보다 많이 보고 듣고 있으며,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위험한 바이러스처럼 우리나라에 다가오고 있다. 지구촌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1974년 오일쇼크가 일어나서 유가가 엄청 올랐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이 중동지역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사실 중동지역의 문제는 우리나라와 관련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동문제를 유심히 살펴 앞으로의 대체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올해로 99세를 맞은 중동 역사 최고 권위자 버나드 루이스의 개인적 삶과 학문을 담았다. ‘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으로 중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이 지역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것으로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서정민 교수는 “버나드 루이스, 그 이름은 항상 나의 학문적 고민과 함께했다”고 고백하면서 “미국 내 현존하는 최고의 혹은 가장 영향력 있는 중동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버나드 루이스는 1916년 영국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영국과 미국에서 보냈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히브리어·아랍어·터키어 등을 익히고 학문적 업적을 쌓다 1982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미 정가의 중동정책 자문 역할을 했다. 신오리엔탈리스트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서양인 가운데 중동에 대해 그만큼 균형 잡힌 시각을 펼친 예도 드물다. 이 책에는 버나드 루이스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자신의 성장 과정과 함께 역사학자의 삶으로 들어서게 된 계기, 영국인으로서 왜 중동의 역사를 연구하는지, 역사를 연구하면서 직면한 학문적 고민과 논쟁에 대해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의 에피소드, 터키 대통령 투르구트 외잘과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 요르단 국왕 후세인 등 중동의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에 대한 회고도 들어 있다. 버나드 루이스는 중동의 100년 역사를 서구의 시선이 아닌 중동의 시각으로 중동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2001년 9·11테러로 인해 미국에 대한 중동의 반감이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왜 이슬람이 미국과 대립하는가’에 대해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슬람 세력이 미국과 대립하는 이유에 대해 대다수 무슬림들은 미국을 기독교세계의 대표 국가로 생각하며 반감을 갖게 됐다고 분석한다. 미국이 중동의 어떤 부분도 점령하려 들지 않았고 오히려 중동의 독립을 도왔던 터라, 미국이 중동의 적대 대상이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우리는 ‘중동’이라고 하면 전쟁과 테러부터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루이스가 들려주는 아프가니스탄인 특유의 통렬한 직설화법 에피소드나 이집트인들의 유머감각 등은 신선하면서도 재미있게 들려진다. 중동 문제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이 책을 읽고 중동 문제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와 일관된 시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중동문제에 대해 깊이 알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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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을 이해하는 출발점 오늘날 한국도 테러가 주목받는 사회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한국사회에 불어 닥칠지도 모를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법률을 만든다고 하니 그것에 반대하는 야당이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며 막고 있는 정국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이런 정국을 불러왔을까? 테러를 방지한다는 법률이 테러를 조장하는 형국이라는 것인데 본질은 어디 갔는지 곁다리만 무성하다. 테러하면 주목되는 지역이 있다. 중동이 그곳이다. 전쟁, 테러, 분쟁에 종교적 요소까지 뒤섞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곳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목을 받는 다는 것 또한 시각을 달리한 조건이 있다. 바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중동이 이렇게 부정적 시각으로 주목받지만 정작 중동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접근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중동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의 시각을 통해 중동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담아 전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100년의 기록’이라는 책의 저자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가 그다. 버나드 루이스는 “1916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히브리어 등 고대 언어를 공부하여 해박한 언어 지식을 바탕으로 중동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했다. 또 역사학자로서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격변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명실상부 최고의 중동 문제 전문가로 발돋움했다.” ‘100년의 기록’은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자기 삶과 업적과 중동 역사를 돌아보며 쓴 책이다. 하여 중심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중동전문 역사학자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간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자로 중동에 주목하게 된 배경과 학자로써 학문적 고민까지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중동의 종교를 포함한 역사로부터 현재의 중동문제까지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버나드 루이스의 기본적이면서도 분명한 시각은 “역사의 동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서구적인 시선을 배제한 채 중동 고유의 시각으로 그들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적인 시각을 벗어나 올바로 중동의 현재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각 속에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 이슬람 과격단체, 반미주의의 확산 등의 현안을 직시하며 “서구적인 방식으로 중동을 바꾸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며, 서구의 힘을 중동에 적용시키기보다 중동인 자신들의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하도록 돕는 편이 낫다고 설명한다.” 또한 버나드 루이스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시각을 중동에 적용하려는 잘못된 시도에 관해서도 분명히 지적한다. 자신들의 민주주의 방식이 중동 사회에도 반드시 통할 거라는 오만함에서 기인한 서구 사회는 중동 문제에 개입하면서 수많은 계산착오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중동인 자신들의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하도록 돕는 편이 낫다고 설명한다. 유럽인으로 태어나 중동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중동전문가로 활동하다 미국의 중동정책에 관여하게 된 저자의 특별한 이력은 곧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의 한 흐름이었다고 여겨진다. 저자 버나드 루이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서구적 시각의 강요가 중동의 테러위협을 해소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테러에 관한 정책은 테러의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으로 테러를 이용하려는 세력의 문제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에서 테러에 관한 이야기는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권력의 중심이 선 세력이 그 권력을 이용하여 더 오랫동안 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테러라는 상황을 이용하고 있다고 보인다. 테러의 위험이 문제가 아닌 테러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것이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우리나라에서 테러를 해소해 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