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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로 유명한 옥성호(현재 1인 출판사 운영 중)님의 장편 소설.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을 존경하고 그의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감동 받아 지은 소설이다. 시카고 한인 교회를 배경으로 전형적인 목사님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에 대한 회의를 주제로 하고 있다. 대형 교회 목회자의 위선적인 모습을 고발하며 진정한 신앙은 생각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생각 없는 믿음처럼 종교의 가치를, 인간의 가치를 훼손 시키는 것은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 본인도 유명한 대형 교회의 목회자 아들로 자라면서 신앙에 대한 회의를 심각하게 경험했었다.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면서 다시 신앙을 갖게 된 본인의 경험이 작품에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솔제니친의 작품을 빠짐없이 읽으면서 원어로 읽지 못하는 것을 가장 후회하여 러시아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사실 작가는 한국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재학 중에도 흥미없었던 러시아어가 솔제니친이라는 작가를 통해 배워야겠다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교회처럼 자본주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 없다고 비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파이자 오메가인 돈을 더 버는 것이 축복이라고 떠벌리는 교회가 과연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지 가슴 아픈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작품 주인공인 장세기라는 목사 내외는 딸의 회의론적인 신앙관 때문에 분노를 폭발한다. 목사 체면, 교회 안에서의 위치 때문에라도 신앙에 회의를 갖고 있는 딸을 어떻게해서든지 설득하고자 한다. 그깟 체면 때문에....
우리도 다를바가 없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벗어버리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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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감명깊게 읽었던 옥성호 작가님이 그의 글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여 만든 소설 "낯선 하루"를 만났네요 기독교에 최고의 영향력을 주셨던 옥한음 목사님의 아들로 살아온 그가 계속해서 교회를 비판하는 책들을 출간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는 말도 많지만 전 그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기독교가 갱신할 부분이 있다는 건 많은 기독교인들이 알기에 오히려 그의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덮으려는 것보다 들어내서 도려내는 것이 오히려 상처를 회복하는데 가장 큰 치료방법이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다 읽고 나서 나의 신앙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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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주류 기독교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가지는 부류가 많아졌다. '개독'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교회 밖의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근에는 한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지금은 다니지 않거나 가볍게 다니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모태신앙중에 이런 경우가 많은데, 대개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합리적 질문에 제대로 답변해주는 사람을 못만나거나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하면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옥성호씨는 고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인데, 이 분 역시 회의를 겪었던 것 같다. 몇년전부터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보여주고 지적하는 책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는데, 나도 몇권을 읽어봤는데 꽤 재미있다. 나도 사역자를 가족으로 둔 모태신앙인라서 그럴까. 교회를 비판하는 적나라한 책들 중에는 이 사람은 처음부터 그냥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교회를 온 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정 떨어지는 부류도 있는데, 옥성호씨의 책은 모태신앙인이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고통과 고민, 회의들이 솔직하게 묻어나서 좋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비문학적 글을 출판하던 저자가 문학적 장르로 도전한 두번째 책이다. 시쳇말로 손에 잡은 뒤 놓을 수가 없었다. 보통 모태신앙인 가정에서 저런 류의 대화는 피하기 마련인데(필연적으로 싸우게 되니까) 소설 속 상황에서 펼쳐지자, 내 경험도 떠오르고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도 기억나고 해서.. 손을 놓을 수 가 없더라. 아무래도, 내가 감정이입한 캐릭터는 주인공인 장목사와 그 딸이다. 딸의 모습은 나의 성장기를 떠오르게 했고, 장목사는 성장기 이후의 나를 보는 듯 했다. 나 역시 그 딸과 같은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준적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소름 끼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결국 소설은 원만한 결말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결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내 삶에서도 그랬다. 결국 저 갈등은 한 쪽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해결이 되지 않는 다는 걸 경험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다면 실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글 중간에 평생 불교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가 죽기직전에 '하..나..님..'하고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나오는데 이 장면도 사실 교회에 다녀본 사람들이면 ..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장면이다. 좀 더 설명하면, 할머니는 평생을 불교신앙으로 남에게 피해 안 주며 조용히 살았는데, 기독교인 부인과 결혼해서 개종한 아들에게 죽기직전까지 개종요구를 받았지만 결국 개종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의식을 잃고 죽기직전에 저 말을 남긴건데, 그 과정에 청년부 회장 박주명이 반복적으로 여러시간동안 할머니 귓속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를 반복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하.. 나..님..' 하고 할머니가 임종하자 박주명은 천국에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면서 구원을 선포하는데..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 박주명은 교회일에 열심이지만, 매사가 위와 같은 식인 것 같다. 정규 신학교에도 등록할 수가 없어서 돈으로 주고 학위를 사는 엉터리 신학교에 가야할 정도로 교리적 체계가 없는 청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위의 할머니 사건 이후로 교회에서 영향력이 컸던 장로아들이 그를 밀면서 장목사는 박주명을 교역자로 세우라는 압박에 시달리는데... 종교적인 이야기라서, 모두가 볼 수 있는 공적인 장에서는 조금 말을 아껴야 할 것 같다. 그 외에도 정말 하루에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보기 힘들정도로 모태신앙인이 겪었거나 겪고있는 또는 겪게될 고민들이 압축적으로 생생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젊은 모태신앙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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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기독교인, 크리스챤 그리고 믿는 성도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대표적인 성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처럼 예수님은 왕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육체을 입고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고 고치고 안아주기 위해서 심지어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신앙처럼 우리의 성도가 된 이후에 낮은 모습으로 겸손하고 사람들을 섬겨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은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교만해지기 일수이다. 이러한 모습이 이제는 교회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신앙의 첫발을 내딛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하다가 직분을 받고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 그리고 목사가 되면서 명예욕에 불타 섬기려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고 상대를 의식하여 가식적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보일 때가 비일비재하다. 교회에서는 장로로 멋진 신앙생활을 하는 듯하지만 사회나 가정에서는 일반 사람들과 별반차이 없이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상대가 이 사람이 교회의 직분을 갖고 성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상대방은 강한 혐오감과 기독교와 교회에 큰 이질감을 가지게 될 것이고 교회를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한국교회가 앉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옥성호(고 옥한흠 목사님의 장남)은 아버지가 한국교회에 유명한 목사님이였지만 기독교의 이질된 모습에서 회의를 느끼면서 방황도 하게 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의 교리강좌와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둘의 영향으로 그가 작품세계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낯선 하루」 이라는 기독교의 문제들을 한인교회 목사를 통해 비춰지게 된다. 이 내용에서 한인교회 장세기 목사의 이야기로 구성되고 있다. 어느날 장세기 목사는 아주 길게 느껴지는 하루를 경험하게 된다. 새벽에 만난 정집사의 솔직하고 순수한 기도제목과 달리 가식적으로 믿음 생활하는 성도를 비교하게 되고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모습을 비교할 수 있었다. 물주라고 할 수 있는 김집사님댁에 할머니가 곧 죽음 앞에서 박주명 청년은 전도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영역에 침범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일게 되고 김집사님의 추천으로 박주명 청년을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추천해달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은정)이 기독교에 대한 회의를 늘어놓으면서 장세기 목사와 아내는 큰 충격을 겪게 되고 기독교에 대한 이질감을 다시 한번 비추게 된다. 그리고 배 목사와 배 목사 친구의 상담과 이야기를 통해 성공을 위한 비겁할 수 밖에 없는 교역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한인사회에서 성공하다시피한 현 권사님은 순탄한 삶속에서 한 순간 남편을 잃고 자식의 병원 소식을 통해 자기의 뜻대로만 신앙을 해 온 것에 후회하며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권사님의 모습 등 몇 가지 내용들은 기독교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옳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목격되었지만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은 느꼈을 것이다. 이런 모습 속에 우리들은 어떻게 그것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해보고 각자 자신은 어떠한 가를 다시한번 느끼게 해 준다. 우리의 존재, 성도로써의 존재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고 장세기 목사의 언급된 말처럼 사람을 의식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허락한 것을 알고 그릇용량만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기독교의 모습 속에서 무조건 상처를 받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성도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피의자,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가 될 것을 소망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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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저자 옥성호의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래곤 한다.
그가 맨 처음 냈던 책(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은 그 사상이 보수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의 사상은 기독교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번에 낸 그의 책은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그의 질문은 한층 더 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하루의 주인공은 저자의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한다. 주인공이 하루 동안 만나는 낯선 사건들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함께 고민하고 답을 하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책의 핵심은 풍자가 아니다. 저자가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진지한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책 '서초교회 잔혹사'와는 구별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나름의 가치를 도출해 기독교가 가지는 의미를 새긴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제시한 의미가 '낯선 하루' 속에서 벌어진 문제들을 다 덮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낯선 하루'를 맴돌고 있다. 아니, 우리는 무감각한, 익숙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익숙하다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을 것이다.
저자가 손짓하는 '낯선 하루'로의 초대에 응한다면 분명 새로운 질문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질문, 거기서 낯선 하루는 시작이다.
어느덧 소설가의 길을 걷고 있는 옥성호 작가에게 감사와 애정을 담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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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교회 잔혹사>, <갑각류 크리스천>, <~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유명하신 옥성호씨의 장편소설 <낯선 하루>가 출간되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카고에서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로서, 목회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의 역할까지 무난하게 수행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딸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주인공은 점점 신에 대한 회의와 의심의 문제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계속되는 갈등 끝에, 이 낯선 하루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딸에게 편지를 씁니다. 논리적인 "설득"이 아닌, "사랑"을 전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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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교회 잔혹사>라는 소설로 한국 대형교회 목사의 일탈을 신랄하게 꼬집은 옥성호가 이번에는 이민교회 목회자의 내면을 자세히 묘사한 또 한편의 소설, <낯선 하루>를 내놓았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 형식을 빌려온 이 소설은 시카고 이민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하루를 묘사한다. 새벽 4시 50분, 새벽기도회는 꼭 자신이 인도하는 것을 목회철칙으로 삼은 장세기 목사는 새벽기도를 하는 것을 ‘매일 죽는 일’로 여긴다. 그는 새벽기도회에 많은 성도들을 참석시키고자 딱딱한 교리 설교를 축복 설교로 바꾸었다. 이 새벽기도회에 다른 여인을 마음으로 탐닉한 정 집사가 오열하며 기도한다. 장 목사는 정 집사와 상담하면서 목사로서 모범답안 같은 형식적인 기도를 해 준다. 오전 9시 30분, 출석 성도수의 정체에 답답함을 느끼며 부교역자에게 호통을 친다. 또 열심 있는 청년부 회장의 신학교 추천서 문제로 담임목사로서의 위기감을 느낀다. 그는 세상적인 성공을 꿈꾸는 속물 목사인가? 오후12시,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이 닥쳤다. 딸 은정이가 학생 수련회 중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은정이는 기독교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장 목사는 그 와중에 딸의 영혼에 관한 것보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의 체면과 안위에 더 신경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괴로워한다. 오후 2시 30분, 다시 교회 사무실, 부목사의 친구 목사가 남가주 ‘노래의 교회’의 담임목사의 위선 때문에 믿음과 목사직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작가는 <서초교회 잔혹사>에서 보여준 아무개 목사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계속 세운다. 오후 7시 5분, 딸과의 계속되는 대화 후, 장 목사는 딸의 외침이 반항이 아니라 절박하게 내미는 구조의 요청임을 깨닫는다. 아빠와 엄마의 사랑을 보여 달라는 간절한 외침! 그는 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목사가 아니라, ‘사랑한다. 내 딸.’이라고 말하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 이 소설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언제나처럼 목사로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낯선 하루를 목사가 아닌 아버지로 마친다.”(p. 243).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하루의 다양한 사건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회의하고 의심하며,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 고민하는 목사다. 그는 딸의 ‘배교 선언’ 때문에 직업으로서의 목사가 아니라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빠, 즉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로 자신을 다잡는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미 작고하신 아버지 목사님에 대한 바람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작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는 분이셨다. 하지만 아들은 외적으로 대형교회를 이루고 존경받는 목사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종교인으로 아버지를 소망한 것이다. 또한 이 땅의 모든 목사들이 고뇌하는 진실한 신앙인이기를 소망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 대해 의심하고 갈등하는 생각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작가의 말’ 마지막 문장이 내 마음에 비수처럼 꽂힌다. “생각없는 믿음처럼 종교의 가치를, 아니 인간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p.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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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가치와 보편적 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 이 책에서는 모든 가치와 믿음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던 그날,하나님의 행방에 대한 뼈아픈 질문이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였어요.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는 종교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지,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어설프지만 작가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에게 신이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는 그만큼 사는 것이 벅차고 치열하기 때문일 것이겠죠. 특히, 이번 책에서 선교부를 맡고 있는 배 목사의 신학교 동기가 ‘노래의 교회’ 박 건축 목사 밑에서 사역을 하다가 박 건축 목사의 거짓된 신앙과 철면피 같은 행태에 견디다 못해 기독교 신앙 자체를 포기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박 건축 목사의 위선적 행태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장세기 목사는 스스로에게 되묻지요. ‘나는 박 건축 목사와 뭐가 다른가?’ 보다 더 유명해지고 싶다, 보다 더 큰 교회를 맡고 싶다, 라는 욕망. ‘큰 교회’라는 단어가 주는 달콤한 유혹은 그 뒤에 숨은, 차마 형용하기 힘든 더러움과 악취마저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위장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장세기 목사는 이미 깨닫고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던 것이 아닐지. 그리고, 이 책은 물신주의에 물든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비애와 풍자와 종교의 가치와 보편적 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인상적이 책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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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은 크리스찬이라고 했다. 평신도 집사라고 했는데 그녀는 깨어 있는 시간의 50% 이상을 교회활동에 바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말이다. 그녀의 열심이 아주 가끔 이상한 대단함(?)이라 할만큼, 때로는 내 목구멍이 '헐' 하고 막히는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을 정도이다. '낯선 하루' 라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낯선 사람들' 중 하나처럼 그녀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상식은 인본주의이고, 정상은 오히려 미온적 태도의 표현이고, 조화와 균형을 상실하거나 파괴하는 행동을 하면서 십자가를 핑계대고, 그들의 창조자 하나님을 터무니없는 안하무인, 비상식적 괴팍한 신으로 만들어 버린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창조자는 이 세상을 조화롭게 순리적으로 흘러가도록, 아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만들었는데 말이다. 저자의 의도는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은 이렇다. 종교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비정상을 정상으로, 부조화와 균열을 조화롭게, 억지가 만들어낸 모순을 순리대로 잘 흐를 수 있도록, 막힌 인생의 길을 열어주는 통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어마어마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아도 종교를 통해 받은 위로를 가지고 누군가를 진정 위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낯선 하루'에 등장하는 낯선 사람들의 낯설고 안타까운 삶의 모습이 마치 그들이 믿고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존재로 만들어버린 것 같다. 난 신앙이 없다. 아니, 한 때 정말 생명을 걸고 믿었다가 떠났다. 그 믿음을 떠나고 나니 더 이상 이 세상은 내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솔직히 말해 훨씬 더 평안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속에 남은 그 무엇은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나는 제발 이 세상이 신이 버린 세상이 아니길 바란다. 신을 믿는다고 눈물 흘리며 외치는 인간 때문에 신이 버려지는 세상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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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서 낯선 하루라는 소설은 나에게 만큼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보다 더 충격적이고 마음이 아픈 사연들과 사건들을 지난 30년 동안 몸소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기독교 인구 수에 비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비슷한 유사 그리스도인들을 배출한다. 무슨 산업용 로보트를 공장에서 찍어 내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종교인들을 생산해 낸다. 안타까운 것은 목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말할 때 늘 내가 말하는 것이 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성직자는 기하 급수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성직자가 늘어나면 교회가 조직과 제도를 만들게 되고 부패의 길이라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 저런 성직자들과 종교기관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헌금은 자연스럽게 강요되고, 직책 위에 직책을 만들어 하이에나 처럼 야금 야금 서민들 주머니를 턴다. 목사 안수는 신학교만 졸업하면 누구에게나 안수를 허락한다. 얼마 전 서세원 목사 사건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악의 문제들을 목사는 말씀으로 정당화 시키고, 교회의 머리는 예수가 아닌 목사와 물질과 건물이 된다. 종교는 기업이 되고, 목사는 하나의 직업이 된다.
설교라고 여기 저기 많아 보이지만 홍수가 나서 마실 물이 없듯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진리의 말씀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오직 성경을 내세우지만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을 찾아 헤매는 영혼들은 장세기 목사의 딸처럼 갈 길을 잃어버린다.
성직자는 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그 도를 따라 삶에서 살아내야 한다. 불교는 부처의 도를, 기독교는 예수의 도를 행해야 한다. 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도를 따라 행하지 못하면 성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눈물 흘리고, 회개 했으니 목사로 새롭게 거듭나겠다는 다짐이 성직자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사업에 실패해 이제 목사를 하겠다고 해서 목사가 되는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이제 목사 밖에 없으니 목사라도 하면서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교회가 부패해지고 썩어 냄새나는 것임을 명심해 주었으면 좋겠다. 오죽 했으면 야고보는 "선생된 자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라"고 경고하겠는가? 책에서 등장하는 청년부 회장 박주명 형제 같은 사람은 늘상 교회에서 마주치는 일이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박주명 같은 청년들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에게 성직자는 무슨 의미이며, 왜 목사의 길로 걸어가려고 하는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는 있는가? 그 길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당신은 정녕 알고 있는가? 영혼에 대한 간절한 눈물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을 주신다면 선교사로 나가라! 그러지 않는 이상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접어라! 신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찬성이다! 공부해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라!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 긴 시간 고민했다는 변명 또한 하지 말아라!
나는 당신이 목사가 아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목사 가정이라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자. 단지 장세기 목사의 딸 은정이처럼 용기있는 질문들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문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거나 목사의 자식이라는 굴레로 마음속에 판도라의 상자를 숨겨 두고 있기 때문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목사의 가정이든 기독교인의 가정이든 자녀의 신앙적 회의와 고민들을 나누고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주인공 장세기 목사와 그의 딸 은정이의 대화처럼 많은 대화가 오가는 것은 실제로 드물다. 많은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존경하던 박윤선 목사님의 따님이 얼마전에 책을 내었다. 그 책을 본 사람들이라면 박윤선 목사님의 따님이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아무튼 장세기 목사에게는 낯선 하루였을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자신의 신앙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 과정에서 문득 기억의 저편을 끄집어 내지만 이미 은정이의 마음은 닫힌 상태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었으니 인간이 되면 된다. 장세기 목사는 인간으로서 아버지가 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이 없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의 상징인 예수를 우선하지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낯선 하루의 주 메시지가 어떻듯, 내가 볼때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인간관계에서 어느 곳에 있던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되는 것이다. 이 외에 하나님의 섭리, 자라게 하시는 일, 열매를 맺는 일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선'을 분명히 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사 이 어지러운 세상속에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다면 각자 처한 자리에서 기독교인이 아닌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면 교회는 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사실 (엡4:11)에 나와 있는 목사라는 구절은 원문에는 목자라고 되어 있다. 물론, 목사라고 해도 문제는 되지 않지만 굳이 목사라고 하여 그 직함에 어떤 의미를 집어 넣을 필요도 없다. 단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유기적인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속에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서로 섬기고 그 섬김이 세상으로 드러나 이웃을 향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목자는 예수님이 맡기신 섬김의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종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교에 가서 누구나 공부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목사가 되게 해서도 안되며, 목사안수를 주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지금의 신학교와 기독교단체들이 과연 이러한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만은 기억하도록 하자. 그것은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종교인인가, 질문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섬김의 정신으로 사람을 섬기는 일에 힘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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