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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그늘의 발달』은 사무치는 시집이다. 여기에 실린 수많은 슬픈 시들 중 하나를 겨우 골랐다. 제목은 「문병」. 이번에는 이 시에 대해 이야기해 본다. 먼저 읽어보자.
문병(問病). 한자를 그대로 풀면 병을 묻는다는 뜻이다. 병을 앓는 사람을 찾아보고 위로하는 일을 두고 우리는 병을 ‘묻는다’ 한다. 누가 이 단어를 처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참 효율적인 압축이지 싶다. ‘묻는다’라는 말 안에는 ‘걱정한다’도 있고, ‘위로한다’도 있고, ‘기도한다’ 혹은 ‘함께 슬퍼한다’도 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경우에 따라 ‘묻는다’가 이렇게나 많은 의미를 거느릴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말은 왜 이렇게 슬플까. 나는 문병이라는 말이 불러오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 봤다. 왜 문병이라는 단어에는 어딘가 사람 마음을 아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건지. 이것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그 단어 안에 두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혹은 서 있는 사람과 (몸져)누운 사람. 이 두 사람의 대비는 ‘문병’을 ‘질병’이나 ‘투병’ 같은 말보다 더 슬픈 말로 만든다. 뒤의 말들에는 병든 이만 있지만, ‘문병’이란 말에서는 병든 이가 건강한 이와 함께 놓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도 있는데 한 사람이 병과 고통스럽게 싸울 때 다른 한 사람은 그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록 그 내용이 다르더라도 이 둘은 고통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러한 두 사람의 닮음은 ‘문병’을 또 한 번 슬픈 말로 만든다. 병을 묻는 일이란, 이처럼 이중으로 슬픈 일이다. 문병은 두 겹짜리 슬픔이다. 문태준은 이 두 겹의 슬픔을 아는 시인이다. 그의 네 번째 시집에 실린 「문병」이라는 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를, 위에서 말한 이유와 같은 이유에서 슬픈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위와는 다른 이유에서 덜 슬픈 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문병도 슬프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이 문병은 내가 아는 가장 덜 슬픈 문병이다. 시의 내용만 간추려 보자. 우선 화자가 병을 ‘물으러’ 누군가를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병원에 도착해 환자가 있는 병실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간 그 첫 순간, 화자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오는 광경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대는 엎질러진 물처럼 누워 살았지” 환자니까 누워 있었을 테고, 누워 있었으니 납작해 보였을 텐데, 심지어 환자복과 병실 침대 시트의 무늬가 똑같아 그가 더욱 납작해 보였겠다. 3차원으로 생생한 이 공간에 2차원처럼 존재하는 환자의 모습을, 그는 “엎질러진 물” 같다고 쓸쓸하게 비유한다. 생이 활기를 잃듯, 환자가 입체감을 잃고 평면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자는, 그런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그저 “보슬비가 다녀갔다”거나 “제비가 돌아왔다”는 실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떠들어댈 뿐인데, 그마저도 더는 할 수 없게 된다. “초롱꽃 핀 바깥”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일이, 물론 자신은 조금의 악의도 없었다 해도, 병실에 종일 누워만 지내는 환자에게는 그조차 상처가 될 수도 있을까 염려되어서다.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물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한다. “그대가 잠시 웃”는 모습을 보고, “밥알 몇 개를/개미 몇이 와 마저 먹는 것”을 본다. 그렇게 계속 본다. 시의 마지막 행은 이렇다. “작은 개미들을 계속 보았지” 그렇게 화자는 그냥 지켜본다. 그저 계속 보기만 한다. 그리고 그 ‘지켜봄’에서 시가 끝난다. 사실 ‘지켜봄’에서 끝난다기보다, 이 시는 ‘지켜봄’ 그 자체다. 지켜보는 것으로 시작해서 계속 지켜만 보다가, 마지막까지 지켜보면서 끝나는 시다. 2행과 3행의 “나는 ~고 말했지”를 제외하면, 이 작품에서 화자가 하는 일은 아픈 이를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렇게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문병인가. 병을 ‘물어야’ 하는데, 환자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의 화자는 저렇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다. 이 문병에는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다. 환자를 붙잡으며 펑펑 울지도 않고, 그의 건강하고 행복했던 과거를 들추어 내며 현재의 아픔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슬프게 쓰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더 슬퍼질 수 있었던 시다. 문병이라는 소재부터가 이 시가 그려낼 슬픔에 대해 미리 어느 정도 각오를 하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각오했던 바에 비해 이 시는 좀 ‘덜 슬픈’ 것 같다. 그저 담담하고 건조한 저 어조 때문인가. 내게는 이것이 단순히 문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문병의 메커니즘과 더 관련 있어 보였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내 몇 안되는 문병 경험 중 하나를 꺼낼 필요가 있겠다. 그 문병은 외할머니의 입원 때였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친 터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회복을 위해 병원에서 지내고 계셨다. 그때의 상황은 이 시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입원하신 할머니는 정말로 “엎질러진 물” 같았고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 역시 화자처럼 무슨 말을 하기를 그만둔 채, 그저 당신을 계속 보기만 했다. 걱정되고 심란한 가운데 대체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싶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근신하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오히려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장난도 치고 하며 뻔뻔할 정도로 구셨다. 그때 말을 더 많이 한 쪽은 할머니 쪽이었고 더 많이 웃었던 쪽 역시 당신 쪽이었다. 나는 환자보다 더 조용했고 환자보다 더 울상으로 서 있었다. 할머니는 내 학교 생활을 물었고 오늘 아침밥은 잘 먹고 왔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물었다. 돌이켜 보면 문병을 갔던 건 나였지만 ‘물었던’ 쪽은 오히려 할머니였다. 나는 위로를 드리고 왔어야 할 문병에서 도리어 위로를 받고 온 것이었다. 이 거꾸로 된 문병의 풍경을 나만 경험한 게 아니라고, 저 시는 말하고 있었다. 화자가 “그대는 잠시 웃었지”라고 말할 때 그 웃음은 분명 내가 본 적 있던 웃음이었고, “나는 어렵게 웃으며 보았지”라고 말할 때 그 웃음도 분명 내가 지은 적 있던 웃음이었다. 시인의 문병과 나의 문병은 이처럼 닮아 있었다. 우리의 비슷한 문병은 과연 앞에서 말했듯이 병을 ‘묻는’ 일이었을까? 같은 시인의 다른 시 「가재미」가 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어 보인다.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라는 무서우리만치 삭막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시도, 문병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우선 “가재미”라는 표현에 눈길이 간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문병」에서 “엎질러진 물”로 표현되었던 것이 이 시에서는 “가재미”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환자는 두 시에서 모두 평면 이미지로 나타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나약한 상태라서 그런 걸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가재미」의 마지막 구절은 더욱 놀랍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내가 그녀를 적셔 주는 게 아니고 그녀가 나를 적셔 준다. 암 투병 중인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간 문병에서, 되려 화자가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이다. 일어설 수도 없이 가재미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지내는 평면의 환자가, 건강한 화자를 오히려 끌어안는 장면. 건강한 내가 아픈 그녀를 끌어안는 게 아니고,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받기만 했다. 이런 문병도 ‘문병(問病)’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다시 「문병」으로 돌아오자. 위로를 주는 쪽은 여기서도 환자 쪽이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나”가 아픈 “그대”에게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니라 그 반대. “그대”가 “나”를 위로하고 있다. 이 역전은 다음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이 부분에서도 마찬가지, 손을 잡아주는 일은 문병객이 환자에게 해 주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대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것’이란다. 그렇다면 문병의 ‘문’ 자를 ‘물을 문(問)’ 자가 아니라 ‘들을 문(聞)’ 자로 써 보는 건 어떨까. 묻는다는 것은 준다는 것이다. 문병 갈 때 주로 사 가곤 하는 음료수나 과일만 주는 것이 아니고, 진심을 다해 걱정해 주거나 위로해 주거나 얼른 낫기를 기도해 주거나 하는 것도 다 ‘주는 것’이다. 문병이 병을 ‘물으러’ 가는 일일 때, 우리는 환자에게 이런 것들을 ‘주고’ 온다. 건강한 이가 주고 아픈 이가 받는다. 반면 듣는다는 것은 받는다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는 일과도 같다. 듣거나 바라보는 것이지, 묻는 것이 아니다. 몇 달 전 나의 문병이 그랬고, 문태준의 「문병」이 그랬듯, 어떤 문병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이러한 ‘받는 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아픈 이가 주고 건강한 이가 받는다. 위로를 받는 쪽은 오히려 문병을 간 내 쪽이다. 걱정을 받는 쪽도, 기도를 받는 쪽도 내 쪽이다. 문병이 병을 ‘들으러’ 가는 일일 때는, 도리어 우리가 환자에게 ‘받고’ 온다. 이처럼 문병(問病)이 문병(聞病)이 될 때, 문병의 풍경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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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가재미 이후에 그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신문에 실린 시집 소식에 반가운 마음에 우선 댓글부터 단다.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할때 그의 시 첫 장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 오면서 위로 받는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그의 시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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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의 네번째 시집. 내가 갖고 있는 시집은 2014년 6월 출간된 초판 8쇄본. 제목이 마음에 든다. '그늘의 발달'이라니. 시인의 다른 시집들과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평화로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마치 엄마가 계신 시골집을 보는 느낌. 특히나 표제작인 '그늘의 발달'에서 감나무를 베는 모습이 진짜 고향집을 보는 느낌이다. 우리집에도 뒤꼍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기에 감상이 남다르다고나 할까. 똑같은 풍경을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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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의 우울이 겹겹이 쌓여가는 와중에 '그늘의 발달'이라니. 하며 집어든 시집이다.
읽는 동안은 사실 별다른 생각이 많이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무엇을 원하여 기대하고 시집을 읽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글자 그대로를 읽어내기 위해 시집을 읽는 것인지 잘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조금, 몇몇의 시들은 공감하여 느끼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생각이 조금, 또 와중에 마음에 든다고 생각되는 시가 조금, 있었다.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 그런지 시집 안의 내용을 이래저래 생각해볼 시간도 없이 후루룩 읽어버렸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시집을 들어보아도 마찬가지 였다. 무슨 내용이 있을까, 어떤 끈으로 묶여 있을까 바라보고 싶어도 마주보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마음에 들었던 것은,
[눈물에 대하여
어디서 고부라져 있던 몸인지 모르겠다 골목을 돌아나오다 덜컥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이 목하 내 얼굴을 턱 아래까지 쓸어내리는 이 큰 손바닥 나는 나에게 너는 너에게 서로서로 차마 무슨 일을 했던가 시절 없이 점점 물렁물렁해져 오늘은 더 두서가 없다 더 좋은 내일이 있다는 말은 못하겠다 ]
나를 더 기운없음의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일, 누가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내가 나에게 차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에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게 남았다. 평소 다른 시집들을 읽다가 문득문득 마음에 들었다며 연시만 꼽았었는데, 이번엔 또 꼽아놓은 시들 분위기가 한결같이 가라앉은걸 보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 같은 것은 없단 생각이 든다.
[아무 까닭도 없이
돌담을 지나가고 있었다 귀뚜라미가 돌담 속에서 울고 있었다 구렁이가 살던 곳이라고 했다 돌담을 돌아도 돌담이 이어졌다 귀뚜라미가 따라오며 울었다 집으로 얼른 돌아와 목침(木枕)을 베고 누웠다 빈방에 가만히 있었다 귀뚜라미가 따라와 목침 속에서 울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
시집과는 크게 관련이 없지만 읽으면서 우울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우울 자체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것에 대해서. 책장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많아지다보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때도 왔다. 제대로 시를 읽고 있는게 맞을까 생각이 미치다보니 그것마저 우울해졌었다. 무언가를 하는 와중에 의미를 찾는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값어치가 있을까 싶다. 시를 읽는 일도 매한가지라 생각해야 겠다. 읽을수록 기운이 빠지는 생각할 수록 기운이 빠지는 일이 없도록. 몇차례 시간을 두고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제목에 속박되어 그 안을 제대로 들어가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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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에 빗댐 - 詩
내 걸음 가다 멎는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抒情)
문태준 시인의 시에 관한 생각이 잘 드러나 있는 시입니다. 시로 쓴 시론이라 할 만합니다. 위 시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를 당신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당신이라는 말은 진폭이 넓어 어느 층위에서 말하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쉬운 상대에게 쓰는 호칭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시인이 시를 호락호락하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눈여겨 볼 것은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입니다. ‘들썽들썽’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어수선하게 자꾸 들뜨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어입니다. 시의 얼굴이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천천히 오직 천천히 /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봅니다. 그런 다음 시인은 결연한 다짐을 합니다. 당신의 ‘습한 곳에’ ‘나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언합니다. ‘나의 서정(抒情)’으로 당신에게 다가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인의 시는 거개가 습한 곳에 바쳐진 서정시입니다. ‘그늘이 지붕이 되’(「그늘의 발달」)는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습한 곳은 어두운 ‘공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주 잃어버리거나 잊는 ‘시간’과 ‘공간’을 두루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꽃잎이 지는 시간을 노래한 다음과 같은 시, ‘겨우 밥술 뜰 만한 힘으로 / 늙은 손목에서 뛰는 가녀린 맥박과도 같이 // 가까이 아주 가까이에서, // 나의 생각과 생각이 나를 어루만지다 잠시 떠나듯이 //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오기도 전에’(「꽃잎 지는 시간」)는 아주 가녀린 ‘시간’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뜨거운 물이 찻잎의 푸른 눈물을 둥그렇게 감싸듯이 / 떠도는 손님을 헐값의 여인숙이 한 칸의 헐렁한 몸으로 받아내듯이 // 그윽한 못과 / 날아오를 물오리 한 마리’(「새벽 못가」)는 그윽한 ‘공간’과 ‘시간’을 환기시킵니다. 이렇듯 시인은 우리의 가슴에 촉촉한 서정시의 꽃다발을 선사합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다음과 같은 시는 언젠가 내가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것 같은 ‘서정’입니다.
百年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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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집에 담긴 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전작들에 비해 약간 처진 느낌이 든다. 선이나 관조의 깊이를 몰라서 못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에 나온 여러 시집들 중에서 사고 싶은 시집이 많았지만 전작에 대한 신뢰와 '시인의 말'이 마음에 들어 이 시집을 구입했는데 이번에는 서점가서 좀 읽어보고 구입할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내가 리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 한 권의 시집을 놓고 자책하는 밤이다.
갑자기 중년에 이른 시인의 필치가 아직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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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하고 살림을 하면서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멈춰 섰다. 잘 살고 있는지, 변한 건 없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틈 날 때마다 끼적인 작은 노트들을 꺼내 읽어보았다. 껍데기는 그대로 인데, 아니 조금 더 불어 있는데 마음은 버석버석 모래가 씹힐 만큼 건조해져 있었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적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성이 바짝 말라 있었다. 시인 문태준은 시인이자 불교방송의 PD이다. 라디오 프로듀서를 한 지 올해가 16년째란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쓸 만큼의 감성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럽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시인은 하늘이 내리는 사람 같다. 문태준의 시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친구 ‘김연수’때문이었다. 김연수의 팬인 나로서는 그가 하는 말들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수 없는데, 그는 종종 같은 고향 출신인(김천) 문태준을 언급한다. 그래서 읽게 된 문태준의 시, 그리고 그 중의 『가재미』라는 유명한 시. 한 가족처럼 지내던 큰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가재미』는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심한 듯 담담하게 내뱉지만 언어와 분위기의 묵직함 때문이었다. 그의 시를 읽고 나서야 밀도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그의 시는 뻔뻔하지 않아서 좋다. 치장한 얼굴을 내세우지 않아서 좋다는 뜻이다. 금세 유행하는 어떤 시들은 간지럽고 인공적인 향이 강해서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문태준의 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곱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흰쌀밥 같기도 하고 감자 같기도 하다. 「그늘의 발달」은 2008년에 나온 그의 네 번째 시집이다. 『그늘의 발달』은 고향집에서 감나무 가지를 치는 아버지를 보며 쓴 시라고 한다.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감나무가 너무 웃자라/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눈물을 감출 수는 없어요/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한 몸의 그늘/그늘의 발달/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밤을 다 감고/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나의 일기에는 잠시 꿔온 빛// 시골에서는 감나무 가지가 퍼져 그것이 그늘져 지붕을 덮으면 집에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감나무의 가지를 자르는 아버지를 보며 어차피 사는 게 감나무가 그늘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그늘을 만들면서 사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병이나 아픈 것, 이별이나 슬픔-느닷없는-을 피할 순 없으니, 굳이 감나무를 잘라서 그늘을 없앨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늘의 발달』을 처음 읽었을 적에는 토속적인 서정시라고 생각했고 비화를 알고 나서는 삶을 달관한 것 같은 시라고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종교적 색채(특히 불교)를 풍기는 것 같기도 했다. 적극적인 것 같기도 하고 무기력한 것 같기도 하다. 감나무 가지를 자르는 행위에 대한 의미를 앍고 나니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갗에 스칠 만큼 가슴에 와 닿았다. 감정의 동요가 일었다. 이런 것들이 그가 쓴 시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토속적이면서도 서정시인 것. 나는 이런 걸 느꼈어, 너도 한 번 느껴봐 하는 느끼한 허세가 없다는 것. 스산한 바람, 가을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것. 저녁 무렵 잡풀을 태우면 나는 기분 좋은 매캐한 냄새와 시골집 마당이 생각나는 것. 휘황찬란하지 않은 것. 그러나 오래도록 깊은 감동을 주는 것. ‘머츰하다’나 ‘소루하다’라는 등의 단어들은 문태준 시인 덕에 알게 된 것들이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같은 재료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이렇게 다른 글들을 이렇게 다른 생각들을 생산해내는 그를 보며 ‘참 멋진 사람이다, 잘생긴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단지 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라는 온전한 개체, 그 전체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아끼는 가장 가까운 벗들에게만 살짝 알려주고 싶다. 그의 시들을, 그의 서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