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3)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67%
  • 리뷰 총점8 33%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8.0
  • 50대 9.0

포토/동영상 (1)

리뷰 총점 종이책
비평은 제 2의 창조다.
"비평은 제 2의 창조다." 내용보기
야심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발터 벤야민의 야심은 아돌프 히틀러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는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 계몽주의의 연장으로 발생된 유물론적 변증법과 유태신학으로부터 유래한 신비주의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히틀러는 유태민족을 제거함으로써 유럽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발터 벤야민은 유럽
"비평은 제 2의 창조다." 내용보기
야심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발터 벤야민의 야심은 아돌프 히틀러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는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두 가지 전통을 자신의 텍스트 안에서 하나로 만들려고 했다. 계몽주의의 연장으로 발생된 유물론적 변증법과 유태신학으로부터 유래한 신비주의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히틀러는 유태민족을 제거함으로써 유럽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발터 벤야민은 유럽을 유태민족과 더불어 '구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실패한 사람이었다. 벤야민이 기획했던 잡지들은 하나도 출간되지 못했고, 그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세 번의 사랑(도라 벤야민, 율라 콘, 아샤 라시스)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는 교수 자격 취득 시험에 떨어졌고, 평생 동안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가장 친했던 브레히트와 게르하르트 숄렘은 벤야민을 끝내 외면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작업했던 <아케이드> 논문은 그의 후배 테오도르 아도르노에 의해 퇴짜를 맞았고, 미국 비자를 받아 망명하는 데에도 실패한 그는 스페인 국경을 넘다 자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평생에 걸쳐 수행하려고 했던 사명, 즉 역사적 유물론과 메시아 구원론의 결합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그의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우고 있다. 한국에도 벤야민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비평가들이 많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제목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 새로운 천사)>는 벤야민이 자신의 상징적 아이콘처럼 생각했던 파울 클레의 그림 제목이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도 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 벤야민의 어떤 점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가 우리에게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그의 메세지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방법론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벤야민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이념을 비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체계화', 이는 밀란 쿤데라가 지적했듯이, 모든 사유하는 자의 영원한 유혹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의 사상을 꽉 짜여진 텍스트 속에서 억지로 체계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평, 저널, 평론, 논문, 에세이를 다른 문예작품에 대한 비평들의 모자이크로 만듦으로써 그의 사유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주석을 달고 비평 작업을 함으로써 작품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라고 믿었다. 벤야민은 괴테의 <친화력> 비평 논문 속에서 '상징의 토르소'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토르소는 팔과 다리가 없이 몸통만 있는 조소 작품을 뜻한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을 '상징의 토르소'라고 불렀다. 이 토르소의 전신은 오직 비평가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채로 남아있는 예술 작품은 비평가에 의해 그 비밀을 풀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여기서 비평은 곧 또 하나의 창조가 된다. 비평은 사상을 전달하는 또 하나의 매체이자 수단이다. 벤야민은 라디오 방송의 대본을 쓰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 벤야민은 '아우라 없는 예술'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게 된다. 기존의 예술은 세속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일회적이고 신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와 같은 새로운 예술은 완전히 세속화된, 정치적 혁명의 매체다. 이는 종교의식적인 '아우라'를 내포하지 않은 대량복제시대의 새로운 예술 생산 방식이다. 벤야민이 평생에 걸쳐 몰두했던 것은 <아케이드(Passagenwerk)>의 완성이었다.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보들레르에 관한 에세이도 이 <아케이드>에 속한 것이다. <아케이드>는 총 여섯 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벤야민은 보들레르 에세이 부분을 가장 먼저 완성했다. <아케이드>의 목표는, 인류가 꿈꾸는 이상적인 역사의 모습이 현실 속에서 왜곡되고 억압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추적하여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는 끝내 이를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기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실패의 원인은 보들레르 원고를 뉴욕에서 거절해 돌려보낸 후배 아도르노의 뻔뻔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벤야민 이념의 모순에 있었다. 한편으로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과 유태 신학의 구원론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인류가 기왕에 누리던 자연의 상태가 왜곡되고 착취당하는 현실 속에서 변증법적 지양(폭력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이념이며, 유태 신학의 구원론은 인류의 역사가 메시아를 통한 인류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다. 벤야민식 원근법이 지향하는 유토피아라는 소실점은 이렇게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 이 둘은 같다. 벤야민은 이 폭력 혁명을 통해 기존의 역사적 굴레를 단절시킬 이가 메시아라고 믿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사상은 그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애초부터 실현될 수 없었다. 유태 신학은 메시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은 폭력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지상 왕국)가 역사 속에 건설될 수 있으리라는 이상주의이다. 지상 왕국의 건설은 수용소의 건설을 전제로 해야만 했다. 결국 벤야민 스스로도 모스크바 재판을 지켜보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 브레히트와의 토론에서도 '이론적 노선'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시인했다. 벤야민이 카프카에 대한 주석으로 인용했던 이 말은 결국 벤야민 자신에게 적용된다. "카프카가 말하고 있듯이 희망은 이렇게나 많이 남아 있다. 다만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닐 뿐이다."(발터 벤야민)
s******0 2004.10.23.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상징적 비평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상징적 비평가" 내용보기
독일문예사상가 발터 벤야민(1892-1940)에 대한 여러 평어 가운데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보는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발터 벤야민의 현재성에 관하여>(1972)에서 제시한 평이다.   "나의 테제에 따르면 계몽과 신비주의를 결합하려는 벤야민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경험의 메시아 이론을 사적 유물론에 활용하는 법을 신학자 벤야민은 터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상징적 비평가" 내용보기
독일문예사상가 발터 벤야민(1892-1940)에 대한 여러 평어 가운데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보는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발터 벤야민의 현재성에 관하여>(1972)에서 제시한 평이다.

 

"나의 테제에 따르면 계몽과 신비주의를 결합하려는 벤야민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경험의 메시아 이론을 사적 유물론에 활용하는 법을 신학자 벤야민은 터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우선 벤야민의 사상적 근원인 유대교 신비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잘 지적해 내고 있다. 양자는 벤야민 사상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핵심요소로 비평적 글쓰기의 시학의 단초를 마련한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평가대로 벤야민은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주의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유대 정신의 영향이 더 컸다. 다시 말해서 진리와 구원 그리고 종말론이라는 종교적 파토스가 비판과 해방 그리고 무산계급이라는 유물론적 파토스보다 강했다. 따라서 종교적 신비주의와 역사유물론의 결합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는 후기 벤야민이 천착한 '구원의 미학'의 미완결로 끝을 맺는다.

 

벤야민의 사상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측면은 1924년을 그 분기점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1924년은 벤야민이 비의적 철학자이자 언어 신비주의자에서 정치참여적 저널리스트이자 변증법적 유물론자로 변모하는 분기점이다. 참고로 베른트 비테는 벤야민의 전 생애를 9개의 시기로 세분하고 있다. 베를린 유년기와 청년기(1892-1912),청년 운동, 유태 정신, 언어 철학(1912-1917),낭만주의 정신의 예술 비평(1917-1923),역사비관주의와 반고전주의 미학(1923-1925),파리-베를린-모스크바(1926-1929),위기와 비평(1929-1933), 망명:아우라 없는 예술에 관한 이론(1933-1937), 아케이드(1937-1939),역사의 종말(1940) 등이다.

 


벤야민의 이론적 틀은 언어철학, 역사철학, 문학이론으로 구분된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다시 예술생산이론, 기계복제예술이론, 아이러니의 유토피아, 알레고리식 비평이론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수많은 문예평론가들이 벤야민을 선호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발터 벤야민이 비평과 평론의 본질에 대해 통찰력 있는 관점을 제시한 직계 선배이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사상을 기반으로, 벤야민은 비평을 폐쇄적인 체계적 사유보다 우월한 인식론으로 간주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모든 예술작품은 비평에 의해 완성된다. 

 

"오늘날 사람들이 비평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는 반대로 비평은 그 핵심의도에서 평가가 아니다. 오히려 비평은 작품을 완성시키고 보완하며 체계화하는 한편, 작품을 절대성 안에서 해체시키는 것이다."

 

비평은 예술의 절대적 진리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수단이고, 비평이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되는 경우가 아닌 한 비평을 써서는 안 된다. 상징이 기만적으로 보여주는 온전한 세계보다 비평에 의해 해체된 작품의 파편성이야말로 오히려 현존재에 대한 더 정확한 표상을 보여준다.

 

z***a 2010.10.01.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벤야민에게로 가는 길
"벤야민에게로 가는 길" 내용보기
나는 대학원에서 발터 벤야민을 공부하고 있다. 언제부터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학부 때 인문학 방법론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그때 과제가 5명의 현대철학자의 사상을 요약해 오는 것이었는데, 4명의 철학자를 뽑고 마지막으로 고른 사람이 벤야민이었다. 그에 대해 쓰면서 멋모르고 베껴적은 '영기'니 '우의'니 하는 단어들에 선생님은 검은 펜으로 '어떤 의미?'라는 주석을 달
"벤야민에게로 가는 길" 내용보기
나는 대학원에서 발터 벤야민을 공부하고 있다. 언제부터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학부 때 인문학 방법론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그때 과제가 5명의 현대철학자의 사상을 요약해 오는 것이었는데, 4명의 철학자를 뽑고 마지막으로 고른 사람이 벤야민이었다. 그에 대해 쓰면서 멋모르고 베껴적은 '영기'니 '우의'니 하는 단어들에 선생님은 검은 펜으로 '어떤 의미?'라는 주석을 달아 돌려주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났다. 이젠 '아우라'가 예술작품의 원본성이자 대상과의 교감이라는 것을, '알레고리'가 언어철학과 관련된 어려운 개념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로 가는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이 날실과 씨실처럼 짜여 있는 이 전기는 막막해 하던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희망과 좌절로 점철된 벤야민의 삶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벤야민과 진지하게 마주하려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저자의 간결한 정리와 역자의 매끄러운 번역도 높이 사고 싶다.
p***e 2002.04.02.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