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편 {아랑은 왜}는 인터넷에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참고하는 '쌍방향 창작'을 시도했던 작품이기다. 그러한 시도에 걸맞게 이 소설의 구성은 독자와 작가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형식으로 기존의 소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이라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배소로 등장하는 장르다. 장르 자체가 새로운 것이고, 물론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전위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그것을 꿈꾸는 김영하에게 어울릴만하다. 끊임없이 독자에게 묻고, 수정하고, 다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아랑은 왜}를 읽고 크게 당황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김영하의 게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을 읽는 독자는 그 방법에 흥미를 느끼기도 하고 지루하다고 욕을 퍼붓기도 한다. 물론 지루하다고 느끼는 이는 기왕의 소설 독법에 익숙해 있어서겠다. 그들이 꺼리는 몇 가지 룰과 이 소설이 게임일 수밖에 없이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랑 전설' 속의 아랑은 조선 명종조 밀양 부사 윤관의 딸이다. 그녀는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에 맞서다 그의 칼에 맞아 죽어 원혼이 되는데 그 후 밀양에 부임하는 부사마다 첫날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가니 아무도 밀양 부사를 맡으려하지 않았다. 그 때 배짱 좋은 이상사라는 자가 자원하여 내려가 원혼의 억울한 죽음을 전해듣고 범인을 잡았다는 것이 아랑전설의 대강이다.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단순한 구성과 스토리는 김영하의 손길을 거치면서 하나씩 해체된다.
첫째로 '아랑 전설'은 추리소설로 변신한다. 아랑을 전임부사의 딸이 아닌 기생으로 보고 연쇄살인사건이란 관점에서 소설을 풀어 가는 것이다. '아랑 전설'은 조선시대라는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그 시대의 시스템을 드러내기에 좋은 소재일 수 있다. 그래서 소설 속에 탐정 역할을 하는 김억균을 등장시켜 사건을 풀도록 만들고, 그에 의해 아전들은 관아의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 아랑 이야기를 지어낸 자들이 되고, 배짱 좋은 이상사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추리소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아랑은 왜}에는 '작가와 우리'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는 '아랑 전설'을 재구성하는 '나'가 나오는데, 그가 독자를 향해 당신도 함께 참여하자고 말하고, 김억균이니 조윤이니 하는 배우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의견을 물어 재구성에 도움을 받기도 한다. 여기서 '나'라는 이야기꾼, 즉 작가는 독자와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 부르며 '우리의 선택은 좀더 뒤로 미루기로 하자'느니, '우리의 의심은 재구성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라느니 하며 능청을 떨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랑은 왜}가 잘 만들어진 하나의 롤 플레잉 게임일 수 있는 부분이다.
세 번째는 참고문헌이다. {아랑은 왜}에 나오는 문헌은 다양하다. {한국 문학 대사전}, {한국 구전 설화}, {정옥낭자전}, {청구야담}, {한국 민중의 문학}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기존 작품들과 구분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우리'는 함께 게임을 진행시키는 동안 이러한 문헌들의 도움을 받아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한국 문학 대사전} 등 '아랑 전설'의 여러 판본을 통해서 이야기의 다른 점과 그 속의 틈을 발견하고, {정옥낭자전}의 작가를 통해서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버림으로써 권선징악적 결말을 만들지 않겠다는 방향을 설정한다. 일종의 게임 아이템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쌍방향 창작의 재미를 만끽하던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군데군데에서 묘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네 번째, 작가의 배신 즉 이야기꾼의 솜씨이다. 재구성을 맡은 '나'는 독자와 자신을 '우리'라 칭하면서 마치 이 소설을 함께 써 가는 듯 생각하도록 만들지만 결국 {아랑을 왜}를 책으로 엮은이는 '우리'가 아닌 '나'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전 페이지에서만 해도 아랑의 아버지 윤관이 홀아비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가 페이지를 몇 장 넘기다보니 '윤관의 홀아비 생활을 감안한다면' 하면서 홀아비라 찍어두고 있었다는 듯 한다. 또한 '반묘(뒤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라는 부분을 보면 재구성자가 '우리'가 아닌 '나' 즉 이야기꾼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소극적인 줄로만 알았던 독자는 알고 보면 또 다른 '아랑 전설'의 판본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작가의 판본이 {아랑은 왜}라면 독자의 판본은 무수히 많을 것임을 김영하는 말한다.
다섯 번째로, {아랑은 왜}가 '아랑 전설'과 다른 점은 행복한 결론을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롤 플레잉 게임을 진행시킨 결론이자 작가 자신의 생각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의 결말이라면, 탐정이 근사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또 다른 사건을 위해 멋있게 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독자는 김억균이 어사 조윤에게 곤장 50대를 맞고 다음 행선지로 따라 나서지도 못하게 되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작가 역시 '그 순간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아랑 전설의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것으로 그 사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때 대부분의 독자들은 다시 공명정대한 밝은 세상이 온 것에 안도하며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라고 말하며 권선징악은 '할리우드 법정 드라마가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라 비꼰다.
마지막으로 '아랑 전설'의 현대판인 박과 영주의 이야기를 특이한 방식 중 하나로 들 수 있다. 작가는 현대판을 넣게된 이유를 작중 화자가 이야기 밖에 있음을 알리는 것, 이것이 매력적인 구성일 수 있다는 것으로 삼고, 결말도, '아랑과 박이 만나는 장면도 마무리로는 그림이 괜찮다'는 역시나 가벼운 생각에서 맺는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독자가 하나의 판본'이라는 것을 닮은 부분이다. 영주는 굳어진 인물이 아니고, 그러므로 이로서 작가에게 게임은 영원한 과제가 된다.
■ {아랑은 왜}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이다. 김영하라는 이야기꾼이 선보인 '아랑 전설'의 새로운 판본인 것이다. {아랑은 왜}가 재미없으면 마음에 차도록 다시 구성하면 된다. 이 판본 역시 많은 틈을 보이고 있고 작가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랑은 왜}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특징에 부합하는 소설이기 전에 변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전위를 꿈꾸는 이야기꾼의 솜씨라는 것을 명심하고 읽어야하겠다. [인상깊은구절] -소설 속에서 인용된 {왕조 실록}의 일부와 {정옥낭자전}은 허구다 -밤벌레들이 어른거리며 불가를 맴돈다. 멀리 교회의 십가자들이 성운으로 빛난다. 아파트의 불빛들은 하나둘 꺼져간다. 목을 젖혀 하늘을 본다. 명종 16년의 보름달이 환하다. 그는 입을 벌려 달을 향해 중얼거린다. 영주가 죽었다는 게. 이제서야 실감이 난다. 좋다. |
|
『아랑은 왜』는 영화로 치자면 메이킹 필름같은 작품이다. 소설이 작품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소설 창작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따라서 소설 창작론 교재같은 성격이 다분하다. 친절한 작가가 "자, 소설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독자에게 선을 보이게 됩니다."라고 설명해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소설 창작과 관련하여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의 몇 가지 예로 들어 보자.
첫째, 작품의 소재.
이 작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아랑 전설'을 그 소재로 하고 있다. 이렇게 누구나 아는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꼭 독자에게 익숙한 소재가 아니더라도 '해 아래 새 것은 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소재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듯하다.
그는 대단히 자유롭게 아랑 전설을 이렇게도 혹은 저렇게도 변형시킬 수 있었을 테고, 그것이 자기 청중에게만 환영받는다면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저작권을 고려하지 않고는 어떤 작품도 발표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독창성이 예술가를 평가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준으로 간주되는 시대이다. 그러니 아랑의 전설을 새롭게 해셕하는 이 작업이 결코 순탄치는 않을 같다. '익숙한' 이야기를 '다르게' 쓴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다(23쪽).
둘째, 구성의 문제.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소설의 구성 방법 중 하나가 과거나 현재, 혹은 두 인물의 관점(혹은 사건)을 교차로 배열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식은 잘못 쓰면 이야기가 단순해지고 도식적이 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 작가의 수준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이 그런 구성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이런 식의 설정은 현대와 과거를 유기적으로 연관지어 묶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과거의 이야기와 현대의 이야기가 판박이처럼 똑같으면 유치할 테고 너무 다르면 도대체 뭣 하러 과거와 현대를 한 소설 안에 병치시켰느냐는 비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인물 설정.
어떤 인물을 등장시키느냐의 문제는 그 인물의 성격을 어떻게 상정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인물/입체적인 인물) 그러한 성격이라는 것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물 설정에서 역사적 배경이 작용하는 측면도 매우 크다.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고 절규했던 홍길동이야 그의 앞세대이지만 그 역시 그 정도 두께의 절망만큼은 공유하고 있었을 터이다. 절망이 욕망으로 전환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무욕으로 승화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김억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마 그 중간쯤이 아니었을까? 욕망도 무욕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어중간하게 걸쳐져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무료하고도 지루한 나날들을 갖가지 공상과 잡념으로 견뎌나가고 있지 않았을까?(68쪽)
이처럼 작가는 등장 인물들 한 명 한 명의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는 영화감독과 같다.
적어도 자기의 작품 안에서 작가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의 세계를 창조하는 신. 그런데 작가라는 신은 자신의 인물들을 전혀 무에서 창조하지는 않는가 보다. 김영하는 소설 속 인물이 창조된다기보다는 모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창조된다기보다 모방된다. 어떤 인물은 작가 자신을, 작가의 아버지를, 옆집 아저씨를, 옛날 여자 친구를 닮는다. 대부분의 인물은 작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와 닮는다. 내 소설 속의 인물들도 현실에서 내가 알고 지낸 몇몇 인물들과 함수 관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일 대 일 대응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일정하게 소설과 현실의 인물들이, 마치 결식 아동 후원회처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97쪽).
모든 작가에게 적용된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작가의 지인들이라면 작품 속 인물 속에서 얼핏얼핏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을 수도 있겠다.
넷째, 발상의 전환.
인물의 성격을 명확히 하거나 사건을 만들기 위해 어떤 물건이 필요할 때가 있다.
어째서 북이나 종은 죽음과 그토록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일까. 구렁이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나그네를 위해 거대한 범종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까치떼의 이야기는 교훈적이지만, 그러나 끔찍하다. 생각해보라. 잠에서 깨어난 나그네의 발치에 즐비하게 널린 머리 터진 새떼들의 시체, 그리고 범종을 타고 흘러 나그네의 옷을 붉게 물들였을 피와 뇌수(92쪽).
다섯째, 소설의 역할.
소설 작품 속에서 당대 사회나 시대상은 도대체 얼마나 반영해야 하는가?
이 작품의 경우 이 예로 든 게 바로 섹스와 연애의 문제이다.
그러나 또 이런 반론도 들려온다. 그렇지만 정말 많이 자는 걸요. 그리고 그게 그들의 인생에 저어말 큰 영향을 미치구요. 누가 누구와 자는가의 문제가 어쩌면 그들에겐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단 말이죠. 물론 그것을 쓰는 작가에게도 그렇구요. 옛날에는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꾸고 선배 한 명 때문에 자발적으로 전과자가 되어버렸다지만, 요즘은 누가 누구와 자는가의 문제에 필적할 만한 심각한 사건은 그들 인생에 하나도 일어나지를 않습니다(107쪽).
그런데 '요즘엔' 정말 이런가? 그렇다면 나는 요즘 사람이 아닌 거다.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가의 문제.
"그렇습니다. 그게 섭리입니다. 저 미물이나 인간이나 앞날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매일반이지요. 날마다 판단을 해야지요. 여긴가 저긴가. 그리고 뒷다리의 힘을 모아 펄쩍 뛰고 나면 그 다음은 모르는 거지요. 헤헤."(176-177쪽)
그리고 억균과 어사의 역학관계로 인해 일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어사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물론 억균도 이렇게까지 하면서 아랑의 사건에 매달릴 이유는 없었다. 억균 역시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사적인 원한이 있지도 않고 이 사건의 해결에 출세길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방금 전 중문에서 어사를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거기에서 모든 고나속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사에게 추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다시 말해 구경거리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호기심은 다른 고을로 출발함과 동시에 유야무야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사의 힐난에 상처를 받은 종8품의 억균이 정3품 어사를 향해 사람들을 물리고 긴히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잇다고 맞받아치는 바람에 일은 여기까지 오고야 만 것이었다(170쪽).
아마 조윤은 젊은 억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국면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늙은이들은, 게다가 관료는 조심스럽다. 사소한 문제도 자신과 관련해서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호기심을 통어할 수 없다면 그는 고나료가 아니다(170-171쪽).
일곱번째, 결말의 문제.
이제 거의 다 왔다. 소설을 마무리지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야 말로 종결짓기이다.
작가는 마치 "Catch me if you can."하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유유히 제 갈 길을 간다. 칼을 농락하는 프랭크처럼. 작가가 재능이 많다는 건 인정하겠다. 그러나 "와우, 정말 대단해. 인정, 인정!"하며 박수를 쳐주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눈에 띈다.
이 소설은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소설창작과정에 대한 소설이다. 그런데 원 텍스트가 없는 상태에서 작품 쓰기와 그 작품에 대한 해설내지는 설명을 병행하다보니 구성 자체가 매우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속의 소설의 완결성도 의문이 든다. 소설 속의 소설은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지니는가? 완벽한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대추나무에 얽힌 연과 같다.
세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명포수의 재주를 볼 기회를 준 건 고맙지만, 현란한 쇼를 본 후 한참이 지나 생각해 보니 '그런데 그 포수, 토끼를 한 마리라도 잡긴 잡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소설 창작 과정 자체를 소재로 삼아서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돋보이나, 그리고 팬 서비스 차원이라고 할까? 독자로서도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완성된 작품이라고 보기엔 뭔가 좀 부족하고 애매하다. 적어도 일개 독자로서 내가 느끼기에는 말이다. |
|
이야기의 ‘틈’과 ‘꿈’ - 김영하 아랑은 왜가 놓인 자리 김영하 소설에는 냉정한 서술자가 자주 나타난다. 첫 장편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보면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이 예술가의 지상덕목”이라고 말하는 서술자가 나온다. “압축의 미학”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 말은 근대소설의 작가 중심적 상상력에 제동을 거는 작가의 시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타자의 자살을 기획하는 주인공 ‘나’의 면모는 작가가 지향하는 시선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바, 자살을 기획하되 타자 스스로 그 자살을 실행하게 하는 ‘기획자’와 ‘실행자’의 엄격한 분리는 작가와 인물을, 작품과 텍스트를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김영하의 소설적 사유방식을 명확히 표명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은 장편 아랑은 왜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진다. 메타픽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김영하 소설의 방법론적 특징이 결집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나는 나를…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선택하는 액자 소설의 형식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기원을 해체하려는 새로운 방법론적 시도로 나타난다. 여기서 두 개의 이야기는 공존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뿌리로 작용하는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들은 서로 교통할 수 있되, 그 이야기들을 연관 짓는 핵심 이야기는 부재한다. 모든 이야기가 뿌리이면서 줄기이고 한편으로는 나무이다. 시작과 끝이 맞붙어 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서로 맞붙어서 이야기의 진실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진실은 그것을 읽는(듣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질 뿐 이야기가 강요하는 하나의 진실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의 열린 담론을 주창하는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아랑은 왜에서 정의되는 ‘작가’는 이야기의 ‘창조자-신’이 아니다. 그는 차라리 여러 배역들을 배우들에게 분담하는 ‘연출가’에 가깝다. ‘창조자’로서의 작가가 인물-배우를 ‘신’의 입장에서 인형처럼 갖고 노는 존재라면, 그리하여 인물-배우의 자질과 상관없이 작품이 생산될 수 있다는 입장에 선다면, ‘연출가’로서의 작가는 ‘신’이 될 수 없으므로 배우의 자질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 아랑은 왜에 나타나는 ‘작가’는 바로 ‘창조자’에서 ‘연출가’로 ‘변신’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감독’이 된 작가는 배역을 맡은 인물들과 대화하고 그의 생각을 배우들에게 주지시킨다. ‘연출가’로 내려선 ‘작가’라는 존재 때문에 소설은 ‘대화의 기록’으로 변화한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기원으로서 작가가 부재한 소설, 아랑은 왜는 이 지점에 이르기 위해 ‘창조자’를 ‘연출가’로 변신시키는 해체의 전략을 문학적으로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
이야기의 기원으로서 작가를 해체하는 정신은 근대적 주체를 해체하려는 욕망과 다를 수 없다. 아랑은 왜에서 근대적 주체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김억균”은 인과성을 중시하는 근대적 인물 계보(형사-탐정-의사)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가 인과성에 근거하여 추리하는 ‘아랑의 죽음’에 얽힌 전말은 근대적 주체의 합리성이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하나의 예시일 수 있다. 하지만 근대적 주체로서 김억균은 자신의 논리에 내재한 ‘틈’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동일자의 면모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판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관찰을 통해, 다시 말해서 실증을 통해 그가 도달한 사건의 진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자들에 의해 재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간과한다. 모든 이야기의 “틈”을 주장하는 “이상사”와 이야기의 “틈”을 부정하는 “김억균”의 만남이 모든 이야기는 “꿈”일 뿐이라는 “이상사”의 생각으로 정리되는 것도, 진실은 결국 주체가 꾸는 “꿈” 속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작가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 하겠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다.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지거나 이미 있던 이야기의 요소가 사라질 때, 거기에는 언제나 작은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아랑의 이야기에도 여러 가지 틈이 보인다. 붉은 깃발과 큰줄흰나비말고도 여러 군데에서 그 틈이 보인다. 살인자의 신분도 그렇다. 어떤 판본은 살인자가 통인이라고 말한다. 통인이라면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는, 말하자면 하급 관속에 속한다. 그러나 어떤 판본에서는 관노, 그러니까 관청에 소속된 노비가 살인자로 지목된다. 아름다운 수령의 여식을 호시탐탐 노리던 관노가 겁탈을 하려다 참극을 벌인다는 것이다. 통인이 유모를 돈으로 꼬여 아랑을 유인해내는 데 반해 관노는 완력으로 일을 저지르려다 실패한다. (『아랑은 왜』, 16~17쪽)
이야기에 대한 김영하의 끊임없는 욕망은 이처럼 이야기의 “틈”과 이야기가 갖는 “꿈”의 속성에서 연유한다. 이야기의 “틈”은 이야기를 만든 자의 “틈”이며, 이야기를 만든 자의 “틈”은 세상의 “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이야기의 “틈”을 주제화함으로써 이야기가 가진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다. 아랑의 이야기를 현대화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 곧 “박”과 “영주”의 이야기를 놓고 벌이는 작가(서술자)와 인물들의 다양한 해석의 양태는 닫힌 세계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작가의 욕망을 대변한다. 닫힌 세계의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욕망 때문에 김영하 소설은 다분히 환상적인 색채로 나아간다. 양성성의 문제를 다룬 단편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을 비롯해서 「도마뱀」 「베를 가르다」 「피뢰침」 등에 나타나는 환상성의 요소는 분화의 상태로부터 미분화의 상태로 나아가려는 작가의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낸다.
여기서 김영하의 소설적 방법론이 지향하는 지점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모든 위계화, 요컨대 근대적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지점과 연결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와 인물의 위계는, 또 중심 이야기와 주변 이야기의 위계는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근대사회를 반영하는 형식으로서 소설의 위상은 미분화된 이야기의 한 가지 양식으로 변주된다. 기원 없는 이야기에 대한 담론을 통해 김영하는 소설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러한 성찰이 소설의 형식에 대한 성찰에 한정된 것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소설의 외부를 성찰하는 과정의 부재는 이후에 발표되는 김영하의 작품들에도 그대로 반복되는 문제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
김영하의 『아랑은 왜』는 성석제의 『순수』 이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고 자부하게 되는 소설이다. 게다가 제임스 미치너의『소설』 이후 소설에 대한 소설쓰기로는 가장 진지하고 읽고 나서 계면쩍지 않은 그런 작품. 외려 형식의 과감함에서 제임스 미치너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스스로의 문제제기를 사회적 양식으로 제공하고자 하는 순진성마저 겸비하고 있다.
아랑의 전설이라는 것이 있다. 밀양 고을에 부임하는 사또들이 하루를 못넘기고 횡사에 횡사를 거듭한다. 어느 담대한 이가 이 밀양 부사 자리를 자청하여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잠을 청하는 척 하면서 기다리는데 훵하니 바람이 불고 소복 차림의 여인네가 등장한다.다른 사람 같으면 심장 발작으로 짤막하게 제 삶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을 그 순간,신관 사또는 네가 전임 사또들을 죽인 요물이나며 호통을 친다. 그건 자기가 일부러 한 짓이 아니고 자신은 그저 제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기 위해 나타난것 뿐이라며 귀신이 훌쩍인다.이후 신관 사또는 귀신의 죽음에 얽힌 내막을 소소하게 조사하여 범인을 밝혀내고 시체를 찾아 후하게 장사 지낸다.이제 구천을 떠돌지 않아도 되는 귀신은 마지막으로 신관 사또에게 나타나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전설의 고향을 통해 알게 된 아랑의 전설이다.김영하는 바로 이 아랑의 전설에 수다한 소설적 수작을 부린다. 아랑의 전설에 보이는 수많은 틈과 이를 이용한 소설 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나람의 고찰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이야기꾼이라는 작자들이 과거나 지금이나 밥먹고 하는 일이 그거 아닌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기." 김영하는 조금씩 모양이 다른 아랑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런 구실을 붙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러한 작업을 진행 중임을 넌지시 비춘다. 그리고 이것이 어쩌면 소설의 기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인다.
소설에는 모두 세 개의 이야기대가 존재한다.아랑의 전설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살피는 나의 이야기,아랑의 전설을 내가 재구성하여 만든 이야기,그리고 아랑의 전설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소설을 쓴다면 서두로 삼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박과 영주의 이야기. 이 세 가가지 이야기가 진전에 진전을 거듭하면서 시간적 배경, 사건의 발생, 시점, 등장인물 등 소설의 기본적 재료들이 어떻게 소설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형되는지, 부러 서투른 반복까지를 병행하면서 친절하게 보여준다.
어처구니없다고 여길 수도 있는 이야기들의 갈래들을 여러 가지 사료, 그것이 실재하는 것이든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 것이든지에 관해서는 보르헤스식으로 넘어가기로 하고, 와 작가 자신의 상상력을 섞어 적절하게 묶어두는품이 여유롭고, 그래서 읽는 사람들도 숨가쁘지 않다. 작가가 지적하는 길로만 따라 걸으면 되는 이 수월한 책읽기라니. 그러면서 간간히 독자의 몫인
사족같은 상념만 아래와 같이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모른다. 사실은 현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작가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그럼 소설 속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들에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전제를 깔아 놓는다면?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는 여러 인물의 중첩을 제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범람하는 이미지들과 난무하는 관계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배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과연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일까.
각설하고 생을 통째로, 어느 때는 그 한 토막을 사회적 틀 안에서 교묘하게 변형하고 심드렁하게 재창조하는 소설 쓰기 작업에 대한 소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인상깊은구절] 그대 이후의 소설들은 통상 하나의 출판사가 출판권을 가지며 한 명의 작가가 저작권을 소유한다. 민담이나 전설은, 물론 그렇지 않다. 그것에는 이렇다 할 소유권이 없다. 누구나 민담의 윤색가가 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아주 새로운 민담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
|
김영하의 소설 <아랑은 왜> 무수한 이야기로 전해지는 아랑의 전설을 과연 어떤 것과 접목시켜 소설을 썼을까 궁금했다. 아랑은 나비가 되었다고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언제쯤 작가의 이야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소설이 시작되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궁금해했다. 그리고는 다시 이거 소설맞어 하며 책표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결말이 나는 거지하며 책 뒤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랬다 이렇게 한 소설을 써나가는 과정처럼 그렇게 아랑의 전설과 현실의 이야기를 접목시킨 거였다.
여름 남량특집 전설에 고향에 나올듯한 전설을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극적인 효과를 위한 등장인물도 만들어보고 서두를 어떻게 이끌것인지도 생각해보며 그렇게 한 작가가 소설을 써나가는 관점에서 같이 보았던 것이다.
나비로 환생한 아랑이 범인의 상투끝에 앉아서 범인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결국은 한 금부낭관의 추리로 인해 관리의 부정과 치정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결국 꿈속에서 아랑을 만나는 한 작가의 이야기와도 결부되는 특이한 구성의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나와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소설을 쓰는 것 같은 창작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차이라면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정말이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느낀다. 그저 그런거지 하며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들도 하나의 소재가 되고 그것을 펼쳐나가는 방법도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니 말이다 쓰는 재주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작가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일 것이다...
오랫만의 김영하의 글을 읽으면서 또한번 생각했다... |
|
꽤나 괜찮은 이야기꾼이라 할만한 작가라고 인정. 개인적으론 성석제를 더 위에 쳐주긴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소재개발이나 그 범위선택에 있어서만은 낫다고 생각한다.
'아랑전설'은 아리랑의 배경이야기니 하면서 어릴때부터 들어왔었는데, 현대의 이야기꾼이 이걸 어떻게 풀어내려나 꽤나 궁금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랑의 아버지가 왜 그 전설에서 그냥 사라지는지가 가장 이해가 안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 대해 김영하는 근대적인 인물을 하나 도입해서 그럴듯한 개연성을 제시한다.
이 이야기, 혹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면에선 다소 실망스럽기도 하다. 약간이나마 아쉬운 무게감의 측면도 있지만, 좀 더 긴 호흡으로 풀어내었어도 꽤 훌륭했을 것 같단 생각도 드는데 말이다. 그냥 과거의 재구성만 하더라도, 라쇼몽 못지 않은 다기한 군상을 그려낼 수도 있었겠고, 현재와의 크로스오버라는 모티브도 좀 더 그럴듯하게 잘 살릴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소재 및 주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너무 과도하게 의식한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도발적으로 그런 시각들에 대한 반응을 표면에 드러내어, 오히려 빗겨가는 전략을 세운것 같기도 하지만, 하나하나가 기대보다 소박해져 버린 느낌이다. |
|
어깨가 아프다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서핑을 하다가 지난 주말에 읽은 책의 서평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예스 24에 들어왔고 아랑은 왜를 찾아 찾아 들어왔더니 벌써 어떤 분이 서평을 써놓으셨고 구경도 할 겸 쭉 내려가는데 정말 화려하다 각 신문사마다 서평을 안 올린 곳이 없군.... 김영하...
90년대를 대표하는 많은 소설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도 그런 소설가중에 한 명이다. 그런 그에게 그의 신작에 각 신문사들이 서로 글을 안 써주면 난리라도 날 듯이 서평을 올리는 이유는 무얼까?
물론 문지라는 출판사의 힘도 있을 것이구,,, 그렇지만, 김영하. 그의 글쓰기는 독특한 점이 있다.그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그랬고 <엘레베이터에 낀="" ~="">도 그랬다. 그리고 이번 신작 <아랑은 왜="">또한 독특한 맛이 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다고 믿는 전설이나 설화는 기록되어 전하는 것도 있고 기록되지 않고 전하는 것도 있다. 그것은 여러세대동안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전하여 지고 전하여 져서 윤색되고 각색되고 지지고 볶아져서 지금 2000년 대를 사는 우리앞에 떡 놓였다.
그렇다면 그 사건의 진짜 진실은 무얼까? 김영하는 마치 장날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이 삥둘러서있는 한 가운데서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랑 전설 그거 다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 사실은 이렇게 된 이야기라고.. 하고 사설을 풀어 놓는다. 그러나 누가 알까? 그 이야기에 진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역사도 기록이 되어전하는 것이지만 기록하는 자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심지어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한 얼굴로 우리를 대하는가.
궁예의 이야기만 보더라도, 사실 우리가 궁예와 왕건의 이야기를 아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왜곡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전설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나비로 화한 아랑이 나풀나풀 날아와 범인의 머리위에 앉았든, 아니면 아랑이란 처녀가 사또의 딸이 아닌 애첩이었든.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전설이고 이야기일뿐이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떨까... 결국 우리도 조금씩 다르게 전설을 전하는 계승자들이니..
재미는 있었다. 그러나 딱히 지적을 하자면 엉성한 스토리에는 화가 났다. 긴밀한 구성과 뭐 영화같은 스펙타클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의도는 다분히 장미의 이름같은 긴장감을 원한 것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데 ,.... 정말 읽다가 중간쯤 가서 짜증이 나려고 했다. 너무 뻔하니까 헐렁헐렁한 구성에 왜 그렇게 페이지는 많은 것인지 그렇지만 김영하씨의 색다른 도전 고전의 재해석이라는 나름대로의 시도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사족하나 소설가는 정말 공부를 많이해야 하는 직업인 것같다. 물론 경험이 많고 발로 아는 것도 많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많이 찾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참 좋다.
김영하씨의 이번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문학대사전을 꼭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상깊은구절] 이 이야기는 관습적인 '선 애정 후 정사'의 공식을 뒤집은 것이다.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무르익으면 잠자리에 든다. 그후 사랑은 시험을 받고 그 시험을 이겨내면 사랑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대중적 서사 패턴의 반대편에 '포르노그래픽 어페어'가 있다. 이런 공식은 스크린이나 소설 속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엄연히 통용된다. 결정적 순간에 여자들은 남자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며 다시 한 번 묻는 것이다. "나 정말 사랑해?" 그러나 인간들이 사랑의 확인을 섹스에 앞세우기 시작한 것은 수백만 년의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최근의 일다. 약 1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섹스는 사랑보다 먼저였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이십세기 초반의 인간들도 결혼 전까지는 상대방의 눈이 하나인지 둘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결혼식을 치른 후에야 자기가 사랑해야 할 대상의 이목구비를 분명히 식별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지금도 적지 않은 수의 부부들은 제주도의 특급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자마자 이혼을 결심한다. 어떤 남자들은 신부의 순결을 의심하고 또 어떤 여자들은 신랑의 성아랑은>엘레베이터에>나는> |
|
김영하 작가는 참 좋아하지만 사실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던 차 우연히 골라서 읽게 되었던 <아랑은 왜> 첫 챕터를 읽고 ???? 하고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었다. '김영하는 왜?' 정도로 요약되는 물음표들이었을까.
새롭고 그래서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멈칫하게 했다.
김영하의 이야기들은 읽을 때마다 드는 느낌이 있다. 이 사람, 참 똑똑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과 이 사람, 결국은 마음 속에 계획이 있었던 거로구나. 하는 느낌.
<아랑은 왜>를 시작할 때의 물음표들도 결국은 길을 돌아 이런 느낌들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저기 흩어졌던 생각들이 점점이 만나 하나의 물음표에서 마감된다.
|
| 김영하의 '아랑은 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아주 훌륭한 소설집입니다. 단편 하나하나마다 중독성 강한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강한 흡입력을 갖춘 단편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몇 안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더군요. 그게 1996년입니다. 그는 1968년생입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작가의 글을, 그것두 감탄해 가면서 읽는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물론 질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을 100배쯤 좋아하는 저로써는 기대감으로 흥분됩니다. 앞으로 그는 저랑 동시대를 살면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쓰겠지요. {아랑은 왜}는 아주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익히 보여주었던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처음부터 독자는 작가가 던진 미끼를 덥썩 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라고. 소설 쓰는 것은 별 게 아니라고' '민담이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전혀 다른 이야기로 전해지고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개입하듯이.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인심좋게 독자를 끼워주지만 그를 따라가는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부터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봅니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맥이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한거니까요. 영화를 볼 때 저는 다음 장면과 마지막 결말이 어떻게 날 것인가를 보면서 동시진행형으로 상상하곤 합니다. 사소한 것을 클로즈업 시켜줄 때마다 아 저게 뭔가 복선이 되겠구나 하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지요. 그런데 책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결말을 상상하기 보다는 그 상황 자체를 상상하게 됩니다. 집에 대한 묘사가 나오면 그 집을 상상하게 되고,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나오면 그 자체를 떠올리게 됩니다. 작가가 아무리 나랑 같이 다음을 상상해 볼까요?라고 말해도 그게 잘 안됩니다. 결국 저는 이렇게 항복하고 맙니다. '그래 소설은 아무나 쓰는게 아니야'라고. |
| 많은 신문 기사들이 소설에 대해 아랑이야기를 재구성 했다느니 새로운 형식을 취했다느니의 말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재미는 287페이지에 있다. 이 페이지는 도움을 받은 책과 논문을 적은 곳인데 맨 아래에 있는 한 문장은 나에게 식스 센스와 매트릭스에서 느꼈던 충격을 주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 글을 볼 것 같아서 그 문장을 쓰지는 못하겠다. 마치 영화의 결과를 모두 알려 주는 것 같아서... 하지만 그 문장은 소설을 읽는 내내 사실이라고 믿었 던 것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느낌이 기본 으로 별이 3개 있는 평가점수 항목을 건드려 별 다섯 개로 만들게 했다. 분명히 소설 속에서도 '이것은 소설이다'라고 말해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 나만 그랬을까? 조선왕조 실록과 백과사전이 등장하는 소설의 처음 부분은 이 책 이 소설책인지도 의심하게 했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 이 책은 분명히 소설책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어디까지가 소설인지는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