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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성과 도덕성 시비에 내치마저 흔들리다-광해군의 몰락
"정통성과 도덕성 시비에 내치마저 흔들리다-광해군의 몰락" 내용보기
문명이 발달하고, 민주화 된 사회일수록권력을 행사하는 데 가장 큰 기반이 되는 것은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에서 나온다고할 수 있다.신권이 강했던  조선왕조 역시나 왕의정통성은 왕의 권위를 지키는데 상당히중요한 작용을 했다.후사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명종이 서른 넷이란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보위를 이어 받은 것은 중종의 7번째 왕자덕흥군의 3남 하성군 즉 선조였다.명종이
"정통성과 도덕성 시비에 내치마저 흔들리다-광해군의 몰락" 내용보기

문명이 발달하고, 민주화 된 사회일수록
권력을 행사하는 데 가장 큰 기반이 되는 것은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신권이 강했던  조선왕조 역시나 왕의
정통성은 왕의 권위를 지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후사를 이을 왕자가 없었던
명종이 서른 넷이란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보위를 이어 받은 것은 중종의 7번째 왕자
덕흥군의 3남 하성군 즉 선조였다.
명종이 순회세자를 잃은 뒤 더 이상의 왕자가
태어나지 않아 직계가 아닌 방계로 왕위가
승계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선조는 나이
열여섯에 왕이 된 이래, 42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그런데 선조 역시나 말년에 왕위를 두고,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영창대군와 이미 세자로
책봉했던 광해군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선조는 자신이 적통의 왕이
아니었다는 약점을 의식해서 적자인 영창을 세자로
옹립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런 선조의 태도는 그 의도와는 달리  조정이
극심한 분열에 빠지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폐모살제(廢母殺弟)  라는 패륜의 길에 들어서고,
서인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씨앗을 뿌린 셈이 됐다.

'조선의 정쟁3- 아버지와 아들, 남인과 북인'편은
선조와 광해군의 갈등과 광해군이 내치에  실패하면서,
반정을 불러오게 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광해군은 평화시였다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입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선조가 의주쪽으로
몽진을 하게 되면서 분조를 하게 됐고,
유사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 것이었다. 광해군이  형 임해군을 제치고 세자가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 뒤  전란이 수습되고, 40대에 선조가 중전을 잃은
뒤에 일어났다. 선조가 김제남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면서
광해군의 입지가 불안해진 것이었다.
새 왕비가 왕자를 낳자  광해군을 왕자에서폐하고, 새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유영경같은 인물들이 생기면서, 공론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광해군이 명나라로부터 세자 고명을 받지 못한 것도 문제가
되면서, 세자문제는 민감한 현안이 됐던 것이다. 세자 문제는
다시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들이 다시 광해를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을 옹호하는 소북파로 나뉘는 계기가 됐다.

결국 선조는 영창대군이 두살 밖에 되지 않아 광해군에게 양위를
하고 승하했지만, 형제를 죽여야 하는 상황은 이미 피할 수 없었다.
영창대군이 살아있는 한 안심할 수 없었던 대북파들이 영창을 지지했던
소북파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들 대북파들은 강경론을 펼치며, 광해군을 압박해갔고, 그렇게 자신을
지지해준 신하들의 압력에 광해군은 형 임해군과 이복 아우 영창대군을
유배에 처하는 명하게 된다. 그리고 인목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속성은 두 형제를  유배지에서
그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임해와 영창 모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게 됐다. 이렇게 피비린내라는
결과에,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당시 성리학의 윤리에선 용납할
수 없는 엄청난 패륜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 선택으로  광해군은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그의
내치 또한 흔들렸다. 광해군의 외교책은 지금은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존명배청(尊明背淸)하지 않고,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를 견지한
그의 현실적인 외교 또한  반정의 빌미가 돼버렸다.
이후 김류, 이질등 서인세력들은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광해군을
폐하는 반정을  도모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가 빚어지면서 사대부들을 사분오열할 수 밖에 없었고,
인목대비 폐모를 위해 벌어졌던 일들은 조정의 행정력을 소모시키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들은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폐모를 추진하면서, 
문무백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의견을 말하는 수의를 열었는가하면 연일
상소를 올림으로써, 광해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의 내치도 흔들릴 수 밖에 없었고, 북인들의 강경 일변도의
태도는, 정국을 경색으로 몰고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폐모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있었다. 이덕형이나,
이항복등이 상소를 올림으로써  사대부 정신을 발휘했다.
선조와 광해군 시기에는 빼어난 인물들이 많았지만 이런  정국에서 그들의
능력과 기상은 제대로 기용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 영민한 인재들은 어느 편이든 서야 하는 입장으로 내몰
렸고, 이렇게 조정의 신하들이 분열하고 정국에 실망한 나머지 조정을 떠나는
사이,북인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렇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게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모하고 서궁에
유폐했던 패착은 결국 반정이란 부메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광해군의 몰락은 도덕성을 상실함으로써 자초한 측면이 컸다.













YES마니아 : 로얄 e****0 2011.10.18. 신고 공감 8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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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과 북인(신봉승/동방미디어)
"남인과 북인(신봉승/동방미디어) " 내용보기
┼조선의 정쟁...┼ 선조 치하에 있었던 그 유명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 두 가지 전쟁 속에서 조정에는 정파싸움이 여전하였지만 왕실에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로 선조의 후계자 문제. 임진왜란 당시 여러 대신들의 의견으로 세자에 광해군이 임명되었지만 선조는 별로 탐탁해 하지 않았으며 명나라 또한 첫째인 임해군 대신 둘째인 광해군이 세자이라며 세자로 인정을 해주
"남인과 북인(신봉승/동방미디어) " 내용보기
┼조선의 정쟁...┼ 선조 치하에 있었던 그 유명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 두 가지 전쟁 속에서 조정에는 정파싸움이 여전하였지만 왕실에는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로 선조의 후계자 문제. 임진왜란 당시 여러 대신들의 의견으로 세자에 광해군이 임명되었지만 선조는 별로 탐탁해 하지 않았으며 명나라 또한 첫째인 임해군 대신 둘째인 광해군이 세자이라며 세자로 인정을 해주지 않았다. 이 것을 갖고 선조는 항상 광해군을 괴롭혔다. 수많은 변덕을 부리면서 광해군에게 애정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마 광해군이 폭군이 된 책임은 선조에게 있을 듯 하다.!!!!!!!!!!!!쟁점!!!!!!!!!!!!※선조는 변덕쟁이인가?- 한마디로 말하여 선조는 변덕쟁이가 맞다. 왜 변덕쟁이라는 호칭이 선조에게 따른 것인가? 선조는 광해군에게 뿐만 아니라 대신들에게도 변덕을 써먹었다. 그 때문에 신하들은 선조가 허락하거나 반대한 일에 대해서도 그 때 그 때 상황을 본 뒤 변덕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하는 난감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변덕인지 모르고 사실대로 받아드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은 신하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해군에게 양위를 하겠다느니 하는 말도 광해군에게는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이 것이 다 선조의 변덕임을 알기에 극구 사양을 한다. 역시나 선조는 흡족해 하고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변덕이 아니고 무엇인가?※선조는 왜 다른 왕자가 아닌 광해군에게 양위하였는가?- 사실 선조는 세자를 광해군이 아닌 다른 왕자에게 물려주려는 생각도 했었다. 특히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은 뒤부터는 그 생각이 확실해졌다. 하지만 여러 신하들이 광해군을 지지하였고 영창대군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크길 기다리다가 결국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자연스레 세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광해군은 폭군인가? 외교의 천재인가?- 광해군은 그 당시 조선 밖의 정세에 능통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명나라를 누르고 등장한 청나라와의 외교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나라와의 외교를 시도한 광해군이 한동안 즉위하였다면 인조 시대의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만용//
k*****e 2006.05.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