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시를 아끼는 책이다. 이 책 역시 하나의 비평서이지만, 여타 비평이 시를 해석하거나 해명하려고 하고, 또는 설명하려고 한데 반하여 이 책은 시 자체의 존재를 그것대로 받아들이려는 비평을 보여준다. 그가 정신분석 비평을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정신분석 비평이 시 배후에 있는 작가의 심층심리를 드러내려고 하고 그리하여 시의 존재를 심리로 환원하려는 경향에 반대하여 시가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 자체의 존재성에 천착하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는 것이다. 시가 드러낸 이미지의 존재는 단순히 존재하고만 있지 않다. 그것은 움직인다.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이미지는 시인 개인사에 한정되어 산출된 이미지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획득하게 된 원초적 이미지의 창조적 발견이다. 원초적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고정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이미지는 시인의 창조적 발견 속에 깃든다. 그래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인은 또한 원초적 이미지를 실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새로운 원초적 이미지에 끌려 들어가고, 그 이미지와 더불어 살게 된다. 이미지는 반영적인 상이거나 비유가 아니라 자체로서 존재하며 사람을 변형시키고 자신도 그럼으로써 변형된다.
바슐라르의 이 이미지론은, 시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그 존재가 우리 삶을 다시 살게 해준다는 시를 위한 찬가이다. 바슐라르의 이러한 이미지론은 그의 이 책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그 이미지론을 이미지의 현상학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것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이다.(86-87면) 이미지는 사상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그것을 어떻게 생각으로 다 파악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의 시구를 생각을 한 후 쓸까? 시인은 갑자기 벼락처럼 다친 언어에 놀라며 노트에 재빨리 쓴다. 독자도 역시 망치처럼 내리치는 시구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도래한 그 사건에 어쩔 줄 모르고 자신의 존재를 내맡긴다. 이를 바슐라르는 '울림'이라고 표현한다.(90면) ... 바슐라르는 이 울림의 현상 자체가 시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현장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 현장을 잃어버리는 비평이란 시의 본성에 접근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바슐라르는 이 책에서 '행복한 공간의 이미지'를 연구하려 한다.(108면) 그 공간의 이미지는 상상력으로 파악되는 공간이어서 기하학자들의 공간, 숙고의 대상으로서의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물론 우리들이 들어가 사는 공간의 실체성 속에서가 아니라- 공간이다. 그 공간은 새롭게 하는 이미지들에 의해 풍요로워지는, 상상력의 활동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가 문학작품에서 끌어올린 공간의 이미지들은 다채롭다. 집, 서랍과 상자와 장롱, 새집, 조개껍질, 구석, 세미와 무한, 그리고 이 공간의 상상력을 통해 안과 밖의 변증법을 사유하며 원의 이미지의 존재 자체를 생각해본다.
그가 목록화한 공간 이미지 항들은 각각이 또한 다채로운 이미지 군을 가진다. 그 이미지 군은 각기 섬세한 차이를 가지면서 영혼의 다른 울림들을 마련한다. 집은 어떤 이미지인가? 참된 안락과 보호를 가져온다. 그 안락과 보호는 내밀한 몽상을 지속시켜준다는 의미에서의 안락과 보호이다. 그래서 집은 고독의 공간이다. 이때 몽상은 추억으로 인도하고 더 나아가 기억을 넘어선 원초적인 상태, 세계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 상태에 있게 해준다. 이때 시간성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前인간적인 휴식의 상태'(123)를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집의 변용체들인 새로운 상상적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길도 역시 집의 변용 이미지다. 집 속의 지하실과 옥탑방은 우리의 내밀성 속에 잠겨 있는 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다. 공포와 상승의 이미지들. 이 역시 원초적 이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집에 대한 몽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제2장 집과 세계를 보면 집의 이미지가 결코 정태적이지 않으며 다양한 이미지군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술라르의 아름다운 문체를 향유하면서 말이다.
다른 이미지군들, 서랍이나 상자, 장롱, 새집, 조개껍질 역시 집 이미지의 다양한 변용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지만 자신만의 형태 속에서 집이 가리키는 내밀성과 고독을 여러 가지로 드러내준다. 비밀들을 담고 있는 집의 가재도구들, 새가 몸으로 만드는 새집, 그리고 그 속에서의 안락과 평화, 연약한 살이 만드는 조개껍질, 이들은 원초적 이미지는 시에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생성하도록 만든다. 아니, 그 새집이나 조개껍질은 이미 하나의 경이이다. 이 경이에 촉발되어서 시인들은 상상하고 꿈꾸는 것이다.
이런 작은 사물들의 이미지들이 경이로움을 던져줄 때, 바슐라르같은 현상학자는 바로 세미한 것에서 무한한 것을 몽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구체적인 공간으로서는 구석이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구석은 잊혀지고 쓸모 없고 자잘한 것들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공간이다. 이때는 세계가 지워지면서 추억이 펼쳐지는 내밀성이 다시 살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내밀성은 아주 작은 것에도 애정을 품고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래서 작은 것 속에서 더 무한한 상상력이 뻗쳐나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7장에서 바슐라르는 세미화와 관련하여 창조된 상상적 이미지들을 추적하여 풍부한 자료들을 모아놓는다. 엄지 동자와 같은 동화에서부터 돋보기, 식물, 유리의 흠, 그리고 소리의 세미화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고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8장을 넘겨보면 세미화의 이미지는 큼과의 관련성으로 그리고 세미화의 큼은 내밀의 무한성으로 현상학은 나아가고, 이어 숲, 팽창의 감각, 지평선, 사막, 평원의 이미지들을 여행한다. 내밀의 무한성, 우리는 이 이미지들의 역설에서 안과 밖이 경계 지워지지 않고 메비우스의 띠처럼 엮이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안팎의 변증법이 완전성을 가지게 될 때 원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는 것을 이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배우게 된다.
바슐라르의 시학은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말했듯이 행복의 시학이다. 그의 이미지들은 고통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쉴 수 있는 이미지들이다. 그는 시를 읽으며 그 속에 등장하는 빛나는 이미지들을 같이 살고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럼으로서 시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즉, 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의 시학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 [인상깊은구절]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