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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폭력’은 이제 사회에서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거리를 보아도, 멀리서 사회를 보아도, 겉보기에는 정말 그래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책은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이며 특히 “예루살렘의 백묵원” 부분은 백미이다. 여러 종교가 공존해도 그 사이의 갈등이 거의 없는 우리로서는 중동의 끊이지 않는 분쟁이 사실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이슈는 중요한 국제 문제이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도 반드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러 복합적인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악화되어 가는지, 각자는 순수성 및 진정성을 강조하지만, 어떤 모순과 아이러니가 존재하는지, 유수의 사상가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분석하는가 등등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챕터에서 이런 사항들을 가장 두드러지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이슬람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말과 글이라고 여겨질 것들이 예루살렘의 정치가의 언행이라는 것을 보여준 내용이 명쾌하다. 왜냐하면 이성과 논리라는 것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 적대적인 상대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단적으로 부각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저승을 움직이리라: 지하세계“라는 소챕터도 아주 강렬한 지적인 자극를 선사한다. 핵심은 사회와 문명, 혹은 공동체에는 “외설적인 지하 영역”이라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통찰이 빛나는 개념인데, 이 폭력성이 내포된 실재가 한국 사회, 더 나아가 나 자신의 무의식에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성찰을 유도해준다. 또한 한국 사회가 점점 배타적, 적대적인 구조화로 빠져들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폭압적인 것인지를 상기시켜준다. 게다가 그것이 ‘지하, 암흑’ 등으로 비유되듯이, 우회적이고 위장적이어서 얼마나 인지하기조차 힘든 것인지도 알려준다.
<이 글은 문화충전 200%를 통해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문화충전 #서평이벤트 #폭력6가지우회적성찰 #폭력 #6가지우회적성찰 #21세기문화원 #슬라보예지젝 #이현우 #김희진 #정일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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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문화원에서 펴내는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에 집중하여 독서하는 마음은 지금의 어지러운 세계정세 소식과도 맞물려 '폭력'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보는 성찰을 해보게 도와줍니다. 그리고 이 책의 ''6가지 우회적 성찰''이라는 부제처럼, 6가지로 알아보는 폭력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부여해준다는 생각에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재출간으로 십수년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변화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게 됩니다. 폭력의 시초가 과연 어떻게 되는가, 다양한 불안과 혐오의 요인들을 가지는 이 시대에 폭력은 모르는 곳에서 시작된다면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폭력의 구조는 어떠한가를 심도있게 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합니다. 원서의 폭력에 대한 개념을 잘 파악하고 우회적인 성찰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이번 개정판이 더 인상적인 것은, 폭력에 대해 울상 짓기 보다는 이러한 폭력의 비참함을 가져다주는 폭력의 구조에 대해 직시해야 하다고 그렇게 만들어주는 책의 내용에 있다고 봅니다. 폭력에 대한 마주침이 불편하지만 그것에 대해 직시할 에너지를 주는 책이 된다고 단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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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은 6가지 주제들을 힘있게 풀어나가며 동시에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할 수 있고 상황에 절묘하게 맞는 우화를 가져와 그래, 이거지! 감탄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온게 2008년이라는데 2026년에 읽어도 세계 곳곳에서 이슈가 되는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그 이면의 정치적인 움직임을 한쪽의 시선으로 보기 보다는 객관적으로 기준을 두어 사리 판단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6가지의 우회적 성찰 속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 공포의 정치, 언어의 폭력, 테러리즘이 가진 원한, 무신론이라는 익명의 종교, 정치의 문화화, 신적 폭력 등의 소주제들은 인간이기에 일정 교육을 거쳐 사람답게 잘 살고자 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읽고 생각해보아야 할 과제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극단의 이기주의와 퇴보하는 윤리 의식, 폭력적 정치에 열광하고 결집해 지지하는 행태를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을 통해 팩트 체크할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의 진짜 반대말은 이타주의, 즉 공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부러움과 원한이고, 바로 이 부러움과 원한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나는 나의 이익에 반反하여 행동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을 수반하고 라캉의 '타자의 욕망' 개념도 함께 맞물려 부러움과 원망이라는 감정을 연계해 짚어보는 시작이 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릇된 신념 하나가 망상인줄 모르는, 스스로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작태는 비단 처참한 상흔을 남긴 테러범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아 공감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의 원천을 헤겔, 마르크스, 라캉의 사상으로 확장해 논리로 풀어낸 이 책 <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과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폭력 #폭력6가지우회적성찰 #슬라보예지젝 #21세기문화원 #문화충전 #문화충전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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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는 절판되었다가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 개정판 옮긴이의 후기에서, 20년 전에 쓰인 이 책이 던지는 ‘폭력’이라는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며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동물의 세상에서 ‘폭력’이라는 화두가 사라지게 되는 날이 올까? 오히려 이 화두는 갈수록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가시적인 폭력(지젝은 이것을 ‘주관적 폭력’이라 명명했다)을 당하는 사람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우리는 국가권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향해 공권력이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다짜고짜 불심검문을 당해서 몽둥이로 두드려 맞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을 때 신체를 훼손시키는 고문을 받을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종교를 가졌다고 해서 나를 공격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요즘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두드려 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회사에서 상관들이 아랫사람들 욕설을 사용해가며 모욕하거나 감정이 격해졌다고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처럼 명확히 식별 가능한 폭력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 사회 역시 분노 사회다. 우리를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게 만드는것은 우리가 구조적 폭력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폭력은 주관적 폭력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무엇이 시위대로 하여금 화염병을 던지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테러 단체가 비행기를 납치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외국인 노동자를 멸칭으로 부르는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이민자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국경에 벽을 세우는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2008년 금융위기를 가져온 것일까. 무엇이 빌 게이츠가 어마어마한 기부를 하게끔 만든 것일까. 무엇이 가자 지구를 불태우도록 만든 것일까. 주관적 폭력 아래 은폐된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는 손쉬운 분노를 자아내는 주관적 폭력 아래 숨겨진 진짜 폭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지젝이 제시하는 폭력의 삼각 구도 - 주관적 폭력,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 - 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은 무척 유의미하다. 우리는 압도적이고 자극적이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을 직접 다루는 대신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을 일별하기 위해 잠시 물러서야 한다. 지젝이 설명하는 폭력으로 향하는 여섯 가지 우회로를 모두 가보아야 한다. 우리를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먼저 지젝이 말하는 폭력은 총 세 가지로 방금 언급한 주관적 폭력이 그 하나고 나머지 두 개는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다. 지젝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묶어 ‘객관적 폭력’이라 말한다. 먼저 상징적 폭력은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폭력이다. 온갖 멸칭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상징적 폭력의 예시를 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징적 폭력은 습관적인 언어 사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사회적 지배 관계나 선동적인 언어 속에서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형태의 폭력이 언어 자체에 들어 있고, 언어가 의미 세계를 대상에 부과할 때 따라붙는 것이다. 마지막 구조적 폭력은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결과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에는 근본적인 구조적 폭력이 존재하다. 지젝에 따르면 이 폭력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어떠한 직접적인 사회-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구조적 폭력에 둔감하다. 나 역시 20대 시절만 해도 자기계발서나 자기위로 서적을 따위를 읽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대게 구조적 폭력은 하나도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자연스레 멀어졌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흘린 땀과 눈물, 누군가가 광장에서 쏟아낸 피와 내장들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은 채, 너의 행복과 너의 감정만 돌보라고 말하는 책들은 나를 끝없이 생각에 빠트린다. 이 책의 출간된 시대적 역사적 정치 경제적 배경에는 어떠한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이 책은 어떠한 구조적 폭력을 강화하고 기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우리 집 위에 드론 폭탄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나는 출신 국가와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에게 가시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은 길거리에서 거의 보지 못한다.(구조적 폭력은 서로 가하고 있겠지만) 대신 은퇴 이후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은 가끔 한다. 이 년 전부터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포함한 일체의 동영상을 시청하지 않는다. 오로지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실린 챕터 중 구조적 폭력을 다룬 <1장 SOS 폭력>이 현재의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느꼈다. 왜냐면 지금의 한국 사회는 무척 인상 깊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7,000이라는 숫자가 은폐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은 무엇일까. 삼성전자 노사가 성과급 배분을 놓고 노사 협상에 들어갔지만 서로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정유회사 4사의 영업이익이 950억에서 5조 9635억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다음 달에 지방 선거를 앞두고 역시나 막말이 넘쳐흐른다. 나는 지젝의 『폭력』을 읽으며 인식의 도구를 훈련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폭력, 상징적 폭력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이 책에서 지젝이 소환하는 온갖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이론과 개념을 내 것처럼 사용하고 싶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에게 삶의 모든 것은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영역이라 명령한다(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일단 본인의 탓을 한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고 그래서 나의 능력이 미천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을 책임감 있는 태도라 말한다. 능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조적 폭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설계해 놓은 세상에서 일과 자율성의 노예가 되어 삶을 일에 통째로 갖다 받친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에서 일터를 구한 운이 좋은 몇몇들은 ‘경쟁’에서 성공하고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는 중간계급으로 도약한다. 그러고는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 되어 간다. 1장에서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로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등이 등장한다. 이 책이 20여 년 전쯤 출간되었으니 나는 여기에 샘 올트만, 일론 머스크, 젠슨 황 등의 이름들을 추가하여 읽었다. 우리가 온갖 매체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폭력적인 이미지 아래 도대체 어떠한 구조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불의에 가득 찬 온갖 사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는 손쉬운 분노에 휩싸인다. 우리는 무엇에 의해 이 분노가 촉발된 것인지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상징적 폭력을 가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때 우리는 지젝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바로 이 시점에 이 책 『폭력』을 읽어야 한다. 지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칫하면 주관적 폭력의 비이성적 폭발처럼 보이는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한발 물러서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 책에서 전 지구적 문제를 다루면서 독자에게 말을 건다. 인도주의적 위기 사태를 보면 즉각 참여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지만 일단 기다리면서 두고 보라고 말이다. 왜냐면 우리가 느끼는 급박함과 분노는 어쩌면 가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주관적 폭력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폭력, 즉 객관적 폭력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한발 물러서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독자들은 읽고 읽고 또 읽기로 한다. * 출판사 제공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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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책 제목만 봤을 때 폭력의 역사나 정치적 테러를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펼치고 읽다보면 곧, 우리가 뉴스에서 쉽게 소비하는 총격, 폭동, 전쟁 같은 “가시적 폭력”이 아닌, 오히려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폭력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언어와 제도,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스며 있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흔히 '폭력'이라 정의하는 개념의 지평을 완전히 뒤흔드는 도발적인 책이다. ( 사실 지젝의 책에서 도발적이지 않은 책이 있던가.. )
지젝은 이 책의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sideways)' 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는 서문에서부터 우리가 뉴스나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끔찍한 학살, 테러, 범죄와 같은 이른바 '주관적 폭력'에만 매몰될 때, 정작 그 비극을 가능케 하는 더 거대한 힘을 놓치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책에 대해 '도덕적 감상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냉혹한 찬물' 이라던 미디어의 한줄평을 먼저 옮겨본다. 서문에서 저자는 폭력을 세가지 층위로 분류한다. 먼저 언급한 주관적Subjective 폭력에 더하여 상징적Symbolic 폭력, 그리고 구조적Systemic 폭력으로 말이다. 2장에서 이야기하는 '언어적.인종적 폭력'과 5장의 이야기는 상징적 폭력으로 읽혔다.3장의 자선적 자본주의와 4장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구조적 폭력으로 묶어본다. ( 개인적 의견이다.) 지젝은 구조적 폭력을 가장 강조하고 있는 듯 했지만, 내게는 상징적 폭력이 먼저 다가왔다. 지젝은 2장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라는 제목을 선택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타자와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관용(Tolerance)'이라는 미명 하에 우리는 타인의 문화나 고통에 개입하지 않으려 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타자를 비인격화하는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이 된다.
"더 많은 의사소통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더 많은 갈등을 뜻한다. (p109, 페터 슬로터다이크)" 라는 지젝이 언급한 문장에 공감해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기'라는 태도에 더해 '서로 비켜서기'라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p109)". 일단 끄덕끄덕. 이야기는 언어 그 자체에 내재된 폭력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기호 속에 이미 타자를 규정하고 배제하는 힘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언어가 평화의 도구가 아니라 타자를 특정 범주에 가두는 첫 번째 폭력의 현장' 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의 “정상성 강박” 에 대한 여러 키워드들, 이를테면 '좋은' 대학, '좋은' 회사, '자가' 아파트 등은 지젝이 말하는 상징적 폭력과 굉장히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폭력이 총이나 주먹이 아니라 “너는 뒤처지면 안 된다”는 언어로 작동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지점.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풀어가면서 많은 작품들을 소환하고 있다. 2장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의 예를 들자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나 예이츠의 시구, 그리고 닐 게이먼의 『샌드맨』의 문학작품은 물론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크시의 <희생> 등을 넘나든다. 지젝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라캉과 들뢰즈 또한 빠지지 않음은 물론이다. 헤겔과 칸트, 그리고 하이데거도 거든다. ( 지적 도전의식을 불태우게 하는지라 밑줄 인덱스를 빼곡하게 붙이며 여러 번 읽어야 했다. ) 구조적 폭력 측면에서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내부의 폭력을 해부한 작업”으로, 지젝은 폭력을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계의 작동 방식으로 읽어낸다. 지젝은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 같은 인물들이 한편으로는 시스템적 폭력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선을 통해 그 피해를 복구하려 드는 행위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자선적 자본주의(Liberal Communist)' 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지젝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자선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적 폭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마취제'에 불과하다. 과거 중세 시대에 죄를 짓고 면죄부를 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 지점은 우리나라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노동 구조는 유지하면서 ‘상생 광고’를 하는 기업, 장시간 노동 문화는 남아 있는데 웰빙 캠페인을 진행하는 사례 등 우리는 한번쯤 "왜 이런 '치유'가 계속 필요할 정도로 시스템은 사람들을 소진시키는가?" 란 질문을 던져보지 않았던가. 책의 말미에 미주만 15페이지, 참고문헌만 5페이지다! 가나다 순으로 찾아보기도 제공되어 있어, 읽다가 떠오르는 키워드 중심으로 다시 찾아보기에도 수월하다. ( 찾아보기를 자주 확인하다 보니 발터 벤야민만 14곳에서, 니체는 11곳에서, 라캉은 25 곳에서 언급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소소한 재미 )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직접 정리해주는(!) 교훈 세 가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2008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난민 문제, 혐오 정치, 금융 위기 이후의 불평등, 알고리즘과 미디어가 생산하는 언어적 폭력까지 지젝이 말했던 “보이지 않는 폭력”은 오히려 지금 더 일상적인 것이 된 듯 해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 소비하는 뉴스, 무심코 받아들이는 경제 시스템 역시 폭력의 일부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그는 우리가 '선량한 시민'으로서 누리는 일상이 사실 얼마나 거대한 시스템적 폭력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를 직시하게 한다. 대중문화, 영화, 정치적 사건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지젝의 서술 방식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민낯'을 보게 만든다. 결국 뉴스에서 만나는 폭력 사건이 더 이상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배경음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다소 불편하다. (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책일지도.. ) 지젝의 이런 '측면에서의 성찰'은 우리가 마주한 비극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렌즈가 되어준다. 그러니 독서 토론을 해보고 싶은 책으로 '찜콩'해두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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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문화원 리뷰를 쓰기 앞서 벅찬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찾다가 내 부족한 언어의 한계가 부끄러울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 선생님 (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현으로 나는 위대한 지성을 '선생님'이라 부른다)과 동시대를 살다니, 이건 내 삶의 큰 자랑이자 신의 축복이다. “폭력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처럼 느껴졌다. 과연 우리는 폭력이 일어나는 곳을 모르는지, 지젝이 말하는 폭력의 구조란 무엇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펼친 책이다. 무려 15년 만에 새 옷을 입고 태어난 지젝 사유의 결정판!! 전쟁과 혐오, 정치적 양극화, 온라인 집단 린치와 불안이 일상이 된 폭력의 시대에 지젝은 단순히 누가 폭력을 행사했는지 묻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언어, 그리고 우리가 무심코 유지하는 시스템 자체를 의심한다. 부제 우회적 성찰이라는 표현처럼, 그는 폭력을 정면에서만 바라보지 않는다.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때 오히려 더 본질적인 장면들이 드러나지 않는가? 원서로 말하면 무려 2008년에 쓴 이 책은 18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현재적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더 연결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혐오와 공포, 분노와 불안이 끝없이 증폭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젝은 이미 오래전 이 시대의 균열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특히 목차를 따라가다 보면 폭력이라는 현상을 통해 현대 사회 전체를 해부하려는 지젝의 의도를 느낄 수 있다. 1부에서 지젝은 우리가 흔히 폭력이라고 부르는 사건들 뒤에 숨어 있는 구조를 이야기한다. 그는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구분한다.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는 장면은 비난받지만, 경쟁과 빈곤, 차별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시스템은 오히려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 부분 읽다가 문득, 우리 사회의 끝없는 생존 경쟁이 떠올랐다. 청년 세대의 불안, 혐오 정치, 타인의 실패를 관망하는 문화는 어떤가? 이는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결과는 아닌지? 책 초반에 2006년 8월 6일 영국의 자위 마라톤이 언급된다. 찾아보니 이는 실제로 열린 퍼포먼스성 행사라고 한다. 참가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위를 하며 성에 대한 금기와 보수적 규범에 저항한다는 취지의 이벤트였다. 일부는 성 건강 캠페인이나 기부 행사 성격도 띠고 있었다고 한다. 지젝이 이 사례를 가져오는 이유는 뭘까? 단순히 선정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현대 사회가 겉으로는 점점 더 자유롭고 쾌락에 개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쾌락조차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규율 안에서 이용된다고 본다. 자유로운 쾌락조차 이벤트화·상품화되면서 결국 시스템 안에 흡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지젝의 핵심 개념인 ‘잉여 향유’와도 연결된다. 인간은 단순히 즐거움을 원하는 게 아니라, “즐겨야 한다"라는 압박 속에서 피로와 강박을 느낀다. SNS 시대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행복과 자유, 자기표현을 끊임없이 전시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지치곤 한다. 지젝은 자위 마라톤 사례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역설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사용한다. 가장 사적인 행위조차 공적 퍼포먼스와 소비의 대상으로 변하는 시대.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해방”이라고 느끼지만 동시에 또 다른 규율 안으로 들어간다는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젝이 폭력을 꼭 피 흘리는 장면에서만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욕망과 쾌락을 조직하는 방식 자체에도 보이지 않는 폭력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슬라보예 지젝을 사랑하고 그의 저작을 읽을 때마다 살아 있는 역동성을 느끼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이론만 설파하는 철학자가 아니다. 조르주 바타유, 테오도어 아도르노, 알랭 바디우 같은 사상가들뿐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문화, 사건과 뉴스까지 끌어와 끊임없이 충돌시키고 뒤집는다. 때로는 날카롭게 비판하고, 때로는 그들의 사유 위에 자신의 철학을 덧입히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주는 느낌. 읽다가 이해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그 부분을 캡처해 검색하고, 언급된 철학자와 영화,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또 다른 사유의 세계가 열린다. 하나의 문장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또 다른 질문으로 끝없이 번져나가는 쾌감은 읽어본 분들만 아실 듯. 2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두려워하라! 」에서는 지젝 특유의 불안한 인간관이 드러난다. 그는 타인을 단순히 이해와 공감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서로에게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언어의 폭력”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말이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이미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sns 시대를 살며 우리는 타인을 쉽게 조롱하고 낙인찍지 않는가? 누군가는 단지 말 몇 마디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삭제된다. 폭력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언어 속에도 깊게 스며 있다는 사실... 섬뜩하다.
3부에서는 테러와 분노의 구조를 분석한다. 여기서 지젝은 단순히 “폭력은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폭발 직전의 상태로 내몰리는지를 묻는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한국 사회에서 반복되는 묻지 마 범죄나 극단적 분노 범죄가 떠올랐다. 물론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지젝은 사건 자체만 소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 배경의 구조를 보라고 요구하는데 정말 공감되는 말이다. 가해자의 악마성에 집착하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 씁쓸하다. 한 사람을 악마화하면 우리는 안도할 수 있다. 문제는 저 사람 개인에게만 있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인을 악마화할수록, 경쟁과 고립, 혐오와 불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는 오히려 보이지 않게 된다. 지젝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외면해온 세계의 균열 속에서 서서히 자라난다는 사실! 4부와 5부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건 ‘관용’에 대한 비판이었다. 우리는 관용을 좋은 가치라고 믿지만, 지젝은 현대 사회의 관용 담론이 사실은 정치적 문제를 문화 차이 문제로 축소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의 문화화”라는 표현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놀랍도록 잘 들어맞는다. 노동, 계급,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서로의 취향과 정체성만 이야기하는 사회. 갈등의 원인을 구조가 아니라 개인 감수성 문제로 돌리는 풍경은 너무 익숙하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 읽었던 《잉여 향유》 와 《지젝 비판적 독해》 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젝은 늘 인간 욕망의 모순을 파헤친다. 사람들은 평등과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혐오와 배제를 통해 쾌감을 얻는 아이러니! 그는 불편한 욕망을 끝까지 직시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에서 지젝은 발터 벤야민을 끌어오며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흔드는 폭력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단순한 복수도 아니고 국가 권력의 폭력도 아니다. 오히려 기존 질서 자체를 중단시키는 어떤 순간에 가깝다. 이 부분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동시에 왜 사람들이 체제 전체를 향해 분노하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혐오 정치, 알고리즘이 증폭시키는 분노, 온라인 린치, 불평등과 불안의 시대 속에서 지젝의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지금은 폭력이 너무 노골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더 위험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폭력에 관한 책이라기보다, 우리가 어떤 세계를 “정상”이라고 믿고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18년이 지난 지금 더 현재성을 지닌다. 폭력은 갑자기 터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긴 세계의 구조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다는 것. 내게 지젝은 지금 시대를 읽는 가장 독보적인 렌즈이자 좌표다. 지젝은 묻는다. 정말 우리가 봐야 할 폭력은 저기 바깥에만 있는가. 아니면 이미 우리의 언어와 일상, 욕망 속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는가. #슬라보예지젝 #폭력6가지우회적성찰 #지젝 #철학책추천 #인문학 #사회비평 #폭력의구조 #객관적폭력 #혐오사회 #한국사회 #철학서리뷰 #독서기록 #북리뷰 #책추천 #인문학추천 #아도르노 #바타유 #알랭바디우 #잉여향유 #지젝읽기 #사회구조 #폭력에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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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폭력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선명한 사건, 즉 누군가 주먹을 휘두르거나 테러가 발생하는 주관적 폭력으로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폭력: 6가지 우회적 성찰』(원제 Violence: Six Sideways Reflections) 은 다른 시선을 요구합니다. 지젝은 폭력의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비스듬히 바라볼 때, 오히려 우리 체제를 지탱하는 거대한 객관적·구조적 폭력을 선명히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소개가 필요 없는 인물입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현대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해부해 온 세계에서 가장 도발적인 지식인 중 한 명입니다.
2008년에 펴낸 Violence: Six Sideways Reflections가 2026년 한국어 전면 개역판으로 새롭게 출간됐습니다. Sideways—우회적으로, 비스듬히. 왜 지젝은 폭력을 정면으로 보지 않겠다고 선언할까요? 폭력을 정면으로만 응시할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지젝은 폭력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주관적 폭력, 우리가 일상적으로 폭력이라고 부르는 물리적 행위입니다. 둘째는 상징적 폭력으로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깊이 박혀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폭력입니다. 셋째는 구조적 폭력으로 경제·정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입니다. 뉴스를 보며 분개하는 테러나 범죄, 전쟁의 잔혹함은 주관적 폭력입니다. 그것은 사실 폭력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진짜 문제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구조적·상징적 폭력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주관적 폭력에 대한 분노 자체가 그 구조를 은폐하는 기제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폭력: 6가지 우회적 성찰』은 이 세 가지 방식의 폭력이 복잡하게 벌이는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폭력(주관적 폭력)은 이미 작동 중인 상징적·구조적 폭력의 표면적 증상입니다. 특히 관용과 이데올로기 이면에 숨은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이웃을 두려워하라'. 지젝은 여기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레비나스에게 이웃이란 "전혀 헤아릴 수 없는 타자로서, 무조건적인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숭고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젝은 이 헤아릴 수 없는 타자가 나와 소통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사물로서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순간, 레비나스의 아름다운 윤리는 무력해진다고 짚어줍니다.
즉, 타자가 더 이상 존중받는 대화 상대가 아니라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절대적 타자가 될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려워하며 거리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식의 무조건적인 환대와 사랑이 현실의 끔찍한 타자 앞에서는 불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부르고 분류하는 방식, 즉 언어의 폭력은 관용의 가면 뒤에 숨어 있습니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이 말하는 '열린 태도'는 사실 우리에게 무해한 타자만을 허용한다는 선언입니다. 나의 질서를 뒤흔드는 '진짜 타자' 앞에서 관용은 순식간에 혐오로 뒤집히고 맙니다. 결국 관용이란 타자가 철저히 우리를 닮아갈 때만 유효한 조건부 계약일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정책은 존중과 공존을 강조합니다. 공공기관 캠페인이나 교육에서도 다름을 인정하자는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방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관용이 실제로는 거리 유지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혼이주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정책은 적응과 관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계속 규정됩니다. 저도 그동안 타자에 대한 존중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불결하지 않으며, 위험하지 않은' 무해한 상태일 때만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가공된 타자만을 수용해 온 셈입니다. 이 책은 나를 둘러싼 가짜 관용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용 담론이 실제로는 정치·경제적 문제를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탈정치화 전략이라는 점에 공감합니다. 정치의 문화화라고 부르는 이 과정에서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문화적 차이의 갈등으로 위장됩니다. 관용은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지젝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사실 강요된 선택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체제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척하지만, 실상은 '올바른 답'을 고를 때만 그 자유를 승인합니다. 자비의 가면을 쓰고 자발적 복종을 설계하는 이 교묘한 메커니즘이야말로 지젝이 폭로하고자 하는 상징적·구조적 폭력의 정수입니다. 앞선 세 가지 폭력이 모두 동일한 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서로 다른 층위의 폭력이라면, 이 구조를 끊어낼 수 있을까요? 신적 폭력은 바로 그 질문을 위한 개념입니다. 폭력을 없애려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폭력의 형태만 바꾸고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신적 폭력은 질서의 작동방식을 끊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선(善)으로 여기지만, 지젝은 오히려 아무나 용서를 남발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영화 <도그빌>의 사례로 보여줍니다. 지젝은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니면서 타인의 죄를 너그럽게 사하여 줄 권리가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뽐내려는 권력 놀이일 뿐이라는 걸 짚어줍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용서냐 처벌이냐의 선택이 아닙니다. 지젝이 겨냥하는 것은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덕적·사회적 틀 자체입니다. 신적 폭력은 바로 그 틀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용서와 처벌이라는 익숙한 윤리적 좌표를 무력화시키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선과 악의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폭력을 사건이 아닌 구조이자 체제로 읽어내는 『폭력: 6가지 우회적 성찰』. 주관적 폭력 너머의 객관적 폭력을 분석하고, 언어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탐구하고,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위선을 파헤치고, 보편성 뒤에 숨은 권력을 분석하며 체제의 회로를 끊어내는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읽는 내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순과 깊게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겉으로 평온하고 치안이 좋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이 매끄러운 체제 뒤에는 플랫폼 노동자의 과로사나 청년 고독사 같은 구조적 폭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의 탈을 쓰고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기여하는 자유주의적 좌파의 위선을 꼬집은 지젝의 문장들이 비수처럼 꽂힙니다. 또한, 비극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해자 개인에게만 모든 분노를 쏟아붓는(주관적 폭력에 집중하는) 행위가 어쩌면 그 비극을 낳은 거대한 경제적·정치적 시스템(상징적·구조적 폭력)을 보지 않기 위한 회피가 아니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세상이 비극과 폭력으로 가득 찰 때, 성급하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요구에 응하지 말라는 지젝. 우리가 내놓는 대부분의 해결책은 기존의 폭력적인 시스템 안에서 허용된 방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짜 도덕의 사슬을 끊어내는 결단만이 진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젝의 질문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지젝이 제안하는 해결책은 성급한 행동이 아니라 침착한 사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은 시스템의 회로를 멈추게 하는 생각하기, 즉 사유 그 자체인 겁니다. 6가지 우회로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폭력이라는 단어의 진짜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폭력 #슬라보예지젝 #지젝 #Violence #우회적성찰 #철학책추천 #인문학 #정치철학 #비판적사유 #사회비판 #현대철학 #21세기문화원 #인디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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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무료로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 입니다
폭력 슬라보예 지젝 2026 21세기문화원
<슬라보예 지젝 - 폭력>은 폭력을 단순한 사건이 아닌 하나의 조건이자 구조로 재정의함으로써, 우리가 익숙하게 이해해 온 폭력 개념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문제적 저작이다. 이 책이 제기하는 핵심 문제의식은 명료하다. 우리는 과연 폭력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혹은 보이는 것만을 폭력으로 오인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폭력은 전쟁·테러·범죄와 같은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사건, 즉 ‘주관적 폭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지젝은 이러한 통념을 해체하며, 그러한 폭력이 오히려 더 근원적인 ‘객관적 폭력’을 은폐한다고 지적한다. 객관적 폭력은 다시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되며, 전자는 언어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에 스며들고, 후자는 경제·정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개념 정리를 넘어 폭력에 대한 인식 자체를 전환하도록 요구한다. 폭력은 특정 순간에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평화’라고 부르는 상태조차 구조적 폭력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국면일 수 있다는 통찰은,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근본적으로 흔든다. 이러한 이론적 틀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혐오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도 유효하게 작동한다. 예컨대 중국인에 대한 혐오 표현이나 물리적 공격은 단순히 개인의 일탈적 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겉으로는 주관적 폭력의 형태를 띠지만, 그 이면에는 불안과 경쟁, 배제의 논리가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과 타자를 낙인찍는 상징적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는 사회가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폭력의 또 다른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대한민국 사회 일부 극우 세력의 과격한 언행과 물리적 충돌 역시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출로 보기 어렵다. 이러한 행위들은 주관적 폭력으로 가시화되지만, 그 배경에는 사회 변화에 대한 불안과 상실감, 그리고 경제적 양극화와 세대 갈등, 정체성 위기와 같은 구조적 긴장이 자리한다. 특히 이들은 특정 집단을 적대적으로 규정하는 언어를 통해 상징적 폭력을 강화하며, 이를 스스로 정당한 방어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폭력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사회 구조가 축적해 온 긴장이 외부를 향해 분출된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지젝이 폭력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는 폭력을 직접 규정하기보다 ‘우회’라는 전략을 통해,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관용, 인도주의, 자유주의, 자선—속에 내재한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는 폭력을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구조적 효과로 파악하게 만든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는 착취와 자선을 동시에 수행하는 역설적 존재다. 이때 자선은 착취를 보완하는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과 악의 이분법 자체가 이미 폭력의 구조 안에 포섭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폭력의 근원을 개인의 내면과 일상적 관행의 층위까지 확장한다. 우리가 반복하는 습관, 제도적 무의식,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는 구조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때 폭력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 내재된 조건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맞서 싸운다고 믿는 폭력조차, 사실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구조일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정치적 실천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이어진다. 지젝은 즉각적인 행동보다 ‘행동하지 않음’의 급진성을 강조하며, 바틀비적 제스처—“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를 통해 기존 체제가 강요하는 선택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구조적 폭력의 회로를 교란하는 전략적 중단이자, 또 다른 형태의 저항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슬라보예 지젝 - 폭력>은 폭력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조건으로 재위치시킨다. 나아가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을 통해 기존 질서를 단절하는 해방적 폭력의 가능성까지 사유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폭력을 비난하는 도덕적 안전지대에 머무르지 말고,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더 이상 중립적 관찰자로 남을 수 없으며, 이미 폭력의 체계에 연루된 존재로서 자기 인식을 갱신하게 된다. 요컨대 <슬라보예 지젝 - 폭력>은 폭력을 사건이 아닌 조건으로, 외부가 아닌 내부로,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재배치하는 사유의 전환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사유를 통해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과연 폭력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이미 그 내부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폭력 이후의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슬라보예지젝 #폭력 #21세기문화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