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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한국사상선 『홍명희·정인보』를 읽었다. 사실 읽기 전까지 홍명희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임꺽정』의 작가, 그리고 월북 문인이라는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뿐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꽤 놀랐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성별에 대한 그의 관점이었다. 홍명희는 남성과 여성을 단순히 나뉘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인간 안에 다양한 성질이 연속선처럼 섞여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의 젠더 담론에서 이야기되는 ‘스펙트럼’이나 경계의 모호함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아서, 1930년대의 글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독서모임에서도 이 부분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다들 “시대에 비해 너무 앞서간 사람 같다”는 반응이었다. 에스페란토어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특정 국가의 언어가 아닌 국제어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 취미라기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강하던 시기에 오히려 보편성과 국제성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홍명희라는 인물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졌다. 문학에 대한 태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문학은 문학을 통해서 도달하는 길이 있을 뿐이지 살림살이를 떠나서야 있을 수 없지.” 라는 문장을 읽으며, 홍명희가 왜 리얼리즘 문학에 관심을 가졌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태도가 담겨 있는 듯했다. 정인보의 글도 함께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양명학과 관련된 부분이 흥미로웠다. 학창 시절 윤리와 사상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접하면서 형식적인 지식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이라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독서모임에서도 단순히 옛 사상가를 읽는다는 느낌보다,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고민해볼 만한 문제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과거의 사상가들을 다룬 책인데도 의외로 현재적인 문제의식이 많아서 흥미롭게 읽은 책이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시리즈를 처음 읽어봤는데, 다른 권들도 계속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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