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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그것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생활 방식에서 축적되어 굳어진 정신적 혹은 물질적 산물을 지칭한다. 아울러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너무 넓고 다양하기에 한마디로 정의할 수도 없으며, 다만 일정하게 구분된 분야의 범주를 통해서 논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책은 인류학자인 저자가 다양한 종족의 원시문화에서 현대적인 사람의 양식까지를 관찰하면서, 각각의 문화에 반영된 특징과 의미를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어떤 행동 양식이나 의식이 오랜 시간에 걸쳐 공동체에서 널리 통용되는 양식으로 정착했다면, 일견 아무런 의미 없이 보일지라도 그 연원을 추적하다보면 분명 문화적인 의미를 추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다.
즉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그에 필적하는 문화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랜 동안 공동체에서 형성된 환경과 물질 그리고 의식적인 측면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정 지역에서 통용되는 각종 풍습이나 음식문화, 그리고 종교적 신념 등에 관한 기원을 탐구하고 그 기능을 문화적으로 추적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겠다. 모든 문화는 그것을 유지했던 공동체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생활방식에서 형성되었기에, 그에 관한 평가 역시 어느 일방의 관점이나 기준에 의해 재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문화란 추상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고정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양태가 변하면 그에 따라 바뀌고 혹은 새롭게 형성되기도 하는 역동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특정 지역에서 나타나는 ‘암소 숭배’라든가 ‘돼지 숭배자와 돼지 혐오자’가 왜 병행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다양한 부족들의 문화를 추적하여 그 의미를 짚어내고, ‘원시전쟁’으로부터 비롯된 공동체 사이의 전쟁이 실은 종족의 인구증가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시작되었음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공동체 사이의 전쟁이 발생함으로써 이전까지 미미했던 ‘미개족의 남성’ 역할이 증대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남성중심의 문화’와 계급사회를 구성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동했음을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종족 사이의 과시욕이 과대한 선물로 표현되는 이른바 ‘포트래취’ 문화라든가 폐쇄되엇던 종족과의 접촉으로 인해 그들의 화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 ‘유령화물’ 혹은 ‘구세주’의 신화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추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억압이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이들을 ‘마녀 혹은 악마’로 규정하여 잔혹한 학살을 초래했는가 하면,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도 이전부터 형성되었던 다양한 사상들을 받아들여 마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서양의 중세에 횡행했던 이른바 ‘마녀사냥’이라는 현상은 ‘체제유지’를 위한 기득권자들의 몸부림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이 21세기에도 지구상 곳곳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문화 현상에 내재해 있는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특정 문화에 대해서 보편적인 관점에서 비난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그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 책은 다양한 문화의 의미를 탐구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고 이해된다.(차니) *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않고 겨우 앞부분의 40페이지밖에 읽지 않았지만 번역자의 성의를 의심케 하는 부분들이 눈에 띄어 그냥 몇자 적어보기로 한다. 먼저 번역하는 사람의 마음이긴 하겠지만 영어의 You로 시작하는 문구를 "당신은" 어쩌구 저쩌구 하며 그것을 곧장 옮긴 듯한 말투가 상당한 걸끄러움을 주고 있다. 이런 경우 내가 받는 인상은 영어에는 밝지만 우리말에는 너무 어두운 것 아닌가 하는 씁쓰레함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게될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 말에 익숙한 한글 사용자들이어서, 번역하는 사람은 당연히 영어보다 우리말에 더욱 익숙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이런 문장을 접할 때마다 그런 상식은 여지없이 배신당하고 만다. 둘째는 용어의 사용도 문제로 여겨진다. 대표적인 것이 식량 연쇄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런 용어가 정말 있나하고 인터넷을 뒤져 보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먹이사슬이란 용어를 흔하게 사용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집단의 복지란 말도 의미전달을 명쾌하게 하기 위해선 총체적 복지나 전체의 복지로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다 읽고 평하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이런 사소한 문제들에 부딪치면서 그동안 번역서에서 항상 접해왔던 불만이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화가 치밀었고, 또 원래의 책이 좋고 신선한 것이어서 옮기는 과정에서 그런 좋은 책자의 내용이 번역자의 미숙함으로 훼손되는 것이 안타까워 그냥 몇자 적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사람들에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 언제쯤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그러니까 인터넷 시대의 도래 이전에는 이러한 번역의 미숙함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얼마든지 저자와 모르는 부분에 대해 전자 우편을 주고받으며 정확성을 기할 수 있는 시대이다. 번역자들의 양식이 가끔 의심스럽다. 이번에도 작은 부분들이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불만이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에서마저 성실성이 돋보일 때, 우리의 문화도 문화란 말에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런 지적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남겨두자면 그런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작은 지적이 책에 대한 접근을 아예 막는 불상사는 없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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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이 빚은 문화의 수수께끼 저자가 서양(유럽)문화권의 기준에서 비합리적이라고 간주되어 ‘신비’ 혹은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던져버린, 다른 문화권에서의 다양한 생활양식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결과가 이 책, <문화의 수수께끼>이다. 예컨대 힌두교에서는 왜 암소를 숭배하며, 이슬람교가 어떤 이유로 돼지고기를 금하는지에 대해 과거에는 단순히 종교적인 금기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으로 경제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굶주리면서도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 인도 농부들은 어리석은 종교적 광신자가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는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제상 주된 기능이 우유생산에 있는, 전문화된 미국의 낙농용 가축1)”과 달리 인도의 암소는 미국 농부의 트랙터에 해당하는 수소를 생산하는 것이 경제상 주된 기능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소, 흑소는 생활력이 강해 목초나 사료용 식용작물 대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인간이 직접 먹을 수 없는 풀이나 추수하고 남은 농작물 찌끄러기, 시장터의 쓰레기들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우는 일2)”을 한다. 미국의 소와는 달리 사료의 공급 없이 우유를 생산하고, 연료 및 비료 등에 사용되는 소똥을 남긴다. 또한 트랙터처럼 도로 교통수단이나 쟁기끌이에도 사용된다. 또한 저자는 통계자료를 활용하여 인도의 암소 숭배는 종교와 상관없이 “저(低)에너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도3)”하는 수단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가 터부시된다. 왜냐하면 “야훼나 알라와 같은 <수준 높은> 신(神)들이 인류 대다수가 즐겨 먹는, 해롭지 않고 오히려 익살스러운 이 동물 - 돼지 - 을 저주4)”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유를 반농반목(半農半牧)을 하던 중동의 사람들에게 단지 육류 섭취만을 목적으로 돼지를 사육하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돼지가 지니고 있는 큰 약점은 실용화 될 수 있는 젖이 없고 원거리를 몰고 다니기가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네겝이나 요르단 계곡 등 성서와 코란에서 나오는 지방의 덥고 건조한 기후에는 신체구조적으로 잘 견뎌내지 못한다5)” 따라서 소규모 사육으로 이웃을 시험에 들게 하느니 차라리 금기로 지정하여 여러 가지로 유용한 다른 가축의 사육에 더 힘쓰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합리적 판단을 해야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저자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나 종교적 신비의 영역 안에 머물던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자처럼 생활양식에 과학적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힘써야 할까 저자는 결론에서 “의식의 복잡하고 자민족중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양식들에 더욱 탐닉할 경우 지금까지 우리가 지녀왔던 마녀들이나 메시아들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더욱 무서운 전율(戰慄)도, 더 큰 정신분석적 의식(儀式)도, 더 익살스러운 관념의 유희(head trips)도 필요치 않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상의 의식(意識)을 비신화화(非神話化)하려 애씀으로써 평화/정치/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假定)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다. 만약 사회의 불평등 요소들을 우리의 뜻대로 변경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이 그토록 희박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생활양식이라는 수수께끼의 영역 속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확대하는 것이 도덕적 지상명령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6)”라고 말함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 만능주의’라는 현대 사회조차도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무지(無知)나 공포 등을 이용,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을 초자연적인, 일종의 신화(神話)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집단 환각상태에 빠져,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믿는 사이에 사회의 불평등 요소를 변경시킬 동력을 상실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 속에서 생활양식을 과학적 객관성을 가지고 고찰하면, 자민족중심주의나 종교적 편견에 가려져있던 진실을 파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인류는 작지만 큰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옥의 티 p. 217 아직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상의 의식(意識)을 비신화하려 애씀으로써 ⇒ 아직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상의 의식(意識)을 비신화화하려 애씀으로써 |
| 대개의 사람들은 낯선 문화에 대해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며 조금 본인이 '깨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다양성에 입각하여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개고기를 먹든말든 서양에서 참견할 것이 아니며 인도에서 소들이 거리를 활보하든말든 우리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 시각에서는 '용인'은 되었을 지언정 '이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지 '다양성'이라는 무덤 아래 묻어두었을 뿐이다. 문제는 결국 그 문화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풍습'이라는 앙금을 그대로 남긴 채로 넘어간다는 것이며 어떤 계기가 있을 시 언제든지 또 그 이해의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묻어두는 시각'을 거부하고 비교적 적극적으로, 일견 기괴해보일 수 있는 문화코드에 누구나 어느정도 이해할만한 이유를 달고 있다. 인도에서 암소숭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암소숭배를 통해 암소를 살려두는 쪽이 암소숭배를 버리고 암소를 도살했을 때보다 '인도'라는 척박한 eco-system하에서 이득이 많다는 이유이며 중동에서 돼지고기가 터부시되는 것은 중동처럼 돼지를 기르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지 않은 eco-system하에서 맛있으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돼지고기에 대한 갈구를 원천봉쇄하기 위함이다. 일견 우습게 보이는 포트래취나 대인(Big-man)숭배는 그 경제공동체의 전체 생산을 그 eco-system이 파괴되지 않는 한에서 극대화하고 그 결과를 재분배하며 유령화물전설이나 메시아 신앙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 반항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단결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데 중요하다. 마녀사냥은 무너져가는 중세사회에 있어서 빈곤의 책임을 당연히 져야 할 귀족과 성직자에의 분노를 '마녀'에게 투사함으로써 반사회운동의 핵심을 흐리기 위함이었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풀자면 이 말이다. [모든 문화코드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그러므로 한 문화를 다른 문화가 깔보거나 우월감을 가질 일은 아니다. 한 문화가 만약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 문화를 가진 종족이 다른 문화를 가진 종족과의 생존권 경쟁에서 졌을 뿐이며 문화 자체에 우열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이야기도 어느정도는 수긍이 간다. 문화라는 것은 어느정도 'eco-system'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폴리네시아 군도와 중동지역이, 우리나라와 미국이 문화가 틀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적어도 그 시작점에 있어서는 (요즘같은 글로벌 시대 말고) 그 지역에서 보다 잘 살아남기 위한 '적응방법'이다. 어느정도 계급이 생겨나면서부터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사이에서 메시아신앙과 마녀코드 등의 또 다른 문화코드들이 생겨나며 이 문화코드의 목적은 계급의 고착이냐 계급의 타파냐 둘 중 하나가 된다. 마빈 해리스는 얼핏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문화에 대해서도 모호하지 않은, 무척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붙임으로써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그 문화를 백안시하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그 와중에 너무나 문화의 이유를 '정신'이 아닌 '물질', 너무나 실질적인 '살아남기 위한 이유'로 몰아갔다는 인상이 있고(적어도 조금은 인간이 '의식'이라는 모호한 이유로 행동할 때가 있지 않을까?)아마도 이 책이 쓰여질 즈음, 1970년대 초반의 '과학이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분위기와다소 유물론적이었던 사회기조를 반영하는 것 같기는 하다.그러나 우리나라가 개고기를 먹는다니 인간의 친구인 개를 먹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여배우가 버젓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세상에서 비록 여기서 주장한 내용이 100% 맞는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중립적이고 모든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만으로도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기초를 세우고 싶은 사람에 대한 입문서로는 괜찮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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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궁금했었던 이야기가 명쾌하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끔씩 화제에 떠오르게 되는 주제들. 이제껏 나는 '힌두교는 소를 먹지 않는다'까지만 알려고 했지 그 이상은 알려 하지 않았고이런 정도만 알아도 어느정도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문화 다원주의라는 말을 자주 들어 익숙 해져 있지만 정작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때는 그 문화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작 그러한 때에 자신이 이중성에 대해서 놀라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당연한것일지도 모른다.왜? 정말 문화가 다른 이유를 깊숙히 알아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언제나 현상을 파악할때 그 정확한 근거를 보아야만 직성이 풀린다. 막연한 현상은 무언가 불안감, 옳지 않은 것만 같은 느낌을 심어 준다. 이 책은 우리가 말하는 문화 다원주의의 진정한 다름을 인정하게 해주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중세에 마녀상냥이 횡행했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알수 없는 그 시대의 광기어린 행위로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그래서 지은이는 이런현상에대해 우리에게 지배층의 의도, 역사, 사회적, 자연 환경을 토대로 그러한 행위의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준다.우리에게는 단순히 신기하고 이상하다라는 현상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그들의 정황을 이야기 해 주면서 어떤 사건을 바라 보는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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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서는 문화,종교등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저는 힌두교도들의 소숭배를 단지 이슬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힌두교들은 소를 먹지 않는다고만 알았습니다. 단순한 저와는 달리 이 책에서는 개개의 문화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학이란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미래던 먼 미래던지 과학이라는 것도 과거시대의 패러다임들처럼 도태될지도 모르는 불완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패러다임(패러다임을 우리말로 대체할 말이 생각이 안나서 자꾸쓰게 되네요)은 과학입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철저히 이 시대의 생각에 충실한 상태에서 과거의 문화적 현상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으로 인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말고도 미신이나 신화, 종교의 이면에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있는 것만이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길을 트여주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독서경험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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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끝없는 사회화를 겪고.. 내 나름대로 달리 말하면 문화에 길들여진다. 그 사회의 일원이라면 아마도 그 사회에 내재된 문화의 특성이나 그 기능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문화 밖에서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이 책이 마음에 든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써 기독교 자체에 관해 인간적인 해석을 가한데 대해서는 좋게만 여기진 않지만 말이다. 여하튼 제일 마음에 든 부분은 인도의 소 숭배에 관한 것이다. 인도의 소 숭배를 비효율적이라고 말하고 나쁜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욱 문화의 환상에 빠진게 아닐지^^...
인도의 자연이나..기후,여러 인문환경들을 고려해서 이러이러해서 인도에는 소의 숭배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모습이 매우 멋있었다.
물결안에서는 자신이 물결안에 있다고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던가... 이 책을 일고 둘러싸인 환상을 조금 깨달았으면 한다. [인상깊은구절] 병들고 상한 수소를 건강한 수소로 대체할 수 없는 인도의 농부는 마치 고장난 트랙터를 대체하거나 수선할 능력이 없는 미국의 농부와 흡사한 처지가 된다. 그러나 인도의 상황과 미국의 상황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즉 트랙터는 공장에서 생산되지만 수소는 암소가 낳는다. 암소를 소유한 농부는 소소를 생산해낼 공장을 갖는 셈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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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본적조차 없던 당연시 받아들이고 지내던 것들에 대한 생각의 대전환을 안겨주었다. 마빈 해리스는 명쾌하고 쉽다. 독자들로 하여금 빠져들게 하며 굉장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설득되지 않을수 없다. 각 문화가 가지는 특성 이데올로기 다양한 관습에 대한 그의 추론은 재미가 없을수가 없다. 신화와 전설로 뒤덮여 우리의 눈을 가리는 사회 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아주 시원하게 깨는것은 우리 사회가 보다 진일보하는 밑거름이기도 하고 다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할수있는 밑거름이 된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으로 뻗어나가게되는 첫 작품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재미는 물론이고 지식적 영역까지 넓힐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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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면 왜 이런 문화가 생겼고 이유는 무엇이고가 나와있어 좋네요. 아직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다 읽으면 어떤 생각으로 마무리를 하게될 지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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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많은 인과들이 모여 맥락이란 줄기를 형성하고, 그 줄기를 관통하는 특별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개신교의 탄생과정이 그랬고,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그랬다. 문화의 맥락을 읽고 그 안에 담긴 본질을 이해하는 인류학적 사고와 시각을 길러주는 책. 마틴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는 어떻게 세상에 등장했을까? 개신교 목사들의 주장처럼 마틴 루터는 타락한 천주교의 모순을 깨트리고 진정한 구원과 회개를 사람들에게 전하기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인물일까? 힌두교도들은 왜 암소를 숭배하고, 무슬림들은 왜 돼지고기를 금기시 하는가? 진정 그들은 암소를 신으로 생각하고 돼지고기를 더러운 음식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문화는 절대 하나의 인과관계, 결과론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과관계를 거치고 그 안에서 한 가지 방향으로 흐르는 어떤 거대한 맥락이 형성된 뒤에야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특별한 문화가 생겨나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리스 시대 팔레스타인이나 로마시대에 일어났었던 전투적 메시아니즘적 사건들이 1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도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이런 메시아니즘적 동요의 최절정이었거나, 아니면 그 부산물이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메시아니즘 운동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의 메시아니즘적 열정의 폭발은 부와 권력을 독점한 지배계층들에 저항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서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에도 부패한 가톨릭의 횡포를 비판한 세력은 존재했다. 본문의 내용처럼 마틴 루터는 그 세력의 최절정이었거나 부산물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다만 그의 주장은 다른 세력, 다른 민중봉기들과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마틴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횡포와 부패, 교황의 세속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지만, 당시 민족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던 봉건 영주들의 지위는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 평등이나 농노 해방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은 것이다. 마틴 루터는 계급의 구분을 인정했다. 교황의 권력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봉건 영주들의 욕망은 마틴 루터의 주장과 잘 맞아 떨어졌고 이는 중세 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시발점이 됐다. 다른 메시아니즘적 저항들은 세속권력과 신성권력 양쪽의 탄압을 받았다. 인간 평등과 급격한 종교 개혁을 외쳤던 그들은 모두 역사의 수면 아래 가라앉았지만 마틴 루터의 프로테스탄트는 독일의 수많은 영주들의 보호를 받았고,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가톨릭과 동등한 종교적 위치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종교 개혁이 개인의 의지, 신학의 참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권력의 충돌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본 신교의 탄생과정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이의 유입과 인쇄술의 등장, 산업 기술의 발전, 교황의 권위 약화에 따른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인간본위 사상의 재도래 등 여러 인과 관계들이 차례로 발생했고 이때 교황의 권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영주들에게 마틴 루터가 교황과 가톨릭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해준 것이다. 신교의 탄생과 그 과정은 결국 신 중심의 중세 시대를 끝내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근세 사회로의 이행을 촉발시킨 시발점 역할을 했다. 이처럼 한 가지 문화 현상, 역사적 사건은 여러 인과 관계로 인해 생겨난다. 그리고 그런 사건과 현상들이 큰 맥락을 형성하고 하나의 문화를 만든다. 인류의 오랜 역사가 그러했고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다. 때문에 인류학은 미래를 예측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인류학의 총체적인 관점으로 맥락을 이해하는 시각은 문화와 트렌드를 짚어내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 책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런 맥락을 이해하는 눈을 길러주고 문화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사고를 훈련시켜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