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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나의 시선을 잡은 레몬색표지의 작은 책, 오창섭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미셀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떠올리며, 책을 집어들었지만 '메타 디자인을 찾아서'라는 부제에 더 반가움을 느꼈다. 보드리야르의 『기호의 정치경제학비판』에서 메타 디자인이란 용어를 접한 후 라서 그런지, 그리고 오창섭의 『디자인과 키치』에 대한 좋은 인상 때문인지 제목만 보고 책을 구입해버리고 말았다.
노란 벽돌길을 따라 마법사를 만나기위한 여행-고향 캔사스로 돌아가기위해-을 떠나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메타 디자인이란것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책의 첫장을 넘겼다.사용자들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그럴듯하게 들리는 '사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발생한다'는말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기능주의적 사고들, 키치적 사물의 디자인들 그리고 기타 많은 담론들...
그동안 실생활에서 공감하고 있었지만 키치적사물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박쥐같은 위치에 서있던 나를 비롯한 많은 디자이너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글들로 시작을 연다. 하지만 1장을 전부 읽기도 전에 『디자인과 키치』에서 이야기한 '키치의 유형, 내용, 존재방식들'에서 키치란 단어를 삭제하고 많은 형용사들과 수식어들을 사용해 좀더 그럴듯 하게 말을 풀어놓은 글이라는 생각이 스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전혀 새로운 담론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디자인이란 것은 고상하거나 아름다운것, 우아한것, 좀더 멋진 어떤것이라기 보다는 우리와 가장 친밀한 일상생활과 연결 지어, 디자인의 의미의 확장을 언급해준다. 어떤이는 메타 디자인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메타 디자인이란 새로운 영역의 담론의 장을 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 기존의 작가의 생각에 새로운 용어(익숙하지 않아서,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용어)를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여간, 메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했다는 점에서도 그 시작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듯하다.
2장에서 메타 디자인의 이해로 시작을 열기는 했지만, 무엇이든지 한마디로 정의하기/정의해주기를 좋아하는 나의 우매한 습관 때문인지 "메타디자인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나의 궁금증을 명쾌하게 풀어주지는 못했다. 메타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는 '메타' 의 구조에 대해 '메타언어'를 예를 들어, 메타 언어가 언어에 대한 언어/재귀적 기능을 하는 언어로 소통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스로에게 던져지는 사고의 화살', '넘어섬', '해석의 노력', '반성의 움직임', '창조의 움직임', '상대적 개념', '비평적 사고를 전제로 함' 이라며 메타를 정의했지만, 책의 제목에서처럼 쉽게 이해하기도/되기도 어려운 개념인 듯하다. "삶이란 무엇일까? 왜 태어났지? 왜 사는 것이지?"같은 담론의 담론을 거듭하듯이, 아마도 시공간의 맥락에 따라 디자인-메타디자인-의 의미 역시 계속 변화될 것이다.
결국 책에서는 일상 삶과의 괴리감이 없는 디자인, 그곳에서 디자인의 지향하는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키치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키치라 부르는 유희, 구별짓기, 정체성확인 등의 사물 역시 확장된 영역으로서의 디자인이며, "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 지향해야할 메타 디자인이다"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아니, 소위 우리가 말하는 키치적인 것이 가장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작가가 말하려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란 기능주의에서 말하는 사물의 기능을 통한, 동선의 길이로 측정 가능한 편리의 획득에 의한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과 키치』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인간을 위한다는 외침아래 모든 행위들이 면죄부를 갖게 되었다며 기능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얼핏 잘못 이해하게 되면 작가 역시 기능주의디자인의 경계에서 박쥐같은 입장을 취한다고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반대의견에 대한 직접적이며 강력한 표현이 부족해서는 아닐지...
어찌되었든 의자를 통해 디자인의 형태와 기능에 대해 살필 때, 갤런 크렌츠의 『의자』에서 처럼 단순히 '인간을 위한 의자'-인간공학차원에서의-로 마무리짓는 방식에 휩쓸리지는 않는다 (기능주의디자인처럼, 인간을 측정 가능한 존재로 보는 것)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의자의 감수성'이란 개념을 등장시켜 단순히 앉는 존재로써가 아니라 계급의 존재를 암시하는 의자까지 의자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의자라는 것을 기능주의적 사고로 호명 할 때는 단순히 앉을 때 쓰는 도구가 되지만, 사실 우리 주위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의자의 기능이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앉는 기능에 의해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의자가 인간의 편리성을 도모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책을 쌓아둔 의자, 발판으로 사용되는 의자, 옷걸이로 사용되는 의자, 문이 닫히지 않게 세워둔 의자 등을 생각해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의자의 기능의 확산을...-이 기능들은 디자이너들이 생각했던 기능이라고, 디자인을 하기 전에 염두에 둔 기능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쌓아둔 책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 바위/잔디에 심지어는 계단에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의자라 호명하던 것들 외에 이런 것들에도 의자라 불러야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들, 여기서 벌써 오류가 생긴다는 말이 아닌가? 잔디도 바위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굳이 예를 들 사물들도 많았지만, 의자를 예로 든 이유는 무엇일까? 의자라는 것을 단순히 앞서 말한 기능의 확장만을 설명하기위해서 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의자라는 것의 숨은 의미를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배와 통제의 사회에 뿌리를 두고 산업화와 함께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왔다. 물론 의자의 또 다른 의미-계급의 존재를 암시하는 의자-를 살펴본다면 이집트.로마의 의자에서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급이니 신화니 하는 말들을 자주 사용해서 이해를 도우려 하는것 같지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신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지만, 자세한 설명이 부족해 읽는 이로 하여금 막연히 저자의 시각을 따라가게-사고의 확장이 아닌 단순히 동조하기- 만들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저자가 말하려는 것의 의도는 알겠지만, 저자 역시 노란 벽돌길을 찾아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결국에는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야말로 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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