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웹사이트를 뒤지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 필사해보았다. 어딘가 처연한 눈빛과 그보다 더 처연해 보이는 진주 귀걸이.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그게 그유명한 북구의 모나리자 진주귀걸이 소녀 였다. 곰브리치아저씨 책에서 언급된대로. 베르메르의 그림은 혼자서 헤쳐나가는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묵묵하다고나 할까 강인하다고나 할까. 아마도 정말로 화집이 아니라 큰 캔버스의 진품을 보게 된다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금 여러가지로 힘들고 어렵고 또 헤쳐나가는 중이지만. 전혀 알려진바 없는 베르메르의 일생처럼. 나 역시 전혀 알려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이유를 대라면.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여줄수밖에 없는거 같다. |
|
내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처음 본것은 만화책에서였다. 책 제목을 갤러리 페이크로 기억하는데 매우 재미있게 읽었었고 그중 어느 에피소드에선가 등장하는 베르메르의 작품인 터번을 쓴 소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우습게도 그 이유는 '소녀가 예쁘다' 였다) 나는 인터넷 사이트를 뒤졌으며 몇몇점의 작품을 더 볼 수 있었지만 그 질은 별로 좋지 않았고, 나는 좀 더 제대로 된 그림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작품집은 그리 흔치 않았다. 교보문고에 가서야 이 책을 구할 수 있었고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고 용돈도 풍족치 못했지만 난 선뜻 책을 구입했다. 물론 결과는 만족이었다. 비록 직접 그림을 보는 것 보다야 못하다지만 분명 컴퓨터 모니터로 색깔도 정확치 못한 그림을 보는 것 보다는 백배 낫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베르메르가 남긴 그림이 얼마 없는 탓에 많은 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지만 그 덕분에 베르메르의 모든 그림이 이 책안에 들어있다고도 할 수 있다.(그것은 창해에서 나온 조그만 책도 물론이지만) 그림의 퀄리티도 좋으며 기타 화가의 뒷 이야기라던가 그 당시의 관련 자료등도 풍족하게 수록되어 있다. 베르메르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인상깊은 그림 - 회화, 터번을 쓴 소녀, 우유를 따르는 여인, 레이스를 뜨는 여인. |
![]() 미술관이라고는 딱 두 번밖에 가본지 못한 내가 그림에 관한 에세이를 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용기를 낼 수 있는 까닭은 미술이나 문학 같은 예술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 때문이다. 그것이 미술이든 문학 혹은 음악이든, 소위 예술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예술의 사회적 측면과 극히 개인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예술이 자신을 태동시킨 당대와 밀접히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무슨 무슨 ‘~이즘’으로 표현될 만큼 사회적 운동의 양태까지를 보여주며 자신이 발 담그고 있는 시대의 성격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또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의식의 계몽을 선구하는 최첨병의 역할을 예술은 담당한다. 그것이 예술 하는 작업, 예술행위의 최우선의 목적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 혹은 예술행위는 또한 극히 개인적인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나 작가가 글을 쓰는 행위 등은 그 화가나 작가 시인에게는 개인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러한 그들의 작품을 보고 읽고 느끼는 독자의 행위 역시 개인적인 것이다.
화가나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등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리고 담아내고자 했던 이상과 생각 그리고 당대의 현실과 미래의 전망은 우선 작가 개인의 영감으로 시작 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적 열망의 표현이나 당대의 실상을 고발하고자 했다는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따라서 어떤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는 행위 역시 그 작품을 보고 읽는 독자 개인의 행위가 우선이다. 이 말은 어떤 작품에 대한 느낌이나 예술적 감동 역시 그 개인 고유의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예술 작품 그것은 그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읽고 보는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아름답게 그린 한 폭의 인물화가 그것을 그린 화가에게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아름다운 그림일 테지만 지금 막 지독하게 아픈 이별을 경험한 한 개인에게는 차라리 증오스럽고 저주스런 그림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수 없게도 그 그림 속의 여인이 자신이 한 때는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와 닮았다면 그림 속의 여인은 이제 마녀보다 못한 저주스런 한 대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을 하거나(캬바레 얘기가 아니다^^) 예술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행위에는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인식과 사유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오늘의 그림 이야기를 해보자. 과연 그 눈빛이 전부일까? 진실일까? 이 글의 주제가 되는 그림은 알렉산더 로슬린Alexander Roslin(1718~93)이라는 스웨덴 출신의 화가가 그린 <베일을 쓴 여인>입니다. 이 곳 네이버 블로그에서 <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이주헌 저/예담 간>라는 책의 출간기념 이벤트에 내가 관심을 갖기 전에는 본 적도 없는 그림이며 화가입니다.
지난 해 모매체에 서평을 연재할 당시 우연한 기회에 미술감상 에세이를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된 미술 또는 그림이고 보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아무튼 그 그림에 대하여 저자인 이주헌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빛’이라는 말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우리는 눈이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때의 눈빛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마음의 빛이겠지요. 우리는 다른 이의 눈빛만 보고서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혹은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눈빛은 날씨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빛에 따라 우리는 형형색색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요. 사랑하는 이의 진심이 담긴 시선은 그 많은 눈빛 가운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눈빛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그 눈빛 하나가 더 소중하지요. 그림을 보세요. 지금 한 여인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따뜻한 그 눈빛은 북극의 얼음마저 다 녹여버릴 것 같네요. 푸근하고 넉넉한, 진실로 아름다운 눈빛입니다. 쓰고 있는 베일을 벗어 나머지 눈동자도 드러낸다면 그 화사한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살가움으로 보는 이의 영혼을 무장 해제시킬 것 같습니다. 그녀는 과연 누구에게 저리도 따뜻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걸까요? 그녀의 눈빛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그리는 화가에게 던져진 것이겠지요. 물론 자신을 그려준다고 아무 화가에게나 이런 눈빛을 보낼 수는 없을 것이고, 그 화가는,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그녀의 남편이거나 연인일 겁니다. 스웨덴 출신인 화가 알렉산더 로슬린은 파리에서 오래 창작활동을 했는데, 그때 그곳에서 만나 결혼하게 된 여인이 바로 이 그림의 주인공 마리 쉬잔입니다.
아내를 모델로 그린 이 그림에서 그는 아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든 남편들이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에 촉촉이 젖은 그녀의 눈빛은 만족과 기쁨, 그리움, 신뢰, 안온함, 약간의 응석이 섞인 유혹 등 진정한 사랑이 가져다주는 온갖 따뜻함들로 풍성합니다. 그림을 보고 저자의 친절한 해설을 읽고나면 그 눈빛의 따스함과 매혹적인 미소에 우리도 방금 흠뻑 빠져들 것만 같습니다. 저자의 해설에 토를 달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여인의 눈빛은 아름답고 온화합니다. 더욱이 그 수줍은 미소와 베일을 쓰고 부채를 쥔 채 약간 비스듬히 몸을 튼 여인의 자태는 그녀의 시선에 우리를 사로잡히게 합니다. 다행히 한 쪽 눈만을 보여주었기에 망정이지 두 눈을 다 보았더라면 아뿔싸! 그 눈에 풍덩 빠져버렸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일까요? 그 눈빛이 저자가 말한 대로 사랑하는 사람만을 향한 눈빛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화가는 그녀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고 그녀를 그렸던 것일까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삐딱하게 보기를 천형처럼 지고 살아가는 이목이는 왠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불행하게도 영화를 먼저 보고 그림을 보았던 까닭에 나는 그 소녀의 눈빛에서 고단한 삶의 무게를 보았습니다. 주인집 화가를 사랑하게 된 하녀 신분인 소녀의 처연한 슬픔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신분과 나이와 삶의 차이에서 비롯된 애증과 절망 그리고 안타까움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감추고 있는 그 파란 두건과 그녀의 남루한 의복 그리고 그녀의 귀에 매달려 있는 진주귀걸이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표징임을, 17세기 근대 부르조아 사회에서 피어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클래식 음악이라 부르는 장르의 음악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멜로디를 가진 많지 않은 곡을 제외하고는 깊이 교감할 수 없는 까닭으로 우리는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주저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범인의 취미에 그림감상이 많지 않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제를 벗어난 사족이 길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내가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눈빛은 이주헌님처럼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향한 따스하고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녀의 현실은, 그 소녀를 그리고 있는 화가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소녀와 화가 앞에 가로 놓여 있는 현실의 장애는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화가의 부인은 소녀를 향한 화가의 사랑을 눈치 채었고 거의 발작 수준의 증오를 드러내었습니다. 화가의 딸은 공공연히 적의를 드러내었습니다. 영악한 화가의 장모는 소녀를 부유한 상공인 후원자에게 바치는 선물쯤으로 여깁니다. 그처럼 갑갑한 현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마음과 몸 모두 일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소녀의 앞에 서서 붓을 놀리는 화가의 일그러진 눈빛에는 현실의 고통과 지난한 사랑의 무거움이 묻어나고 어깨를 짓누릅니다. 소녀는 푸줏간집 소년에게 자신의 신세한탄을 할망정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화가가 그려낸 그림 속의 소녀는 아름답고 수줍은 호기심을 몰래 드러내듯이 옆쪽을 향해 시선을 보냅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눈동자만으로 정면을 응시합니다. 그 눈빛에는 화가를 향한 연민과 어린 소녀의 호기심과 삶과 신분에 대한 처연한 슬픔과 갑갑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 함께 보여집니다. 그 앞의 화가는 사랑스럽고 아름답기만 한 눈빛으로 소녀를 보지 못합니다.
사랑은 안타까움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런 그녀를 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는 그대로 감옥입니다. 현실의 감옥을 뛰쳐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그림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위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진주귀걸이(그것은 화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상징입니다)를 걸어주고 그 소녀를 그림 속에 담아냄으로써 화가는 현실의 감옥을 빠져 나올 수 있고 안타까운 자신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보는 것이, 느끼는 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베일을 쓴 여인>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이미 다른 그림을 원용하여 골자를 말했음으로 사실 별로 할 얘기도 많지 않습니다. 저자가 풀어 설명한 것처럼 사랑스런 눈빛만이 전부일까요 진실일까요? 전부이며 진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의 두 주인공 ‘마틸드’와 ‘줄리앙 소렐’의 경우처럼 그림 속의 여인과 화가는 서로 신분의 벽이 가로 놓여 있는 사이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저자의 설명을 읽지 않고 화가의 이름만을 안 정도의 상태에서 그림을 보았더라면 그녀가 사랑스런 눈빛과 수줍은 미소를 보내는 대상이 그녀의 그림 선생님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처럼 웃고 있지만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내는 사랑의 눈빛을 그려낸 그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사춘기 소녀가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어떤 대상을 향해 그 자신의 수줍은 호기심과 설렘을 보내고 있는 그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림 속 여인은 충분히 어려 보입니다. “눈은 감옥이다” 언젠가 제가 서평을 쓴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 간>에서 저자인 임철규 교수님이 쓰신 말입니다. 이 말은 눈은 ‘봄’(見)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기관이고 사람은 바로 ‘봄’을 통해 인식을 하고 그 인식작용을 통해 사람은 대상을 개념화 한다는 것과 그런데, 어떤 대상을 인식하여 개념화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전체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함으로 우리가 ‘안다’라고 하는 것은 곧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배제를 수반함으로 그것은 곧 ‘인식파편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음으로, 이 때에 눈은 진정 감옥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인식의 세계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지 못하고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 그것을 전체적인 것처럼 ‘틀짓는’ 감옥의 세계, 관견(管見)의 세계”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림 속에서 여인의 눈빛만을 떼어내 개념화 하는 것은, 임철규님의 논리를 수긍한다는 전제하에서는 참으로 우스운 비틀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저자의 해설을 흥미진진한 자세로 읽었습니다. 그 해설이 의미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맨 처음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 작품을 제멋대로(?) 해석해내는 눈이야 말로 진정 우리가 알고 깨우쳐야할 눈이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눈은 감옥이다’라는 정의는 사실 눈의 작란(作亂)을 통한 의식 또는 기억의 작란에 바탕한 인식과 사유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고 그 밑바탕에서 이루어지고 만들어지는 언어의 폭력성과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지 우리가 이주헌 저자처럼 예술을 제멋대로, 즉 자신의 경험과 사유 그리고 심미안으로 즐기는 예술감상행위를, 또는 그러한 인식작용의 해악을 경고한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위로라는 것”과 “예술이 종교와 더불어 우리의 삶을 충족시켜 주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임을 나타내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삶 속에서 뭔가 2퍼센트 부족할 때 미술작품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삶을 향한 새로운 의지와 활력을 복돋아 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눈을 통해 보고 그 본 것을 사유를 통해 개념화 하는 인식작용의 파편화에 대한 주의와 조심성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면 눈의 감옥에서 벗어나 예술의 감흥으로 한껏 넓어진 삶의 지평과 확 바뀐 세계 속에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별빛과 화가의 시선 그리고 나의 눈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현재 그곳에 잇는 것이 아니라 별빛이 그 별을 떠났던 때에 그곳에 있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별빛은 이미 소멸하여 그 존재조차 사라진 죽은 별의 빛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가 최영미의 독백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림을 보는 지금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건 바로 그 시선이다. 누군가, 언젠가 그녀를 쳐다보았겠지. 그토록 사랑스럽게 그토록 뜨겁게........ 그런 애틋한 시선을 한번도 받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과 허망함이 내 안에서 교차된다. 아쉽고도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도 죽고 그도 죽고......... 오로지 화가의 따뜻하면서도 잔인한 시선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화가의 우연한 시선> 중에서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지금 보고 있는 그 그림 속의 여인이나 화가 역시 이미 죽고 짧게는 수 십 년 길게는 수 억 광년을 달려와 나와 만나는 별빛과도 같이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 있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저 영원불멸의 명제를 실감하는 것이 바로 그림을 보고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이처럼 예술을 하고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림을 보는 이 시간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이 그 감상의 격과는 상관없이 얼마나 근사하고 유익한 시간이겠습니까? 그림 속의 여인을 다시 한번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괜히 폼나게 짧은 사전지식을 애써 떠올리지 않은 채 그저 편안하게 응시합니다. 눈이 크게 떠집니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가깝게 다가옵니다. 삼백 여 년 전의 여인과 교감하는 시간이 아름답습니다. 새롭게 열린 나의 눈에 이제는 그녀의 눈빛만이 아니라 검은 베일이 뚜렷하게 보이고 치장한 장갑이며 부채가 보입니다. 배경이 되는 어두운 바탕색에도 시선이 갑니다. 팔소매의 의상과 부채의 화려함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베일은 오히려 신비감을 자아냅니다. 수줍은 미소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도 같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화가의 부인이라기보다는 처녀의 조심스런 몸가짐을 연상하게 합니다. 결혼 한 여자들이 흔히 끼는 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손에 끼워져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배경은 그림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 보이는 의상과 부채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림 속 여인의 품격을 높여줍니다. 적어도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신분이 낮거나 삶이 고달파보이지 않습니다. 나만의 시선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마치 이제야 다 닳은 별빛과도 같은, 화가의 시선과 그림 속의 시선과 만나는 특별한 경험, 그림을 통해 교감하고 소통하는 그림 속으로의 여행으로 여러분도 함께 떠나보시길 바랍니다.(16 jun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