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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시 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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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린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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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린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김기택,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방안을 환히 밝히던 텔레비전을 끈다. 어둠이 밀려오고, 어둠 속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온다. 텔레비전과 풀벌레 소리 사이에서 시인은 시를 쓰고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문명=빛이 들어오고, 텔레비전을 끄면 자연이 어둠과 더불어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라는 구절에 드러나듯, 시인은 어둠 속에서 환한 소리를 본다(듣는다). 어둠을 환히 밝히는 소리는 텔레비전 빛=소리에 익숙한 사람은 들을 수 없다. 텔레비전을 놓는 순간, 다시 말해 문명을 놓는 순간 우리는 환한 어둠이 밝히는 세계로 들어간다. 문명화된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그토록 외면했던 사물들이 비로소 제 모습을 지니고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나 여치 소리에는 별빛이 묻어 있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게 들리는 벌레 소리들을 들으며 시인은 문득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는 걸 생각한다. 귀뚜라미나 여치 소리가 텔레비전 소리에 묻혔듯, 어두운 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들이 있다. 시인은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그 작은 풀벌레들에게도 작은 귀가 있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이 있다. 그 통로로 얼마나 작은 소리들이 들어오고 나갔을까? 시인은 조용한 한밤에도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를 내고 들으며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를 생각해 본다.

 

문명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기는 대가로 우리는 “여린 마음들”을 잃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화려한 문명에 가려진 세계에도 소리들이 오간다. 작은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를 듣는 생명들을 상상해 보라. 그 생명들이 문명 세계로 보내는 수많은 소리들을 “발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는 듣지 못한다. 발꿈치처럼 두꺼운 귀는 문명의 세례를 흠뻑 받았지만, 그런 만큼 작은 생명들이 보내는 소리들을 듣는 자연 감각은 잃어버렸다. 이제는 어둠 속에서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귀뚜라미나 여치 소리에 묻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두꺼운 귀를 뚫을 만한 힘이 그 소리들에는 없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시계 소리만 들린다. 작은 귀를 가진 생명들이 내는 소리는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시계 소리가 저리 또렷하게 들리는 상황에서도 들리지 않는 소리라면 그 소리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작은 귀를 가진 생명이 사는 세계가 있고, 큰 귀로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들으며 사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다. 큰 귀를 가진 사람들이 왜 한밤에도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소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따지듯이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들려주면 좋을까? 작은 생명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민감한 신경 탓에 잠 못 드는 밤만 계속되지 않겠는가? 일상이 무너지면 삶이 무너진다. 자기 삶이 무너진 상태에서 듣는 작은 소리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맞는 말이다. 작은 생명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고 우리가 ‘원하는’ 삶에 이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이 시에서 작은 생명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여린 마음들”을 소리로 상상하고 있다. 시인이라고 그 소리가 들리겠는가? 아니다. 시인은 다만 상상할 뿐이다. 텔레비전 브라운관이 뿜어내는 현란한 빛에 막혀 덧없이 스러진 ‘작은 소리들’이 있다고 시인은 우리들을 향해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운 문명의 빛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음을 시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세계가 내보내는 소리를 들으려면 무엇보다 텔레비전을 꺼야 한다. 텔레비전=문명이라는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그 작은 생명들의 울음소리를 우리는 떠올려야 한다.

 

작은 생명들이 내는 소리는 지금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고, 있다고 생각하면 있다. 보이지 않는 게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시인은 크게 밤공기를 들이쉰다. 공기에 스며든 그 소리들이 허파 속으로 들어온다. 그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마신다. 공기에 스며든 그 소리들이 허파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 들리지 않으면 마시면 된다. 그리고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가. 작은 생명들이 내는 소리는 어떻게 보면 내 마음이 내는 사랑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들리지 않는다고 우리가 외면한 작은 소리들이 바로 내 마음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허파에 묻은 별빛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허파가 환해진 그 일만으로도 이 세상 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밝아지지는 않았을까 

 

텔레비전을 끄는 일은 문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다. 문명을 거부한 채 자연 속에서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시 제목에 드러나거니와 시인은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하고 있다. 풀벌레들에게 작은 귀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작은 귀로 이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는 풀벌레들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시인은 텔레비전 소리에 묻힌 풀벌레들의 소리를 시 세계로 불러내고 있다. 시인이니까 그런 소리를 상상하는 거라고 이야기하지는 말자. 어린 시절 우리 모두는 이미 풀벌레 소리를 상상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상을 어린아이의 영역으로 밀어놓고 우리는 ‘이성이 있는’ 어른이 되었다. 작은 생명들이 내는 소리를 다른 세계로 내버림으로써 우리는 이성=어른이라는 문명 세계를 굳건하게 세운 셈이다.

 

문명은 사람들의 감각을 무디게 한다. 열린 감각으로 이 세상을 살기가 너무 어려운 까닭이다. 한밤에도 이 세상은 온갖 빛으로 환하지 않은가. 시인은 텔레비전을 끄는 일만으로 풀벌레 소리를 들었지만,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텔레비전을 끄면 또 다른 빛이 방안을 채운다. 문명의 빛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다는 말이다.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상상하는 마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군가는 작은 생명들이 내보내는 소리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없어도 누군가는 그것을 기억하고 표현해야 한다.

 

(작은) 풀벌레들은 우리 바깥에 있는 생명들이 아니다.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사는 생명들이 (작은) 풀벌레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이곳이 얼마나 다양한 생명들로 가득 차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시인은 이들을 허파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와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기는 이 세상 어디에나 꽉 들어차 있다. 우리는 공기처럼 작은 생명들로 가득 찬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들리는 게 전부는 아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어떤 소리들이 연이어 흘러나오고 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사실일 뿐이다. 시인은 그 사실을 ‘상상’한다. 상상을 통해 우리에게 그 사실을 느껴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나머지는 상상하는 사람들이 끌어내야 할 몫이다. 시인이 시를 끝낸 자리에서 우리 몫의 새로운 상상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홀로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

  그 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 김기택, 「다리 저는 사람」

 

 

사람들은 꼿꼿하게 걷는다. 걸음이 당당해야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고개를 들고 똑바로 앞을 보며 걷는 사람들을 우리는 실제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거나, 온몸을 뒤흔들며 걷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가?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먼저 따른다. 걸음 하나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이 방식은 물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외모가 상대를 이기는 경쟁요소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당당한 걸음은 곧 사회적 성공을 나타내는 기호가 될 수밖에 없다. 위 시에 나오는 그는 꼿꼿하게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춤추는 사람처럼 걷는다. 춤은 무대에서 추어야 한다. 무대에서 춤추듯 걸으면 찬사를 받지만, 거리에서 춤추듯 걸으면 비난을 받는다. 꼿꼿하게 걷는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찬사와 비난은 사람들이 정한 기준에 따른다. 기준에 맞으면 찬사를 받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비난을 받는다.

 

그는 한 걸을 옮길 때마다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는데,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가 일어났다. 한마디로 그는 한걸음 한걸음을 온몸으로 걷는다. 온몸으로 걷다 보니 동작이 크다. 꼿꼿하게 걷는 사람들과는 참 대조적인 걸음걸이인 셈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그는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온몸을 사용하는 걸음걸이가 요란할지는 몰라도 그는 남들 볼까 아주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걷는 것도 힘들고 남들 눈치 보는 것도 힘들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들 시선을 뒤로 한 채 그는 묵묵히 제가 갈 길을 간다. 그는 오로지 온몸으로 걷는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지하철 역사를 채운 다양한 소리들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라고 시인은 쓴다. “소리 죽여”와 “힘차게”라는 말이 모순인 듯 붙어 있다. 가방은 왜 소리를 죽이고 있을까? 가방을 맨 사람이 흔들리는 만큼이나 가방도 흔들린다. 거대한 흔들림 속에서 조용하게 걷는 사람과 소리 죽여 흔들리는 가방이 묘하게 겹친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시인은 말한다. 못 걷는 다리 하나가 있고, 걷는 다리 하나가 있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해 온몸이 다리가 된다. 돌려 말하면 걷는 다리 하나로 그는 어디로나 움직일 힘이 있다. 다리로만 걷는 게 아니지 않는가? 다리 하나가 부실하면 온몸으로 걸으면 되지 않는가? 온몸이 다리가 되다 보니 걸을수록 온몸이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리 저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다른 이가 도와야 할 만큼 걷는 게 힘든 것도 아니다. 그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어 자신을 비정상 속에 가두는 사람들의 마음이 두렵다. 장애인은 비정상이 아니다. 장애인은 그냥 장애인일 뿐이다. 비장애인이 그냥 비장애인인 것과 같다. 온몸을 흔들며 지하철 역사를 걷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눈으로 그 사람을 보았는가? 개인적으로 어떨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는 이들을 결코 고운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문제는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장애인들을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문제다. 온몸으로 걷는 그는 바로 이런 시선이 부담스럽다. 비장애인이 길을 걷는 것처럼 보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다. 다리 저는 사람을 보면 자꾸만 눈길이 간다. 왜 그럴까? 비장애인이 걷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평상심으로 보지 않는다. 장애인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사회 분위기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비정상과 정상으로 나누어온 통념이 아직도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사람들은 모두 기둥이 되어 우람하게 서 있는데”라는 진술로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차별 상황을 표현한다.

 

“빽빽한 기둥 사이를” 팔랑팔랑 홀로 지나가는 장면으로 시인은 시를 맺는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사회가 그렇다는 말로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사회 분위기는 결국 우리가 만들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 동성애자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미혼모들을 그렇게 바라본다. 우리와 다르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다리를 절면 우리와 다른 것일까? ‘다르다’는 말에는 우리를 ‘기준’으로 해서 상대를 ‘평가’하는 통념이 깃들어 있다. 통념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기는 생각일 뿐이다. 시대가 변하면 사라지는 게 통념이라는 얘기로 돌려 말해도 좋겠다. ‘우리가 남인가?’라는 말로 우리 입장에서 ‘남’을 배척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다리 저는 사람 앞에서 거대한 기둥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가 사는 사회는 서로에게 지옥이 되어버린다. 다른 걸 다르다고 인정하지 않는 악순환이 지옥을 만든다. 이 시는 그 악순환의 지점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o*****s 2019.04.20.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