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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심장은 지속적으로 뛰고 있고 정신은 맑다. 어느 때라도 펜을 들고 종이 위에 글을 쓸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 미친 사람처럼 걷잡을 수 없이 천하고 야비한 글을 쓰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그는 그의 동맥에서 시작된 광기가 손가락 끝을 통해 펜과 종이로까지 흐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p28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다
<페테르부르크>는 의붓 아들, 파벨의 부고를 접한 아버지가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아들의 하숙집을 방문하고, 아들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따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시간적인 배경은 1869년으로 당시 떠들썩했던 ‘네차예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네차예프 사건이란 당시 모스크바의 페트로프스키 대학 농대에 다니던 네차예프가 5인조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과정에서 그 조직의 일원이었던 이바노프가 조직에서 빠져나가려 하자, 당국에 밀고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한 사건을 가리킨다. –p330
의붓 아버지로 등장하는 인물은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으며, 네차예프 사건에 연루된 바도 없지만 이 소설에서는 의붓 아들이 네차예프 사건에 관계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을 쓰기 직전 간질병, 불안한 정신상태, 도박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이 극에 달한 모습 등은 리얼하다. 소설의 소재를 찾기 위해, 아들의 죽음과 부도덕한 관계를 추구하는 모습도 추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애증과 경쟁의 관계다. 이 소설에 그려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아들 파벨의 관계도 그러하다. 아버지를 존경했으나 비난의 글을 남긴 아들, 아들을 사랑하는 듯 했으나 무관심했으며, 아들을 사랑했던 하숙집 주인 딸에게도 질투를 느끼는 아버지. 저자는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언제나 이런 것일까? 가장 강렬한 적대 의식을 농담 속에 숨기는 것일까? 그것이 그가 쓸쓸히 혼자 남게 된 진짜 이유일까? 그의 삶의 기반이었던 아들과의 싸움이 없어지고, 그의 날들이 텅 비어버렸기 때문일까? 민중의 복수가 아니라 아들들의 복수. 이것이 혁명의 밑바닥에 깔린 것인가? 아버지는 아들과 아들의 여자를 시샘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금고를 털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그는 지쳐서 고개를 흔든다. –p142
국가에 반기를 들었다가 한번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 책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코드 중에 하나다.
당신은 계속 민중의 마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소. 역사는 생각이 아니오. 역사는 민중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란 말이오. 역사는 거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오. 내가 바로 지금 생각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고 나한테 말하지는 마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또다른 약삭빠른 논쟁을 위한 전략일 뿐이오. 그들은 그렇게 해서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죠. 나는 생각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오.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소. 나는 한 번에 하나씩밖에 생각할 수 없소. 다른 때는 다른 생각을 하고 말이오. 내가 해동하는 한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오. 민중은 행동하지요. –p264
2년 전, <악령>을 읽으며 복잡한 인물관계도 어려웠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중간에 포기했었는데, 이 책에 묘사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을 보니 다시 한번 그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창작을 하려면, 정말 책 속에 묘사된 도스토예프스키처럼 되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을 사랑하고, 매사에 반듯하게 살면 글을 쓸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새삼스레 들고야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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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미스터리, 추리극을 보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느낌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현실과 허구의 영역을 오가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면모를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이야기는 파벨의 사망소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의붓아버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파벨의 흔적을 찾아 페테르부르크의 아들이 머물던 곳으로 향했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은 가히 유쾌한 일은 아니기에, 파벨이 머물던 숙소의 분위기는 침울함 그 자체이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은 모든 이들에게 파벨의 그림자와 함께 해야만 하는 부담감이었다. 작가의 뛰어난 심리적 묘사는 나로 하여금 누군가 나와 아주 가까운 이를 잃은 듯한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 복잡 미묘함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나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파벨의 사망을 마치 자신의 탓인 것 마냥 생각했다. 그가 아들을 버렸노라고, 죽은 것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자신이라고. 하지만 자책하는 그 모습은 어느 순간 미궁속에 빠져버렸다. 아들의 죽은 사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지독한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타오르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 때문이었다. 파벨의 죽음은 이제 그를 페테르부르크에 좀더 머무르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렸기에 서서히 사라져가는 파벨의 영혼을 자기 안에 간직하려 들었다.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등장인물들의 혼재 속에서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지독히도 증오하던 네차예프와 그의 아들이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다가왔다. 흔들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그에게 경찰은 파벨과 관련된 어떠한 문서도 넘길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넘겨받고자 했던 유품들이었건만, 그에게 아들 파벨은 살아있을 때 조차도 다가갈 수 없는 미묘한 존재였던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또래 여성을 바라보며 아버지에 대해 묘한 경쟁심리를 느꼈던 것 같다는 추측 외에 그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 어떤 것도… 현실적 욕망과 이성적 그리움(?) 사이에서의 갈등은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세상의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파벨을 미끼로 점차 목을 죄여 오는 네차예프의 손길에 굴복하여 전혀 지지치도 않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 그는 결국 파벨을 배반하였다. 그렇게 쓰여진 그의 글에는 더 이상 이 세상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은 존재치 않았다. 격정적이지만 세상을 등진듯한 그의 글 속에는 파벨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부정만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것은 메마름이었고 격정이었으며 동시에 고뇌이기도 했다. 손쉽게 잡히는 스토리라인이나 거대한 스케일 보다는 한 인물의 혼재된 생각들이 잘 묘사된 작품이다. 극중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진 복잡한 감정들에 빠져 헤엄치는 재미를 맘껏 느낄 수 있었다. 그 야릇한 감정들이 이상하게도 나에겐 유쾌함이었다. 그 유쾌함으로 인해 오늘도 나의 독서는 즐거움일 수 있었다. |
| 어릴적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은 수학문제처럼 어렵게만 느껴졌었고 이 책도 그렇게 다가왔다. 만일 노벨상 수상작가인 저자의 약력이 그렇게 다재다능하지 않고 문장도 그렇게 짧고 숨가쁘게 읽히지 않았다면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정말 소설가, 문학교수가 맞나? 어찌보면 심리학자나 과학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리묘사와 객관적인 관찰이 대단하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처럼(작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아무런 미련없이 선과 악을 마구 넘나들어야 한다면 난 글을 쓰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않을까? 글쓰는 재주가 없는 평범한 나에게 이 책은 글 쓰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멋진 기회가 된 것 같다. |
| J.M 쿳시란 작가의 작품은 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를 통해 처음 접했다. 워낙 이름앞 수식이 많이 붙은 사람이어서도 금방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이름에 혹해서만 보게된것도 아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느껴지던 색다른 그 무엇때문이었다고나 할까. 등장인물이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의 폭넓은 표현, 묘사, 그리고 개성.. 그 모든것들이 첫 몇 장에서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아들의 죽음, 아들의 죽음에 자신이 소멸되기를 원하는 의붓아버지의 에이는 가슴.. 그러한 와중에도 하숙집 여주인에게서 느끼게되는 남성으로써의 느낌의 표현. 단지 시작에 불과한 부분에서조차 남다른 특성을 가지고 시작하는 이 글은 과연 내가 온전히 이해한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을만큼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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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와, 1868년 기존 사회를 번복하려던 5인조 비밀결사 사건인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프로 착용했다는 작품 설명을 읽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했다.왠지 지난해 읽은'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이 생각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다른 이야기 일테지만,도선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는 공통점.도선생의 작품들이 소설에 모자이클 퍼즐처럼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역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이렇게 흥미롭게 소설을 쓸 수 있다니... 사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처음부터 흥미롭게 읽히지는 않았다.적어도 70여 페이지가 넘어갈 때까지는 그랬다.뭔가 ~척하려는 느낌.그런데 이상하게 멈출수 없게 하는 묘한 신비의 마력.
의붓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여기까지 읽을 때만 해도 '살인' 에 관한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다. '악령'을 읽지 않은 탓이였을 게다. 살인은 어느 사이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상황으로 이여졌고..다시 살인으로 돌아오는 과정.그 속에 정치적 사건,바로 '악령'의 모티브가 되였다는 네차예프 사건이 근간을 이룬다.(다행인 것은 '악령'을 읽지 않았음에도 소설을 이해하는데 전혀 지장은 없다는 것.오히려 이제는 악령을 읽어 봐야 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한)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은 작가에 대한 창작의 문제로 소설이 흘러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대가' 라는 제목이 붙은 것도 어쩌면 이런 까닭에서 였는지도 모르겠다.'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의 처럼 작가 쿳시도 대문호라는 타이틀로 살아가야 하는 창작의 고통,작가의 비애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조금은 극단적인 방법처럼 보여지긴 했지만 도선생의 작품과 그의 인생을 연구한 결과 작가는 도선생의 색깔을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로 말할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워낙 살인사건에 관심을 둔 탓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난해했는데,어느 사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도선생의 작품과 작가의 적절한 상상력 배합의 결과 덕분은 아니였을까 싶다.작가의 창작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 하기 위해 먼길을 돌아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역사적 작가를 자신의 상상력과 사실을 바탕으로 또 다른 형태의 소설을 탄생시킨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듯 하다.
"그에게는 그것이 그가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대가처럼 보인다.그들은 그에게 책을 쓰라고 많은 돈을 준대요.그 아이는 죽은 애의 말을 반복하며 이렇게 말했다.그들이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그것은 그가 그 대신 그의 영혼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이다."/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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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의 대가 - 존 쿳시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라는 제목만 보고 고른책. 첨엔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란 죄와벌의 작가 도스트예프스키를 말하는 거였다. 그가 후기에 쓴 걸작 [악령]을 쓰게 된 동기를 픽션을 곁들여 소설로 풀어낸 이야기였는데, 어디서 잘 보기 힘든 소재와 주제여서 그런지 몰라도 흥미로웠고 새로웠지만, 근데 좀 어렵긴 했다 그저 유명한 소설의 대가 정도로만 알고 있는 도스트예프스키에 대해서 비정하리만치 냉정하게 그의 정신상태와 영혼을 파헤쳐버린 작가의 용기와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네차예프 사건, 도스트예프스키가 앓았던 간질병, 재혼과 의붓아들의 존재 등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런지, 도스트예프스키와 네차예프는 만난일도 없었다고 하는데도, 그의 의붓아들 파벨은 아버지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고 하는데도 이 소설의 내용이 너무나 사실처럼 느껴진다. 최근 가벼운 느낌의 소설들을 주로 읽다가 인간 영혼의 본질을 파헤친 이런 묵직한 소설을 오랜만에 접하니, 명작이라 칭송받는 작품들의 진가를 다시금 느껴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 작품의 소재가 된 [악령]도 꼭 읽어봐야지. |
| 2003 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존 맥스웰 쿳시의 대표작이라는 점도 중요했지만 결정적으로 이 책을 손에 쥐게 만든건 바로 '도스또예쁘스키'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래의 '칼의 노래'에서 처럼 이 소설은 작가가 역사적인 한 인물의 내부에 들어가 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이다. 이 소설이 '칼의 노래'와 다른 점은 '칼의 노래'가 난중일기의 사실적 사건들을 따르면서 이순신의 내부를 묘사했다면 이 소설은 순수히 도스또예쁘스키라는 인물의 내면에 들어가서 그에게 있을 법한 사건을 서술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인 도스또예쁘스키의 의붓아들의 죽음이나 네차예프와의 대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작가인 J.M 쿳시의 소설창작에 대한 자기반영적 소설로 읽혀질 수가 있다. 실제로 이 소설은 19세기소설의 독보적인 대가인 도스또예쁘스키의 심리 속에 들어감으로써 '작가' 혹은 '예술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도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수많은 작가중 누구도 아닌 도스또예쁘스키가 그러한 '대가'로 선정된 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그가 소설이 탄생한 이후 독보적인 천재라는 점도 있지만, 그의 문학이 그 어떤 것보다 '진실'이라는 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갔다는 것이 더 중요한 점일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더구나 인간본성에 대한 진실이라는 것은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대로 마주하기 어려운 추악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내가 지금껏 읽은 도스또예쁘스키의 작품은 그런 '진실'을 속이거나 거짓된 이데올로기로 포장하는 것 없이 정면돌파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경이적인(미적인/도덕적인) 순간(에피퍼니라고 부를수도 있고, 성스러운 것의 경험이라고 부를수도 있다)에 대한 매혹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그는 쓰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작가란 무엇인가? 존 쿳시가 말하는, 그리고 내가 이해한 작가란 이렇다. 작가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심도, 아들의 영혼도, 사랑도 이념도 악마에게 팔아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도스또예쁘스키가 미친 듯이 글을 쓰는 것으로 끝난다. 그가 슬퍼하는 아들의 죽음, 하숙집 모녀와의 관계, 네차예프와의 사상적 대결. 사실 그것들은 도스또예쁘스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경험>들을 글로 써낼수 있다는게 백배, 천배 더 중요하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도덕도 욕정도 이념도 아니라 글을 쓴다는 것. 즉, 미적인 동기이다. 그는 마치 무당처럼 일반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무당에게는 영혼의 세계, 작가에게는 진실의세계)를 보며 미친듯이 그것을 토해낸다. 그것이 작가이고, 어쩌면 인간의 모습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문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대단히 간결하면서도 대단히 풍부한 깊이를 담고 있다. 아무래도 아이디어가 비슷해서인지 김훈의 문체가 생각이 났었는데, 매우 간단한 진술로 이루어진 문장이 시나브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