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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잘 나가는 소설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존 그리샴은 변호사 출신답게 지겹도록 변호사 이야기를 반복해서 '전 독자의 변호사화'를 꾀하고 있고 마이클 클라이튼은 의사 출신답게 과학적 사실과 상상력을 배합하는데 특출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인간을 팩스처럼 공간과 시간을 뛰어 넘어 '전송'한다는 물리학적 상상력과 거기에 중세에 대한 역사학적 고찰을 잘 조화 시켰다. 이제 과학 한 가지만 가지고는 모자르는 것일까? 아니면 에코나 댄 브라운처럼 한 번 중세 공부를 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항상 그의 모든 소설처럼 무척 재미 있었고 잘 알지 못하는 유럽 중세에 대한 지식 또한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보고 너무 재미있어 영화도 비디오로 보았는데 그것은 너무 실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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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책의 주된 내용은 물리학의 양자이론에 관한 것입니다. 이전의 크라이튼의 소설처럼 전문적인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만, 내용중에서 쉽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양자이론을 이용해 양자컴퓨터와 공간이동(시간여행은 아닙니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한 중세유럽에서의 모험(?)을 다루고 있죠. 한가지 말하고 싶은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용중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갈수 있는 장소도 아니라는 얘기가 나오죠. 지금 두번째 읽고 있는데, 100% 이해된다고는 할수 없지만 어렵지 않은 편이며, 과학분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분은 재미있게 읽으실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도 좋은 책이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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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며칠 전에 이야기한 대로, 나는 이 마이클 크라이튼의 작품들을 읽으면 이 저자가 어떤 경로로 품은 꿈이 어떤 자취를 밟아 이런 거대한, 혹은 굽이굽이 매력을 품은 내러티브가 완성되었을지 머리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햔결같이, 이 아름다운 꿈의 행로는 파국으로 끝난다. '쥬라기 공원'에서 해먼드를비롯 이슬라 누블라의 테마파크 창업 멤버(창업 멤버라고 해도 되는 게, 기업은 고-중세 중국의 사직 창립처럼 일국의 완성이나 마찬가지로 장대한 과정을 밟는다. 그 '쥬라기 공원'은 기업의 프로젝트를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기업이었다. 크라이튼은 이처럼 뼈대만 앙상한 과학 담론만으로 이야기를 채우거나, 혹은 셸던처럼 철저히 장르 공식에만 충실한 계산 하에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고, 풍성한 캐릭터를 등장시킨다는 게 높이 사야 할 미덕이다. '쥬라기 공원'은 그래서, 영화와 소설이 비교가 안 되는 게, 이 캐릭터의 볼륨과 완성도 면에서도 그러하다. 심지어는 말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 마이클 크라이튼 특유의 전가의 보도처럼, 순수하게 자기의 꿈만 찾아 대학(어디든 무관. 다 열정적이고 제 할 일은 확실히 해주는 멤버들) 소속으로 제 직장이나 모교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탐사 따위에 열중하다, 느닷 미친 기업가의 부름을 받는다. 마치 '7인의 사무라이'에서 간베에가 뜻 있는 지사(라곤 하나 물론 그 영화에선 거지 삼신이 들러붙은 찌질이들처럼 보이는)들을 하나 둘 불러모으는 어레인지먼트를 연상케 하듯 말이다. 처음에는 반발하나, 목구녕이 포도청이라고 당장 제 꿈을 실현할 쩐을 무데기로 안기겠다는데 누가 배겨나겠는가. 이렇게 해서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어떤 이는 갖은 분투 끝에 제가 속해야 할 곳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테마파크, 혹은 여태 찾아 헤매던 난제의 답을 일거에 안겨줄 신천지라 함은, 이들이 몽매에도 그리던 모든 매혹의 요소를 원 패키지로 품은 달콤한 가나안이라는 소리다. 고생물학자에게 '쥬라기'를 재현한(정확하게는 그렇지는 않으나 일단) 먼 섬처럼 그 속을 헤젖고 놀고 싶은 곳이 또 어디 있겠으며, 역사학자에게 백년 전쟁 그 장기 향방을 결정한 생사의 전장처럼 뼈를 묻고 싶은 곳이 따로 존재할 수 있겠나 이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가장 처참한 환멸을 맞는다. 오래 품은 환상이 사멸하는 것만큼 정신에 대미지를 주는 게 없는데, 이들은 그에 그치지 않고 육체적 상흔까지 입거나 아예 목숨을 잃는다. 바로 이 점이, 아동물(대부분 무책임하게 정형화, 체제 순응적으로 가공된 꿈을 심어준다는점에서 공통인)과 크라이튼의 스페큘레이티브 장르1)가 차별화되는 점이다. We don't belong here.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 말처럼 씁쓸하고 화자의 절망을 나타내는 표현도 드물다. 영화에서 이 대사가 주로 어떤 상황들에서 등장하는지 한번 떠올려 보라. 주인공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낙원에서 추방당한 알몸의 남녀, 장원에 욽타리를 치는 지주의 서슬에 제 보금자리를 떠나는 농노, 큰형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미지의 바다 너머로 몸 붙일 땅 한뙈기를 찾아 떠나는 바이킹, 그리고 마침내 말과 정서, 의복과 먹거리 등 모든 것이 낯선 황막한 중세의 벌판과 산천에서 초주검이 된 이들 젊은 학자들이 그러하다. 크라이튼이 제시하는 결론은 그래서 냉소적인 동시에, 당장 두 발을 더디고 서 있는 '이곳, 그리고 지금'의 개량과 수호야말로 뭇 인간들의 소명임을 깨우치는 데에 있다. 그의 소설은 그래서 항상 낙천적이며, 품어 왔던 차안에의 애정과 집착이 산산조각나는 그 순간에조차 건강성과 재생의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그의 소설을 읽고 꿈을 키우게 하는 비결이며, 어른이 현실에서의 패퇴에 즈음하여 그의 작품에 잠시 몸을 담아 활력을 충전하는 근본적 동인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