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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사로서 교실에서 가장 바로잡고 싶은 편견 중 하나는 전통 한국 사회가 늘 정적이고 폐쇄적이었다는 오해다.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배하던 조선의 잔상이 워낙 강해, 많은 이들이 우리 역사의 본모습을 단조롭게 인식하곤 한다. 그러나 고려사 연구의 권위자 박종기 교수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려》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통쾌하게 깨뜨린다. 저자는 오늘날 현대 한국인의 심성에 흐르는 개방성과 역동성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추적하며, 그 본령이 바로 '고려'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교과서 서술의 행간을 촘촘히 메워주며 죽어 있던 천 년 전 역사를 우리 삶으로 생생하게 소환해 낸다. 우선 교사로서 무척 반가웠던 대목은 국호의 기원과 정체성을 명쾌하게 정립해 준 점이다. 고구려와 고려라는 명칭이 교과서나 일반 도서에서 종종 모호하게 혼재되어 서술되곤 했는데, 저자는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년) 이후 국호를 '고려'로 바꾸어 불렀던 당대의 역동적 분위기를 정확히 짚어준다. 나아가 궁예가 왜 나라를 세우며 다시 '고려'를 표방했다가 마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는지 설명하는 대목은, 국호가 단순한 이름이 아닌 그 시대 지배 세력의 '국가 정체성'을 반영하는 거울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세계사 속의 한국을 다루는 관점도 흥미롭다. 몽골 제국을 방문한 교황 사절단이 남긴 고려(솔랑게스)인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세계 속의 코리아'로 당당히 존재했음을 알게 한다. 책이 서술하는 고려의 군사력과 독자적 기술력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적은 비용으로 빠르고 단단하게 제작된 독특한 선체 구조의 '고려선'은 훗날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으로 이어지는 과학적 모태가 되었다. 또한 세계 최강의 대제국 몽골의 침략을 무려 30년간 막아낸 국가가 전 세계에서 고려가 유일했다는 사실은 고려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이를 뒷받침한 체계적인 정책의 결과였다. 21세기 복잡다단한 동북아 정세 속에서 우리가 고려의 군사력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저력은 'K-방산'과 문화유산의 독자적 성취로도 증명된다. 영웅 이성계를 만든 황산대첩의 숨은 주역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독자적 화약 무기를 제조해 왜구의 침입을 종식한 최무선이었다. 세계적인 '게임 체인저'였던 화약 제조 기술을 끝내 숨기려 했던 명나라의 견제를 뚫고, 문헌에 기록된 1377년보다 수년 앞선 1372년 전후에 이미 독자적인 염초 제작에 성공한 최무선의 집념은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문화적 성취 역시 눈부시다. 10세기 초 중국의 청자 기술을 수용했으나, 11~12세기 초 상감과 비색이라는 독창적 공법을 더해 '천하제일 고려청자'라는 세계적 명품을 탄생시켰다. 나전칠기, 종이, 먹 등 고려의 수공업 제품들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호평받은 역사는 오늘날 'K-컬처'의 진정한 원조라 부르기에 부끄러움이 없다. 의류 환경의 대혁명을 이끈 문익점의 목면 보급 역시 서구의 산업혁명에 견줄 만한 위대한 변화였다. 저자가 포착한 고려의 인쇄 문화는 현대 한국 사회와 더욱 굳건하게 연결된다. 지적 욕구가 충만한 고려인들이 발전시킨 금속활자 인쇄 기술은 조선의 문치주의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고, 대한민국을 인쇄문화 종주국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 찬란한 인쇄문화의 DNA는 오늘날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과 전 세계 외국 서점에 나란히 진열된 'K-Book'의 열풍으로 면면히 흐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조 왕건이 제정한 안동, 경주 등의 지명과 토성분정 정책은 오늘날 대한민국 행정지명의 약 70%의 뿌리가 되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고려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신분 이동이 활발한 '역동적인 사회'였다. 천민 출신 이의민이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고, 원 간섭기 거대한 국제 질서의 변동 속에서 하층민들이 무공, 역관, 환관의 재능을 통해 지배세력으로 대거 진출한 역사는 억압받던 이들에게 기회와 희망의 무대였다. 21세기 다이내믹 코리아의 기원은 바로 이러한 고려의 활기찬 역동성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교사로서 이 서평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바로 고려가 지녔던 '다문화적 포용성'이다. 흔히 현대의 다문화 사회 진입을 최근에 일어난 낯설고 새로운 현상으로 받아들이지만, 저자가 복원해 낸 고려의 모습은 이미 천 년 전에 훌륭한 다문화 사회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발해, 여진, 거란, 한인(중국인) 등 주변 종족들의 귀화를 파격적으로 수용했다. 이 귀화 이문족 주민의 총 수는 약 17만 명에 달했는데, 당시 고려 인구를 약 200만 명으로 추산한 《송사》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무려 전체 인구의 8.5%에 이르는 엄청난 비율이다. 외국인 비율이 5% 이상이면 다문화 사회로 분류하는 현대적 기준을 천 년 전에 이미 훌륭히 충족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외국인 근로자, 결혼 이민자, 유학생, 난민 등 다양한 배경의 이주민들을 새로운 구성원으로 맞이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고려의 귀화인 수용 전통은 우리가 마주한 갈등을 풀어내고 나아가야 할 포용과 공존의 명확한 역사적 근거를 제공한다. 결국 이 책이 도달하는 종착지는 명확하다. 고려의 찬란한 문명과 유산이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고려인들의 '역동성'과 '개방성'에 있었다는 점이다. 벽란도에서 푸른 눈의 상인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고, 신분의 한계를 넘어 꿈을 꾸며, 거대한 이주민의 물결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던 그 열정이 바로 오늘날 한류의 본령이다. 학생들이 시험을 위한 암기용 역사에서 벗어나 우리 안에 흐르는 역동적인 고려의 DNA를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한 다문화 시대를 살아갈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포용의 지혜를 건네는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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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이나 옛날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느 시대를 가장 먼저 생각할까? 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내가 매년 첫 수업 시간이나 고려 시대 단원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에게 항상 던지는 질문이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다. 70% 이상의 학생이 조선시대를 답하고, 나머지는 고구려나 백제, 신라를 이야기한다. 고려를 선택하는 학생은 지극히 드물다. 대중에게 고려는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사이에 낀, 생각보다 친숙하지 않은 ‘비인기 시대’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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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의 머릿속 역사 지도는 대체로 조선왕조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음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50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 익숙한 지도 위에 지워져 있던 또 하나의 선을 발견했다. 바로 '고려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선'이다. 역사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나"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의 이것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시키는 방식은, 수업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던지고 싶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역사와 현재를 잇는 일이야말로 교사가 늘 고민하는 지점인데, 이 책은 그 고민에 하나의 답을 제시해 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영문 국호 Korea의 기원을 다룬 대목이었다. 개항기에는 오히려 Corea 표기가 더 흔했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서 편찬된 자료들이 서구에 받아들여지면서 비로소 Korea가 보편화되었다는 서술을 읽으며, 나라 이름 하나에도 이렇게 복잡한 국제 관계의 역학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단순히 "고려에서 유래했다"는 한 줄로 끝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근대 동아시아의 힘의 흐름 속에서 다시 풀어낸 저자의 시선이 인상 깊었다. 최무선의 화약무기 개발을 K-방산의 원조로 읽어낸 부분도 오래 기억에 남았다. 왜구의 끊임없는 침입 앞에서 기존 무기의 한계를 절감하고, 원나라 기술자를 설득해 배운 기술을 독자적인 화약 제조로 완성해 낸 최무선의 이야기는, 외부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해 낸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방위산업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교실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학생들도 분명 흥미로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밖에도 금속활자의 발전 과정, 지명의 유래, 성과 본관 제도의 형성, 그리고 문벌에서 학벌과 재벌로 이어지는 계보까지, 책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여러 조각들이 실은 고려에서 비롯되었음을 하나하나 짚어 준다. 특히 현대 행정지명의 상당수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나, 성과 본관 제도가 고려에 와서야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산되었다는 설명을 읽으며, 교과서에서는 짧게 지나쳤던 고려사의 제도적 지속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오래 머문 대목은 다문화사회를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12세기 고려의 귀화인 비율이 8.5퍼센트에 달했다는 수치를 보고, 외국인 비율이 5퍼센트를 갓 넘긴 오늘날 한국이 이제야 다문화사회를 논하고 있다는 현실이 겹쳐 떠올랐다. 나 역시 은연중에 전근대 왕조국가를 폐쇄적인 사회로 상상해 왔던 것 같다. 그런데 고려가 다양한 배경의 귀화인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관료로 등용했으며, 그 후손들이 새로운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최근에 만들어진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읽은 성과 본관 이야기와 이 대목이 맞물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성씨 중 상당수가 실은 귀화인에게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다문화 가정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는 교실을 떠올리면, 이 대목은 그 아이들에게 "우리는 원래부터 섞여 있었다"는 말을 역사적 근거를 들어 건넬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이야기였다.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거나, 낯설지만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야기에 훨씬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이 책을 읽으며 앞으로 고려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더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을지 여러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조선 중심의 역사 서술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도, 이 책은 오랜만에 새로운 눈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보게 해 주었다. 고려사 수업을 준비하기 전, 또는 학기 말 심화 독서 자료로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