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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의 날개>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다운 자세한 심리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이 책은 유독 그 정도가 심하다(못해 토할 거 같다). 인물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보다 심리와 상황 묘사가 서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미나이(무려 '프로'!)에게 너무 힘들었다고 하소연했더니만 내 착각이 아니란다. 눈빛 하나를 두고 수십 페이지 동안 온갖 생각과 계산을 거듭하는 서사라고... 유난히 이 책이 그게 심한 까닭이 ①대화보다 침묵과 눈치가 중요한 플롯이고, ②행동하기보다 관조하는 인물들의 특성 때문에 상황에 대한 집요한 묘사와 과잉된 의식이 그 자리를 채운 셈이라고 알려주더라. "연극이 아니라 엑스레이 사진을 보는 느낌"이라는 설명에 완전히 격공했다. 아무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심리 묘사에 진이 빠져서 날아가려는 정신을 부여잡기 바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밀리가 어쩌면 이렇게 속터지는지 한참을 곱씹었다. 나는 작가의 전작 <여인의 초상> 속 이사벨이 남편 오스먼드와의 유독한 관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복장 터지던 사람이다. 그래서 다 알고도 속아주는 밀리, 물어보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는 밀리, 끝까지 침묵하는 '성녀' 밀리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를 억누르면서까지 그들과의 관계를 지키려 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거니와, 애초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까지 마다하는 모습이 납득되지 않았던 것이다. 밀리에겐 이사벨의 사촌 랠프보다 훨씬 든든한 스트링엄 부인과 루크 의사라는 좋은 어른들이 쌩쌩하게 곁에 딱 붙어있는데, 왜 그렇게 죽을 정도로 낙담해버린단 말인가. 타산적인 현대인인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성적인 거부감과 별개로, 책을 덮고 나니 밀리가 안쓰럽고 갸륵해서 긴 상처 같은 통증이 남는다. 특히 품위 있고 평화로웠던 덴셔와의 마지막 '약 냄새도 약 맛도 나지 않는'다는 대목은 다른 책에서 느끼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저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자인 나조차도 '비둘기' 같은 밀리에게 속아 넘어간 게 아닐까 두려워진다. 과연 정말로 밀리가 자기보호 본능도 없는 부처님일까?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보기에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밀리는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가장 강력한 카드인 '이상화'를 내놓은 것이라 짐작한다. 자비를 베풂으로써 케이트와 덴셔의 사랑을 망가뜨리는 잔인한 씨앗을 뿌린 것이다. 밀리는 마냥 순진한 성녀가 아니다. 오히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총명한 인물이다. 작가가 밀리와 스트링엄 부인이 영국에 오기 전 모습(뉴욕 생활과 알프스 여행)에 상당한 분량을 내준 것만 봐도 독자에게 '밀리는 등신이 아니랍니다' 라는 강력한 눈짓을 보낸 게 아닐까 싶다.ㅋㅋ 덴셔와의 마지막 대면을 아름답게 끝낸 것도, 이미 자신이 죽은 후일 것을 알면서 크리스마스에 편지를 보낸 것도 케이트에 버금가는 밀리의 고도의 지략인 셈.(거의 뭐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육참골단 수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이 책은 케이트와 밀리의 대결이었고, 양쪽 다 승자다. 케이트는 돈을, 밀리는 덴셔의 사랑을 얻었으니까. 그렇다고 결코 케이트가 미워지지는 않는다. 케이트는 소설 초입부터 내게 심정적인 '까방권'을 얻었다.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타락한 아버지와의 대면, 무식한 언니, 냉혹한 폭군 로더 이모까지. 차라리 밀리처럼 아무도 없느니만도 못한 가족을 두고 사는 건 지옥 그 자체다. 그렇기에 너무나 총명한 케이트가 왜 그렇게 독하게 굴 수 있었는지 지극히 공감한다. (물론 마크 경을 이용한 최후의 일격이나, 10부에서 덴셔에게 "난 정당하게 했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은 소름 끼치도록 잔인하지만 말이다. 마치 메데이아가 연상되기도 한다.) 덴셔 역시 뒷배 없이 능력만 가진, 유약하고 위선적인 청년이 20세기 초 영국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 뻔하기에 애처롭다. 케이트는 밀리를 등쳐먹으려 했다기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인 밀리에겐 마지막 행복을, 우리에겐 돈을'이라는 처절한 계산을 내렸을 뿐이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암시'와 '눈치'이다. 인물들은 서로에게 암시를 보내며 눈치를 살피고, 작가 역시 독자에게 끊임없이 단서를 던지며 눈치를 채게 만든다.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1부의 아버지 대면이나 2부의 미국 행보마저도 캐릭터의 성격을 독자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작가가 깔끔하게 숨겨둔 암시이다. 책 속 인물들끼리의 눈치 게임을 쫓아가기도 바쁜데, 독자마저 헨리 제임스의 암시를 끊임없이 받아먹어야 하니 우아한 고역이 따로 없다. 특히 작가가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일부러 '그' 혹은 '그녀'라며 고약할 정도로 대명사를 남발하는 것만 봐도 알쪼이다.. 하지만 그런 갖갖은 수법으로 내용과 형식을 이토록 완벽하게 일치시킨 거장의 설계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다행히 하지만 가까스로 꽁지 빠지게 도망은 안 쳤다.) 20세기 초반, 엄격한 품위라는 감옥에 갇혀 살던 케이트, 모든 것을 가졌지만 건강하지 못해 일찍 죽은 밀리가 참 안타깝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다. 읽을 때는 끝나지 않는 심리 묘사가 숨 막히고 지긋지긋했는데, 다 읽고 나니 오히려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결말도, 인물들의 의중도 다 아니까 제임스가 숨겨둔 암시를 좀 더 눈치 빠르게 읽어낼 자신이 생겼다. 읽기 녹록지 않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나름 많이 읽었는데 이 책이 베스트라고 생각될 정도.. 완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