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오덕 선생님이 화났습니다. 『우리글 바로쓰기』가 나오면 많은 학자들과 글쓰는 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비판하거나, 아니면 선생님 견해가 옳으니 지금부터라도 우리말을 살려서 글을 쓰자고 해서, 신문이나 잡지의 글이 달라지리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책이 나온 지 한 해가 지났는데도 책 내용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놓는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서 인사로 또는 전화로, 편지로 찬성과 공감의 뜻을 말해주었지만, 선생님이 애써 비판한 신문과 잡지의 글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책이 나온 지 한 해가 지나서 신문이나 잡지가 바뀌지 않는다고 답답해 하셨지만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 뜻을 받들어 ‘한국글쓰기연구회’ 같은 단체에서 바른 글쓰기 운동을 하고 있고, 바른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나라 전체를 두고 보면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글은 생각으로부터 나오고, 생각은 생활의 영향을 받으니, 글이 쉽게 바뀔 리 없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생활도 바뀌어야 글도 바뀔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비판을 멈추지 않습니다. -에 의해 → 따라서, 때문에, 에서, 으로, 가 …. 비교하다 → 견주다 정확하다 → 올바르다 세 장, 세 달 → 석 장, 석 달 입장 → 처지, 태도 적자 → 손해, 손실, 부족, 빚 시사해 → 귀띔해, 암시해 吾等(오등)은 慈(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 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누구든지 첫머리 정도는 대충 알고 있는 독립선언문입니다. 순수한 우리말은 겨우 토씨밖에 없습니다. 우리말이 중국글의 토로 떨어져버린 글, 이게 독립선언문입니다! 독립선언문이라면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사람이 스스로 주인된 백성임을 선언하는 글인데 스스로 그것을 어긴 셈입니다. 민중시인에서 생명 시인으로 나아간 김지하 시인. 시인의 글도 책에서 말을 배우고 책에서 관념을 배워 글을 쓰게 된 글쟁이들의 문제가 그대로 있습니다. 남의 글을 고치는 노릇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기는 편집자들도 비판 대상입니다. 이번 책에서 선생님이 가장 애써 비판한 것은 우리 소설의 문장입니다. 식민지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데 그 까닭은, 지금 우리말이라고 알고 있는 일본말이나 일본말법, 그지없이 귀한 우리말은 버리고 유식해 보이는 중국글자말을 즐겨 쓰고 있는 글버릇이 죄다 식민지시대에 비롯된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든 글 가운데서도 소설이 그릇된 말을 퍼뜨리고 병든 글의 형태를 만드는 데 앞장서는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시대 소설을 살펴 외국말병 증세를 환히 진단하겠다는 뜻입니다. 먼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은, 우리 신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장편소설로서 언문일치 문장을 완성했다는 이광수의 『무정』(無情)입니다. 이 작품은 옛 소설이나 신소설같이 중국글투를 섞거나 중국글자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써도 될 중국글자말이 가끔 나옵니다. 관형격조사 ‘의’도 일본글의 영향을 받아 쓰고 있습니다. 과거완료형이라는 ‘었었다’를 아무런 원칙도 없이 여기저기 함부로 써놓았습니다. ‘언문일치’ 문장의 모범이 된다는 소설이 우리말을 더럽히는 일에 앞장선 꼴입니다. 이광수가 쓰기 시작한 ‘구어체’를 자기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도록 개혁해서 완성했다는 김동인의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재미있게 쓰인 맺음꼴을 모조리 다 없애고 ‘다’ 한 가지로만 쓴 것을 ‘구어체 문장의 완성’이라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다’‘이다’와 같은 ‘현재법 서사체(敍事體)’를 안 쓰고 풀이말의 맺음꼴을 모두 과거형으로 쓴 이도, 일본 소설의 문장을 따라서 ‘그’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한 이도 김동인입니다. 순수한 우리말을 미개하고 야비하다고 보는 관점도 문제입니다. 1920년대 대표작가들인 현진건·염상섭·주요섭·나도향은 물론 카프 작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1930년대 들어서는 박태원의 중편소설 「小說家 仇甫氏의 一日」이 심각합니다. 이 소설은 중국글자와 중국글자말을 아무런 제한도 없이 마구 섞어서 쓴 글이 되어서 우리 글자만 익힌 사람은 읽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중국글자말을 비판하는 눈이 없으니 일본글이고 서양글이고 번역체 문장을 제대로 보았을 리도 없습니다. 실제로 일본말 직역한 문장과 ‘었었다’를 함부로 쓴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쯤 되면 그 뒤의 작가들을 살펴보지 않아도 우리 소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왔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언문일치 문장을 완성했다고 하는 이광수의 소설부터 시작해서 요즈음의 우리 소설까지 깨끗한 우리말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더라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도 이제, 바른 글쓰기는 나 자신의 절실한 문제가 되어, 한두 가지 말이라도 바로 써보려고 노력하고, 마침내 몸으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는 글에 다가가자고 마음먹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