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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으로 슬픈 피그말리온
읽을 책을 고르는 기준은 제법 완고해서 『겨울통』에 따라붙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될 사랑 이야기'란 호홍보 문구는 내게 큰 감흥을 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정용준 작가의 전작을 신뢰한다. 정용준 작가가 써내려온 이야기들을 믿는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스치듯이 마주치는 약자들의 이야기에 깊이 있게 공감하고 이를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는 흔하지 않다. 정용준 작가는 따뜻한 시선으로 담은 이야기를 훌륭한 필치로 적어낸다.
『겨울통』은 크게 세 개의 구간으로 읽힌다. 우선 첫번째 구간은 두 주인공 '인하'와 '동아'가 소랑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다. 두 사람은 도서관에서 문화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시인인 동아는 글쓰기를 가르치고, 조소를 전공한 인하는 그림을 가르친다. 남들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구는 인하는 유독 동아에게만큼은 데면데면하게 구는데, 마침내 인하가 떠나는 날 동아가 돌발적으로 마음을 터놓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한층 발전하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소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겨울통'이 동아에게 찾아온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겨울통'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이 겨울통이란 것이 '겨울에 헤어진 연인이 떠올라서 아픈 병'인가 했다. 이를테면, 영화 <러브레터>처럼 말이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읽어나가다보니, 겨울통은 작중에서 실존하는 '병'이었다. 낮이 가장 긴 하지에 발병하기 시작해 낮이 가장 짧은 동지에 절정에 달하는 병이다. 부분통인 경우엔 해당 신체만 사라지지만, 전체에 발병한 경우에는 몸 전체가 물이 되어 사라진다.
『겨울통』의 두번째 구간은 동아의 겨울통 투병기라 할 수 있다. 이 구간에서는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이 유독 많이 생각났다. 『구의 증명』에 나오는 구와 담은 병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읽는 이로 하여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사랑하냐는 물음이 절로 튀어나오게 만든다. 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까지 주워섬기고 이를 실행한다.
『겨울통』은 그 정도의 수위를 보여주진 않는다. 보다 온건한 버전의 『구의 증명』 같다. 으레 불치병이 많은 연인에게 그러하듯이, 겨울통은 동아와 인하 사이를 삐걱이게 만든다.
마침내 동지가 지나고 이 소설의 세 번째 구간에 진입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구의 증명』에 가까워지는 것인가, 했다. 다만 그렇지는 않았고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앞서 정용준 작가는 주변의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작가라 말했다. 요즘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에만 혈안이 된 시대에는 더욱 귀한 면모다. 문학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기도 하다. 정용준 작가는 남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의 전작 중 <젊은작가상>을 안겨준 「선릉 산책」은 장애를 가진 아이와 함께 선릉을 산책하며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다가 산문집 『소설 만세』에서 그는 어릴 적에 언어에 대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했다. 이때의 경험을 담아 『내가 말하고 있잖아』라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겨울통』을 읽으면서 인하의 병에 어쩌면 작가 자신의 경험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하의 고통과 어려움이 더 깊고 섬세하게 와닿았다.
『겨울통』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다시 본 <스타 이즈 본>가 떠올랐다. <스타 이즈 본>은 잭슨 메인이라는 스타가 정점에서 몰락하는 과정과 알리라는 무명 가수가 스타가 되는 과정을 절묘하게 교차시킨다. 이 둘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지만, 끝내 두 사람의 위치가 완전히 반대가 되었을 때 잭슨 메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더는 자신이 알리의 발목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몰락과 비상이 교차하는 <스타 이즈 본>의 구도 속에서 두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 행동들은 되려 그 반대의 결과를 불러온다. 그건 사랑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필연적인 비극이기도 하다.
『겨울통』에서도 인하와 동아는 서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은 때때로 상처가 된다. 어쩌면 최선을 가장한 회피일지도 모른다. 인하는 뒤늦게 동아가 자신에게서 보고 싶었던 것은 그럴듯한모습이 아니라 어눌한 모습일지언정 인하를 이루는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식이다.
그러나 작가는 인하를 절망 속에만 두지 않는다. 고통 속에만 홀로 두지 않는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 담겨 있던 희망을 몰래 인하에게 건네준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하는 희망에 찬 슬픈 피그말리온이 된다. 그 희망이 설사 자신을 괴롭게 할지라도, 인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 읽고 나니 왜 최진영 작가가 추천사를 썼는지 알 것도 같았다. 두 소설은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 대처하는 방법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담았다.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쓴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겨울통이라는 제목은 다소 의뭉스럽다. 하지에 발병해서 동지에 절정에 달한다. '태양의 저주'라고도 불리지만, 겨울에 앓는 병도 아니다. 다만 바이러스의 모양이 얼음 결정과 닮았고, 온몸이 시리다는 게 겨울통이라는 이름이 붙은 주된 이유다. 게다가 이 책이 발간된 지금은 막 여름이 시작하는 시기다. 책의 표지나 내용은 <러브레터>를 연상케 하는 탓에 나는 이 책을 겨울에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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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통》의 주인공은 인하와 동아다. 소설의 배경은 소랑이라는 작은 도시고. 그런데 ‘겨울통’의 의미는 뭔가. 표준국어대사전이나 우리말샘에도 없다. 다만 정용준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병명으로, 여름에 발병해 겨울(동지)이 되면 신체가 물처럼 녹아 사라지는 병으로 설명된다. 즉 ‘겨울통‘은 작품 속에서 설정된 질병 이름이자, 사랑과 상실을 드러내는 핵심 소재로 이해하라는 부연 설명을 곁들여 건네준다, 네이버에서다. 이렇게 나 자신을 다독이고 나서 책장을 넘겼다. 첫 구절인 ’인하 씨가 걸어오고 있다.‘에서 착각을 일으켰다, 독자인 나는. 아하! 인하 씨는 여자이구나! 이런 참 쓸데없이 착각하다니. 남자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작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참 어려워졌다. 소랑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내 이야기 내 책 만들기‘는 소랑 군민을 위한 문화사업이다. 동아와 인하는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말을 할 수 없는 인하, 대신 패드에 입력한 텍스트를 디지털 음성으로 출력 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인하. “왜 말을 안 해요?” “왜 말을 못 해요?” “왜 패드에 글을 써요?” 그때마다 인하 씨는 싫은 내색 없이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싫었겠지. 지겨웠겠지. 그런 그를 관찰하는 동아는 넘을 수 없는 단단한 벽을 느낀다. 인하 씨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털고 도서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동아를 봤다. 동아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지, 고개를 들었는데 동아와 눈이 마주친 건지는 모르겠다. 인하 씨가 손을 흔들었고, 같이 손을 흔들었다. 인하가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 인하는 동아가 좋고 소랑이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믿는다. 하지만 감춘 말도 있겠지. 이 마음 옆에 저 마음 있고 그 마음속에 다른 마음도 있는 것처럼. 어느 날 신체 일부, 혹은 몸 전체에 묘한 감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 느낌이 워낙 생경해서 증상을 느낀 이들은 그냥 알게 된다고 한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피가 통하지 않을 때 저리고 아린 통증이 두려운 느낌.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전염성은 없다고 알려졌지만, 전문가들조차도 발병 원인도 밝히지 못했고, 제대로 된 이름조차 붙이지 못했다. 하지에 발병하고 동지에 녹아내리는 현상을 두고 ’태양의 저주‘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공백을 두려움으로 채웠다. 불확실은 불안으로 발현 됐다. 그리고 어느 날 동아도 ’겨울통‘에 걸리고 만다. 둘은 슬픔에만 잠기지 않고 남은 시간, 서로를 힘껏 사랑하기로 하는데……. 언젠가 동아는 말했다. “죽음이 아니야. 물속에 눈도 귀고 숨도 피도 뇌도 있을 거야. 그러니 마음도 감정도 생각도 있겠지. 보고 듣고 생각도 하겠지. 꿈도 꿀지 몰라. 아니, 삶 자체가 꿈 같을지도 몰라. 나는 은근히 그게 기대가 된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만, ’겨울통‘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인하를 달래려던 말이었겠지만, 하늘의 별이 되어 너를 지켜볼게, 같은 동화 같은 상상력 이었겠지만, 인하는 동아가 정말로 그걸 믿었으면 좋겠다. 작은 일로 언쟁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까다롭게 구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가까운 사람과는 더욱더. 그러면서 인하는 솔직히 두렵다. 너무 두려워서 두렵지 않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할 수밖에 없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며칠이나 남았을까. 시계는 보지 않는다. 시간도 시각도 확인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