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히 접하게 된 칠레 작가.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졌지만, 내게 낯설게 다가왔던 루이스 세풀베다. 그의 초기작인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읽었다. 새벽 시간, 앉은 자리에서 내려놓을 새도 없이 마지막 장을 덮었다. 특히나 요즘 들어 절실히 느끼는 건, '세상은 넓고 좋은 책은 많다'라는 것. 단순하고 명쾌한 플롯, 긴장감을 돋우는 추리극 형태, 응축된 문장 속에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방식까지 소설 읽는 재미를 한껏 높여준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노인이 등장한다. 당시 상황은 독재가 심해지고, 노다지꾼들이 몰려들며, 백인 사냥꾼들이 기승을 부리던 때. 즉 문명의 이기가 원시 자연을 개발이란 미명 아래 파괴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런 속에서 원주민은 물론 야생 동물들 또한 삶의 터전을 잃고 혼란에 휩싸인다. 일찍이 노인은 아내를 잃고, 원시 부족인 수아르족과 함께 생활했다. 자연과 인간의 어우러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살아가던 중, 수아르족과 작별을 고한다.
다시 사람들 북적이는 일상으로 귀환한 노인은 '책을 읽을 줄 아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책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리라 다짐한다. 치과 의사를 통해 얻게 된 연애 소설을 읽으며 자연에서의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던 찰나, 어느 백인 사내가 의문의 시체로 발견된다. 살쾡이의 짓으로 판명나자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암살쾡이와의 한판 승부. 애초에 죽은 백인 일행은 수컷 살쾡이와 새끼들을 무자비하게 총으로 쏴 죽이고, 그것들의 가죽을 벗겨낸다. 철저히 영웅 심리로 말이다. 우기가 한창인 아마존 밀림에서 배고픔에 지친 살쾡이는 남편과 자식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복수를 감행했던 것. 마을 인근의 사내들이 하나, 둘 암살쾡이에게 살해당한다.
이때 탐욕스러운 마을 읍장은 노인에게 살쾡이를 처치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인간과 동물의 숨막히는 대결. 밀림을 오가며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대결구도가 한동안 계속된다. 노인은 그러한 살쾡이를 연민한다. 그 역시 철저하게 인간에 의해 삶 자체를 유린당한 동물이었기에... 특히 이 장면에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떠올랐다. 차이가 있다면, 자기 연민이냐 아니냐 정도? 결국 기나긴 대치 끝에 노인의 총에 죽고 만 살쾡이. 하지만 노인은 절망한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중략- 노인은 느닷없이 화가 난 사람처럼 손에 들고 있던 엽총을 강물에 던져 버렸고, 세상의 모든 창조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그 금속성의 짐승이 물속에 가라앉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P179~180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P180
마지막 단락에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잘 드러난다. 친절하다 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단락이 없었다면 좀 더 묵직한 울림이 있지 않았을까? 노인의 삶이 제시하는 바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더이상 원시 자연이 파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연애 소설' 읽는 행위로서 잘 드러낸다. 이성이 지배하는 인문 서적, 믿어지지 않는 역사 소설보다 두 주인공이 모진 어려움을 겪고 사랑하게 되는 해피 엔드가 노인의 마음을 움직인다.
루이스 세풀베다. 좀 더 그의 약력과 작품들을 살펴봐야 겠다. 독재 체제에 항거했던 살아있는 지성이라 평가받는 그다. 천상 여행자이기도 했고. 그의 작품들을 리스트에 담으며 또 다시 전작 읽기란 매혹적인 책읽기에 빠져들 것 같다. |
|
루이스 세풀베다는 아마존 개발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 환경 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고 했다. 당연히 그는 이 소설에서 개발과 발전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아마존 밀림 깊숙이 침투해온 이들에 의해 유린당하는 자연과 원주민의 삶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옹호는 구호도 아니고 선언도 아니다. 인간과 자연, 동물의 교감을 생생하게 전하며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에 공감했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의 최종 대결 상대는 암살쾡이다. 마지막은 마치 『노인과 바다』나 『모비 딕』을 연상시키는 인간의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루이스 세풀베다는 인간의 자연 정복이라든가, 그런 행위의 위대함을 찬양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은 암살쾡이를 끝내 죽였으면서도, 이를 비극으로 인식하고 있고 오히려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에게, 아니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암살쾡이가 왜 사람을 헤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과 대결하여 처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비극성을 느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비극성이야말로 개발의 비극이고, 부도덕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그런데 루이스 세풀베다에게 놀라운 것은, 그런 거대한 주제를 ‘연애 소설’을 매개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노인에게 연애 소설은 뒤늦게 찾은 안식처다. 사람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한 연애 소설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세계를 이해한다. 물론 그의 삶은 늘 그러했지만, 그것을 체계화하고 타자화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소설, 연애 소설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자연에 대한 예찬이면서, 무분별한 아마존 개발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책에 대한 예찬, 삶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데 대한 방법에 대한 소설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부분은 독서에 관한 또 다른 찬사이며, 책과 독서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할 여지를 준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읽은 책의 작가 연보는 2009년 ‘프리마베라상 수상’까지이고, 작가 소개에서는 작가 걈 영화감독, 출판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2000년) 바로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났다. 지구를 사랑한 소설가이자 활동가가 개발로 인해 등장했을 신종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것 자체가 비극이다. |
| 제목만 봤을 땐 꽤나 낭만적인 소설 같다 그러나, 안을 살짝만 들쳐보아도 인간의 자연파괴에 대한 고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남은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 강의 무분별한 파괴! 노인은 지혜로운 원주민과 동화되어 갈 정도로 밀림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잘 안다 밀림에 갇혀 연애소설만 탐닉하고픈 소박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大를 보지 못하는 인간들은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자꾸만 밀림 속으로 쳐 들어온다 다소 추리소설다운 긴장과 냉정한 유머와 탁월한 재치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올해 2월 16일을 기점으로 ‘교토의정서’가 발효됐다 가장 많은 오염물질을 내뿜는 미국은 교묘히 경계망을 빠져나갔다 세계에 대한 배반과 더불어 유유한 자연에 대한 배반이다 허파가 제 구실을 못하면 온 몸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조직은 괴사되고 결국 우리 몸은...우리 자연은 썩고야 만다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하는 비굴한 날이 오기 전, 지금 당장 우리 모두 환경운동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소설이 받은 티그레 후안 상은 살해당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받쳐졌다 그는 “성공하려면 목숨을 걸어라”라는 명언을 온 몸으로 실천한 진정한 행동주의자였다 |
| 내가 처음으로 읽는 남미작가의 소설이었다. 내가 이제껏 중점적으로 읽어오던 미국과 일본, 유럽 쪽 소설과는 다르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건, 1줄을 채우고도 남는 남미식 이름인데, 그런것은 빼고 보더라도 ''자연''이라는 무대, 그 중에서도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아마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자연이라고는 개발된 산과 바다밖에 모르는 나에게 순수의 자연이 존재함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또 이제껏 읽어온 소설의 배경이 대부분 개발된 도시인데 반해 처녀림이라는 배경은 나에게 낯이 설었다. 고향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도망쳐 개발하려는 처녀림으로 이주한 노인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조그만 집에서 치과의사가 구해다주는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한적한 삶을 즐기련느 사람이다. 하지만 뚱보읍장은 그를 한적한 삶에서 몰아내려고 한다. 그 것은 마을사람을 자꾸해치는 암살쾡이 때문인데, 아마존의 지리를 잘아는 노인에게 그 암살쾡이를 죽여달라고 제의를 한 것이다. 이제까지 읍장의 괴롭힘을 귀찮아하던 노인은 다시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조건하에 그 제의를 승낙한다. 그리고 그는 암살쾡이를 죽이고 연애소설이 기다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이 소설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자연의 소중함? 자연을 파괴하려는 이기심에 대한 고발? 잘 모르겠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도시인이다.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나에게 먼나라 이야기 일 뿐인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노인의 태도이다. 자연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개발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을 자꾸 못살게 구는 읍장에게 한가로이 연애소설을 읽는 시간을 빼앗기는게 싫어서 암살쾡이- 자연으로 대변될 수 있는-를 죽이러 가는 노인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개인의 이기심이다. 그런 나에게 이 소설이 살해당한 환경운동가 치코멘데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에게 바치는 소설이라는 것이라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다른 리뷰어분들은 다들 환경을 생각하게한다. 며 쓰셨는데 제가 비뚤어진걸까요..? 어쩄든 이 책을 본 뒤의 제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과 함께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
| 자연을 연구하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아마존의 밀림 속에서 자연의 생명활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 지식의 총화가 진화론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인류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주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연을 탐구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일 뿐 지혜가 아니다.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자연을 탐구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삶의 지혜와 생명활동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닌 더불어 사는 융화하는 자연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성에 길들여진 인간이 자연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 그 고통의 끝에는 때로 삶이 아닌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도 한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한 한 노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 혹은 작품의 노인은 자연을 단순히 이해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의 자연은 더불어 함께 하는 생명의 원천 그 자체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사람과 자연은 편의에 따라 파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불행하게도 그동안 세상의 거의 모든 작가들은 후자의 편에 서 있었다. 작가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대해서는 즐겨 썼지만 정작 인간의 자연 파괴적 행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였다. 거기에 반기를 든 작가가 바로 '루이스 세풀베다'다. 그의 첫 소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환경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이다. 소설은 문명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몰지각한 인간들의 자연파괴 행위에 대한 준열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과 생명활동에 대한 경배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소설에는 아마존 밀림 한 가운데서 외롭게 살고 있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라는 노인이 등장한다. 노인은 생뚱맞게도 연애소설을 탐닉한다. 그 이유가 뭘까. 그 설정의 의미가 뭘까.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병치. 작가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닐까. 문맹을 겨우 벗은 짧은 글실력을 가진, 더구나 평생 사랑 혹은 연애감정과는 거리가 먼 고달픈 삶을 살아 온 밀림의 노인이 연애소설을 탐닉하는 것은 자연의 진정한 의미와 생명의 원리도 모르는 인간들이 친환경개발론이니, 자원활용론이니 하는 경제논리를 앞세워 자연을 무참히 짓밟고 유린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아닐까.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가난과 주위의 편견을 피해 아마존의 밀림으로 이주한다. 이주하자마자 깨달은 건 정부의 무책임과 무성의에 대한 배신감이다. 밀림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이주민들은 불과 2년도 안 돼 대부분 생명을 잃는다. 거기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의 아내도 포함돼 있다. 한편 질기디질긴 게 또한 인간의 생명력이기도 하다. 우기에 아내를 잃은 노인 역시 뱀에 물려 사경을 헤매지만 다행이 밀림의 원주인인 수아르 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때부터 노인은 수아르 족 아닌 수아르 족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것은 곧 밀림의 법칙을 이해하는 과정이며, 그 대자연의 법칙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나이 들어 더 이상 수아르 족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된 노인은 엘 이딜리오의 선착장 한쪽에 집을 짓고 혼자만의 생활을 시작한다. 유일한 즐거움은 치과의사가 구해 온 연애소설을 읽는 것이다. 노인이 처한 또 하나의 현실은 여전히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문명세계와의 끈이다. 어느 날 양키의 주검을 발견한 마을의 독재자 뚱보 읍장이 다짜고짜 원주민을 살인범으로 지목하는 것을 말리려 나섰던 노인은 읍장의 체면을 구겼다는 이유로 자신이 지목한 양키의 살해범 암살쾡이와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노인은 암살쾡이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지만 그것은 썩 기분 좋은 승리가 아니다. "틀니를 꺼내 손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 비극을 시작하게 만든 백인에게, 읍장에게 금을 찾는 노다지꾼에게, 아니 아마존의 쳐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낫칼로 쳐낸 긴 나뭇가지에 몸을 의지한 채 엘 이딜리오를 향해, 이따금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주는,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 소설이 있는 그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180쪽) 인간의 자연파괴적 행각들이 빚어낸 밀림의 혼란, 그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소중한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만 원주민 수아르 족과 야생동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불행을 이해하면서도 그들과 맞서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 노인, 그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살쾡이를 죽인 후 내뱉는 노인의 자조적 독백은 그러한 어이없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고발이자 신랄한 비판이다. |
|
오늘 우연찮게도 환경을 다루고 있는 전시를 보고 왔다. 마치 연새 소설 읽는 노인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을 그림으로 다시 한 번 확인이라도 하란 듯이 말이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란 책의 제목만 듣고는 낭만적 소설일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낭만과는 거리과 먼 환경을 중심에 두고 있는 소설이었다.
인간의 야만성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마존이란 무대를 배경으로 아주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 해 가면서 하나씩하나씩 우리의 이김과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간의 탐욕스러움이 뱀의 허물이 벗겨지듯 그렇게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노인이 연애소설에 유독 집착하려고 하는 이유는 소설 말미에 알 수 있었다.
세풀베다란 작가의 이름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중심으로 생각하는 내용이 환경이란것을 알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한 환경의 중요성을 안다고 해도 나의 힘으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갈팡질팡 하는 경우를 나에게서 종종 발견한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고마운지도 모르겠다. 당장 무얼 하지 못하더라도 환경의 중요성, 그리고 지구의 위험성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게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으니깐... 어려운 환경이야기가 부담이 된다면 이렇게 소설로라도 먼저 만나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이 소설에 억지가 있다고, 너무 과장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딴지를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요한건 지구가 날로 파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니깐.
노인이 하는 말에 귀기울여 봐야 한다 우리모두...
|
|
남들보다 한참이나 늦게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매혹적인 제목에 이끌려 근사한 한편의 멜로물이라 멋대로 착각했다가 93년에 씌여진 장정일의 독서 일기에서 "진정 멋있다. 읽고 나자 마자 바로 내 뇌의 한부분이 될만큼 강력했다" 라는 찬사에도 불구,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자연파괴자들에게 맞서는 노인과 동물의 얘기란 걸 알자 읽을 마음이 쑥 들어가 버린 한심한 이유에서 였다. 환경이나 자연 보호같은 얘기는 늘상 하는 효과없는 공공기관의 캠페인 정도로 넘기던, 책 속의 노다지꾼이나 양키들과 다를바 없는 나의 정신 세계가 10년이 지나서야 이 책과 만나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노인이 애독하는 슬픈 역경을 딛고 아름다운 해피 엔딩을 맞는 연애 소설들보다 더 매혹적인 사랑과 슬픔, 그 안에서 반짝이는 위트로 읽는 내내 미소와 뭉클함을 선사한다. 성큼 다가온 장마와 태풍의 시즌, 무섭게 내리 퍼붓는 아마존 열대 밀림의 우기를 상상하며 다시금 이 책을 펼쳐들게 되겠지,,,,,,, [인상깊은구절]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읽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읽을 게 없었다. |
|
소설의 배경이 아마존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제목이 주는 전원적이고 낭만적인 감상과는 달리 소설은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는 아마존을 무대로 한다. 아마존의 '밀림은 새로이 정착한 이주민이나 금을 찾는 노다지꾼들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p.72)
그런 밀림에 사는 주인공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그는 연애소설 읽는 것을 좋아한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제 3세계인을 상징한다는 어느 yes24 독자의 리뷰는 그럴듯해 보인다.
"소설의 주인공 호세 볼리바르는 말 그대로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이다. 글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쓸' 수는 없는 노인이라는 인물 설정은 어쩌면 서구 문명을 수용해야 하는,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는(빼앗긴) 제 3세계인들을 상징한다."
사실, 나는 소설을 읽고서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 지 잘 모른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전에 이 리뷰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주인공인 노인은 자신이 글을 읽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을 그의 평생에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여긴다.(p.75) 읽을 줄 알았지만, 읽을 게 없었던 그는 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거주지를 잠시 떠난다. 그가 간 곳은 '엘 도라도'라는 작은 도시였다. 그곳에서 노인은 대략 50여 권의 책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노인은 큰 감동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결정하기까지 다섯 달 동안이나 책을 살펴본다.(p.85)
이 책은 한 노인이 연애 소설을 읽는다는 내용이 아니라,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 행하는 다른 일들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에 대한 약간의 단상을 정리하고 이 힘겨운 리뷰 쓰기를 마치려고 한다.
노인은 다섯 시간의 수면과 두 시간 정도의 낮잠 외의 시간에는 주로 소설을 읽는다.(p. 89)
'주로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비를 찾거나 무대가 되는 곳을 상상하며 보냈는데, 파리니 런던이니 제네바니 하는 지명이 나오면 그 도시들을 상상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는 노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노인처럼 독서를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는 정말 책 내용과 함께 행간에 숨어 있는 저자의 사상까지 알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였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 책은 쉽게 읽혀진다. 사건의 진행도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되고, 밀림이라는 독특한 무대는 신선함을 가미시켜준다. 루이스 세풀베다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 문학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음을 하나의 수확으로 생각하고 이만 이 고통스런(?) 리뷰 쓰기를 마친다.
아! 소설 리뷰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라는 생각이 나를 답답하게 하는 밤이다. 리뷰가 아닌 수필이 되어버리기 직전에 글을 마쳐야한다는 계획도 이미 틀려버렸다. [인상깊은구절] 노인은 잠이 없는 편이었다. 다섯 시간의 수면과 두 시간 정도의 낮잠 외의 나머지 시간은 주로 소설을 읽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랑의 신비를 찾거나 무대가 되는 곳을 상상하며 보냈는데, 파리니 런던이니 제네바니 하는 지명이 나오면 그 도시들을 상상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
|
제목만 봐서는 굉장히 로맨틱한 할아버지 또는 소녀같은 할머니가 나올거라 생각했었는데.. 밀림이란 공간, 수렵과 채집에 익숙한 원주민 생활을 하는,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같은 노인이 주인공이여서 굉장히 의외였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그의 영원한 사랑이자 아내, 돌로레스 엔카르나시온 델 산티시모 사크라벤토 에스투피난 오타발로
다소 좀 우스꽝스럽다 느껴질 정도의 긴 이름과 그 이름의 반복된 나열이.. 좀.. 뭐랄까. 마치 꼭 풍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랄까?? 여하튼 제목에서 연상했던 것과는 다른 스토리에 다소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긴 했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흡인력이 높아 책을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쏘옥~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근데, 이 이야기는 정말 픽션일까?? 만들어진 이야기라 하기엔.. 오홀.. 너무 비현실적인 현실 같아서.. 꼭 <파이이야기> 같았다. 진실이지만, 너무 동떨어져서 믿기 어려웠던 진실..
후에.. 지금으로부터 30년, 40년 후의 나는 어떤 모습의 노인이 되어있을까? 바람이 있다면, 지금처럼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자주 보고.. 블로그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 여유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모습이고 싶은데.. 거기에, 기왕이면.. 나랑 비슷한 성향을 가진 할아버지도 옆에 끼고서~ 말이지..^;;;ㅋ 그때쯤엔, 나는 또 어떤 책을 읽고 있을까??
p.123 역시 일행의 도움을 받아 몸의 균형을 잡은 채 겨우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온 힘을 주고 겨우 빼낸 것은 고무 장화가 아니라 창백하고 외설적으로 생긴 그의 오른발이었다.
p.138 돈이라고요? 벌면 뭣해요? 손에 땡전 한 푼이라도 쥐어지면 카드 노름판에 털어 넣기 바빴죠. 오죽했으면 물건 들일 돈이 없어서 쩔쩔맸을까요. 읍장 각하는 아직 잘 모르시나 본데,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서면 끝까지 헤매는 곳이 밀림이라고요.
p.176 살쾡이란 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흘리는 죽음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네.
p.179 노인은 짐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두 발의 총탄이 짐승의 가슴을 열어 놓은 것을 보며 치를 떨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몸집을 지닌 짐승의 자태는 굶어서 야위긴 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인간의 상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자신이 입은 상처의 고통을 잊은 채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
|
노인의 삶은 평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젊었을때 아름다운 부인을 맞이하여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었지만 그것 또한 쉬운일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짧은 결혼생활동안 사랑했던 아내를 보낸 후 노인은 수아르족과 함께 밀림속에서 오랜기간동안 수아르족과 함께 수아르족의 언행을 습득을 했지만 노인은 수아르족이 아니어서 문명의 세계로 올 수 밖에 없었어요. 밀림속에서의 노인은 자유를 느꼈고 동물과 느낌으로 눈빛으로 소통하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을거라 생각합니다. 노인은 한권의 연애소설을 읽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젊은시절 사랑했던 아내를 생각했을까요? 이 책에서 읍장은 아주 뚱뚱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그리고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죽인 살괭이를 살생하기 위해서 들어가게된 밀림속에서도 별빛을 벗삼아 책을 읽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동물들을 살육하는 해야 하는 괴로운 마음을 책으로 마음을 달랬을거라 생각합니다. 현 세상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목적으로 인해 밀림은 무참히 파헤쳐 지면서 그 밀림속에서 살고 있던 인디오족과 야생동물들은 그들의 새로운 삶을 찾아서 더 깊은 밀림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그들이 느껴야 했던 생명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노인은 살괭이를 살려 주자고 하는 마음과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해야 하는 마음의 중간에서 갈등과 망설임을 수 없이 겪어야 했겠지요. 노인이 어쩔 수 없이 살괭이에게 총을 겨누었을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노인에게 드러냈던 살괭이는 지금 자기의 모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을겁니다. 인간과 동물들은 서로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고동의 운명체로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