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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것이 저자의 지식과 경험을 응축하여 조리있게 정리된 저작물이다 보니, 한 번의 독서로 완전히 읽는 사람의 지식으로 소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서평, 후기 같은 되돌아보는 글을 적어보면 읽는 이의 시각으로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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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저자는 인간이 사랑에 이르는 여정을 ‘인간이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할 때’,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할 때’의 네 단계로 구분한다. 인간은 유약하기 때문에 우선 자기 자신을 돌보고, 하느님의 도움을 받은 다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사랑과 다정을 느끼면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저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 읽은 후에는 네 번째 단계가 결국 다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이 조금 의아해지는 독자가 많을 듯하다. 필요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왜 최고 단계의 사랑이 아닌 것일까? 저자는 마지막 단계의 사랑에 대해 ‘우리 자신이 오직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만 존재하기를 원하는’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이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된다. 궁극적으로 주님과 결합해 한 영혼이 된다는 말은 보통의 평신도로서는 조금 어렵게 다가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통해 얻고자 하는 평화와 자비, 영원한 생명에 가장 가까운 말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해제를 보면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낭만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르나르도는 의외로 십자군 원정이나 수도원 개혁 운동 등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던, 꽤 불안정한 시대의 성인이었다고 한다. 보통 성인들의 저서를 읽을 때 시대적 배경이나 그분의 사상적 뿌리를 알지 못해 어렵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신애론』에는 그의 유년 시절이나 영성생활을 엿볼 수 있는 해제가 함께 실려 있어 본서 부분인 1부만큼이나 해제인 2부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2부를 읽은 후 1부를 다시 읽으면 조금 의아하거나 어렵게 다가온 부분들도 더 잘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여겨지는 사랑에 대한 베르나르도의 깊은 사유를 엿보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가진 사랑이 나아갈 방향을 깨달을 수 있는 책이었다.
*캐스리더스 활동으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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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사랑할 의무]의 본문인 1장에서 가장 기억되는 부분은 역시 ‘사랑의 네 단계’이다.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는 단계, 나를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단계,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단계, 하느님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단계. 이는 가르멜 영성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이 영향을 주고 받았다기 보다는 하느님이 가르치시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간을 흘러 내려오면서 사랑에 대한 가르침도 그렇게 함께 흐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네 단계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육신’에 대한 가르침이다. 육신을 나쁘고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유한한 육신 안에 담으신 뜻을 생각하고 감사와 겸손을 가져야 한다고 하신다. 육신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고 때가 되면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부활의 때에 영혼은 죽지 않는 육신과 다시 결합된다는 것으로 성경 말씀을 풀이한다. 유한한 육신에 담긴 하느님의 영은 재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고 우리는 이 생을 육에 끌린 삶이 아니라 영에 따른 삶으로 이끌어 하느님의 나라에 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듣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는 하느님의 법, 사랑의 법이 작용하는데 노예나 용병의 관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정화시킨다고 한다. 사랑의 법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때문에 끌려가는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택하여 받아들이는 ‘삼위일체’와 같은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3장 7 사랑의 단계 참조) 결국 사랑의 법은 자유의 법이다. 사랑해야 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가 사랑을 택하기에 그것은 참다운 사랑이 될 수 있고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본모습이며 또 현세에서 이루어야 할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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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사랑할 의무'에 대해 말하는 책, 신애론.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낯간지럽게 느껴지는 세대에 살아가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대담히 이야기하는 이 책이 처음에는 많이 낯설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고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왜, 어떻게 하느님의 어떠한 모습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랑해야하는지는 잘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네 단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한다. 네 번째 단계: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할 때
과연 나는 어떠한 사랑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하느님을 위해 사랑한 적이 있을까.
사랑을 말하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한 적이 있을까? 하고 되돌아 본다.
참되고 진실한 사랑은 분명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계속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참되고 진실한 사랑. 깨끗한 마음. 바른 양심이라니 나는 참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을까. 계속해서 요동치고 혼란한 마음을 어떻게 정돈해 주님께 드려야할지 알려주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한 의무에 대해 생각해보고 스스로를,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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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이런저런 봉사를하며, 봉사자들을 만나고 또 신부님과 함께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는데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던 차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어요. 이 책에는 1부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 에서 사랑의 단계를 4단계로 나누어서 제시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어느단계에 해당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는 2단계~3단계 그 어느사이쯤 머물고 있지 않은가 생각이 들어라구요. 모태신앙으로 가늘고 긴...신앙생활을 하던 제가 최근 몇년 사이에 다양한 성당 내 봉사활동을 하면서 3단계에 써 있는
이 부분에 있어 제가 봉사하는 이유가, 이웃사랑=하느님사랑=큰 계명 이렇게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4단계인 영성의 최고봉까지 오를려면, 저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이기적 사랑'에서 '순수한 신적 사랑'으로 나아가라는 성인의 권고가 담긴 책으로 단순한 신학 이론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이끄는 실천적인 영성 지도서인 <신애론>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영적여정에 지속적으로 읽으며 참고해야 할 책을 만난 것 같아서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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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론》이전에《그리스도의 탄생》을 읽으며 마음에 붙들었던 인물은 바오로 사도였다. 어떻게 한 사람이 회심 이후 자신의 삶 전체를 그렇게까지 예수님께 내어맡길 수 있었을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때로는 무모해 보일 만큼 한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과연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은 왜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만큼 강렬한 존재가 되는가. 그리고 《신애론》을 만났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 책에서 신앙을 논리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든다. ‘우리는 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이 문장이 낯설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하느님을 사랑할 의무’라는 표현은 어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떻게 의무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베르나르도가 말하는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랑은 인간이 먼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먼저 주어진 사랑에 대한 응답에 가까웠다. 우리는 대개 필요해서 하느님을 찾는다. 위로받고 싶을 때, 삶이 흔들릴 때,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붙잡고 싶을 때 그분을 찾는다. 베르나르도 역시 인간 사랑의 시작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은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며 사랑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와 도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그분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방향으로. 이 대목을 읽으며 문득 바오로가 떠올랐다. 회심 이후 그의 삶은 더 편안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외롭고, 더 고통스럽고, 더 위험한 길로 향했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만약 신앙이 단순한 확신이나 교리였다면 그렇게까지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바오로를 끝까지 움직이게 만든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사랑이었을 것이다. 설명할 수 없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랑. 그래서 신앙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결국 신앙은 그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 아닐까. 하지만 《신애론》은 동시에 불편한 책이었다. 너무 맑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쉽게 지치고 흔들린다. 기도보다 해야 할 일이 먼저 떠오르고, 사랑보다 계산이 앞설 때도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지금의 나는 과연 어디쯤 와 있는 사람인가 돌아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깊이 남는 이유는 사랑을 완성된 상태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위해 시작되지만, 조금씩 하느님을 향해 움직여 가는 것. 어쩌면 신앙 역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단번에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흔들리면서도 다시 그 방향을 바라보게 되는 것. 《그리스도의 탄생》이 믿음의 시작을 묻는 책이었다면, 《신애론》은 그 믿음이 어디를 향해 자라가야 하는지를 묻는 책처럼 느껴졌다. 이해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사랑으로. 그렇게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다. 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단순히 설명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 끝내 사랑하게 되는 분이라는 것을. 어쩌면 신앙은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내 삶 안에 와 있던 사랑을 뒤늦게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늘도 아주 천천히 우리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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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크게 두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