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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문장들 사이로 각자의 속도로 머무는 삶에 대한 위로가 스며든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부담 없이 읽히면서도 여운이 오래 남았고, 페이지마다 삶을 대하는 저자의 시선이 담담하게 다가와 마음이 편안해졌다. 천천히 곱씹으며 읽기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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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저녁 8시 20분이면 습관적으로 TV를 튼다. MBC 스포츠 뉴스, 나의 아이돌 정영한 아나운서가 나오기 때문이다. 댄디한 차림새의 그가 아나운서 특유의 또박또박한 억양으로 스포츠 뉴스를 전한다. 사실 나는 스포츠엔 관심이 없다. 단지 정영한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기분 좋은 명쾌함을 즐기기 위해 스포츠 뉴스를 본다. 어쩌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그의 외모와 스포츠 뉴스는 엇박이다. 잘 안 어울리는 조합임에도 정영한이라서 괜찮다. 뭔가 사연담은 듯한 눈빛에서 또래 젊은이들이게선 느끼기 어려운 깊이와 우울이 감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참 열심히 스포츠 뉴스 멘트를 쳐 나가는 모습을 보다보면 ‘열심히’ 산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책을 냈다. <각자의 우주> 아나운서 입사 후 틈틈이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단상을 적은 에세이다. 튀르키예와 일본, 아랍에미리트, 포르투갈 4개국 도시들을 돌며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있다. 나이답지 않은 진중함과 속 깊은 얘기들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그런 배경엔 여섯 살 무렵부터 혼자 시장통 맥주집 윗층 단칸방을 지키며 홀어머니와 살아온 삶의 내력들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아마도 ‘말하고 쓰며’ 살고 싶다는 꿈은 그 시절의 단칸방에서부터 자라났을 것이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말끔한 외모와 아나운서라는 직업 이면에 자리한 어린 날의 어둠이 설핏 보여진다. 그의 고백처럼 수십 년이 지나서야 고백하는 성장의 배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 빛나 보이게 한다. 어린 나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관조할 만큼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일찍 철들었고, 그래서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 된 배경일 것이다. 문장은 외모만큼이나 반듯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첨부된 그가 찍은 사진들은 병적일 만큼 수평의 구도에 집착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아직 서른 살 남짓 젊은이의 완벽에 대한 강박증과 치기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들엔 광장과 카페, 그곳에 스며있는 사람들의 체취를 담아내고자 애쓴 흔적들이 느껴진다. 몇 년 전부터 유튜브 채널에서 여행 컨텐츠는 가장 인기있는 카테고리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영향으로 다양한 젊은 여행가들의 도전을 즐겨 시청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파민 터지는 그들의 여행기가 근원적으로 나와는 배치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극 내향형 인간이다. 때문에 외향형 인간들을 보면 반대급부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론 부담스럽다. 그들의 여행은 내내 스펙터클하거나 말초적 흥분을 자아낼 구실들을 찾느라 분주하다. 순간의 클릭수와 시청률을 높여야 하는 그들의 수고를 이해는 한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은 찰나의 흥분이나 스치는 풍광만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걷는 길위에서 혹은 머무는 마을에서 느끼는 사색이나 내적 감상들이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여행 유튜브를 보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그들의 도파민 여행이 의미없고 지루해진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유튜브 영상보다는 책이 내겐 더 어울리는 매체이다. 순간순간 멈추고 싶을 때 멈춰 사색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여행가 이지상 님의 책 이후 단숨에 여행기를 읽어낸 것은 참 오랜만이다. 정영한의 책이라는 이유로 선택했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선택했기에 기대치 않았던 만족감이 컸다. 여행지마다 느끼는 저자의 감상과 심리들이 마지막 성찰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마음을 적셨다. 타인과의 비교가 무의미한 이유가 각자에겐 각자의 우주가 있기 때문이라는 에필로그까지 정영한만의 매력이 물씬 전해진다. 매 챕터마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들이 있었지만 그 중 내게 가장 많이 와 닿은 것은 이 문장이었다. “나는 행복을 애써 얻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덤으로 얻어지는 것이라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살아서는 목소리로, 죽어서는 글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여정을 좀 더 오래 지켜보고 싶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