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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동안 〈진격의 거인〉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에 대한 상찬의 표현 중 ‘셜록 홈즈와 진격의 거인의 완벽한 조합’이라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소설 속 천재 수사관인 아나와 그 조수인 딘의 관계는 셜록 홈즈에서 셜록과 왓슨의 관계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그런가 하면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제국과 제국을 위협하는 레비아탄은 진격의 거인의 석조 방벽과 그 방벽을 기어 넘어오는 거인을 떠오르게 한다.
”침실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나무 여러 그루에 꿰뚫린 시체가 매달려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시체라는 사실을 알기조차 어려웠다. 뒤얽힌 가지 속에서 몸통 조금, 그리고 왼쪽 다리 일부가 보였다. 내가 그걸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시신이 제국 엔지니어 이얄렛(본부)들이 입는 자주색 군복을 입은 중년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오른쪽 팔은 완전히 사라졌고 오른쪽 다리는 작은 나무 둥치에서 쏟아져 나와 침실의 석목 바닥을 뚫고 들어간 뿌리 덩어리에 잡아먹힌 상태였다.“ (p.21)
사건은 한 귀족의 저택에서 커맨더 계급인 블라스의 나무에 잡아 먹힌 듯한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나는 이뮤니스(커맨더 바로 아래 계급이며 시그넘보다 두 단계 위의 계급)인 아나를 보조하는 시그넘(카눔 제국의 군 계급도 상 아래에서 세 번째에 해당)이다. 제국의 군인들인 변형된 전투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중 인그레이버에 해당한다. 인그레이버는 ‘모든 것을 기억해서, 본 것을 전부 그대로 묘사하고 모든 대화를 들은 대화를 들은 대로 전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아나를 힐끔 봤다. 40대 후반에서 50대(변형된 사람 중에는 나이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있다)로 보이는 키 크고 마른 여성, 아나는 나처럼 피부에 회색이 감돌았지만 확실히 흰 편이었다. 외출을 하지 않는 탓도 있었지만, 제국 내륜에 살던 피부색이 흰 인종인 사지족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의 얼굴을 나 같은 탈라족보다 각지고 좁았다. 새하얀 머리칼, 큰 미소, 노란 눈을 가진 아나는 종종 고양잇과 동물처럼 보였다. 적당한 햇살을 찾아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도 마주치는 생쥐를 괴롭히려 드는 미친 집고양이랄까.“ (p.49)
나는 그러한 인그레이버의 능력을 활용하여 아나의 명을 받아 사건 현장에 투입된다.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아나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아나는 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생각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아나는 대부분 눈가리개를 한 채로 내 설명을 듣는다. 때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다음에 조사할 사람을 지정하기도 한다. 의구심을 가진 채 조사를 진행하고 내가 전달한 정보는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된다.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체제 속에서 태어나죠. 가문의 번영을 위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변화를 강요하는 관계와 조직에 매여 있고요. ······그게 바로 제국 아닌가요? 당신은 제복을 입었고, 나는 귀족의 옷을 입었지만 우리 둘 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라고 강요받고 있어요.“ (p.321)
이러한 모든 사건의 배후는 어쩌면 이들이 소속되어 있는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해벽을 비롯하여 세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로부터 침범하는 레비아탄으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제국이다. 하지만 제국이 인간을 지키는 것처럼 인간들은 바로 그 제국을 지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도 같다. 소설의 성공은 어쩌면 이 가상의 제국을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실감나고 핍진한 제국 덕분에 소설은 성공적이다.
”센 세즈 임페리야. 제국이 강한 것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너도 거기 포함된다, 디니오스 콜. 그리고 제국이 약한 것은 종종 강한 소수가 우리 다수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탈라그레이에서 벌어진 일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여기 배정되었고, 그렇게 할 생각이다.“ (p.491)
설계된 가상의 제국이 제공하는 실감과 동시에 복잡한 사건이 지니는 치밀함이 이 소설 《오염된 잔》을 휴고상 그리고 세계환상문학상의 수상작으로 만들었다. 층층이 나뉘어져 있는 제국의 계급들과 이들이 지닌 능력을 기억하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조금씩 따라가다보면 저절로 습득이 가능해진다. 소설은 ‘레비아탄의 그림자 시리즈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오염된 잔》을 읽었다면 시리즈의 나머지를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로버트 잭슨 베넷 Robert jackson Bennett / 이나경 역 / 오염된 잔 (The Tainted Cup) / 황금가지 / 517쪽 / 2026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