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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출발 신호용 권총 정도만 쏴도 북극곰이 도망갔는데, 최근에 북극곰 한 마리를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 실탄 일곱 발을 쏴야 했다.
보통은 발톱만 휘둘러도 인간이 도망갔는데, 최근에 인간 한 명을 완전히 쫓아내기 위해서 일곱 번이나 물어야 했다.
지금 누가 누구의 서식지를 침범하고 있는가?
이 서늘한 질문은 우리가 그동안 의심 없이 믿어왔던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환상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동물과 슬기롭게 공존하며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과연 그 말은 동물들에게도 같은 의미일까?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논픽션 작가 프랑크 베스테르만의 신간 《공존한다는 착각》은 인류가 자랑하는 영광스러운 문명 이면에서, 탐욕스럽게 자연을 소유하고 통제해 온 우리의 민낯을 파헤친다.
이 책은 동물의 특성을 우화적으로 기록하던 중세의 '동물지(Bestiary)' 형식을 빌려와 '현대판 동물지'를 표방한다. 저자는 16세기 북동항로를 개척하려던 네덜란드 탐험대의 항해일지를 펼친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려던 '인간 영웅'들의 도전과 실패담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들 앞에 낯설게 등장했던 동물들의 흔적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멸종의 벼랑 끝에서 살아남은 일곱 종의 동물 일각돌고래: 인간의 환상이 투영되어 동화 속 유니콘이 되어버린 사연 노르웨이레밍: '집단 자살'이라는 오해를 낳은 인간의 시선 유럽뱀장어: 인간이 세운 댐으로 인해 수천 년간 이어온 생명의 물길을 잃어버린 비극 흑기러기: 잃어버린 낙원과 서식지에 얽힌 이야기 북극곰: 때로는 문명을 위협하는 '무법자'로, 때로는 빙하 위의 '불쌍한 희생양'으로 인간 입맛에 맞게 소비되는 현실 순록: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밀려나는 툰드라 생태계의 민낯 왕게: 인간의 개입으로 서식지를 옮겼다가 어느새 생태계를 파괴하는 '외래종 침입자'로 낙인찍힌 모순
책은 400년 전 극지방의 과거와 현대의 복잡한 사회 구조를 가로지르며, 동물들의 삶이 인간의 자본과 정치적 목적에 의해 어떻게 짓밟히고 제멋대로 오독되었는지 낱낱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레밍의 '집단 자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의 이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레밍들은 촬영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코스로 내몰려, 피할 곳 하나 없이 절벽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생태계의 비극마저 철저히 연출해 낸 이 장면은 인간의 이기심이 도사린 진짜 '잔혹 동화'다.
'가짜 공존'이 만들어낸 잔혹 동화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고 뼈아프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자연을 사랑한다"는 말조차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며, 동물들에게는 냉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태계 안에서 다른 동물들에게 그저 또 다른 '야생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자연을 재단하고 통제하려는 오만한 '영원한 포식자'로 군림해 왔다. 결국 우리가 '공존'이라는 따뜻한 단어 안에 숨겨둔 것은 다름 아닌 소유를 향한 폭력적인 욕망이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여정은 놀랍도록 지적이고 매력적이다. 16세기 탐험가 바렌츠의 극지방 항해기를 시작으로 정치, 역사, 과학, 문화적으로 파고드는 저자의 집요한 취재력과 스토리텔링은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책장을 덮고 나 묵직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급변하는 환경과 벼랑 끝에 몰린 생태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슬기롭고 현명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의 실마리는 어쩌면 오만했던 인간의 언어를 거두고,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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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네덜란드의 탐험가 빌럼 바렌츠는 유럽에서 북극해를 통과하여 중국(케세이 왕국)으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할 목적으로 북극해로 배를 출항시켰다. 그는 세 번째 항행에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와 동료들은 항해기를 남겼다. 저자 프랑크 베스테르만은 바렌츠와 관련한 항해일지와 지도를 토대로 그의 행적으로 추적하고, 자신의 경험을 덧붙여 이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가 기반이 되는 소재로 삼은 것은 일곱 가지 동물이다(그래서 원서의 제목은 “일곱 동물들이 되물어온다”다). 그 동물들은 일각돌고래, 노르웨이레밍, 유럽뱀장어, 흑기러기, 북극곰, 순록, 왕게다. 이 동물들은 지금도 살아남은 동물들이다. 이 중에는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여전히 번성하고 있는 동물들도 있다(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북극곰은 개체 수가 즐어들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바렌츠의 항해 이야기는 사실 어떤 구실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 말은 이중적인데, 첫 번째는 바렌츠가 과연 무슨 이유로(정말 북극항로 개척?) 배를 띄웠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바렌츠의 항해가 그렇다는 얘기다. 특히 바렌츠의 항해를 그 일정과 경로를 추적하고 언급하고, 여러 일화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건 항해 일지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의 동물을 화두로 삼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동물들도 사실은 그 동물 자체를 이해한다기 보다는 그 이야기를 토대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시 보기 위한 것이다(“세계를 다시 낯설게 만드는 작업”). 이 일곱 동물을 통해서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즉 인간이 그 동물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그 동물들의 의도와 마음을 알고 있느냐이다. 그것은 우리말 제목과 연관되는데, 우리는 그 동물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동물들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브뤼노 라투르의 ‘사물의 의회’라는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들이 그동안 누리던 특권을 내려놓고, 지구에 관한 의사 결정에 동물, 식물, 그 밖의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이는 인간 중심의 모든 사고와 결정을 비판하는 것인데, 저자가 이를 언급하지 않는 대목에서도 이에 관해서 적지 않은 동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사물의 의회’에서도 동물, 식물 등의 권리를 누가 대표하고 목소리를 내느냐는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것도 인간의 목소리가 나타난다. 그건 인간의 주장인가? 뱀장어의 주장인가? 그래서 인간의 목소리 밖에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물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삶, 존재를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물의 존재를 인간 위주로만 파악해서는 이 지구의 미래는 그리 긍정적이지만 않을 것이다. 이정모 관장이 추천사에 쓰고 있듯이, 이 책은 어떤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질문은 한다. 매우 곤혹스럽고, 또 정답도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답을 해야하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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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북극곰이 빙하 위에 외로이 서 있는 사진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그 사진 아래에는 대개 이런 문구가 붙는다.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 '함께'라는 단어가 편안하게 미끄러져 들어온다. 마치 인간과 북극곰이 같은 편인 것처럼, 같은 위기를 공유하는 동반자인 것처럼. 그러나 프랑크 베스터만의 책 <공존한다는 착각>을 읽으면서 나는 그 '함께'라는 말이 얼마나 교묘한 위안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의 동물들, narwal, 레밍, 장어, 기러기, 북극곰, 순록, 킹크랩 등은 인간과 함께 세계를 나누어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이 만든 세계 안에서 밀려나고, 줄어들고, 소멸한다. '공존'이란 인간 쪽에서 내민 손짓일 뿐, 상대방은 그 단어를 알지 못한다. 공존(共存)이라는 한자를 뜯어보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이상한 비대칭이 숨어 있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허락'하는 쪽과 '허락받는' 쪽이 생긴다. 우리가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할 때, 그 문장의 주어는 항상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에게 공존을 제안하고, 자연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베스터만이 쓴 장어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아프슬라위트다이크(한때 수리토목 기술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제방)는 장어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되었다. 장어는 사르가소해에서 태어나 유럽의 강으로 올라오고, 성장한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가 산란한다. 제방은 그 길을 막았다. 환경운동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과학자들이 수치를 제시하고, 정치인들이 고심한다. 그러나 장어는 이 모든 논의 바깥에 있다. 논의의 대상일 뿐, 논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것이 공존의 문법이다. 공존은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내리는 선언이다. 레밍에 관한 장에서 베스터만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끌어온다. 맬서스는 인구가 식량 생산 속도를 초과하면 전쟁, 질병, 기근이 자연적 교정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레밍이 개체 수가 과밀해지면 집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듯, 인간 사회도 어떤 임계점에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섬뜩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존의 가능성을 근본에서 흔들기 때문이다. 공존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제한할 때 성립한다. 그런데 맬서스적 세계에서 욕망의 제한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파국이 강제할 때에야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파국을 경험한 뒤 잠시 수그러드는 존재일지 모른다. 한 세기 전의 제국주의자들도 '문명의 공존'을 말했다. 그들은 피지배 민족을 '교화'하여 함께 발전하겠다고 했다. 오늘날의 환경 담론도 비슷한 구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지속 가능한 개발', '그린 성장', '탄소 중립‘ , 이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편의를 유지하면서 자연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세련된 형태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흑기러기(rotgans)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흑기러기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고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은, 시베리아의 굴라크 노동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기러기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통해 굴라크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기 25년 전에, 기러기들은 이미 그 참상을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나를 오래 붙들었다. 기러기들은 굴라크를 알지 못했다. 스탈린을 알지 못했고, 냉전을 알지 못했으며, 인간의 이념 갈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번식지로 가다가, 혹은 돌아오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 인간 세계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담고 있었다. 공존이 착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연과 공존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도덕을, 우리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 기러기들은 인간 사회의 비극에 속절없이 휘말렸고, 그것을 '착취'라고 이름 붙일 언어도 없었다. 공존이란 적어도 두 주체가 서로를 인식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진지하게 자연을 주체로 대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공존이라는 착각은 완전히 무익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착각에도 종류가 있다. 해로운 착각은 현실을 가리고 행동을 막는다. 그러나 이로운 착각은 현실보다 조금 앞서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을 향해 우리를 이끈다. 공존이라는 단어가 비록 지금의 현실을 과장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지향점이 될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공존을 이미 달성한 것처럼 말할 때다. 그때 착각은 해로워진다. 북극곰 사진 아래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라고 쓸 때,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는다. 그 위안이 행동을 대체한다. 공존을 선언하는 순간, 공존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멈춘다. 베스터만이 그린 세계에서 진짜 용기 있는 목소리들은 착각을 거부한다. 수문을 열어 장어의 이동 통로를 복원하라고 외치는 환경운동가들, 순록 이동 경로를 가로막는 국경 분쟁을 고발하는 연구자들, 킹크랩의 침입이 인간의 실험적 개입 때문임을 기록하는 해양생물학자들. 그들은 공존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존이 얼마나 요원한지를 직시하면서,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나아간다. 베스터만의 책 제목은 <공존이라는 착각>이다. 책 속의 동물들은 실제로 공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다. 제목의 '공존'은 은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은유는 무엇을 꿈꾸는가.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주체가 되는 세계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장어가 자신의 이동 경로를 요구하고, 기러기가 번식지의 안전을 주장하고, 북극곰이 빙하의 보존을 요청할 수 있는 세계.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는 강이나 숲에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뉴질랜드의 왕가누이 강은 법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았다. 자연을 공존의 '대상'에서 '주체'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이것이 새로운 공존의 문법을 향한 첫 걸음일 수 있다. 공존은 인간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갖는 구조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어야 한다. 착각에서 출발하더라도, 그 착각이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되려면, 우리는 공존을 완성된 상태가 아닌 끝없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북극곰은 우리에게 공존을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공존을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요청이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든다. 말 없는 자를 위해 말하는 것, 그것이 착각을 현실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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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문장 중에서 첫째 #북극곰 #Polarbear~ 살다보면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 기사, 독서중 감동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 북극곰인지 불곰인진 몰라도 기억에 떠나지 않는 장면중 재혼한 남자가 가족이된 딸과 친해지기위해 야생 배냥여행중 곰의 습격으로 아버지가 사망하고 딸이 엄마와 통화하는 내용인데 곰이 자길 먹고 있다며 죽어가는 장면인데 토픽인지 기억은 가물하다. 10여년이 넘었는데 곰만보면 어김없이 생각난다. 하지만 북극곰의 사투는 여전이 위태롭다. 극지의 해빙은 얼음위 사냥으로 진화한 곰으로서는 앞날을 기약할수없을 정도로 먹이사슬에서 취야해있다. 스발바르제도나 뉘올레슨 관광객 기지촌의 사투는 대담해진 곰과의 사투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둠이 찾아오지 앉는 밤이라고 졸음까지 오지 않는것은 아니다. 그순간 무시무시한 곰발바닥이 그대면상을 휘갈릴수있다. 머리가~p.p 261~2 291 둘째 #순록 #reindeer #馴鹿~ 네덜란드인에게 순록은 순백의 종이를 오린것처럼 순수하게 보였던가보다. 반면 러시아를 관통해 노르웨이로 회항하는 이동통로는 국가적 이해관점차로 또다른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예전 동물의왕국에서 늑대나 표범의 먹이로 잡힐때 가젤하고는 또다른 커다란 순록이 좀더 저항하기를 응원했었다. 훈록에도 종류가 있는데 스발바르순록은 좀 작은 스몰로 무리를 추구했던가보다. 아마 작음을 커버할 방어기재일것이다. 그렇다면 환영하오. p.p 321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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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말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는가.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 흘리고, SNS에 멸종 위기종 해시태그를 달며, 국립공원의 울창한 수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는 행위들이 진정한 공존의 증거일까. 네덜란드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프랑크 베스테르만은 신작 《공존한다는 착각》에서 인류의 이 안온하고 익숙한 자기만족에 조용하지만 단호한 균열을 낸다. 16세기 네덜란드 탐험가 빌럼 바렌츠의 항해 기록과 기후 위기의 최전선인 현대 북극권을 생태학적으로 교차시키는 이 책은, 우리가 ‘공존’이라 믿어온 외교적 수사 뒤에 숨겨진 정복과 지배의 역사를 가차 없이 폭로한다. 런던의 테러 현장에서 시작된 질문책은 뜻밖에도 극지방의 빙하가 아닌, 2019년 11월 29일 런던 템스강 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연회장 피시몽거스홀에서 시작된다. 가석방 중이던 테러범 우스만 칸이 흉기를 휘두르며 무차별 난동을 벌이던 절체절명의 순간, 현장에 있던 시민들은 벽에 장식품으로 걸려 있던 일각돌고래의 기다란 엄니(slagtand)를 떼어내 범인에게 맞섰다. 이 극적인 제압 장면은 곧 영국 전역에 ‘평범한 시민들의 용기’를 대변하는 영웅 서사로 미화되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베스테르만은 이 영웅담의 환호 속에 묻힌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해서 피시몽거스홀 복도에 그런 진귀한 엄니가 걸려 있게 된 걸까?” 북극의 차가운 바다를 가르던 일각돌고래의 신체 일부가 어떤 제국주의적 약탈과 소유의 경로를 거쳐 런던 중심가 사교계의 벽면 장식물로 전락했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인류가 수백 년 동안 동물의 몸과 이야기를 약탈해 자신들의 신화, 도덕적 훈육, 문명적 권력 서사의 소품으로 삼아왔음을 폭로한다. 일각돌고래의 엄니가 서구식 ‘용기의 상징’으로 전유되는 순간, 정작 그 엄니의 주인이었던 생명체는 서사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지워진다. 레밍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우리가 동물의 삶에 얼마나 오만하게 인간의 서사를 투영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기만적인 사례가 바로 노르웨이레밍이다. 개체 수가 지나치게 불어나면 스스로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들어 ‘집단 자살’을 선택한다는 레밍의 이야기는 대중매체와 교과서에서 오랫동안 정설처럼 다뤄졌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허구다. 생태학적 진실은 훨씬 더 단순하고 눈물겹다. 먹이가 부족해지는 폭발적인 번식기, 생존을 위해 새로운 영토를 찾아 이동하던 레밍들은 강이나 바다를 만나면 그저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물에 뛰어들 뿐이다. 문제는 이 작은 설치류가 헤엄쳐 갈 수 있는 한계 거리가 고작 300미터 내외라는 점이다. 조밀한 털에 물이 스며들어 몸이 무거워지면, 이들은 그저 지쳐서 익사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레밍은 순교자가 되려는 것도, 희생양이 되려는 것도 아니며, 죽고자 하는 마음도 없고, 안락사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죽음에는 그 어떤 숭고한 결단도, 자기희생의 의도나 목적도 없다. 단지 처절한 생태학적 조난 사고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를 ‘집단 자살’로 명명했는가. 베스테르만은 인류가 품은 깊은 무의식적 공포, 즉 인구 과잉이 가져올 인류의 파멸이라는 ‘맬서스주의적 공포’를 레밍이라는 존재에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레밍이라는 야생의 주체를 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상영하는 스크린으로 삼아 왜곡된 우화를 감상하고 있었던 셈이다. 막힌 물길, 그리고 ‘가짜 공존’의 기술책에서 가장 묵직하고 서늘하게 다가오는 대목은 유럽뱀장어에 관한 장(章)이다. 대서양 사르가소해에서 태어나 해류를 타고 유럽의 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수십 년을 살다가, 생의 끝자락에 다시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고향 바다로 돌아가 산란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뱀장어의 일대기는 우주적 경이 그 자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아프슬라위트데이크(Afsluitdijk) 방조제를 비롯한 인간의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들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이 거대한 생명의 물길을 가로막았다. 방조제 공사로 자위더르해를 ‘파괴된 생태계’의 전당으로 만들어버린 문명의 폭력 앞에 회귀의 길을 잃은 유럽뱀장어는 멸종 직전의 벼랑 끝으로 몰렸다. 인간은 다시 기술을 들고 나왔다. 인공 어도를 설치하고, 양식 기술을 개척하며 "인간의 위대한 과학이 뱀장어를 보호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선포한다. 저자는 이 지점에 가장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길을 막아놓고 좁은 우회로를 뚫어주는 것이 과연 공존인가? 생태계를 원천적으로 유린해 놓고 기술적 처방이라는 미봉책으로 죄책감을 면제받으려는 오만한 태도야말로 ‘공존’이라는 도덕적 언어로 위장한 또 다른 형태의 세련된 지배, 즉 ‘가짜 공존(fake coexistence)’에 불과하다. 동물을 주체로 바라볼 때베스테르만이 제시하는 문학적 처방전은 ‘조프로자(zoöproza, 동물 산문)’라는 낯설고도 급진적인 글쓰기 장르에 담겨 있다. 이는 동물을 인간 서사의 조연이나 우화적 알레고리로 축소하지 않고, 역사와 자연을 함께 겪어낸 대등한 주체로 대면하는 방식이다. 16세기 극지 항해사들은 수평선 너머로 견고한 영토가 있는 줄 알고 필사적으로 다가갔으나, 이내 버터처럼 스르륵 녹아 사라지던 신기루를 가리켜 ‘보터란트(Boterland, 버터의 땅)’라 불렀다. 오늘날 인류가 외치는 ‘친환경’과 ‘공존’이라는 구호는 실상 이 ‘보터란트’와 같다. 멀리서 보면 숭고해 보이지만, 정작 인간의 안전과 영역이라는 경계선과 충돌하는 순간 신기루처럼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생태계 안에서 다른 종들과 동등하게 연약하고 방황하는 ‘길 잃은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자각. 《공존한다는 착각》은 이 뼈아픈 자각을 확성기로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대신 피시몽거스홀 벽에 박제된 엄니 앞에 , 차가운 물속에서 무력하게 지쳐가는 레밍 앞에, 방조제에 가로막힌 채 길을 잃은 뱀장어 앞에 우리를 조용히 앉혀두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정말 이것을 '공존'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책을 덮고 나면, 그 오만한 단어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 묵직한 동물 산문이 지닌 저항이자 구원의 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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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한다는착각 #프랑크베스테르만 #다산북스 #신간추천 #도서협찬 인간이 외치는 자연과의 공존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이 책은 우리가 실은 얼마나 인간만을 기준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행동하는지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저자는 16세기 극지방 원정대의 항해일지 속에서 찾아낸 일곱 동물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이기적인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습니다. 중간중간 "동물들이 인간에게 말을 건넨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라는 유머러스한 상상을 더해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네요. 특히 책을 읽으며 동물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오만한 시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녹아내리는 빙하 위의 위태로운 북극곰 사진을 보며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광고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실은 북극곰이 먼바다를 수영해 가거나 순록과 새알을 먹으며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해 개체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해요. 인간이 만든 불쌍한 프레임으로 동물을 재단하는 것 또한 철저한 인간 중심적 사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겨울이면 한데 엉켜 겨울잠을 자고 산란기엔 은뱀장어로 변해 2년을 버티는 경이로운 유럽뱀장어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 신비로운 존재들이 인간의 배수펌프장 프로펠러에 끼어 생존율이 낮아지는데, 그걸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공존을 위해 노력한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인간들을 보면 뱀장어는 과연 뭐라고 할까요? 고마워해 줄까요? 처음엔 생태교란종이라며 떠들썩하더니, 요리로 만들어 맛을 본 후 보호해야 할 만큼 먹어 치운 러시아 왕게의 일화는 너무 익숙해서 놀랍지도 않고 씁쓸한 입맛을 남깁니다. 400여 년 전 항해일지에서 동물의 발자취를 찾아내 직접 취재하고 개인의 이야기까지 더해 완성한 흥미진진한 여정이었어요. 우리에게 묵직한 깨달음을 남겨주는 참 고마운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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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현재의 기후위기가 있고 자연을 소중히 여겨야할 이유가 확실한 요즘 이 책의 제목은 매력적이다. 내가 하고 있는 착각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고 구체화할 수 있을 내용을 기대하면서 읽어내려간다. 공존한다는 착각
이런 인문에세이는 처음 읽어보는 느낌이다. 과거와 현재와 나의 시점과 다른사람의 시점이 여기와 저쪽 장소가 모두 혼재되어서 서술되어있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도 하고 읽어내려가는데 있어서 어려운 느낌이었는데 읽다보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점을 달리한 서술로 인해서 모든 것을 다각화한 채로 바라볼 수 있었다. 프롤로그에서 나온 바렌츠와 원정대이야기가 사실 가장 놀랍고 인상깊었다. 1596년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2021년 이야기.. 다시 이어지는 1596년의 이야기 사람이 대항해시대부터 자연과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시간차를 두고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자칫하면 산만해질 수 있을지 모르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이 이야기가 뒷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여 계속 읽어내려갈 수 있게 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7가지 동물들을 소환한다. 일각돌고래, 노르웨이래밍 유럽뱀장어 ,흑기러기 북극곰, 순록, 왕게 위의 동물들은 우리나라에는 익숙치는 않아서 동물들이 언급될 때마다 하나씩 찾아보며 읽어내려간다.
나는 이 이야기들 중에서 래밍이 좀 인상에 남았는데, 노르웨이래밍이 하는 행동습관에 대한 이야기 래밍이 겨울잠 이후에 깨어남을 관찰하는 법 이에 교차하여 작가가 아버지와 이별하는 그 장면에서 내가 가족과 이별했던 그 장면이 느껴지면서 죽음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래밍이 절벽을 내달리는 행위를 그냥 동물적인 본능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이 지점에서 작가는 "레밍의 이런 행동은 인간 사회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다. " "레밍들의 맹목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은 인간 사회에서 우리가 때때로 집단에 휩쓸려 무모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만 같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한번 숙고해보게 되는 인간적인 문장이 머릿속에 남는다. 마지막은 왕게 이야기로 마무리하는데 이야기 속에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이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은 이러하다. '바렌츠사파리 왕게 체험' 프로그램에 가서는 가이드가 왕게의 껍데기에 칼을 꽃아서 몸통에 달라붙은 다리를 분리한 후 남은 몸통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위의 부분을 읽는데, 맘이 착찹해졌다. 왕게 (우리는 킹크랩이라고 부르는 종중에 젤 큼)가 아무리 어느 지역에서는 생태교란종인지는 몰라도 저렇게 바다에 내던져버릴 수는 없지 않을까. 인간의 사소한 그런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은 언제부터 자연속에 살고 자연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까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다각도로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가님의 필력과 경험, 지식에 감탄하면서 반성하기도 하고 극히 공감하기도 하며 읽게되는 인문에세이 공존한다는 착각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공존한다는착각 #다산북스 #다산초당 #프랑크베스테르만 #정신재 #컬처블룸 #컬처블룸서평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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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정독 후 진솔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상처 투성이 지구의 모습과 자연을 보호하자는 구호가 묘하게 오버랩된다. 개빌을 지상 과제인앵 무분별하게 깎고 자르고 베어 버린 지구는 메말라 가고 황폐해져 간다. 저자는 16세기 네덜란드 탐험대의 항해일지 속 동물들의 흔적을 통해 인간의 자기 중심적 행동과 자연을 바라 보는 태도를 드러내며 자연을 향한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과 무자비한 야만성의 진실을 밝힌다. 공존은 그냥 말 뿐이고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망가뜨리고 있다. 그들에게 인간은 그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또 다른 ‘야생의 존재’일 뿐임에도 말이다. 저자는 동물의 특성을 우화적으로 풀어내는 중세의 ‘동물지’ 형식을 빌려 멸종의 위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일각돌고래, 노르웨이레밍, 뱀장어, 흑기러기, 북극곰, 순록, 왕게 등 일곱 종의 동물들을 중심으로 인간이 동물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고발이다. ‘인간 또한 다른 동물들에겐 ‘야생의 존재’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이상하리만큼 잊어버린 채 ‘영원한 포식자’인 척 살아간디.’ 작은 부분에 불과한 우리가 마치 주인인양 빼앗고 훔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오만을 자행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정의 내리면서 동물적 본성을 잊고 숨기려고 기를 쓰며 다른 동물에 대한 압도적 우월성과 주체성과 인간의 권리라는 미명하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동물 자원을 무한대로 이용한다. 그 결과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무자비한 착취와 시디즘 뿐 아니라 왜곡된 사랑과 본성 파괴, 학대로 이어져 왔다.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정의 내렸던 ‘인간은 만물의 영장’ 즉 창조의 우두머리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며 지구의 지배자인 동시에 보호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이는 여전히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정의 내리면서 동물적 본성을 잊고 숨기려고 기를 쓰며 다른 동물에 대한 압도적 우월성과 주체성과 인간의 권리라는 미명하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동물 자원을 무한대로 이용한다. 그 결과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무자비한 착취와 시디즘 뿐 아니라 왜곡된 사랑과 본성 파괴, 학대로 이어져 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물을 사랑하고, 미워하고, 예뻐하고, 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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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영화 <울프 토템>을 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영화 속 늑대는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초원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생명체로 그려졌습니다. 특히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가 남긴 여운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우리는 과연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말하는 ‘공존’이 다른 생명체에게도 같은 의미일지 궁금해져 프랑크 베스테르만의 <공존한다는 착각>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이미 인간 중심적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말은 익숙하지만, 그 안에 인간의 욕망과 가치관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미처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동물들의 삶과 행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언어와 기준이 개입된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환경 보호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한층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익숙한 단어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 준 점이 좋았습니다.
<공존한다는 착각>은 동물과 환경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의라고 생각했던 행동조차 다른 존재에게는 통제나 간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환경 문제나 생태계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때에는 인간의 입장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관점도 함께 고려해 보고 싶습니다. 쉽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다양한 시선에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의미 있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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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북극곰 이야기 정도를 다룬 환경 에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 책은 단순히 동물이나 자연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을 인간의 기준으로만 바라봐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많은 생각들이 사실은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습니다. 특히 북극곰, 레밍, 순록, 고래 등 다양한 동물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로만 알고 있었던 레밍이 실제로는 오랫동안 오해받아 왔다는 이야기, 탐험가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북극곰을 북극곰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환경 문제를 다루지만 딱딱하거나 설교하는 느낌은 없고, 탐험기와 역사 이야기, 과학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소설처럼 술술 읽혔습니다. 책을 덮고 나니 자연은 말이 없어서 침묵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오래 듣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