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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동백꽃>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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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저 할배가 아침 길가에 서서 온기를 쬐고 있다 겨울을 뚫고 누군가 불쑥 보내준 모닥불 한 송이 칼바람에 두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불씨를 감싸고 있다 그렇게 곁불 쪼이며 온 시간이다 이제 다 내어줄 차례다 가슴 온통 헤집어 툭 떨어지겠지 그러면 동박새 주둥이가 분 바른 자리로 돌아가야지 이 빨강이 지나온 아득한 길모퉁이 헤이며 지그시 눈 감은 불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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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저 할배가 아침 길가에 서서 온기를 쬐고 있다

겨울을 뚫고 누군가 불쑥 보내준 모닥불 한 송이

칼바람에 두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불씨를 감싸고 있다

그렇게 곁불 쪼이며 온 시간이다

이제 다 내어줄 차례다

가슴 온통 헤집어 툭 떨어지겠지

그러면 동박새 주둥이가 분 바른 자리로 돌아가야지

이 빨강이 지나온 아득한 길모퉁이 헤이며

지그시 눈 감은 불그레한 할배 한 송이

동백꽃 : 모닥불 한 송이를 품은 두 손의 교감과 자발적 몰락의 미학



박진규 시인의 시적 시선은 세상의 구석진 곳에 소외되어 있던 고독한 존재들을 대자연의 숭고한 질서 속으로 귀환시키는 거룩한 접합점에 서 있습니다. 시 <동백꽃>은 오래된 동백나무에 피어난 늙은 “동백꽃”을 ‘할배’의 실존으로 은유하며, 꽃 그 자체에 시인의 영혼과 감정을 투영하여 가장 따뜻하고 숭고한 서정을 이끌어냅니다.



이 시에서 마주하는 ‘할배’는 먼 훗날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실존적 자화상입니다. 시인이 그려낸 꽃의 노년은 나른하게 멈춰 선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했던 삶의 최정점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투신하려는 동백꽃에 대한 깊은 연민이자, 영혼의 구원을 다루는 장엄한 미학입니다.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찰나는 겨울 아침의 시린 추위 속에서 할배의 두 손과 동백꽃이 ‘모닥불 한 송이’가 되어 만나는 눈부신 교감에 있습니다. 이른 아침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할배는 담장 너머 가지 사이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커다란 동백꽃 한 송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내 호주머니 깊은 곳에 찔러두었던 시린 두 손을 꺼내어, 마치 꺼져가는 호롱불을 안아 올리듯 붉은 동백 한 송이를 두 손 모아 소중히 감싸 안습니다.



시인은 이 극적인 순간을 통해 대자연이 불쑥 건넨 ‘모닥불 한 송이’의 붉은 환대를 형상화합니다. "저 할배가 아침 길가에 서서 온기를 쬐고 있다"는 첫 구절처럼, 동백의 붉은 꽃송이는 비록 외형은 차가울지라도 언 손을 녹여주고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꽃 모닥불’이 됩니다. 칼바람에 얼어붙은 할배의 두 손에 안긴 붉은 동백은, 차가운 문명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영혼을 데워주는 은은하고도 거룩한 불씨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수채화를 완성해 냅니다.



“이제 다 내어줄 차례다”라는 결별의 선언은 생의 전 주기에 걸쳐 아껴 쌓아둔 모든 가치를 아낌없이 나누어 준 뒤 통째로 투신하는 소유 종말의 서사입니다. 척박한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뜨겁게 꽃피워낸 동백꽃과 할배는, 나중에 맺힐 미래의 열매를 위해 모든 것을 통째로 내어주며 조용히 사라지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동백의 낙화는 다른 꽃들처럼 꽃잎이 낱낱이 흩어지는 슬픈 분해가 아닙니다. "가슴 온통 헤집어 툭 떨어지겠지"라는 시구처럼, 동백은 꽃잎과 꽃술과 꽃모가지를 온전히 하나의 생명으로 품은 채 바닥을 향해 통째로 낙하(落下)합니다.



겨우내 지키던 가지 위의 보금자리를 미련 없이 비워내고, 낙화한 그 모습 그대로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결연한 퇴장은 참으로 장엄합니다. 이는 세속의 모든 집착을 비워내고 스스로 몰락함으로써 완성하는 ‘장엄한 부재(不在)의 가치’를 구현하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동백의 모가지가 끊어진 그 자리는 단절의 흉터가 아닌, 새로운 생명을 향해 영양을 밀어 올리는 눈부신 잉태의 자리입니다. 시인은 "동박새 주둥이가 분 바른 자리로 돌아가야지"라는 고백을 통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자발적 몰락을 재촉합니다. 

겨우내 행복한 속삭임을 나누었던 동박새를 가차 없이 밀쳐 보내고, 이제는 나무뿌리 옆 바닥에 누워 옛 가지를 올려다보며, 장차 그 자리에 새롭게 피어날 미래의 꽃과 대화할 동박새를 축복하며 산화하는 숭고한 몸짓입니다. 동백꽃과 할배는 동박새와 함께했던 그 힘들었으나 치열했던 생의 기억들을, 가지 끝 빈자리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걸어두고 조용히 사라집니다.



긴 겨울 동안 금빛 분가루의 온기를 전해 받았던 꽃잎들은 이젠 스스로 ‘할배 꽃송이’가 되어 무심히 낙하합니다. "지그시 눈 감은 불그레한 할배 동백"은 깜깜한 밤의 두려움도, 환한 낮의 걱정도 다 지워버린 채, 떠나보낸 동박새의 주둥이 분 바른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거룩한 봄을 완성해 냅니다.



박진규 시인의 <동백꽃>은 온 힘을 다해 피어내고 마침내 툭 떨어지면서, 다시 다가올 미래의 “동박새 주둥이 분 바른 자리”를 기쁘게 내어주기 위해 기꺼이 몰락하는 ‘할배’ 꽃 같은 우리의 삶에 대한 소리 없는 노래이자 헌사입니다. 겨울 추위가 옷깃을 세우게 하는 쓸쓸한 길모퉁이 담장 밑, 그곳에 툭 떨어져 있는 무심한 낙화 동백 한 송이라도 시인의 따스한 시선을 통과하는 순간,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룩하고 따스한 모닥불이 됩니다.



시인의 아름다운 시선은 ‘할배’와 ‘붉은 동백꽃’의 따스한 포옹만큼이나,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붉은 삶의 아픈 궤적이 결국 진정한 사랑이었으며 눈부신 헌신이었다는 것을 눈물겹게 깨치게 해 줍니다. 평생 우리의 거친 귀로는 들을 수 없었던 꽃들의 신비로운 속삭임을 가만히 귀담아듣고, 그 우주적인 비밀을 시로서 소중히 알려 주신 박진규 시인께 깊은 감사와 비평적 경의를 표합니다.

j******n 2026.06.01. 신고 공감 9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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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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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 시 감상문 시원문: 가을날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은나무의 강물이 멈추기 때문이라고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나무 안에도 강이 있어점점 차가워지는 강이 흐르고 있어얼기 전에 몸을 닫아야 하는 나무의 사연을나뭇잎으로 가는 줄기의 물길 다 끊어말라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나무의 사연을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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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 시 감상문


시원문:


가을날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은

나무의 강물이 멈추기 때문이라고

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나무 안에도 강이 있어

점점 차가워지는 강이 흐르고 있어

얼기 전에 몸을 닫아야 하는 나무의 사연을

나뭇잎으로 가는 줄기의 물길 다 끊어

말라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나무의 사연을

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세상 곡기 다 끊고 깡마른 저 겨울 裸木

새로운 봄이 되는 적빈(赤貧)의 사연을

어느 붉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시집 <풀꽃 친구>(2026) 중에서


시 감상문


시인은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까닭을 나무 안의 강물이 멈추는 데서 찾고, 그 사연을 어느 늙은 나뭇잎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자가 이 진실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전해 들었다'는 점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자기 통찰로 선언하지 않고 늙은 잎이라는 매개를 통해 겸손하게 받아 적는 태도인데, 깨달은 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들은 자가 옮기는 독특한 방식의 표현법입니다.


“가을날 나뭇잎이 떨어지는 까닭은”


이 시는 대답이 아니라 물음으로 시 예술의 문을 엽니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대문을 두드리듯, 시인은 세상이 이미 다 안다고 여기는 이치 앞에 다시 한번 무릎을 꿇습니다. 낙엽이란 누구나 아는 자연현상이지만, 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눈길을 거두게 되는 법인데, 시인께서는 그 익숙함의 커튼을 슬쩍 걷어 올리며, 다 안다고 믿었던 자리마다 다시 물음표를 하나씩 심어 놓습니다.


이 물음은 마치 낮은 목소리로 두드리는 노크와 같아서, 독자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이 태도는 겸손의 시작이며, 동시에 이 시 전체가 걸어갈 느린 걸음의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나무의 강물이 멈추기 때문이라고”


나무에게 강물이라니, 이는 대지에 뿌리내린 것과 하늘로 흐르는 것을 세로로 엮는 은유입니다. 강물이 산과 들을 적시듯, 나무 안의 강물은 뿌리에서 잎끝까지 생명을 실어 나릅니다. 그러니 잎이 진다는 것은 강물이 마르는 일이요, 마름은 곧 흐름이 정지된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낙엽이라는 조용한 사건 뒤에 거대한 강 하나가 멈추어 서는 소리 없는 굉음이 있음을 넌지시 알려 줍니다.


흐르던 것이 멈춘다는 이 표현은 마치 인생의 어느 갈피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는 사람의 뒷모습과도 같아, 읽는 이의 마음에도 서늘한 정적을 함께 얹어 놓습니다. 사람들의 내면에도 보이지 않는 강물이 흐르고 있으니 기쁨과 슬픔, 기억과 망각, 만남과 이별은 모두 마음에 흐르는 강물입니다.


“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깨달은 자의 자리에 서지 않고, 늙은 잎이라는 스승 앞에 은밀한 진언(眞言)을 받아적는 제자처럼 앉습니다. 늙은 잎은 한 계절을 다 살아낸 자로서, 그 말은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지 상상에서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스승께서 주름진 손으로 생명의 비밀코드를 짚어가면서 해석을 하고, 제자는 그것을 받아적는 한폭의 벽화와 같습니다.


'들었습니다'라는 이 말은 이 시에서 세 번 되풀이되며 하나의 후렴처럼 울립니다. 되풀이되는 구절이 노래에 가락을 주듯, 이 반복은 이 시의 만트라가 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그 말을 새겨야 되겠다는 겸허한 발심을 하게 합니다.


“나무 안에도 강이 있어”


겉으로 보기에 나무는 그저 서 있는 고요한 존재이지만, 시인은 그 껍질 속에 숨은 격류를 찾아냅니다. 이는 마치 표정 없는 사람의 가슴속에 아무도 모르는 눈물의 강이 흐르는 소리를 알아채는 것과 같은 발견입니다. 고요한 겉과 굉음으로 흐르는 속, 이 팽팽한 댓구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의 참모습이 아닐까요.


나무 안에도 강이 있다는 이 한마디는, 무생물처럼 여겨지던 것들에게 저마다의 내면의 생명을 되돌려주는 일입니다. 돌에도, 흙에도, 겨울 하늘에도 저마다의 강이 흐르고 있으리라는 상상으로 시의 관심은 맥박으로 감지되는 무생물로 번져 나갑니다.


“점점 차가워지는 강이 흐르고 있어”


따뜻하던 강물이 차가워진다는 이 흐름은 계절의 시간을 몸의 온도로 바꾸어 놓은 절묘한 치환입니다. 여름의 뜨거운 물길이 가을을 지나며 서서히 식어가는 모습은, 마치 뜨겁던 첫 마음이 세월 속에서 저도 모르게 익숙해지다 초발심의 열정이 식어가는 사람의 심경과 겹쳐집니다. 차가워진다는 것은 더 이상 온도의 하강만이 아니라 경이로움을 잃은 익숙한 습관으로 이해됩니다


'점점'이라는 부사는 완만한 기울기를 그려 냅니다. 습관 속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것, 오직 새롭게 보는 호기심 ‘왜’라는 질문 만이 대자연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자세입니다. 

해질녘의 빛은 단번에 꺼지지 않고 서서히 스러집니다. ‘점점’이란 나무의 이별 또한 더디고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 한 단어가 조용히 증언합니다.


“얼기 전에 몸을 닫아야 하는 나무의 사연을”


몸을 닫는다는 표현은 마치 겨울을 예감한 집이 창문을 걸어 잠그는 모습과도 같아서 나무에게는 포기가 아니라 준비이며, 두려움이 아니라 지혜가 됩니다. 스스로 문을 닫는 나무의 모습에서, 그토록 애써 문밖으로 보내어 연결한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하는 결기도 포함 됩니다.


'사연'이라는 낱말이 이 시에서 유독 관심이 갑니다. 사연이란 그저 이유가 아니라 말 못 할 속사정을 가리키는 말이니, 나무의 닫힘 뒤에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아픔도 함께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며, 견딤의 서막으로 이해 됩니다.


“나뭇잎으로 가는 줄기의 물길을 다 끊어”


차갑게 식어가던 강물이란 드디어 스스로 흐름을 끊는 강물이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는 피동에서 능동으로 건너가는 결정적인 도약입니다. 물길을 끊는다는 행위는 마치 칼로 실을 자르는 단호함과 같아서, 나무는 더 이상 계절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운명을 결단하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시가 단순한 가을 서정시에 머물지 않는 지점입니다. 생명을 키운 손으로 자신이 이룩한 생명의 한 부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이 능동의 전환 속에서 낙엽은 비로소 비극의 산물 이상으로 승화됩니다. 


사람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애써 키우고 지켜온 관계나 욕망, 명예나 자존심을 어느 날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붙잡는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끊어내는 것마저 사랑이라 것을 시인께서는 나무를 통해 조용히 알려주려는 듯합니다.


“말라가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나무의 사연을”


물길을 끊은 혈관은 나무의 것이지만, 그 생명의 혈관이 잘려나가는 것을 보는 눈 또한 나무의 것입니다. 끊음과 바라봄이 한 몸 안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이, 이 이별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집니다.


시인은 여기서 가해자와 목격자를 하나로 합쳐 놓습니다. 버리는 자가 곧 슬퍼하는 자이기도 하다는 이 댓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치러야 하는 이별의 값을 조용히 보여 줍니다. 나무는 잎을 버리면서도 그 마지막까지 눈을 떼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시인께서 통찰하신 아픈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어느 늙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들었다’라는 구절이 두 번째로 되돌아올 때,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다짐이 됩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전해 들은 이야기였으나, 두 번째로 되뇌는 구절은 이제 화자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믿음이 됩니다. 종소리가 두 번 울릴 때 그 울림이 더 깊어지듯, 반복은 시의 진실성을 한 겹 더 두텁게 다집니다.


이 반복은 시조의 종장처럼 리듬의 매듭이 됩니다. 앞선 사연들을 한 번 더 갈무리하고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숨고르기이니, 이는 흡사 오르막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나그네의 뒷걸음과도 같습니다.


“세상 곡기 다 끊고 깡마른 저 겨울 裸木”


곡기를 끊는다는 말은 본디 사람의 결연한 단식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 표현을 나무에게 빌려준 순간 나무는 더 이상 식물이 아니라 구도자의 자리에 오릅니다. 잎도 물도 다 내려놓은 겨울나무는 마치 온갖 장신구를 벗어던진 수행자의 자리 같아서, 그 헐벗음이 오히려 거룩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 “나목”은 시인의 어느 시기를 투영하는 듯 합니다. 평생 쌓아온 체면과 열정, 인정받고 자랑스러워 했던 마음을 하나씩 내려놓고 홀로 서야 하는 시간을 성찰합니다. 사람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 이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까지 자신과 만나는 모습이 됩니다.


'깡마른'이라는 표현은 앙상함을 표현한 말이지만, 이 시 안에서는 결핍이 아니라 정련의 결과로 읽힙니다. 불순물을 다 태우고 남은 순금처럼, 나목은 군더더기를 다 벗어낸 뒤에야 얻는 가장 정직한 형상입니다. 헐벗음이 곧 충만함이라는 이 역설이야말로 이 시의 가장 깊은 숨결입니다.


“새로운 봄이 되는 적빈의 사연을”


가난은 흔히 부끄러움으로 여겨지지만, 시인은 그 가난을 붉은빛으로 물들여 놓습니다. 이는 마치 잿더미 속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불씨와 같아서, 가장 낮은 곳이 가장 새로운 것의 자리가 됨을 보여줍니다. 비움과 채움, 겨울과 봄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댓구는 동양의 오래된 지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적빈이라는 두 글자 속에는 붉을 적(赤)과 가난할 빈(貧)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이는 적자(赤子)이기에 세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고, 빈한(貧寒)이기에 작은 깃털 하나로도 꽉참을 느낄 수 있는 정신과 물질 양자가 모두 한 몸이라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다 비운 자리에서 비로소 봄이 움튼다는 이 구절은, 잃음이 곧 얻음의 다른 이름임을 나직이 일러 주는 듯 합니다.


“어느 붉은 나뭇잎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처음의 '늙은 나뭇잎'이 마지막에 이르러 '붉은 나뭇잎'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든 순간, 그것은 곧 나무를 떠날 순간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붉다는 것은 단순한 색깔이 아니라 떠나기 직전의 비장한 아름다움처럼 느껴집니다. 늙음이 시간의 이름이라면 붉음은 그 시간이 도달한 절정의 이름이니, 이는 마치 오래 걸어온 나그네가 마침내 노을 앞 언덕에 서는 것과 같은 순간입니다. 스승의 얼굴이 마지막 장에서 가장 찬란한 빛으로 바뀌는 이 마무리는, 시 전체를 큰 원으로 완성시킵니다.


이 시는 늙음에서 시작해 붉음으로 끝나는 하나의 순환입니다. 시듦이 곧 물듦이요, 마름이 곧 타오름이라는 이 마지막 댓구 속에서, 낙엽은 더 이상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삶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지점의 색으로 태어납니다. 시인께서는 독자에게 붉은 잎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마다의 가슴속에 물들어 가는 나뭇잎 하나를 품게 만들어 줍니다.


지혜가 쌓일수록 내가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없이 지나가는 것들의 소리를 더 잘 듣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께서는 이 계절 또 어디에 귀를 기울여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풀잎의 속삭임을 들어시고, 삭이셔서 시로 완성하실지 시집이나 영화의 후편처럼 몹시 기다려 집니다. 이 가을 추분 절묘한 절기에 멋진 시를 부산일보에 게재하셔서 시 예술의 아름다움을 환기시켜 주신 박진규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j******n 2026.09.24.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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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고욤나무의 심부름”시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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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고욤나무의 심부름”시 감상문 시 제목: 고욤나무의 심부름 시 원문: 고욤나무가 깨감을 가득 달고 서 있다아이 구슬만한 것이 까만 것이 쪼글쪼글하다겨울이 깊도록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니지나가는 내가 다 미안한 기분이다어쩌자고 작고 떫기만 한 자식들저리 촘촘히 만들어서는소용없는 것이 소용이라는 것인지아까부터 먼산 쳐다보기인가먹이 찾다 지친 추운 새처럼
"박진규 시인의 “고욤나무의 심부름”시 감상문" 내용보기


박진규 시인의 “고욤나무의 심부름”시 감상문


시 제목: 고욤나무의 심부름


시 원문:


고욤나무가 깨감을 가득 달고 서 있다

아이 구슬만한 것이 까만 것이 쪼글쪼글하다

겨울이 깊도록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니

지나가는 내가 다 미안한 기분이다

어쩌자고 작고 떫기만 한 자식들

저리 촘촘히 만들어서는

소용없는 것이 소용이라는 것인지

아까부터 먼산 쳐다보기인가

먹이 찾다 지친 추운 새처럼

이거라도 하며 하나 따 먹어본다

달다 하면 달다

그리하여 작은 감씨 서너 개를 오물거리며

새를 흉내 내며 멀리 가보기로 하였다


시 감상문


박진규 시인의 "고욤나무의 심부름"을 읽고


"고욤나무가 깨감을 가득 달고 서 있다“


겨울 고욤나무 한 그루가 잎은 모두 떠나보냈는데 쪼글쪼글한 까만 열매만은 가지에 달고 있습니다. ‘가득 달고 있다’라는 말이 따뜻합니다. 잎을 내려놓은 뒤에도 열매를 달고 있는 고욤나무의 모습은, 시인께서 세월을 살아가며 많은 것을 내려놓은 뒤에도 끝내 품고 있는 시에 대한 열정과 닮았습니다.


"아이 구슬만한 것이 까만 것이 쪼글쪼글하다"


고욤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유리구슬 정도의 크기로 까맣고 쪼글쪼글합니다. 세월이 지나면 사람의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듯 열매에도 겨울 주름이 생깁니다. 주름은 익음의 흔적이면서 새로운 희망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젊은 열매는 탱탱하지만, 아직 제맛을 다 갖추지 못하고, 오래 견딘 열매는 작아지고 쪼글쪼글해지면서 자기 안에 감춰두었던 맛을 드러내듯 익음은 우리에게서 젊음의 윤기를 내려놓는 대신, 쉽게 얻을 수 없는 깊은 맛을 남기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겨울이 깊도록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니"


이 한 구절에는 겨울의 적막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열매는 익었지만 아무도 따지 않습니다. 계절은 깊어가는데 찾아오는 손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는다고 해서 열매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사람의 삶에도 이런 시간이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정성을 다했지만 아무런 박수도 없는 시간, 자신이 가진 것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발견되지 않았다고 가치와 열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나가는 내가 다 미안한 기분이다"


참 따뜻한 문장입니다. 시인은 열매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동안 보지 못했다는 듯 미안해합니다. 이 미안함은 고욤나무에 보내는 미안함이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외면당한 작은 것들에 대한 공감처럼 읽힙니다.


우리는 큰 것에는 쉽게 눈길을 줍니다. 크고 화려한 열매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작고 못생긴 열매는 그냥 지나칩니다. 박수받는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독과 침묵만 찾아갑니다. 그래서 시인의 미안함은 세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마음의 높이입니다. 큰 것에 환희하는 시선보다 작은 것을 올려다보는 더 깊은 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자고 작고 떫기만 한 자식들"


시인은 고욤을 마치 자식처럼 부릅니다. 참 인간적인 질문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고욤은 작고 떫습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 먹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그런 열매를 아낌없이 만들어냅니다.


고욤나무는 인간처럼 효율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크기를 계산하지 않고, 가격을 계산하지 않고, 박수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일을 합니다. 한 알이면 한 알, 백 알이면 백 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냅니다.


"저리 촘촘히 만들어서는"


작은 열매들이 가지에 촘촘히 달린 모습을 떠올리면, 그것은 마치 겨울나무가 작은 등불을 가지마다 걸어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모여 있으니 각각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열매 하나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생명들이 촘촘히 모여 우주를 이루지 않겠습니까.


"소용없는 것이 소용이라는 것인지"


이 시에서 가장 의미 깊은 역설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소용없는 열매입니다. 작고 떫어 아무도 따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세계에서 결코 소용없는 것이 없듯 새에게는 먹이가 되고, 나무에는 씨앗이 되고, 시인에게는 시가 됩니다. 소용이란 사물 안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만나는 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버려진 것은 끝난 것이 아니고, 작은 것은 부족한 것이 아니듯, 쓸모없어 보이는 것은 아직 자신의 쓰임을 만나지 못한 것이겠지요.


"아까부터 먼산 쳐다보기인가"


고욤나무 열매는 아무 말 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 듯 고고합니다. 오늘 아무도 오지 않아도 그냥 기다리는 나무, 지금 아무도 열매를 따지 않아도 언젠가 누군가의 손이 있을 거라는 맹목적 믿음


"먹이 찾다 지친 추운 새처럼"


고욤나무의 모습이 지친 새처럼 보이지만 새에게는 날개가 있듯 고욤나무에게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새는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지만, 나무는 움직이지 못한 채 자기 자리에서 열매만 익힙니다. 날아갈 수 있는 자의 기다림보다 떠날 수 없는 자의 기다림이 더 길고 향기롭습니다.


"이거라도 하며 하나 따 먹어본다"


여기에서 시인은 마침내 손을 뻗습니다. ‘이거라도’라는 표현이 참 애틋합니다.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누구나 행할 수 있은 아니지요. 그저 고욤 하나를 따 먹어봅니다. 한 알의 열매가 시인의 시집을 구성하는 시의 속삭임이 됩니다.


"달다 하면 달다"


이 짧은 말은 시인께서 예술세계에 깔아 놓으신 마법의 양탄자입니다. ‘참 달다’도 아니고, ‘달지 않다’도 아닙니다. 그저, “달다 하면 달다” 더 이상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겨울을 겨울이라 하고, 외로움을 외로움이라 하는 칼날같은 세계에서도 그 안에 작은 단맛을 안치합니다. 젊음에는 젊음의 단맛이 있고, 늙음에는 늙음의 단맛이 있고 만남과 헤어짐에는 그 속에 인생의 단맛을 안치합니다.


"그리하여 작은 감씨 서너 개를 오물거리며"


작고 단단한 감씨 몇 알. 그러나 씨앗은 단순한 찌꺼기는 아닐 겁니다. 씨앗 안에는 미래에 다가올 고용나무의 가지가 들어 있고, 잎이 들어 있고, 꽃이 들어 있고, 또다시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시인이 오물거리는 것은 단순한 감씨가 아니라, 고욤나무의 미래를 오물거리는 것이며, 어쩌면 시인께서 엮어 갈 미래의 시 세계를 오물거리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를 흉내 내며 멀리 가보기로 하였다"


고욤나무는 움직이지 않지만, 시인을 움직입니다. 나무는 뿌리로 침묵의 땅을 붙잡고, 시인은 언어로 시예술의 땅을 붙잡습니다. 나무는 열매를 익히고, 시인은 시를 엮어 냅니다.


고욤나무는 시인에게 열매를 내어놓고, 시인은 고욤나무에 시 한 수를 올립니다. 그리하여 겨울 고욤나무가 시인에게 건넨 작은 심부름 하나가 마침내 시가 되어 우리의 마음까지 날아옵니다.


작고 떫은 것 하나에도 단맛이 숨어 있듯 시인의 삶에도 우리가 아직 다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운 맛이 남아 있을 겁니다. 시인께서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인생의 단맛 하나를 또 다시 속 깊이 익혀가고 있지 않을까요.

j******n 2026.09.14.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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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연두 샤워」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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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목: “연두 샤워” 시 원문 봄날 백합나무 아래라면 다 벗게 된다모자와 장갑을 벗고 윗옷을 벗고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고 양말까지사랑하는 백합나무 아래라면눈을 감고 알마음으로 연두 샤워를백합나무 아래로 쏟아지는 스멀거림머리부터 발까지무엇이라도 틔울 이 혼몽한 접목(接木) 시 감상문 - 박진규 시인의 「연두 샤워」를 읽고 옷 하나를 벗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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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목: “연두 샤워”


시 원문


봄날 백합나무 아래라면 다 벗게 된다

모자와 장갑을 벗고 윗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고 양말까지

사랑하는 백합나무 아래라면

눈을 감고 알마음으로 연두 샤워를

백합나무 아래로 쏟아지는 스멀거림

머리부터 발까지

무엇이라도 틔울 이 혼몽한 접목(接木)


시 감상문 - 박진규 시인의 「연두 샤워」를 읽고


옷 하나를 벗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천 한 겹을 벗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모자를 벗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름에 오점 하나 남기지 않으려고 평생을 바쳐 지켜온 자신의 삶에 대해, 어쩌면 이상한 의심을 품어보는 일이고, 장갑을 벗는다는 것은 직업을 유지하고 월급통장에 적힌 숫자를 세면서 정말 성실하게 살아온 그 손이, 어쩌면 지구별에 저지른 수많은 오염의 주범은 아니었는지 성찰해 보는 일이며, 윗옷을 벗는다는 것은 성실한 시민으로서 지녀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때로는 타인의 가슴에 박은 못이 되어 그들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일이고, 바지를 벗는다는 것은 오랫동안 한눈팔지 않고 성실하게 걸어온 두 다리를 보호해 주었던 옷 때문에, 때로는 잘살아 보려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길을 잃고, 다시 찾은 길을 또 잃어버린 채 보호할 바지조차 없이 떨고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내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인지 망설여 보는 일이며, 속옷을 벗는다는 것은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인바,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그리고 섣불리 선한 마음으로 속마음을 드러내 상처받는 사람들과 달리, 영악한 침묵과 위선으로 누려온 이기적인 행복에 대해서도 스스로 반성하며 돌아보는 일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봄날 백합나무 아래라면 다 벗게 된다”


백합나무는 겨울 동안 모든 것을 벗습니다. 잎을 벗고, 꽃을 벗고, 푸름을 벗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누구는 말하기를, 나무에게 겨울은 가난이 아니라 비움이며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나무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사람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것을 입게 됩니다. 청년 때에는 꿈을 입고, 성공하면 명예를 입으며,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 체면을 입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옷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가두는 껍질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만으로는 깊은 감동을 받기 어렵습니다. 마치 앵무새가 외부의 적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새장에 들어갔다가, 어느 순간 날개의 기능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날기를 거부하는 새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지나친 문학적 상상의 자학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인께서는 삶에서 성공하며 입었던 옷을 벗으려 하시고, 아름답게 꾸며진 새장을 버리고 다시 야생의 자유로 돌아가려 하십니다.


“모자와 장갑을 벗고 윗옷을 벗고

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고 양말까지”


이 대목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모자에서 시작하여 양말까지 내려가는 벗음의 행렬은 사회가 입혀준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모자는 머리를 덮습니다. 장갑은 손을 덮습니다. 옷은 몸을 덮습니다. 속옷은 가장 깊은 곳을 덮습니다. 시인의 벗음은 머리에서 시작하여 몸으로 내려가고, 몸에서 다시 마음으로 들어가는 존재의 탈의식이 됩니다. 시인께서는 모자와 장갑과 윗옷과 바지와 속옷과 양말까지, 그 모든 것을 벗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옷을 입지만, 때로는 그 옷 때문에 진짜 나를 잃어버립니다. 명예가 나를 감싸고 있지만 명예 때문에 내가 숨을 쉬지 못하고, 성취가 나를 빛내고 있지만 성취 때문에 다른 길을 배려할 수 있는 눈이 어두워지며, 사회적 성공이 나를 보호하고 있지만 그 보호막이 어느 순간부터 새장이 되어 반대편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의 날개를 접어버립니다.


“사랑하는 백합나무 아래라면”


백합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닙니다. 시인에게 백합나무는 동심이 깃든 추억이고, 고향 골목에서 늘 마주하던 소년의 꿈이며, 가난한 삶 앞에서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입니다.


소년의 동심에서는 마음의 옷을 벗을 수 있습니다. 고향 골목 담벼락에 기대면 내면의 상처를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백합나무는 소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친구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고, “얼마나 성공했느냐”고 묻지 않으며, “무엇을 이루었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없이 곁에 서 있습니다. 시인은 그 나무 아래에서만 비로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알마음으로 연두 샤워를”


‘알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껍질을 벗은 마음, 아무 장식도 없는 마음, 어린 시절 처음 세상을 바라보던 마음이라고 읽어봅니다. 사람은 살아갈수록 마음에도 옷을 입습니다. 경험이라는 옷을 입고, 상처라는 옷을 입고, 성공이라는 옷을 입고, 실패라는 옷을 입으며, 자존심이라는 옷과 체면이라는 옷까지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백합나무의 연두빛 새잎은 그 어떤 옷도 입지 않은 채 봄을 맞습니다. 연두는 완성된 초록이 아닙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색이며, 아직 무엇이 될지 결정되지 않은 색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색입니다.


시인이 꿈꾸는 것은 바로 그 연두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인간, 굳어진 사람이 아니라 다시 자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연두 샤워’는 봄비를 맞아들이는 일이면서 동시에 이전에 순수했던 자신으로 씻어 나오는 탄생의 의식이며 색채입니다.


“백합나무 아래로 쏟아지는 스멀거림”


연두빛 새잎은 가지 끝에서 작은 기척으로 시작됩니다. 스멀스멀, 조용조용,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움직임입니다. 그것은 봄의 움직임이면서, 늙어 굳어버린 습관 속에서 어린 새 생명의 싹을 틔워야 한다는 열망입니다.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꿈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떨림입니다. “다시 시작해볼까.” “한번 다른 길을 가볼까.” “이제는 나답게 살아볼까.” 그 작은 생각 하나가 마른 가지 끝에서 피어나는 연두의 싹처럼 마음속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스멀거림’은 봄의 촉감이면서 동시에 잠들어 있던 자아가 깨어나는 촉감입니다.


“머리부터 발까지, 무엇이라도 틔울 이 혼몽한 접목(接木)”


이 시에서 가장 깊은 단어는 ‘접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접목은 서로 다른 생명을 잇는 연결입니다. 한 나무의 가지를 다른 나무에 붙이면 두 생명은 서로의 수액을 나누며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백합나무에 접목하려 합니다. 그동안 자신을 지배해 온 세속에서 굳어버린 가치관과 전혀 다른 자연의 가치관을 만나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경쟁이라는 나무에 접목되어 살아왔습니다. 이겨야 한다고 배웠고, 뒤처지면 실패라고 배웠으며, 남보다 앞서야 가치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성공하면 박수를 받고, 실패하면 비난이라는 외부의 손가락질과 좌절이라는 내부의 낙인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냇물처럼 소리 내어 명랑하게 흐르고 싶어도, 주어진 수도관 안에서 침묵처럼 흘러야 했습니다. 산새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어도, 스스로 만든 명예와 체면이라는 새장 안에서 날개를 접고 살아왔습니다. 시인은 이제 그 접목을 바꾸려 합니다.


더 이상 경쟁의 나무에 올라타지 않고 백합나무에 자신을 접목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접목’이라는 시어는 ‘접신’과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경쟁사회가 만들어놓은 가치관과 접신하여 살아갑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 뒤처지면 실패라는 생각, 실패한 사람은 낮은 대접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순수했던 영혼의 눈을 감겨버리게 됩니다.


시인께서는 백합나무 아래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정말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인가?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새로운 접신, 새로운 접목이 시작됩니다. 경쟁과 소유가 미덕이 되고 정의가 되는 사회에 의심을 품게 됩니다. 경쟁에서 소외되고, 덜 소유하고, 덜 소비하는 청빈을 빈천이라는 이름으로 멸시하는 현대 사회의 가치관을 버리고, 이른 봄 눈 속에 텅 빈 가지를 드러낸 백합나무처럼, 휑한 바람 속에 자신을 접목시키려 합니다.


“연두 샤워”는 자연과 영혼이 만나는 초제(醮祭)입니다. 이제 연두 샤워는 단순한 봄의 풍경이 아닙니다. 시인은 마치 자연에 깃든 혼령을 부르는 샤먼이 되어, 앙상한 초봄 백합나무를 마주하고 섭니다. 그러자 시인을 향해 연두빛 새잎들이 머리 위에서 쏟아집니다. 연두는 물처럼 떨어지고, 봄은 빛처럼 흘러내리고, 새잎은 빗방울처럼 몸을 적십니다.


연두 샤워는 몸을 씻는 샤워가 아닙니다. 인생의 때를 씻는 샤워입니다. 명예의 때를 씻고, 체면의 때를 씻고, 경쟁의 때를 씻고, 상처의 때를 씻으며, 오랫동안 자신을 묶어왔던 습관의 때를 씻어냅니다. 그렇게 한 겹씩 씻겨 나가면 마침내 남는 것은 성공한 나도 아니고, 실패한 나도 아니며, 사회가 규정한 나도 아닌, 소년의 눈망울에 담긴 초봄의 차가운 하늘과 앙상한 백합나무 가지만 남게 되었습니다.


연두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미래입니다. 연두빛은 초록이 되기 전의 초록입니다. 완성되기 전의 생명이고, 결정되기 전의 운명입니다. 연두는 시인을 닮았습니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소년을 마음에 간직한 시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다른 수많은 길을 포기합니다. 그때 포기한 길들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살아 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연두 샤워’는 그 잃어버린 길을 다시 만나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과 동네 친구들, 동네 담벼락과 골목길, 바닷가 모래톱과 미역과 파래의 비릿한 바다 냄새가 가득한 추억을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연두 샤워는 다시 태어나는 사람의 의식입니다. 박진규 시인님의 「연두 샤워」는 초봄 백합나무의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며 쓴 단순한 자연시가 아닙니다. 이 시는 한 사람이 평생 자신을 지켜주었던 갑옷을 벗고 다시 자신의 영혼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새는 자유롭게 날고 싶지만 스스로 만든 새장에 갇혀 있고, 시냇물은 악보 없이 노래하고 싶지만 세상이 정한 노래만 반복하는 영상물 속에 박제되었습니다. 그러나 백합나무는 다릅니다. 겨울이면 모든 것을 벗습니다. 잎도 벗고, 꽃도 벗고, 자랑도 벗고, 욕심도 벗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다시 봄을 맞습니다.


그 모습 앞에서 시인은 자신도 백합나무처럼 되고 싶어 하십니다. 벗고 싶습니다. 비우고 싶습니다. 잊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틔우고 싶습니다. ‘연두 샤워’는 봄의 샤워가 아니라 영혼의 샤워입니다. 백합나무의 연두빛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쏟아지는 순간, 명예는 잠시 옷이 되고, 성공은 잠시 신발이 되며, 체면은 잠시 모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벗어놓은 시인은 마침내 소년 앞에 마주 선 시인으로 서게 됩니다. 그 순간 백합나무와 시인은 서로 다른 두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접목됩니다.


나무는 시인의 영혼에 연두를 틔우고, 시인은 나무의 영혼에 자신의 꿈을 접붙입니다. 그것이 바로 「연두 샤워」가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접목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시를 읽으며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낼 때 비로소 본래의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겨울의 백합나무가 앙상한 가지로 봄을 기다리듯, 우리도 언젠가는 평생 걸쳐 입었던 삶의 옷을 벗고 아무 이름도, 아무 훈장도, 아무 체면도 없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연두빛으로 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머리 위로 쏟아지는 연두는 단순한 새잎이 아니라, 오래 잊고 살았던 소년의 동심이며, 시인의 영토이며, 다시 살아보라는 영혼의 소리일 것입니다.


백합나무 아래에서 시작된 시인의 연두 샤워는 한 사람의 몸을 적시는 봄비가 아니라, 한 생의 굳어진 영혼을 다시 틔우는 박진규 시인의 시에 담긴 초제(醮祭) 정신이 됩니다.


j******n 2026.08.17.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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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1월의 회화나무처럼” 시 감상문
"박진규 시인의 “1월의 회화나무처럼” 시 감상문" 내용보기
<시 원문>분수대 옆 화단에 새똥이 이렇게 많다니새똥 속에 아직 소화가 안 된 콩알들이 보인다올려다보니 창공으로 가지들을 쏘며 선 회화나무그 많던 열매를 직박구리에게 다 주었구나내가 먹이고 살펴야 할 자식이라도 된다는 듯한 해 농사 잘 지어 솔빡 주었구나태양으로부터 받은 것을 태양에게 주기 위해직박구리에게 모두 전해준 1월의 회화나무새들은 어디든 날아다니며 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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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분수대 옆 화단에 새똥이 이렇게 많다니

새똥 속에 아직 소화가 안 된 콩알들이 보인다

올려다보니 창공으로 가지들을 쏘며 선 회화나무

그 많던 열매를 직박구리에게 다 주었구나

내가 먹이고 살펴야 할 자식이라도 된다는 듯

한 해 농사 잘 지어 솔빡 주었구나

태양으로부터 받은 것을 태양에게 주기 위해

직박구리에게 모두 전해준 1월의 회화나무

새들은 어디든 날아다니며 똥을 눌 것이다

눈 감고도 다 아는 텅 빈 회화나무


감상문


겨울 어느 화창한 날, 시인이 머문 자리,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회화나무는 바람의 손을 빌려, 자신의 열매를 하나씩 지상으로 내립니다. 직박구리는 그 열매를 겨우내 양식으로 삼아, 부지런히 나르고, 부지런히 먹습니다.


직박구리 가족은 회화나무의 품에서 배부른 겨울을 납니다. 회화나무는 그 모습을 보며, 모두 내어 준 빈 가지에 바람 활을 저어 노래를 합니다. “태양에게서 빌린 일곱 빛깔 무지개, 구름에게서 빌린 수정같은 빗방울, 창공에게서 빌린 머플러 같은 바람이 모여 만들어진 열매이니, 하늘이 내린 대리자 직박구리가 나타나 양식으로 삼으니, 아니 줄 수 있을까.”


회화나무는 자신의 품을 다 비울수록, 더 많은 생명이 안기게 되었고, 가지에 움켜진 씨알을 버릴수록 더 많은 밤하늘의 별들이 가지에 생겼고, 멈춘 발이 무거울수록 직박구리는 날개짓으로 먼 소식을 알려 줍니다.


한 알은 직박구리의 허기를 채우는 따뜻한 밥이 되고, 한 알은 새끼들의 작은 심장을 뛰게 하는 어미의 체온이 되고, 한 알은 가지에 남아 가지에 걸린 별 하늘 이야기를 듣습니다.


회화나무는 참 이상한 부자입니다. 그 겨울! 열매는 사라질수록 직박구리의 생명은 늘어나고, 회화나무의 영토는 늘어납니다. 비울수록 불어나고, 빈 가지가 될수록 밤하늘의 별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회화나무는 직박구리에게 열매를 먹였지만, 사실은 하늘의 무지개를 먹인 것이며, 구름 속 맑은 샘을 먹인 것이며, 창공의 바람노래를 먹인 것이며, 사계절의 절기를 먹인 것입니다.


직박구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회화나무의 꿈을 머금고 날아올라, 회화나무 씨앗을 숲 끝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직박구리가 있는 한, 회화나무는 날개 없이 날고, 두 다리 없이 숲을 달리고, 두 눈 없이 태양을 바라보고, 두 귀 없이 바람의 노래를 들게 됩니다.


시인께서 노래한 회화나무는 이 시대의 어버이의 노래였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자식의 날개짓에 바람이 되어주고, 자식들의 자유로운 영혼과 젊은 날의 방황에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주고, 멀리만 보다 눈먼 자식의 머리에 아늑한 그늘이 되어 쉬게 해 줍니다.


부모가 되면 참 이상한 마법에 걸립니다. 주고도 잃었다 하지 않고, 비우고도 빈곤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비울수록 가진 것 같고, 비울수록 보람이 차오릅니다.


부모는 매일 이상한 마법의 기도를 합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부모의 은혜를 자식들은 쉽게 잊어버리기를, 자식들의 성공은 오롯이 자녀들 스스로 만든 것이라 믿기를, 부모란 한 시대 기꺼이 바쳐지는 당연한 희생물이라 여기기를, 효도라는 케케묵은 도덕이 자식들의 가슴에 후회의 한으로 맺히지 않기를, 부모의 부족함과 열등감과 보상심리가 자식의 앞길을 막은 모난 돌이었다는 사실을.


회화나무는 속삭입니다. 성공한 부모란 겨울 추위 한가운데, 마른 기도처럼 서 있는 존재일 순간으로 박제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또 깨닫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회화나무라는 것을. 자신의 시어를 세상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평생에 걸친 시작(詩作)의 열정과 노고로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였으되, 직박구리의 무심한 행동 닮은 독자들에 의해 망각의 산에 묻힐 것이지만. 결코 시인은 담담한 미소를 잃지 않는 나무라는 것을... 그 겨울, 시인께서 분수대 옆 벤치에서 만난 것은 “눈 감고도 다 아는 텅빈 1월의 회화나무”가 된 자신이었습니다.

j******n 2026.08.03.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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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등 뒤의 풍란" 시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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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등 뒤의 풍란” 감상문 시제목: 등 뒤의 풍란 시 원문 한 10년쯤 사귄 풍란이다나와 같은 물 먹고나와 같은 공기 마시고나와 같은 햇빛 쬐며 사는 풍란이다오늘 아침 물 주려고 보니이파리들이 모두 창밖을 보고 있다당장 어디로 떠날 참인지까치발이다올해 너도 꽃을 꿇었구나물은 병아리 한 모금화분을 반대로 돌려놓고나를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한 10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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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등 뒤의 풍란” 감상문


시제목: 등 뒤의 풍란


시 원문


한 10년쯤 사귄 풍란이다

나와 같은 물 먹고

나와 같은 공기 마시고

나와 같은 햇빛 쬐며 사는 풍란이다

오늘 아침 물 주려고 보니

이파리들이 모두 창밖을 보고 있다

당장 어디로 떠날 참인지

까치발이다

올해 너도 꽃을 꿇었구나

물은 병아리 한 모금

화분을 반대로 돌려놓고

나를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한 10년쯤 사귄 풍란이다


시인은 달력의 숫자를 모으고, 풍란은 창가의 햇살을 모읍니다. 시인은 서류 위에 세월을 쌓는 동안, 풍란은 새순으로 세월을 조용히 밀어 올립니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생명의 나이테가, 같은 공간 안에서 저마다 다른 모습의 시계 태엽을 감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물 먹고


한 모금의 물로 서로 다른 생명이 엮어낸 두 우주가 한 공간에 성장합니다. 물로 이어진 공생이 10년이라는 세월을 쌓았으니, 물 한 방울은 우주의 끝에서 두 생명을 잇는 다리였습니다.


나와 같은 공기 마시고


숨이란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닙니다. 업무에 지쳐 무거워진 시인의 숨이 있고, 마른 잎 되어 사라지는 풍란의 한숨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폐, 서로 다른 결의 호흡으로 시인과 풍란은 다른 듯 같은 숨을 쉽니다.


나와 같은 햇빛 쬐며 사는 풍란이다


햇살은 얇은 담요처럼 내려와 일부는 시인의 등허리를 감싸고, 일부는 풍란의 가지 끝에서 그림자 늘리기 놀이를 합니다.


오늘 아침 물 주려고 보니

이파리들이 모두 창밖을 보고 있다


풍란은 잎마다 푸른 귀를 세우고 창밖 세상의 기척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치 오래 묶여 있던 새 한 마리가 처음 하늘을 배우려는 듯, 먼 발치 고향의 냄새를 알아챈 노루처럼, 이파리마다 창밖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당장 어디로 떠날 참인지

까치발이다


잎을 토끼 귀 모양으로 세우고 창밖으로 향합니다. 시인은 웃음과 함께 문득 서운함도 밀려옵니다. 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풍란의 마음이 어디로 떠나있는지 궁금합니다.


까치발!

풍란은 뿌리까지 모두 드러내면서 걸어 나가려는 자세입니다. 마음은 밤새 걷다 창쪽에 기울어진 잎의 흔적을 남긴 채 새침 떼고 귀만 쫑긋한 모습입니다. 까치발 딴 마음들이 풍란의 다리 사이 여기저기 엉겨있습니다.


올해 너도 꽃을 꿇었구나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눈물을 감추는 사람처럼, 몸속 깊이 감춘 꽃은 녹색 침묵만을 시인에게 던집니다. 꽃 없는 녹색 잎은 시인에게 전하는 가장 조용한 대화입니다. 추억은 굳어 석고처럼 한 곳에 머무나 마음은 움직인다고!


물은 병아리 한 모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병아리 한 모금. 작은 몸집에 그 물도 많을지 적을지 모른 채 십 년을 지냈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오히려 낯선 설렘의 관계를 지속할거라는 자기 위안입니다. 시인께서 주는 한 모금 속에 십 년간 설렘의 정이 녹아 있고, 새 만남처럼 떨림의 긴장이 스며 있다는 의미겠지요


화분을 반대로 돌려놓고


창밖으로 향한 풍란의 잎을 다시 안으로 돌려봅니다. 떠나려는 마음을 달래듯, 그러나 어쩌면 창밖을 향한 것은 풍란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었을지 모릅니다. 도시 직장인으로서 언젠가 떠나야 할 것들에 대한 미련, 풍란은 말없이 시인의 속마음을 대신 속삭이는 중입니다.


나를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모르는 척, 붙잡지 않을 것처럼 의도한 침묵은 시인의 은밀한 대화법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인은 그동안 알면서도 무시한 자신의 시인으로서 열정을 향해, 10년간 애쓰며 보낸 자신의 진짜 내면을 모른 척 안아봅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십 년 동안 시인이 풍란을 보살핀 줄 알았는데, 풍란이 먼저 시인의 등 뒤를 말없이 지켜 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알고보니 그 풍란은 시인으로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풍란이 헤세의 데미안이라면 시인은 싱클레어일 것입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말없이 같은 공기를 마시며 곁을 지켜 준, 오래된 동반자.

등 뒤에 늘 누군가 있다는 것은 어린시절 시골길에서 동생의 손을 잡으면 공동묘지 옆길을 걸어도 무섭지 않았던 경험과 같이 말없는 동행이 주는 위안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밖으로 향하던 풍란을 돌려 놓고 다시 뒤돌아 앉아 풍란을 잊고 일을 합니다. 시인은 풍란이란 막스 데미안의 인도를 통해 직장 외 또 다른 아브락사스 시예술의 세계로 가는 날개를 펴게 될 것입니다.


풍란은 조용히 그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j******n 2026.07.13. 신고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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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물봉선화" 시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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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물봉선화” 시 감상문 시 원문 시 제목: 물봉선화 물봉선화산골짜기 계곡 물 자작한 곳에물봉선화 무리 지어 피어있다컴컴한 산 구석이 조금 무서웠던 나는네가 있으니 참 좋다너도 뒤에 있기 선수구나서로를 원하는 건 부질없는 일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멀리 있는 기쁨이 있다어둥둥 너는 아주 고래를 닮았구나8월이 다 가는 때를 기다려태평스레 공중을 헤어보고 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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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물봉선화” 시 감상문


시 원문


시 제목: 물봉선화


물봉선화산골짜기 계곡 물 자작한 곳에

물봉선화 무리 지어 피어있다

컴컴한 산 구석이 조금 무서웠던 나는

네가 있으니 참 좋다

너도 뒤에 있기 선수구나

서로를 원하는 건 부질없는 일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멀리 있는 기쁨이 있다

어둥둥 너는 아주 고래를 닮았구나

8월이 다 가는 때를 기다려

태평스레 공중을 헤어보고 있구나


시 감상문


더 이상 높을 곳이 없이 아래만 보이는 곳도 있지만, 더 이상 낮을 곳이 없어 위만 보이는 곳도 있다. 높고 아득하여 세상을 한 덩어리로 보는 것. 낮고 가까워 각각을 다르게 품는 것. 서로 배경이 되어 서로를 드러낸다.


물봉선화란 노자께서 항상 칭송하는 곡신(谷神)이니 당신께서 잠시 세상에 나투신 모습이다. 곡신은 비어 있어 만물을 채우고, 마르지 않아 생명을 낳고, 낮아 만물을 안고, 가까워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분이다.


허허로이 계시다 잠시 내보인 모습이 한떨기 물봉선화이다. 물봉선화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낮은 곳을 향하기만 하고 위로 올라선 적이 없고, 낮춤으로 오히려 만물을 업어 떠받칠 뿐이다. 


앞 선 바가 없어 앞이 없고, 높인 바 없어 위가 없다. 땅에서 숨어 뿌리에 가두고, 낮에 숨어 어둠에 가둘 뿐이다.


신어산 골짝에 세상구경 하늘구경, 골짝 구경을 하시느라 얼굴을 보이실 때면 한 송이 꽃 속에 한 하늘을 담으신다. 꽃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으며 서로를 가리지 않는다.


각각은 서로 배경이 되어 연분홍 물결을 이루니 한 마리 고래 마냥 공중 유영을 한다.


"컴컴한 산 구석이 조금 무서웠던 나는
네가 있으니 참 좋다."


어둠은 빛이 없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친구가 없어 그런 것이니 물봉선화는 시인에게 등불같은 친구이시다.


시인이 방문하신 신어산 능선은 스치는 바람에 외롭고, 깊은 계곡은 넉넉한 품이라도 적막할 뿐 오직 물봉선화가 있어 외로운 산기슭을 두손으로 감싸고 적막한 품에 온몸을 안겨주는 친구가 된다. 등불이 아니라도 곁에 있어 밝은 시인의 동행자이다.


"너도 뒤에 있기 선수구나."


시인의 세상살이란 선한 경쟁과 선한 소유욕으로 살아가야 하는 꽃무리 같은 삶이다. 시인은 물봉선화이다. 물봉선화는 경쟁하여 숨으려 하고, 선한 소유욕으로 가진 자리를 내어주려 하고, 선한 명예심으로 잊혀짐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지독한 고독을 안으로 채우는 나이테같은 삶을 사는 존재이다.


"서로를 원하는 건 부질없는 일."


원하는 건 소유하지 않는 것. 원하는 건 소유당하지도 않는 것. 산은 골짜기를 붙잡지 않고, 골짜기는 물을 붙잡지 않으며, 물은 꽃을 붙잡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뒤로 물러나는 삶이다. 사랑도 그러하고, 우정도 그러하며, 자연도 그러하다.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보이기 위해 피는 꽃이 아니라면 볼 사람 없다고 시들해지는 꽃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박수를 치지 않아도 무덤덤할 수 있는 꽃에게만 선한 바람이 불고 계곡이 흐르며, 생명이 피어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멀리 있는 기쁨이 있다."


달은 멀리 있어도 밤길 시인에게 달빛을 깔아주고, 별은 작아서 아득하지만 밤길 시인에게 나침반이 된다. 가까움으로 눈앞이 화사하지만, 멀다고 기쁨이 줄어들지 않는다. 주고 받는 조건에 안도하는 기쁨도 있겠지만, 몽환병자 같이 불명확하고, 노름쟁이 같이 불성실한 것에도 숨어 지내는 “멀리있는 기쁨”도 있다.


"어둥둥 너는 아주 고래를 닮았구나."


물봉선화여 그대는, 산골짜기의 물안개를 타고, 하늘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를 닮았구나” 수천 마리 무리들, 분홍 꽃잎 지느러미를 늘여뜨리고

긴 꽃부리 빳빳이 세우고, 계곡의 바람을 타고, 언덕 위를 유영하는 고래들이다. 산은 바다가 되고, 구름은 물결이 되며, 꽃들은 고래 떼가 되어,푸른 하늘을 천천히 유영하여 건너간다.


"8월이 다 가는 때를 기다려."


뜨겁던 여름도, 골짜기에 이르면, 그 열기 넘치던 웅변도 낮게 쉬어 버린다. 더위조차, 산 앞에서 손님이 되고, 계절조차, 물 앞에서 겸손해진다.


"태평스레 공중을 헤어보고 있구나."


"공중을 헤어보는"  물봉선화에 담긴 하늘은 유영하는 고래의 바다이며, 아래로 비친 구름은 고래의 입김이며, 꽃이된 고래는 세속의 소담한 이야기를 품은 “뒤에 있기 선수”의 수행자 시인이시다.


j******n 2026.07.06. 신고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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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밥” 시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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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괭이밥 고양이가 다니는 길가에 사는 낮은 풀이다고양이가 배 아프면 뜯어먹는 풀이다이 풀로 속을 다 토해내고 낫는다는 걸고양이는 고양이 할배로부터 배웠을 것이다역류성식도염으로 고전 중인 나도뭐라도 뜯어먹어야겠기에 이것저것 먹는 중이다어디에 답이 있는지 몰랐던 고양이 할배도얼마나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인가나도 웅크려 한 잎 살살 따서 먹어본다시큼털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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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괭이밥


고양이가 다니는 길가에 사는 낮은 풀이다

고양이가 배 아프면 뜯어먹는 풀이다

이 풀로 속을 다 토해내고 낫는다는 걸

고양이는 고양이 할배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역류성식도염으로 고전 중인 나도

뭐라도 뜯어먹어야겠기에 이것저것 먹는 중이다

어디에 답이 있는지 몰랐던 고양이 할배도

얼마나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인가

나도 웅크려 한 잎 살살 따서 먹어본다

시큼털털하다

양쪽 턱 침샘 순식간에 분출한다

이파리들은 이쁜 하트를 뽕 날리고 있다

혹시 모르니 한 장 더 뜯어먹는다

어, 그러면 사랑이라?


<감상문> - 괭이밥과 사랑-


고양이의 길은 시인의 길과 다르지 않다. 배 아픈 고양이가 괭이밥을 뜯듯, 속 쓰린 시인도 들풀 한 장에 기대어 삶의 처방전을 찾는다. 고양이에게는 약이고, 시인에게는 사랑이다. 고양이는 할배에게 배우고, 시인은 풀꽃친구에서 배운다.


길가의 낮은 풀 하나, 사람들은 잡초라 부르지만 시인의 눈에는 작은 약국이요, 작은 학교요, 작은 사랑의 우체통이다. 시인은 괭이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오래 숨겨 둔 지혜를 먹는다. 시큼털털한 맛은 풀의 맛이 아니라 삶이 건네는 녹색 미소이며, 침샘을 자극한 시큼한 맛은 자연이 보내는 행복의 맛이다.


하트 모양 잎들은 바람결마다 사랑의 편지를 날리고, 연둣빛 괭이밥은 땅에 접어 감춘 초록 하늘이다. 작은 잎 하나는 사랑의 별이 되고, 작은 풀 한 포기는 초록 하늘의 나비가 된다. 고양이는 몸을 고치려 풀을 뜯고, 시인은 마음을 고치려 풀을 뜯는다. 고양이는 병을 토해내고, 시인은 명치 갉는 고통을 토해낸다.


"어, 그러면 사랑이라?", 풀 한올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들꽃 하나에도 눈을 맞추며, 살랑이는 바람에 귀를 대면, 작은 생명의 지혜 앞에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시이며, 그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된다.


길가의 괭이밥이 낮게 자랄수록 시인의 사랑은 높게 자란다. 고양이가 괭이밥을 찾아 살 듯, 시인은 아름다운 자연을 찾는다. 한 잎의 풀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 그 분 바로 박진규 시인이시다.


하늘을 찌르는 성벽은 소유의 깃발을 꽂고 서 있고, 대지를 파헤치는 황무지는 무소유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한쪽은 움켜쥐어 돌이 되고 한쪽은 버리다 못해 바람이 된다.


성벽의 시간은 말라가고 대지의 바람에 야만이 한낮이다. 그 사이 길가에 엎드린 작은 괭이밥 하나 아무 말 없이 두 극단의 전쟁터를 건너간다. 


소유는 높음을 자랑하고 무소유는 비움을 자랑한다. 소유는 성벽을 쌓고 무소유는 성벽을 허문다. 그러나 괭이밥은 쌓지도 않고 허물지도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초록빛 숨결 하나로 세상의 병을 진단할 뿐.


배 아픈 고양이는 풀을 뜯고 욕심에 병든 인간은 이념을 뜯어먹는다. 교리(敎理)는 살이되고 이념은 뼈가 되고 오만은 법이된다. 그러나 명치는 더욱 타오르고 목구멍은 더욱 메어 온다.


그때 길가의 괭이밥은 말한다. "삼키지 말고 게워내라" 탐욕도 게워내고 오만도 게워내고 소유도 게워내고 무소유도 게워내라고.


고양이는 할배에게 배웠고 강물은 산에게 배웠고 들꽃은 계절에게 배웠고 시인은 괭이밥에게 배운다. 책은 글자를 남기지만 바람은 지혜를 남긴다. 활자는 기억을 보존하지만 대지는 생명을 보존한다. 고양이 할배의 주름진 시간 속에는 도서관보다 깊은 경험이 있고 백 권의 철학보다 한 잎의 괭이밥에 더 정확한 답이 있다.


시인은 웅크린다. 정복자가 허리를 펴는 곳에 시인은 무릎을 꿇는다. 승자가 고개를 드는 곳에 시인은 땅을 본다. 웅크림은 패배가 아니라 겸손의 자세, 작아짐은 굴복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시큼털털한 맛이 혀끝에 번지는 순간 문명의 단맛은 사라지고 경쟁의 독기는 옅어진다. 그 맛은 대지가 끓여 낸 약탕이고 바람이 빚어낸 해독제이나 맛은 고통이다. 그리고 마침내 잎새들은 하트를 날린다. 하늘은 푸름을 날리고 구름은 그리움을 날리고 괭이밥은 사랑을 날린다.


작은 하트 하나가 거대한 성벽보다 크고 연약한 잎새 하나가 수많은 이념보다 진해질때 시인은 한 장 더 뜯어먹는다. 혹시 모르니 한 장 더. 욕심을 씻어내기 위해 오만을 씻어내기 위해 문명의 열병을 식히기 위해 그러다 문득 미소를 짓는다.


소유도 아니고 무소유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그 너머의 자리에서 괭이밥 한 잎을 물고 조용히 묻는다 “어, 그러면 사랑이라?” 그러자 바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꽃은 미소를 짓고 고양이는 꼬리를 흔든다. 


세상이 잊고 있던 처방전 한 장이 길가의 작은 풀잎에 숨겨진 접힌 하늘에서 초록으로 반짝인다.

j******n 2026.06.22.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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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벌새의 일” 시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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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목: “벌새의 일” 시 원문: 벌새들이 활짝 피어난 매화를 탐하고 있다이즈음 저 여린 속곳의 내막 어찌 알고 찾아와가지의 미로(迷路)도 바삐바삐 드나들며 꽃꿀을 따고 있다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일인지 모르고 하고 있다참새보다 작은 몸이지만 꽃도 손톱만 해서 한 끼에 백 집은 들러야겠다꽃 핀 방향에 따라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기계체조 선수처럼 공중제비도 하며 꽃을 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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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목: “벌새의 일”


시 원문:


벌새들이 활짝 피어난 매화를 탐하고 있다

이즈음 저 여린 속곳의 내막 어찌 알고 찾아와

가지의 미로(迷路)도 바삐바삐 드나들며 꽃꿀을 따고 있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일인지 모르고 하고 있다

참새보다 작은 몸이지만 꽃도 손톱만 해서 한 끼에 백 집은 들러야겠다

꽃 핀 방향에 따라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기계체조 선수처럼 공중제비도 하며 꽃을 밝히고 있다

자기가 밝히는 일이 하늘을 밝히는 일인지 모르고

그렇게 헤진 꽃자리여서 알알이 초록이 영글텐데

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하고 있다


시 감상문 : 박진규 시인의 "벌새의 일"을 읽고


"벌새들이 활짝 피어난 매화를 탐하고 있다"


매화가 한꺼번에 봄의 문을 열어젖힌 날, 벌새들은 날개를 활짝 펴고 그 꽃 속에서 봄을 캐어내고 있습니다. 꽃은 향기로 벌새를 부르고, 벌새는 향기를 따라 꽃을 찾습니다. 꽃이 벌새를 부르는 그것이나 벌새가 꽃을 탐하는 것 모두 온몸으로 봄을 여는 사랑의 춤입니다.


꽃은 가만히 피지만 유혹은 현란하고, 벌새는 요란스럽게 달려가지만 조심스럽게 꿀을 땁니다. 정적이면서 우아한 꽃과 날래면서 소심한 벌새가 만나 한 폭의 살아 숨쉬는 화조도(花鳥圖)를 완성합니다. 


하얀 매화가 바람에 꽃 구름을 일렁이면 벌새는 그 일렁임을 타고 템포 있는 춤 선을 그리며 공중에 꿀을 따는 곡예를 합니다. 눈으로 정지시킬 수 없는 둘의 고요한 조우의 순간이 봄 화선지에 하나의 곡선이 됩니다.


"이즈음 저 여린 속곳의 내막 어찌 알고 찾아와"


시인은 꽃술을 결코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내밀한 옷 즉 ‘속곳’으로 표현합니다. 꽃의 가장 여리고 은밀한 곳을 사람의 옷에 빗댄 이 표현에는 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여성스럽고, 소년 같은 친밀한 상상력이 담겨 있습니다. 꽃잎이 겉으로 드러난 얼굴이라면 꽃 속 깊숙한 곳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한 마리 벌새에게만 허용한 비밀의 품인데 오직 벌새만 그 비밀의 품을 정확히 찾아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가지의 미로(迷路)도 바삐바삐 드나들며 꽃꿀을 따고 있다"


시인께서는 가지가 얽히고설킨 모습을 미로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벌새는 그 미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작은 몸을 이리저리 틀어가며 꽃과 꽃 사이를 바삐 오갑니다. ‘바삐바삐’라는 반복에는 벌새의 빠른 날갯짓과 민첩하게 꿀을 따는 동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벌새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구름 같이 공중에 가득 찬 매화꽃 사이에 날갯짓으로 가득 채웁니다. 벌새는 꽃꿀만 따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꽃과 꽃 사이에 생명의 이음줄을 부지런히 연결하는 중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이 일인지 모르고 하고 있다"


이 한 줄은 "벌새의 일"이라는 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문장처럼 느껴집니다. 벌새는 ‘일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칭찬받기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 움직임을 순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람은 일하면서 끊임없이 목적을 붙입니다. 이것은 성공을 위한 일이고, 저것은 의무를 위한 일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일에는 목적이 따르지만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해야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 그것이 벌새의 일입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수행은 수행한다는 생각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새보다 작은 몸이지만 꽃도 손톱만 해서 한 끼에 백 집은 들러야겠다"


벌새는 꽃 한 송이만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수백 수천 개의 꽃이라야 한 끼 식사가 됩니다. 시인은 이 모습을 마치 사람이 한 끼를 위해 여러 집을 찾아다녀 동냥을 구하는 수행자처럼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석가의 수행 중 가장 으뜸은 동냥 수행입니다. 동냥이야말로 무소유를 실천하는 으뜸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제압하는 가장 큰 실천은 동냥에 있습니다. 요즘 수행자는 동냥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욕망에 제압되어 울력이라는 미사여구로 스스로 밭을 일구고 양식을 비축하고 겨울을 준비합니다. 그들은 미래의 굶주림과 가난이 주는 공포에 굴복하고 그 공포에 갇혀 안주의 감옥에 치열한 동냥이란 수행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수행자의 호연지기란 요즘 수행자들이 극도로 회피하려는 그 공포 속에 나를 내던질 줄 아는 용기 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벌새는 결코 안주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작은 몸으로 작은 날갯짓을 하여 수 많은 동냥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한 끼를 위해 백 송이를 찾아가는 벌새의 날갯짓은 시인께 물음을 던집니다. 사람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은 것들을 살펴보았는가?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름도 없는 수많은 작은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고 일일이 직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꽃 핀 방향에 따라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꽃이 어느 방향으로 피었느냐에 따라 벌새의 몸동작도 달라집니다. 꽃의 방향따라 벌새는 위로 아래로  거꾸로 서기도 합니다. 자기 몸의 자세를 중심으로 세상을 재단하지 않고 꽃의 방향에 맞게 자신을 조정합니다.


시인께서는 벌새의 물구나무가 단순한 곡예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시인께서는 벌새를 사람처럼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 하지 않고, 자신을 세상의 작은 꽃 하나에 맞추는 공감의 몸짓으로 이해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에게 맞추어주기를 바라지만 벌새는 반대로 움직입니다. 꽃이 있는 곳으로 자신을 옮기고, 꽃의 방향에 따라 몸의 몸짓 방향까지 바꿉니다. 그래서 수행자 시인은 이 작은 벌새의 거꾸로 선 모습이야말로 오히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세라고 이해하고 계십니다.


"기계체조 선수처럼 공중제비도 하며 꽃을 밝히고 있다"


벌새의 움직임은 이제 곡예가 됩니다. 공중에서 몸을 뒤집고 회전하며 꽃을 향해 접근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기계체조 선수의 공중제비에 비유합니다. 시인은 생각하기를 벌새의 곡예는 관중도 점수판도 박수도 없는 오직 매화 한 송이와 공감하기 위한 몸짓이기에 더 순수하다고 판단하신 듯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움직임을 ‘꽃을 밝히고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참 놀라운 발상입니다. 벌새는 빛을 들지 않았지만, 꽃을 밝힙니다. 자기 몸 하나를 구부리고 움직여 꽃과 공감했을 뿐인데 꽃이 살아납니다. 이것은 시인께서이 세상을 밝히는 방식과도 닮았습니다. 자연과 풀꽃을 향한  작은 관심 하나, 풀꽃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말 한마디,  짧은 시 한소절이 "풀꽃친구"라는 시집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밝히는 일이 하늘을 밝히는 일인지 모르고"


벌새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꽃 하나를 찾아가는 자신의 작은 움직임이 하늘까지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알고 행함은 행함이 수단이 되지만, 안다, 모른다를 초월한 벌새의 행함 만큼 숭고할 수는 없습니다. 맹자(孟子)의 <離婁篇 章句下 12章>에 “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에 “갓난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군자 대인이다”라는 문장에서 ‘赤子之心’이 바로 벌새의 “하늘을 밝히는 일인지도 모르고”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의 시선은 꽃에서 출발하여 하늘로 훌쩍 올라갑니다.


작은 날갯짓 하나로 봄을 깨우니, 하늘까지 밝아집니다. 작은 일이 큰일의 씨앗이니 벌새의 작은 날갯짓은 큰 세계를 비상(飛翔)시키는 스위치가 됩니다. 정작 그것을 일으킨 벌새는 모른 상태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자신이 세상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행동의 빛, 그것이 어쩌면 이 세상에 가장 밝은 적자지심(赤子之心)의 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헤진 꽃자리여서 알알이 초록이 영글텐데"


벌새가 드나든 꽃은 헤지고 상처를 입은 듯하지만 열매가 맺히게 하는 측면에서 보면 아름다운 신호입니다. 꽃의 상처는 열매의 시작이 됩니다. 겉으로 보면 훼손이고 상처인데, 생명으로 보면 완성을 향한 기지개입니다. 시인께서는 사람의 삶도 그와 닮았음을 비유합니다. 상처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점으로써 어떤 아픔은 사람을 깊게 하고, 어떤 기쁨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아름다운 시를 짓는 에너지가 된다는 사실을! 꽃이 헤진 자리에서 초록이 영글듯, 모든 것은 헤진 자리를 가져야 초록으로 익어갈 열매가 있다는 것을!


"그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하고 있다"


마지막 반복은 앞에서 나온 문장보다 더 깊게 다가옵니다. 벌새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다. 벌새의 꽃꿀 따는 작은 일이 꽃의 초록빛 결실을 만들고 다시 새로운 생명을 잇는 낙하를 준비하는 미래가 그 순간에 응집되어 시작되는 것임을 모릅니다.


시인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위대한 일은 반드시 위대한 의식을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 때로는 아무런 명분도 없이, 아무런 선언도 없이, 그저 눈앞의 작은 일에 온몸을 집중하는 사소하지만, 필연적 순간들에서만 시작된다는 사실을! 벌새에게 매화꽃 한 송이와 날갯짓과 꽃의 형상 따라 같이 물구나무서는 순간이나, 시인의 어깨에 낙하하는 꽃잎 한 장의 만남으로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에 담긴 시 한 줄의 영감이나, 서로는 서로에게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우연의 사건이 자연과 시인에게 큰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큰 뜻을 품었다고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 하나가 계획 없이 연결한 또 다른 자극이 세상의 깊이를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벌새의 일”은 아무런 이념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시에는 무엇을 위해 사는지, 종교적 사명이 무엇인지, 국가의 이념이 무엇인지, 삶의 진지한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 의도적으로 배척합니다. 그저 꽃이 피었으니 꽃으로 날아가고, 꿀이 있으니 꿀을 먹고, 꽃의 방향이 달라지면 자기 몸의 방향을 바꾸는 벌새의 공감만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저’가 놀랍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고, 계산하지 않고 몰입하고,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자기 일합니다. 벌새의 물구나무는 하나의 철학이 되고, 공중제비는 하나의 수행이 되며, 꽃을 드나드는 작은 날갯짓은 세상을 밝히는 춤이 됩니다. 무엇이 위대한 일인가를 묻기 전에 눈앞 작은 일에 무의식적으로 밀착되는 날갯짓을 얼마나 온몸으로 열심히 했는가를 살펴볼 따름입니다.


벌새에게는 꽃 한 송이가 우주이고 그 우주 사이를 이리저리 드나들기 위한 날갯짓으로 공중에 정지시킨 몸이 하루의 전부입니다. 벌새에게 꽃은 벌새에게 꿀 양식을 주고 벌새는 꽃에게 암수 수정이란 미래를 준다는 상호 계산 따위는 없는 무심(無心)의 일입니다. 벌새도 꽃도 연유를 모르고, 벌새도 꽃도 연유에 대해 알려고도 않습니다. 다만 한쪽은 꽃을 피웠고, 다른 한쪽은 날개를 폈을 뿐입니다.  


무심이 펼친 꽃잎과 날갯짓 속에 꽃은 열매가 되고, 열매는 다시 생명이 됩니다. 시인께서는 자문합니다. 누가 벌새처럼 자기가 세상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오늘 자기 앞에 놓인 작은 일 하나를 저토록 온몸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j******n 2026.09.2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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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산호자처럼” 시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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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목: 산호자처럼 시원문: 나뭇잎인데 쌈 싸 먹는 나뭇잎이다기장 사람들이 봄젓과 함께 오래도록 좋아하는 나뭇잎이다목련 나뭇잎 같기도 감 나뭇잎 같기도 한데어떤 맛인지는 딱 잘라 말해줄 수 없는 나뭇잎이다아무 맛도 안 나는 듯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뭇잎이라좌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유유자적한 나뭇잎이다그래도 아는 사람은 정말 친한 나뭇잎이라해마다 오월이면 저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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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목: 산호자처럼


시원문:


나뭇잎인데 쌈 싸 먹는 나뭇잎이다

기장 사람들이 봄젓과 함께 오래도록 좋아하는 나뭇잎이다

목련 나뭇잎 같기도 감 나뭇잎 같기도 한데

어떤 맛인지는 딱 잘라 말해줄 수 없는 나뭇잎이다

아무 맛도 안 나는 듯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뭇잎이라

좌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유유자적한 나뭇잎이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정말 친한 나뭇잎이라

해마다 오월이면 저절로 끌리며 산에 가는 나뭇잎이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이 나뭇잎을 아는 사이라면

말없이도 통하는 신묘한 나뭇잎이다


<시 감상문>


박진규 시인의 「산호자처럼」 시는 그 어떤 맛보다 더 깊은 무미(無味)스런 묘한 맛을 지닌 기장 고향의 산호자 쌈잎에 대한 시입니다.


산호자는 그저 나무에 매달린 푸른 잎이 아니라, 쌈잎이면서 한 사람의 어린 시절 추억과 고향의 정서가 녹아든 ‘연둣빛 이야기’입니다.


“나뭇잎인데 쌈 싸 먹는 나뭇잎이다”라는 구절부터 산호자의 특별함이 드러납니다. 흔히 쌈이라 하면 상추나 깻잎처럼 밭에서 자라는 채소를 먼저 떠올리지만, 산호자는 나무에 달린 쌈잎입니다. 채소인 듯 채소가 아니고, 그냥 나뭇잎인 듯하나 먹는 쌈잎입니다. 


이 묘한 경계에서 산호자는 매력을 발산합니다. 밭에서 상에 오른 쌈이 있지만, 나무에서 상으로 내려온 것도 있으니, 땅과 하늘이 한 상(床)에 모여 쌈의 조화를 이룹니다.


“기장 사람들이 봄 젓과 함께 오래도록 좋아하는 나뭇잎이다”라는 구절에서 산호자 잎은 기장 바다의 젓갈을 더할 때 감칠맛 나는 최고의 쌈이 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짭조름한 봄 젓은 바다의 향기이고, 푸른 산호자 잎은 기장 땅의 속삭임입니다. 


기장 바다의 짠맛과 기장 땅의 표현 불가능한 오묘한 맛 즉 무미(無味)한 잎이 한데 어우러진 쌈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입맛을 즐겁게 하는 음식이 아니라, 기장 사람들이 오랜 세월 이어온 고향의 맛이자 삶의 맛이기도 합니다.


“목련 나뭇잎 같기도 감 나뭇잎 같기도 한데”라는 표현은 산호자의 모습을 설명하면서도 시적인 여운이 둥글고 포근하게 남습니다. 목련 잎처럼 넉넉하고, 감나무 잎처럼 둥글게 닮았으면서도 닮지 않은 잎, 익숙하면서도 이름 붙이기 어려운 잎입니다. 바로 이 애매함이 산호자의 형상과 오묘한 맛의 근원이겠지요.


“어떤 맛인지는 딱 잘라 말해줄 수 없는 나뭇잎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시의 정서가 한층 깊어집니다. 상추의 쌉싸름함이나 깻잎의 독특한 향처럼 누구나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맛이 아닙니다.


산호자의 잎은 혀로만 느끼는 맛이 아니라 아련한 추억으로 완성되는 맛입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맛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기억이 얽혀 있어 몇 마디의 언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아무 맛도 안 나는 듯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뭇잎”이라는 표현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에는 강한 향과 개성 넘치는 맛, 화려한 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이 많지만, 산호자는 소리 없이 피어나는 꽃처럼 정지된 듯 조용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아는 사람에게는 고향 시절을 소환하는 독특한 잎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게 빛나는 사람보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뒤돌아보면 더 깊은 존재의 여운을 남기기도 하지요.


“좌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유유자적한 나뭇잎이다”라는 구절에서는 산호자의 성품을 시인이 닮고 싶은 것으로 은유하고 있는 듯 합니다. 밥상의 중심에 서서 자신을 뽐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숨어 있지도 않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킵니다. 이러한 대조적인 표현은 산호자의 존재감과 시인의 내면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이 산호자의 미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산호자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정말 친한 나뭇잎이라”라는 구절에서 산호자는 갑자기 식물이 아니라 오래된 친구가 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잎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벗처럼 다가오는 잎으로 산호자는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익숙한 은어(隱語)가 됩니다.


“해마다 오월이면 저절로 끌리며 산에 가는 나뭇잎이다”라는 구절에서 시인은 고향의 기억에 대한 짙은 향수를 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오월이 되면 산호자를 찾아 산으로 향하는 길엔 아버지의 발자국도 있고, 아들의 발자국도 있습니다. 그 길은 연어의 물보라처럼 기억의 물줄기를 거슬러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귀향의 아련한 발걸음입니다. 산호자 잎을 찾아가는 길에서 산의 푸르름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고, 시인의 동심이 녹아있는 세계를 만납니다.


마지막 두 구절은 이 시의 백미라고 생각됩니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이 나뭇잎을 아는 사이라면 / 말없이도 통하는 신묘한 나뭇잎이다.”

산호자는 마침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산호자라면 금세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산호자 아십니까?”라는 짧은 한마디가 어쩌면 “고향이 어디십니까?”보다 더 진한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산호자를 안다는 것은 그 잎을 먹고 자란 사람들의 시간과 풍경과 추억을 함께 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산호자 잎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초록빛 기억의 문입니다. 그래서 산호자는 고향 바다의 고깃배에 꽂힌 길다란 깃발이고, 어린 시절을 소환하는 푸른 초대장이며, 고향 사람을 알아보게 하는 기장 신분증이 됩니다.


결국 「산호자처럼」의 시에서 산호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향의 맛을 지닌 잎’이 됩니다. 혀끝의 맛은 사람마다 무한한 서사를 품으니 산호자 잎의 무미(無味)한 묘한 맛은 지금도 시인의 가슴 속에 기장바다의 젓갈과 함께 조용히 숨쉬고 있습니다.


산호자의 잎은 고향 밥상의 쌈이며,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이며, 시인의 성장통에 숨은 그리움이며, 시인의 시 속에 살아 숨쉬는 예술 세계의 힘이었습니다.


이 시에서 산호자 잎은 ‘나뭇잎처럼 생긴 둥근 고향’이며, ‘무미(無味)로 표현되는 묘한 예술가의 인생’이고, ‘긴 말없이도 서로를 통하게 하는 연둣빛 시’라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산호자 잎에는 잎을 따러 가는 길엔  시인님의  아버지 발자국 소리와 어머니의 미소와 시인의 어린 시절 휘파람 노래가 언덕 길에 오래된 앨범처럼  살아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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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목욕

j******n 2026.09.07. 신고 공감 2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