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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할배가 아침 길가에 서서 온기를 쬐고 있다 겨울을 뚫고 누군가 불쑥 보내준 모닥불 한 송이 칼바람에 두 손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불씨를 감싸고 있다 그렇게 곁불 쪼이며 온 시간이다 이제 다 내어줄 차례다 가슴 온통 헤집어 툭 떨어지겠지 그러면 동박새 주둥이가 분 바른 자리로 돌아가야지 이 빨강이 지나온 아득한 길모퉁이 헤이며 지그시 눈 감은 불그레한 할배 한 송이
동백꽃 : 모닥불 한 송이를 품은 두 손의 교감과 자발적 몰락의 미학
박진규 시인의 시적 시선은 세상의 구석진 곳에 소외되어 있던 고독한 존재들을 대자연의 숭고한 질서 속으로 귀환시키는 거룩한 접합점에 서 있습니다. 시 <동백꽃>은 오래된 동백나무에 피어난 늙은 “동백꽃”을 ‘할배’의 실존으로 은유하며, 꽃 그 자체에 시인의 영혼과 감정을 투영하여 가장 따뜻하고 숭고한 서정을 이끌어냅니다.
이 시에서 마주하는 ‘할배’는 먼 훗날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실존적 자화상입니다. 시인이 그려낸 꽃의 노년은 나른하게 멈춰 선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했던 삶의 최정점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투신하려는 동백꽃에 대한 깊은 연민이자, 영혼의 구원을 다루는 장엄한 미학입니다.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찰나는 겨울 아침의 시린 추위 속에서 할배의 두 손과 동백꽃이 ‘모닥불 한 송이’가 되어 만나는 눈부신 교감에 있습니다. 이른 아침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할배는 담장 너머 가지 사이로 삐죽이 얼굴을 내민 커다란 동백꽃 한 송이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내 호주머니 깊은 곳에 찔러두었던 시린 두 손을 꺼내어, 마치 꺼져가는 호롱불을 안아 올리듯 붉은 동백 한 송이를 두 손 모아 소중히 감싸 안습니다.
시인은 이 극적인 순간을 통해 대자연이 불쑥 건넨 ‘모닥불 한 송이’의 붉은 환대를 형상화합니다. "저 할배가 아침 길가에 서서 온기를 쬐고 있다"는 첫 구절처럼, 동백의 붉은 꽃송이는 비록 외형은 차가울지라도 언 손을 녹여주고 마음을 뜨겁게 해주는 ‘꽃 모닥불’이 됩니다. 칼바람에 얼어붙은 할배의 두 손에 안긴 붉은 동백은, 차가운 문명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영혼을 데워주는 은은하고도 거룩한 불씨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수채화를 완성해 냅니다.
“이제 다 내어줄 차례다”라는 결별의 선언은 생의 전 주기에 걸쳐 아껴 쌓아둔 모든 가치를 아낌없이 나누어 준 뒤 통째로 투신하는 소유 종말의 서사입니다. 척박한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뜨겁게 꽃피워낸 동백꽃과 할배는, 나중에 맺힐 미래의 열매를 위해 모든 것을 통째로 내어주며 조용히 사라지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동백의 낙화는 다른 꽃들처럼 꽃잎이 낱낱이 흩어지는 슬픈 분해가 아닙니다. "가슴 온통 헤집어 툭 떨어지겠지"라는 시구처럼, 동백은 꽃잎과 꽃술과 꽃모가지를 온전히 하나의 생명으로 품은 채 바닥을 향해 통째로 낙하(落下)합니다.
겨우내 지키던 가지 위의 보금자리를 미련 없이 비워내고, 낙화한 그 모습 그대로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결연한 퇴장은 참으로 장엄합니다. 이는 세속의 모든 집착을 비워내고 스스로 몰락함으로써 완성하는 ‘장엄한 부재(不在)의 가치’를 구현하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동백의 모가지가 끊어진 그 자리는 단절의 흉터가 아닌, 새로운 생명을 향해 영양을 밀어 올리는 눈부신 잉태의 자리입니다. 시인은 "동박새 주둥이가 분 바른 자리로 돌아가야지"라는 고백을 통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자발적 몰락을 재촉합니다.
겨우내 행복한 속삭임을 나누었던 동박새를 가차 없이 밀쳐 보내고, 이제는 나무뿌리 옆 바닥에 누워 옛 가지를 올려다보며, 장차 그 자리에 새롭게 피어날 미래의 꽃과 대화할 동박새를 축복하며 산화하는 숭고한 몸짓입니다. 동백꽃과 할배는 동박새와 함께했던 그 힘들었으나 치열했던 생의 기억들을, 가지 끝 빈자리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걸어두고 조용히 사라집니다.
긴 겨울 동안 금빛 분가루의 온기를 전해 받았던 꽃잎들은 이젠 스스로 ‘할배 꽃송이’가 되어 무심히 낙하합니다. "지그시 눈 감은 불그레한 할배 동백"은 깜깜한 밤의 두려움도, 환한 낮의 걱정도 다 지워버린 채, 떠나보낸 동박새의 주둥이 분 바른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거룩한 봄을 완성해 냅니다.
박진규 시인의 <동백꽃>은 온 힘을 다해 피어내고 마침내 툭 떨어지면서, 다시 다가올 미래의 “동박새 주둥이 분 바른 자리”를 기쁘게 내어주기 위해 기꺼이 몰락하는 ‘할배’ 꽃 같은 우리의 삶에 대한 소리 없는 노래이자 헌사입니다. 겨울 추위가 옷깃을 세우게 하는 쓸쓸한 길모퉁이 담장 밑, 그곳에 툭 떨어져 있는 무심한 낙화 동백 한 송이라도 시인의 따스한 시선을 통과하는 순간,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거룩하고 따스한 모닥불이 됩니다.
시인의 아름다운 시선은 ‘할배’와 ‘붉은 동백꽃’의 따스한 포옹만큼이나,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붉은 삶의 아픈 궤적이 결국 진정한 사랑이었으며 눈부신 헌신이었다는 것을 눈물겹게 깨치게 해 줍니다. 평생 우리의 거친 귀로는 들을 수 없었던 꽃들의 신비로운 속삭임을 가만히 귀담아듣고, 그 우주적인 비밀을 시로서 소중히 알려 주신 박진규 시인께 깊은 감사와 비평적 경의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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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분수대 옆 화단에 새똥이 이렇게 많다니 새똥 속에 아직 소화가 안 된 콩알들이 보인다 올려다보니 창공으로 가지들을 쏘며 선 회화나무 그 많던 열매를 직박구리에게 다 주었구나 내가 먹이고 살펴야 할 자식이라도 된다는 듯 한 해 농사 잘 지어 솔빡 주었구나 태양으로부터 받은 것을 태양에게 주기 위해 직박구리에게 모두 전해준 1월의 회화나무 새들은 어디든 날아다니며 똥을 눌 것이다 눈 감고도 다 아는 텅 빈 회화나무
감상문
겨울 어느 화창한 날, 시인이 머문 자리,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회화나무는 바람의 손을 빌려, 자신의 열매를 하나씩 지상으로 내립니다. 직박구리는 그 열매를 겨우내 양식으로 삼아, 부지런히 나르고, 부지런히 먹습니다.
직박구리 가족은 회화나무의 품에서 배부른 겨울을 납니다. 회화나무는 그 모습을 보며, 모두 내어 준 빈 가지에 바람 활을 저어 노래를 합니다. “태양에게서 빌린 일곱 빛깔 무지개, 구름에게서 빌린 수정같은 빗방울, 창공에게서 빌린 머플러 같은 바람이 모여 만들어진 열매이니, 하늘이 내린 대리자 직박구리가 나타나 양식으로 삼으니, 아니 줄 수 있을까.”
회화나무는 자신의 품을 다 비울수록, 더 많은 생명이 안기게 되었고, 가지에 움켜진 씨알을 버릴수록 더 많은 밤하늘의 별들이 가지에 생겼고, 멈춘 발이 무거울수록 직박구리는 날개짓으로 먼 소식을 알려 줍니다.
한 알은 직박구리의 허기를 채우는 따뜻한 밥이 되고, 한 알은 새끼들의 작은 심장을 뛰게 하는 어미의 체온이 되고, 한 알은 가지에 남아 가지에 걸린 별 하늘 이야기를 듣습니다.
회화나무는 참 이상한 부자입니다. 그 겨울! 열매는 사라질수록 직박구리의 생명은 늘어나고, 회화나무의 영토는 늘어납니다. 비울수록 불어나고, 빈 가지가 될수록 밤하늘의 별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회화나무는 직박구리에게 열매를 먹였지만, 사실은 하늘의 무지개를 먹인 것이며, 구름 속 맑은 샘을 먹인 것이며, 창공의 바람노래를 먹인 것이며, 사계절의 절기를 먹인 것입니다.
직박구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회화나무의 꿈을 머금고 날아올라, 회화나무 씨앗을 숲 끝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직박구리가 있는 한, 회화나무는 날개 없이 날고, 두 다리 없이 숲을 달리고, 두 눈 없이 태양을 바라보고, 두 귀 없이 바람의 노래를 들게 됩니다.
시인께서 노래한 회화나무는 이 시대의 어버이의 노래였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자식의 날개짓에 바람이 되어주고, 자식들의 자유로운 영혼과 젊은 날의 방황에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주고, 멀리만 보다 눈먼 자식의 머리에 아늑한 그늘이 되어 쉬게 해 줍니다. 부모가 되면 참 이상한 마법에 걸립니다. 주고도 잃었다 하지 않고, 비우고도 빈곤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비울수록 가진 것 같고, 비울수록 보람이 차오릅니다.
부모는 매일 이상한 마법의 기도를 합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부모의 은혜를 자식들은 쉽게 잊어버리기를, 자식들의 성공은 오롯이 자녀들 스스로 만든 것이라 믿기를, 부모란 한 시대 기꺼이 바쳐지는 당연한 희생물이라 여기기를, 효도라는 케케묵은 도덕이 자식들의 가슴에 후회의 한으로 맺히지 않기를, 부모의 부족함과 열등감과 보상심리가 자식의 앞길을 막은 모난 돌이었다는 사실을.
회화나무는 속삭입니다. 성공한 부모란 겨울 추위 한가운데, 마른 기도처럼 서 있는 존재일 순간으로 박제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또 깨닫습니다. 자신이 바로 그 회화나무라는 것을. 자신의 시어를 세상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평생에 걸친 시작(詩作)의 열정과 노고로 삶의 에너지를 소모하였으되, 직박구리의 무심한 행동 닮은 독자들에 의해 망각의 산에 묻힐 것이지만. 결코 시인은 담담한 미소를 잃지 않는 나무라는 것을... 그 겨울, 시인께서 분수대 옆 벤치에서 만난 것은 “눈 감고도 다 아는 텅빈 1월의 회화나무”가 된 자신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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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등 뒤의 풍란” 감상문
시제목: 등 뒤의 풍란
시 원문
한 10년쯤 사귄 풍란이다 나와 같은 물 먹고 나와 같은 공기 마시고 나와 같은 햇빛 쬐며 사는 풍란이다 오늘 아침 물 주려고 보니 이파리들이 모두 창밖을 보고 있다 당장 어디로 떠날 참인지 까치발이다 올해 너도 꽃을 꿇었구나 물은 병아리 한 모금 화분을 반대로 돌려놓고 나를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한 10년쯤 사귄 풍란이다
시인은 달력의 숫자를 모으고, 풍란은 창가의 햇살을 모읍니다. 시인은 서류 위에 세월을 쌓는 동안, 풍란은 새순으로 세월을 조용히 밀어 올립니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생명의 나이테가, 같은 공간 안에서 저마다 다른 모습의 시계 태엽을 감고 있습니다.
나와 같은 물 먹고
한 모금의 물로 서로 다른 생명이 엮어낸 두 우주가 한 공간에 성장합니다. 물로 이어진 공생이 10년이라는 세월을 쌓았으니, 물 한 방울은 우주의 끝에서 두 생명을 잇는 다리였습니다.
나와 같은 공기 마시고
숨이란 사람만 쉬는 것이 아닙니다. 업무에 지쳐 무거워진 시인의 숨이 있고, 마른 잎 되어 사라지는 풍란의 한숨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폐, 서로 다른 결의 호흡으로 시인과 풍란은 다른 듯 같은 숨을 쉽니다.
나와 같은 햇빛 쬐며 사는 풍란이다 햇살은 얇은 담요처럼 내려와 일부는 시인의 등허리를 감싸고, 일부는 풍란의 가지 끝에서 그림자 늘리기 놀이를 합니다.
오늘 아침 물 주려고 보니 이파리들이 모두 창밖을 보고 있다
풍란은 잎마다 푸른 귀를 세우고 창밖 세상의 기척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치 오래 묶여 있던 새 한 마리가 처음 하늘을 배우려는 듯, 먼 발치 고향의 냄새를 알아챈 노루처럼, 이파리마다 창밖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당장 어디로 떠날 참인지 까치발이다
잎을 토끼 귀 모양으로 세우고 창밖으로 향합니다. 시인은 웃음과 함께 문득 서운함도 밀려옵니다. 십 년을 함께 살았는데 풍란의 마음이 어디로 떠나있는지 궁금합니다.
까치발! 풍란은 뿌리까지 모두 드러내면서 걸어 나가려는 자세입니다. 마음은 밤새 걷다 창쪽에 기울어진 잎의 흔적을 남긴 채 새침 떼고 귀만 쫑긋한 모습입니다. 까치발 딴 마음들이 풍란의 다리 사이 여기저기 엉겨있습니다.
올해 너도 꽃을 꿇었구나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눈물을 감추는 사람처럼, 몸속 깊이 감춘 꽃은 녹색 침묵만을 시인에게 던집니다. 꽃 없는 녹색 잎은 시인에게 전하는 가장 조용한 대화입니다. 추억은 굳어 석고처럼 한 곳에 머무나 마음은 움직인다고!
물은 병아리 한 모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병아리 한 모금. 작은 몸집에 그 물도 많을지 적을지 모른 채 십 년을 지냈습니다. 모른다는 것은 오히려 낯선 설렘의 관계를 지속할거라는 자기 위안입니다. 시인께서 주는 한 모금 속에 십 년간 설렘의 정이 녹아 있고, 새 만남처럼 떨림의 긴장이 스며 있다는 의미겠지요
화분을 반대로 돌려놓고
창밖으로 향한 풍란의 잎을 다시 안으로 돌려봅니다. 떠나려는 마음을 달래듯, 그러나 어쩌면 창밖을 향한 것은 풍란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었을지 모릅니다. 도시 직장인으로서 언젠가 떠나야 할 것들에 대한 미련, 풍란은 말없이 시인의 속마음을 대신 속삭이는 중입니다.
나를 모른 척하기로 하였다
모르는 척, 붙잡지 않을 것처럼 의도한 침묵은 시인의 은밀한 대화법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인은 그동안 알면서도 무시한 자신의 시인으로서 열정을 향해, 10년간 애쓰며 보낸 자신의 진짜 내면을 모른 척 안아봅니다.
문득 깨닫습니다. 십 년 동안 시인이 풍란을 보살핀 줄 알았는데, 풍란이 먼저 시인의 등 뒤를 말없이 지켜 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알고보니 그 풍란은 시인으로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풍란이 헤세의 데미안이라면 시인은 싱클레어일 것입니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말없이 같은 공기를 마시며 곁을 지켜 준, 오래된 동반자.
등 뒤에 늘 누군가 있다는 것은 어린시절 시골길에서 동생의 손을 잡으면 공동묘지 옆길을 걸어도 무섭지 않았던 경험과 같이 말없는 동행이 주는 위안을 발견합니다. 시인은 밖으로 향하던 풍란을 돌려 놓고 다시 뒤돌아 앉아 풍란을 잊고 일을 합니다. 시인은 풍란이란 막스 데미안의 인도를 통해 직장 외 또 다른 아브락사스 시예술의 세계로 가는 날개를 펴게 될 것입니다.
풍란은 조용히 그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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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물봉선화” 시 감상문
시 원문
시 제목: 물봉선화
물봉선화산골짜기 계곡 물 자작한 곳에 물봉선화 무리 지어 피어있다 컴컴한 산 구석이 조금 무서웠던 나는 네가 있으니 참 좋다 너도 뒤에 있기 선수구나 서로를 원하는 건 부질없는 일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멀리 있는 기쁨이 있다 어둥둥 너는 아주 고래를 닮았구나 8월이 다 가는 때를 기다려 태평스레 공중을 헤어보고 있구나
시 감상문
더 이상 높을 곳이 없이 아래만 보이는 곳도 있지만, 더 이상 낮을 곳이 없어 위만 보이는 곳도 있다. 높고 아득하여 세상을 한 덩어리로 보는 것. 낮고 가까워 각각을 다르게 품는 것. 서로 배경이 되어 서로를 드러낸다.
물봉선화란 노자께서 항상 칭송하는 곡신(谷神)이니 당신께서 잠시 세상에 나투신 모습이다. 곡신은 비어 있어 만물을 채우고, 마르지 않아 생명을 낳고, 낮아 만물을 안고, 가까워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분이다.
앞 선 바가 없어 앞이 없고, 높인 바 없어 위가 없다. 땅에서 숨어 뿌리에 가두고, 낮에 숨어 어둠에 가둘 뿐이다.
신어산 골짝에 세상구경 하늘구경, 골짝 구경을 하시느라 얼굴을 보이실 때면 한 송이 꽃 속에 한 하늘을 담으신다. 꽃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으며 서로를 가리지 않는다. 각각은 서로 배경이 되어 연분홍 물결을 이루니 한 마리 고래 마냥 공중 유영을 한다.
"컴컴한 산 구석이 조금 무서웠던 나는
어둠은 빛이 없어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친구가 없어 그런 것이니 물봉선화는 시인에게 등불같은 친구이시다.
시인이 방문하신 신어산 능선은 스치는 바람에 외롭고, 깊은 계곡은 넉넉한 품이라도 적막할 뿐 오직 물봉선화가 있어 외로운 산기슭을 두손으로 감싸고 적막한 품에 온몸을 안겨주는 친구가 된다. 등불이 아니라도 곁에 있어 밝은 시인의 동행자이다.
"너도 뒤에 있기 선수구나."
시인의 세상살이란 선한 경쟁과 선한 소유욕으로 살아가야 하는 꽃무리 같은 삶이다. 시인은 물봉선화이다. 물봉선화는 경쟁하여 숨으려 하고, 선한 소유욕으로 가진 자리를 내어주려 하고, 선한 명예심으로 잊혀짐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고 지독한 고독을 안으로 채우는 나이테같은 삶을 사는 존재이다.
"서로를 원하는 건 부질없는 일."
원하는 건 소유하지 않는 것. 원하는 건 소유당하지도 않는 것. 산은 골짜기를 붙잡지 않고, 골짜기는 물을 붙잡지 않으며, 물은 꽃을 붙잡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놓아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뒤로 물러나는 삶이다. 사랑도 그러하고, 우정도 그러하며, 자연도 그러하다.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보이기 위해 피는 꽃이 아니라면 볼 사람 없다고 시들해지는 꽃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박수를 치지 않아도 무덤덤할 수 있는 꽃에게만 선한 바람이 불고 계곡이 흐르며, 생명이 피어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멀리 있는 기쁨이 있다."
달은 멀리 있어도 밤길 시인에게 달빛을 깔아주고, 별은 작아서 아득하지만 밤길 시인에게 나침반이 된다. 가까움으로 눈앞이 화사하지만, 멀다고 기쁨이 줄어들지 않는다. 주고 받는 조건에 안도하는 기쁨도 있겠지만, 몽환병자 같이 불명확하고, 노름쟁이 같이 불성실한 것에도 숨어 지내는 “멀리있는 기쁨”도 있다.
"어둥둥 너는 아주 고래를 닮았구나."
물봉선화여 그대는, 산골짜기의 물안개를 타고, 하늘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를 닮았구나” 수천 마리 무리들, 분홍 꽃잎 지느러미를 늘여뜨리고 긴 꽃부리 빳빳이 세우고, 계곡의 바람을 타고, 언덕 위를 유영하는 고래들이다. 산은 바다가 되고, 구름은 물결이 되며, 꽃들은 고래 떼가 되어,푸른 하늘을 천천히 유영하여 건너간다.
"8월이 다 가는 때를 기다려."
뜨겁던 여름도, 골짜기에 이르면, 그 열기 넘치던 웅변도 낮게 쉬어 버린다. 더위조차, 산 앞에서 손님이 되고, 계절조차, 물 앞에서 겸손해진다.
"태평스레 공중을 헤어보고 있구나."
"공중을 헤어보는" 물봉선화에 담긴 하늘은 유영하는 고래의 바다이며, 아래로 비친 구름은 고래의 입김이며, 꽃이된 고래는 세속의 소담한 이야기를 품은 “뒤에 있기 선수”의 수행자 시인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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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괭이밥
고양이가 다니는 길가에 사는 낮은 풀이다 고양이가 배 아프면 뜯어먹는 풀이다 이 풀로 속을 다 토해내고 낫는다는 걸 고양이는 고양이 할배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역류성식도염으로 고전 중인 나도 뭐라도 뜯어먹어야겠기에 이것저것 먹는 중이다 어디에 답이 있는지 몰랐던 고양이 할배도 얼마나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인가 나도 웅크려 한 잎 살살 따서 먹어본다 시큼털털하다 양쪽 턱 침샘 순식간에 분출한다 이파리들은 이쁜 하트를 뽕 날리고 있다 혹시 모르니 한 장 더 뜯어먹는다 어, 그러면 사랑이라?
<감상문> - 괭이밥과 사랑-
고양이의 길은 시인의 길과 다르지 않다. 배 아픈 고양이가 괭이밥을 뜯듯, 속 쓰린 시인도 들풀 한 장에 기대어 삶의 처방전을 찾는다. 고양이에게는 약이고, 시인에게는 사랑이다. 고양이는 할배에게 배우고, 시인은 풀꽃친구에서 배운다.
길가의 낮은 풀 하나, 사람들은 잡초라 부르지만 시인의 눈에는 작은 약국이요, 작은 학교요, 작은 사랑의 우체통이다. 시인은 괭이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오래 숨겨 둔 지혜를 먹는다. 시큼털털한 맛은 풀의 맛이 아니라 삶이 건네는 녹색 미소이며, 침샘을 자극한 시큼한 맛은 자연이 보내는 행복의 맛이다.
하트 모양 잎들은 바람결마다 사랑의 편지를 날리고, 연둣빛 괭이밥은 땅에 접어 감춘 초록 하늘이다. 작은 잎 하나는 사랑의 별이 되고, 작은 풀 한 포기는 초록 하늘의 나비가 된다. 고양이는 몸을 고치려 풀을 뜯고, 시인은 마음을 고치려 풀을 뜯는다. 고양이는 병을 토해내고, 시인은 명치 갉는 고통을 토해낸다.
"어, 그러면 사랑이라?", 풀 한올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들꽃 하나에도 눈을 맞추며, 살랑이는 바람에 귀를 대면, 작은 생명의 지혜 앞에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시이며, 그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된다.
길가의 괭이밥이 낮게 자랄수록 시인의 사랑은 높게 자란다. 고양이가 괭이밥을 찾아 살 듯, 시인은 아름다운 자연을 찾는다. 한 잎의 풀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 그 분 바로 박진규 시인이시다.
하늘을 찌르는 성벽은 소유의 깃발을 꽂고 서 있고, 대지를 파헤치는 황무지는 무소유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한쪽은 움켜쥐어 돌이 되고 한쪽은 버리다 못해 바람이 된다.
성벽의 시간은 말라가고 대지의 바람에 야만이 한낮이다. 그 사이 길가에 엎드린 작은 괭이밥 하나 아무 말 없이 두 극단의 전쟁터를 건너간다. 소유는 높음을 자랑하고 무소유는 비움을 자랑한다. 소유는 성벽을 쌓고 무소유는 성벽을 허문다. 그러나 괭이밥은 쌓지도 않고 허물지도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 초록빛 숨결 하나로 세상의 병을 진단할 뿐.
배 아픈 고양이는 풀을 뜯고 욕심에 병든 인간은 이념을 뜯어먹는다. 교리(敎理)는 살이되고 이념은 뼈가 되고 오만은 법이된다. 그러나 명치는 더욱 타오르고 목구멍은 더욱 메어 온다.
그때 길가의 괭이밥은 말한다. "삼키지 말고 게워내라" 탐욕도 게워내고 오만도 게워내고 소유도 게워내고 무소유도 게워내라고.
고양이는 할배에게 배웠고 강물은 산에게 배웠고 들꽃은 계절에게 배웠고 시인은 괭이밥에게 배운다. 책은 글자를 남기지만 바람은 지혜를 남긴다. 활자는 기억을 보존하지만 대지는 생명을 보존한다. 고양이 할배의 주름진 시간 속에는 도서관보다 깊은 경험이 있고 백 권의 철학보다 한 잎의 괭이밥에 더 정확한 답이 있다.
시인은 웅크린다. 정복자가 허리를 펴는 곳에 시인은 무릎을 꿇는다. 승자가 고개를 드는 곳에 시인은 땅을 본다. 웅크림은 패배가 아니라 겸손의 자세, 작아짐은 굴복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시큼털털한 맛이 혀끝에 번지는 순간 문명의 단맛은 사라지고 경쟁의 독기는 옅어진다. 그 맛은 대지가 끓여 낸 약탕이고 바람이 빚어낸 해독제이나 맛은 고통이다. 그리고 마침내 잎새들은 하트를 날린다. 하늘은 푸름을 날리고 구름은 그리움을 날리고 괭이밥은 사랑을 날린다.
작은 하트 하나가 거대한 성벽보다 크고 연약한 잎새 하나가 수많은 이념보다 진해질때 시인은 한 장 더 뜯어먹는다. 혹시 모르니 한 장 더. 욕심을 씻어내기 위해 오만을 씻어내기 위해 문명의 열병을 식히기 위해 그러다 문득 미소를 짓는다.
소유도 아니고 무소유도 아니고 승리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그 너머의 자리에서 괭이밥 한 잎을 물고 조용히 묻는다 “어, 그러면 사랑이라?” 그러자 바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꽃은 미소를 짓고 고양이는 꼬리를 흔든다. 세상이 잊고 있던 처방전 한 장이 길가의 작은 풀잎에 숨겨진 접힌 하늘에서 초록으로 반짝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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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목: 꽃처럼
시 원문
세상에 찡그린 꽃이란 없다 파안대소는 아니고 피부 아래까지만 보글거리는 넘칠 듯 넘치지 않는 샘물이게 아무 걱정 없이 퐁당 뛰어들고 싶은 품이게 부처님도 그런 미소로 앉아 계신다 힘든 마음이 가끔 쏘아 보아도 그저 웃는다 누가 난처한 질문을 해도 허허허 세상의 꽃이란 먼저 웃는다 꽃 너머 꽃을 응시하면서
시 감상문
“세상에 찡그린 꽃이란 없다”
산은 거센 바람을 만나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강은 수많은 돌을 만나도 흐름을 잃지 않듯, 꽃은 비를 맞아도 미소를 거두지 않고 모진 바람을 만나도 향기를 접지 않는다. 혹시 찡그린 꽃이 있다고 한들, 꽃이 시든 연유가 아니라, 만물과 자신의 삶이 꽃인 줄 모르고 있을 뿐이리라.
“파안대소는 아니고”, “피부 아래까지만 보글거리는”
세상은 모두 웃는다. 폭포는 산을 뒤흔들며 호탕한 듯 웃고, 천둥은 구름 속에 숨어 하늘을 울리는 듯 웃고 샘물은 돌 틈을 적시며 속삭이듯 웃고, 새벽안개는 풀잎 끝을 타고 흐르면서 뽀얗게 웃는다.
큰 웃음은 청각에 맴돌지만, 부드러운 미소는 마음에 가라앉으니, 웃음은 소리를 따라 음악이 되고, 은은한 미소는 꽃향기 따라 내면을 장엄한다.
“넘칠 듯 넘치지 않는 샘물이게”
강물은 흘러 연어를 시켜 옛 소식을 전하고, 이슬은 샘물 되어 땅 소식을 전하고, 꽃은 화사하게 화장하여 바람의 소식을 풀잎에 전하되 수채화처럼 번지지만 흐려지지 않고, 솟아오르지만 넘치지 않는 샘물 닮은 미소가 된다.
“아무 걱정 없이 퐁당 뛰어들고 싶은 품이게”
큰 웃음은 두 팔의 품과 닮아 한 사람 정도 안을 수 있을 뿐, 미소는 슬픔, 기쁨들, 자랑스러운 것들, 부끄러운 것들, 지나간 것들, 다가올 것들 등 모두를 품는다. 꽃의 미소는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고, 봄볕처럼 따뜻하며,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아무 말 없이 쉬어 갈 수 있는 품이다.
“부처님도 그런 미소로 앉아 계신다.”
참새도 늙고, 벌레도 병들며, 꽃도 지고, 사람도 흙으로 돌아가는바, 아기는 어미의 깨끗하고 따뜻한 젖을 먹고 자라나지만 결국 평생 발바닥으로 밟고, 자신의 수레바퀴로 긁은 그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처는 두려움을 부정하지도 않고, 슬픔을 감추지도 않고 각자 어깨에 실린 고통의 무게만큼 몸부림쳐야 비로소 당신의 품을 내어 주신다고 한다. 염화미소(拈花微笑)는 꽃 한 송이를 든 우아한 선문답이 아니라, 진흙 속 어둠 세상과 동서남북 상하내외가 없는 흙탕물 세상, 물 위의 햇살과 공기의 세상이란 삼세(三世)를 모두 만나는 운명과 싸우다 지쳐 자포하고, 다시 일어나 성공하고, 그로 인해 더 노고하고, 때론 방향을 놓쳐 가는 길에 멈추고, 다시 가기를 반복하는 삶을 치열하게 겪은 사람만이 아름답게 피울 수 있는 미소이다.
“힘든 마음이 가끔 쏘아보아도 그저 웃는다”
바람은 꽃잎을 흔들 수는 있어도 꽃을 찡그리게 하지는 못한다. 햇살은 꽃을 시들게 할 수는 있어도 향기의 근원을 막지는 못한다. 사람 세상 역시 다르지 않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남기고, 시련은 마음에 흉터를 남긴다. 하지만 소나무에 내린 폭설로 부러진 가지에서 더 푸른 잎이 돋아나듯이, 세파의 상처로 무너졌다가 일어나고 다시 무너지는 절망 속에서만 아름다운 미소가 자란다. 시인께서 말하는 아름다운 미소는 슬픔을 잊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슬픔을 끝내 숨기지 못한 사람의 초조한 얼굴에서 핀 꽃이며 삶의 끝없는 여정 속에서 생긴 생채기이다.
“누가 난처한 질문을 해도 허허허”
구름은 산에 길을 묻지 않지만, 산은 묵묵히 능선을 내어 주고, 새는 하늘의 허락을 받지 않지만, 하늘은 끝없는 창공을 내어 준다. 강은 바다에 이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꽃은 피어난 까닭을 변명하지 않듯 미소는 삶과 운명의 모든 답을 깨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는 공포와 분노를 자각할 때 밤하늘의 푸른 달처럼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의 꽃이란 먼저 웃는다”
“세상의 꽃”은 해보다 먼저 새벽을 알고, 새보다 먼저 봄을 안다. 꽃의 미소란 누가 바라보기 전에 먼저 바라보는 눈길이며, 누가 사랑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며, 누가 알아주기 전에 먼저 향기를 건네는 관심이며, 누가 아파하기 전에 먼저 아파하는 공감이다.
“꽃 너머 꽃을 응시하면서”
세상에 찡그린 꽃이 없는 것은 찡그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한 아름다운 꽃임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슬픈 경고이다. 세상이 모두 미소인데 삶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은 자신의 온 인생이 통째로 미소 자체인지 깨치지 못한 데서 나온 무지일 뿐이다.
풍진(風塵)의 세상도 꽃이고, 고단한 삶도 꽃이며, 눈물도 꽃이고, 미소도 꽃이다. 피어남만 꽃이 아니라 시듦도 꽃이며, 만남만 꽃이 아니라 이별 또한 꽃이다.
박진규 시인의 「꽃처럼」은 꽃을 예찬하는 시이면서 꽃을 빌려 사람의 삶을 비추고, 미소를 빌려 삶의 품격을 전하는 시이다. 꽃은 아름다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피고 지는 자신의 운명이 아프기에 웃는다. 그 웃음과 미소는 삶을 포기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사랑하려 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일방적으로 손짓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연민이 승화된 것이리라.
시인은 꽃을 보며 세상을 말하며, 세상을 통하여 생명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박진규 시인의 “꽃처럼”이 단순한 자연 시를 넘어 존재의 시, 생명의 시, 수행의 시가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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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풀꽃친구」시 감상문
시 원문
각시붓꽃을 알게 되었다 험한 세상에 친구 하나 더 생긴 기분 각시붓꽃이 사는 김해 신어산 정상까지 나의 관할구역이 넓어진 기분 너를 닮은 제비꽃을 보아도 생각났다 누가 세상 얕보고 설쳐댈 때도 각시붓꽃, 어제 치과의사가 사람 잡는 통에도 너를 떠올린 일 너는 알 것이다 언제 만나도 자네 여긴 어쩐 일인가 우리 자세 낮추어 반색하는 절친 사이 각시붓꽃이 있는 곳이라면 이제 낯선 길도 무섭지 않다
<시 감상문>
사람을 만나면 세상이 넓어지고, 풀꽃을 만나면 내면이 넓어진다. 사람의 미소는 만남의 기쁨을 주지만 풀꽃의 미소는 무심한 동행의 행복을 준다. 사람 세상에서는 사람으로 생기는 기쁨을 만나지만 풀꽃 세상에서는 오래전 시인의 원고지 속 색바랜 미완성 시(詩)를 만나는 고독한 기쁨도 있다.
각시붓꽃은 시인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놓아 버린 인간관계, 망각해 버린 아픈 추억들, 떠나 버린 인연들로부터 받은 고독한 상처들을 이제는 담담하게 담을 수 있는 우주의 보자기였다.
"각시붓꽃을 알게 되었다."
각시붓꽃을 안다는 것은 씨앗 하나가 숲이 되는 시간의 여정이고, 빗방울 하나가 강이 되는 긴 공간의 이음이면서 여전히 무엇인가 남겨야 하는 어떤 것에 대한 강박이다. 각시붓꽃을 안다는 것은 우연이 운명의 뿌리임을 깨치는 속삭임일 뿐 필연을 가장한 인과율의 현란함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소박한 폭로이다.
각시붓꽃을 안다는 것은 박진규 시인의 지구별이 꽃에게 발견되었다는 것이며, 내가 꽃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꽃이 지구별 속 한국에서 박시인을 발견했다는 것이며, 이곳만 보는 삶의 시야를 버리고 저곳도 보는 지평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험한 세상에 친구 하나 더 생긴 기분."
친구를 만나는 길은 꽃길보다 돌길이며, 평지보다 비탈길이며, 화려한 축복들 속에 숨은 족쇄들이 황금 잇몸을 번득이며 붙잡아 두려는 유혹 속 오가지도 못하고 서 있는 순간과 닮은 길이다. 험한 세상을 걷는 길에서 이루어지는 성숙은 모든 순간이 처음인 낯섦에 대한 댓가를 인내로 지불해야 하는 정신적 화폐이다.
풀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다. 풀꽃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건넨다. 풀꽃은 관계가 아니라 내 영혼이 넘어지지 않도록, 안주하지 않도록 말없이 곁에 서 있는 순수한 반려이다.
"각시붓꽃이 사는 김해 신어산 정상까지."
산 하나를 안다는 것은 높이를 아는 일이 아니라, 그 산이 품고 있는 어둠의 깊이까지 닿는 감촉을 아는 일이다.
"나의 관할구역이 넓어진 기분."
사람들은 땅을 넓히고, 소유의 단맛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성공이라 교육받지만, 꽃은 소유와 무소유라는 논쟁을 버린 고요한 정념(淨念)에 머물 뿐이다. 논쟁을 버린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시인의 것이며, 시인의 영토이다.
"너를 닮은 제비꽃을 보아도 생각났다."
보랏빛은 하나인데 제비꽃은 각시붓꽃을 닮았고, 각시붓꽃은 제비꽃을 닮았다. 구별은 식물도감에나 있는 법 시인에게는 모두 한가지 보랏빛 꽃일 뿐이다.
"누가 세상 얕보고 설쳐댈 때도."
얕은 강은 얕은 소리를 내고, 깊은 강은 깊은 소리를 낸다. 높은 가지는 바람에 저항해야 생존하지만, 낮은 풀은 바람과 함께 자빠져야 생존한다. 많이 아는 학자는 만물을 분류하지만, 이름 모를 작은 풀꽃은 만물을 이름 없이 그냥 하나로 품는다. “세상을 얕보고” 치기(稚氣) 어린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시인의 내면에는 그냥 하나로 품어주는 풀꽃 친구들의 속삭임이 그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치과의사가 사람 잡는 통에도."
치과에 가면 치석 제거 기계의 치아 긁는 소리와 시린 통증은 마음조차 긁어 황폐하게 한다. 몸은 의자에 누워 있지만, 긴장은 목덜미를 돌처럼 굳게 만든다. 이완, 릴렉스 등 자기 최면은 약효 떨어진 신신파스 마냥 널브러지고, 오직 이 순간을 피하기 위한 모진 긴장만 의식을 압도한다.
그 순간 불현듯 다가오는 신어산 각시붓꽃 한 송이가 내 눈꺼풀 위에 시원한 보랏빛 꽃물로 아련해지면 치과병원 속 두렵고 낯선 기계 소리의 소음과 고통은 잠시 뒤로 물러간다.
"언제 만나도 자네, 여긴 어쩐 일인가."
속 깊은 친구는 경쟁하여 높아지려 하지 않고, 경쟁하여 낮아지려 한다. 산이 골짜기를 품듯, 강이 바다에 안기듯, 친구는 낮춤으로 더 큰 친구가 된다. 각시붓꽃을 만나 꽃의 시를 쓰고, 반려 친구로 삼아 공감의 시를 쓴다. 나는 그대의 일부분이 되고 그대는 나의 일부분이니 “여긴 어쩐 일인가?” 각시붓꽃 왈 그대는 낯선 ‘나’일세라고 한다.
"각시붓꽃이 있는 곳이라면 이제 낯선 길도 무섭지 않다."
세상은 날마다 처음이고, 인생은 날마다 미지의 퍼즐이다. 오늘 만나는 사람도 처음이고, 오늘 만나는 슬픔도 처음이다. 그중 마음에 각시붓꽃 한 송이 피어 있으면, 낯선 길도 순례길이 되고, 험한 세상도 배움의 길이 된다.
신어산(神魚山)이란 신령한 물고기가 먼바다를 건너 새 세상을 열고 스스로 산이 된 이름이다. 허황후가 바다를 건너온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운명의 강을 거스른 우주의 문을 여는 길이었으니 우주의 문으로서 허황후의 물고기는 잠 없는 깨침을 칭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신어(神魚)는 눈을 감지 않는다. 목탁을 목어(木魚)라 하니 바로 신어(神魚)이다. 목탁이 물고기의 형상인 것은 부성애, 모성애, 부부애, 직업정신, 애국심, 인류애라는 정의를 실현시키는 수단이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 같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며, 수단을 진리라고 위장하는 속임수들을 감시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인류애는 있고, 들꽃애는 없는가? 인류애는 있고, 곤충애는 없는가? 사람의 인권은 있고, 바퀴벌레의 생존권은 없는가? 트릭의 세상에서는 지구의 본래 주인이 바퀴벌레인 줄 알지만, 그것마저 인정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뿐이다.
신어산이란 존재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의심을 촉구하는 목어산(木魚山)이며, 목탁산이다. 공자께서도 하루 세 번 이상 정의롭게 행위를 한 자기 행동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을 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일일삼성(一日三省)이다.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루 세 번 이상 나르시시즘으로 “참 잘했어요”라고 칭찬하고 합리화하라는 문장이 아니다. 나의 정의가 때론 다른 지역 사람, 다른 시대, 다른 생명체, 다른 식물에는 악업의 원천일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성찰이다.
신어산은 시인에게 산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반성과 성찰 및 기존의 정의감에 대한 파렴치한 혐오감을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의심의 칼날을 갈게 하는 숫돌 같은 목탁이다. 신어산은 침묵하지만, 각시붓꽃은 신어(神魚)의 속삭임을 전하는 입이다.
파도는 포말을 일으키며 소란스럽지만, 심해(深海)는 언제나 고요하듯 각시붓꽃 한 송이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세파의 굴곡 속에서 그 고요를 내 안에 심는 것과 같다.
시인은 안다. 친구란 외로움을 없애주는 사람이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걸을 수 있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풀꽃 하나를 사랑하는 일은 꽃 한 송이를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걸음이 더 이상 외롭지 않은 걸음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임을!
신어산 각시붓꽃을 맞이하는 일은 너무 큰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노자도덕경 제41장, 大象無形) 처럼 없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감싸고 곁에 있는 것이니 어디에 위치한들 결코 외로울 수 없는 것 그래서 시인은 속삭인다. “이제 낯선 길도 무섭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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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시인의 “애기땅빈대풀이라도” 시 감상문
시 제목: 애기땅빈대풀이라도
시 원문:
어쩌려고 말복에 보도블록을 껴안고 있노? 염천 모퉁이를 지나다 밟을 뻔 했다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바닥에 바짝 붙어 기어가는 불그레한 줄기들 거기에 빈대 같은 진녹색 잎들이 뽈뽈 달려 있네 이리 낮고 작아서 애기땅빈대풀이라도 해야 할 중요한 일 있다는 듯이 사는 집이 자꾸 밟히는 보도블록 틈새라도 물러서지 않고 힘써 정진하겠다는 듯이 오로지 지금의 생명에 충실하겠다는 듯이
시 감상문
"어쩌려고 말복에 보도블록을 껴안고 있노?"
시인의 첫마디는 풀을 향한 질문이면서 스스로를 향한 질문입니다. 말복의 태양은 대장간의 쇳물처럼 보도블록 위에 쏟아지고, 보도블록은 불가마처럼 달아오릅니다. 사람이라면 그늘을 찾고, 짐승이라면 숲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애기땅빈대풀은 뜨거움을 피하지 않습니다. 불가마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진정한 수행자란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세상 표정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이 아니라, 자기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자리를 안고 이 악물고 미간 주름 깊이 파면서 끝까지 견디는 스스로 알면서 곰같이 미련할려는 자임을 이 한 줄이 먼저 말해 줍니다.
"염천 모퉁이를 지나다 밟을 뻔 했다.“
뜨거움만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 밟힐 수 있는 운명도 함께 견딥니다. 세상은 큰 나무는 피해 가지만 작은 풀은 쉽게 짓밟으며 죄책감도 없습니다. 강한 것은 경계하면서 피한 이유를 설명하지만 약한 것은 무심히 짓밟아도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애기땅빈대풀은 세상사람들의 이러 저러한 사정 마저도 무심하게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수행자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시대를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이 아닙니다. 포기도 아닙니다. 운명을 원망하는 절망도 아닙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평정입니다. 강은 대지를 적시며 바다를 향하고, 달은 밤하늘을 밝히며, 풀은 대지에 실낱같은 뿌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이슬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모든 생명은 그 생명에 맞는 운명을 지고 삽니다. 그냥 살아야 하는 것이 의무이고 책임이고 권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바짝 붙어 기어가는 불그레한 줄기들."
시인은 줄기를 그냥 줄기로 보지 않습니다. 시인에게 풀은 붉은 생명의 혈관이고, 대지가 밖으로 드러낸 심장의 핏줄입니다.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이 풀은 아래로 눕습니다. 나무는 높이로 존재를 증명하지만 풀은 낮음으로 생명을 증명합니다. 높낮음이 가치의 기준이 아니라 운명이 가치의 기준이 될 때 나무와 풀은 같은 불그레한 줄기가 됩니다.
"거기에 빈대 같은 진녹색 잎들이 뽈뽈 달려 있네."
작은 잎은 작은 것으로 초라하지 않습니다. 빈대처럼 작지만 별처럼 빛나고, 이슬처럼 여리지만 산맥처럼 끈질깁니다. 사람은 크기로 가치를 재지만 생명은 운명으로 자신을 증명합니다. 작은 잎 하나가 뜨거운 화덕 같은 세상살이에 온몸으로 초록을 지켜내는 모습은 말없이 품위를 지키는 수행자의 얼굴을 닮아 있습니다.
"이리 낮고 작아서 애기땅빈대풀이라도."
사람들은 위대한 이름을 남기려 합니다. 높은 산은 높은 이름을 남기고, 넓은 강은 넓은 이름을 남기려 하나, 이 풀은 오히려 이름을 낮고 좁게 줄이려고 합니다. 어른을 버리고 애기가 되고, 하늘을 버리고 땅이 되고, 매미를 버리고 빈대가 되고, 화려한 식물을 버리고 풀이 됩니다. 버리고 남은 지꺼기 같은 단어 ‘애기’, ‘땅’, ‘빈대’, ‘풀’을 모아 자신의 이름으로 합니다. 이것이 이 풀의 정신입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름 속 무리한 욕심을 벗어버린 것입니다.
"해야 할 중요한 일 있다는 듯이."
독수리는 하늘을 지키고, 고래는 바다를 지키며, 참나무는 숲을 지킵니다. 애기땅빈대풀도 보도블록 틈새를 지킵니다. 몸집은 다르지만 사명은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이란 큰일을 맡는 것이 아니라 내게 던져진 운명을 끝까지 끌어안고 가는 것 아닐까요.
"사는 집이 자꾸 밟히는 보도블록 틈새라도."
집은 날마다 무너집니다. 구두굽이 지붕을 누르고, 빗자루가 기둥을 쓰러뜨리며, 폭우는 터전을 황폐시킵니다. 풀은 집을 잃어도 삶을 잃지는 않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집이지, 무너지는 것은 의지가 아닙니다. 삶은 장소가 아니라 태도로 완성된다는 것을 이 작은 풀이 보여 줍니다.
"물러서지 않고 힘써 정진하겠다는 듯이."
이 한 행은 이 시의 심장입니다. 수행은 특별한 의식이 아닙니다. 불가마 같은 더위를 견디는 일, 짓눌려도 다시 일어나는 일, 부러져도 다시 잇는 일, 쓸려가도 다시 뿌리내리는 일이 어쩌면 평범하거나 보잘 것 없이 보이나 이 풀에게는 특별한 의식입니다.
이 의식이 정진이어야 하는 이유는 멈추지 않는 무한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무한 반복이며, 다른 모습으로 다른 선택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달콤한 유혹을 사정없이 끊어내는 절단의 고통을 감수하는 바보같은 발걸음입니다. 애기땅빈대풀은 이 가르침을 말 없이 온몸으로 보여 줍니다.
"오로지 지금의 운명에 충실하겠다는 듯이."
사람은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을 잃어버립니다. 풀은 오늘을 살아내며 내일을 맞이합니다. 사람은 목표를 위해 현재를 도구로 삼지만 풀은 현재를 충실히 살고 결과를 맡깁니다. 오늘의 햇살을 마시고 오늘의 바람을 품고 오늘의 운명을 끝까지 안고 버티는 것. 이것이 애기땅빈대풀이 매일 쓰는 행위의 시이며 이것이 시인께서 이 풀에서 발견하신 복장터지는 삶의 자세입니다.
박진규 시인께서는 잡초를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보도블록 틈새에서 불가마 같은 삶을 끌어안고, 밟히고, 눌리고, 무너지고, 쓸려나가면서도 끝내 자기 운명을 포기하지 않는 작가로서, 시인으로서, 가장으로서, 제망부모가(祭亡父母歌)를 부르는 아들로서 피할 수 없는 다양한 운명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노래입니다.
수행자는 산속에 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고통을 피해 달아나지 않고, 불평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며, 오늘이라는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 않으나 그 덧없음 마저 운명으로 귀하게 모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애기땅빈대풀은 작은 풀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에서 아무도 몰라주나 홀로 가장 뜨거운 운명을 품어 안고 말없이 자신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대지 위의 가장 고독한 수행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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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원문
산책길 그늘진 곳에 그늘 같은 제비꽃 되어 보려고요 가만히 눈 감고요, 머나먼 제따와나 숲에 종일 앉은 마음이면 제비꽃 이전의 제비꽃 되어 만나려나 보려고요 그런 우주적 입장이라면 깜깜한 밤 두려움 없고 환한 낮 걱정 없는 마음이려나 보려고요 어쩌면 되는지 맨날 허둥대는 나는 나의 소유란 아무 것도 없다는 듯 저리 무연히 앉아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사라지는 마음 제비꽃 가진 거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참말로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가는 것이 전부라는 듯 피어있는 그늘의 마음 알아보려고요
- 박진규 시인의 “제비꽃”을 읽고
이 시에서 제비꽃은 높은 곳 보다 낮고 양지보다 어두운 그늘을 행복의 자리로 상징합니다.
제비꽃 이야기는 시인의 '산책길'에서 시작됩니다. 시인에게 산책이란 자연에 대해 사람이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 되기를 자처하는 행위입니다. 시인은 산책길에서 소박함과 겸손, 그리고 가난과 수줍음을 ‘제비꽃’에서 발견합니다.
제비꽃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아티스를 향한 애달픈 짝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숨진 소녀의 자리에 피어난 사랑받지 못한 자의 고독을 품은 꽃입니다.
시인은 이 소박한 꽃 속에서 가슴 깊이 숨겨둔 그리운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한 옛 추억을 회상합니다. 제비꽃이 머무는 ‘그늘’은 양지의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만드는 자발적 조연의 공간입니다. 그늘은 만물에 이름과 영광을 지어주면서도 자신은 아무런 대가 없이 숨어야 되는 숙명으로서 부모님과 그 부모님을 닮은 자신을 투영합니다.
“가만히 눈 감고요”
인간이 눈을 뜨는 순간, 밝은 양지는 모든 어두운 그늘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양지도 응달도 없는 조화의 세계가 열립니다. 타인을 떠받치고 사라지는 조연의 마음은 "머나먼 제따와나 숲에 종일 앉은 마음"입니다. 제따와나 숲의 성자는 과거의 기쁨과 괴로움이라는 인과적 감정이 축적되어 오늘을 형성하였지만 그렇다고 세속의 양지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행한 만큼 댓가를 요청하고 손해를 계산하는 '양지의 삶'을 내어주고, 댓가도 손해도 없는 완전한 무욕(無慾)의 상태인 ‘제비꽃 그늘의 상태’에 머물고자 합니다.
시인의 ‘제비꽃 이전의 제비꽃’을 만나려는 발걸음은, 기성 사회가 만든 담론의 높이보다 낮은 향긋한 풀꽃 속삭임에 머물고자 합니다.
우주의 시선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갈등하는 이념도, 종족의 경계도, 종교의 차별도 없는 그저 푸르스럼한 하나의 아름다운 별일 뿐입니다. 시인은 특정 국가나 종교, 이념의 전사(戰士)가 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푸른 별의 일원으로서 ‘그늘진 곳의 제비꽃’ 같은 고요한 음지의 노래를 부릅니다.
“깜깜한 밤 두려움 없고 환한 낮 걱정 없는 마음”을 얻기 위해, 시인의 선한 마음은 사회가 강요하는 힘든 장벽에 수없이 섭니다.
사회의 모든 것은 지성적 활동과 계약으로 엮여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꺼지면 고립의 공포를 느끼듯, 현대인들은 계약적 관계가 멈추는 고독을 밤으로 표현합니다. "어쩌면 되는지 맨날 허둥대는 나는"이라는 구절은 사회를 살다보면 모두가 겪게 되는 익숙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운명의 만남을 묘사합니다.
시인은 어둠과 단절을 아픈 축복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심히 앉아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사라지는" 제비꽃 마음을 완성합니다.
결론적으로 박진규 시인의 이 시는 내가 가진 아주 작은 ‘시’ 마저도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건네주고 가는 것이 전부라는 ‘피어있는 그늘의 마음’을 닮아가는 보랏빛의 제비꽂 미소아닐까요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생색도, 소유에 대한 집착도 없이 이유없이 물러서는 제비꽃 시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정복하려는 현대 문명을 향해 던지는 시인의 따뜻한 성찰의 메세지입니다. 시인의 "제비꽃"에 담긴 시예술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성취만을 위해 미소 마저 반납한 고독한 도시인의 삶에 영원히 마르지 않을 평화의 속삭임이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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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꽃> 가득 피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문 꽁꽁 닫고 달개비잠 한숨 자나 보다 꿈속에서 푸르릉 하늘이라도 다녀오나 보다 앞에 없어도 다 보여! 두 발 쭉 뻗으며 기지개 켜며 나오리 온통 하늘 물들어 태양을 가늠하며 나와 개미는 서성거린다
박진규 시인의 시적 사색은 ‘달개비꽃“의 가장 내밀한 생태적 비밀 속에 숨겨진 우주적 섭리를 길어 올리는 청정(淸淨)을 건드리는 데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모두가 대낮의 햇살 아래서 유용성을 과시할 때 달개비꽃만 홀로 문을 닫아걸고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을 꽃이 피었다고 표현하는 인식 패러다임을 전치(轉置)시키는 현대 실존시학의 정점을 구축해 냅니다.
“가득 피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와 “달개비잠”의 국면은 현상적 소멸을 내면적 개화로 해석하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가득 피어있다는 것”은 “꽃잎을 닫고 가득 잠자는 것”으로 꽃이 핀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 상식을 뒤집어 버리는 꽃 표현의 시적 백미가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새벽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는 달개비꽃이 밤새도록 피어 있으리라 오판하곤 합니다. 달개비꽃은 낮이 채 깊어지기도 전, 정오가 되면 성급히 문을 닫아걸고 침묵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달개비꽃이 진정으로 낮에 피어 있는 모습입니다.
사람의 깨어남이 지상의 소란스러운 나들이라면 달개비꽃의 피어남은 곧 잠듦입니다. 달개비꽃에게 잔다는 것은 곧 활동이고 피어있다는 것은 잠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개화가 외부를 향한 눈뜸이라면 달개비의 개화는 내부를 향한 눈뜸입니다.
대낮에 스스로 문을 꽁꽁 닫아걸고 ‘달개비잠’이라는 오수(午睡) 속으로 들어가는 달개비꽃의 자발적 닫힘은, 소멸이라는 상식의 맹목을 깨뜨리고 무위(無爲)의 위(爲)한 시간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꿈속에서 푸르릉 하늘이라도 다녀오나 보다”와 “앞에 없어도 다 보여!”라는 표현은 심안(心眼)으로 활동하는 비행(飛行)의 모습입니다. 꽃이 눈을 감은 상식적 단절과 폐쇄의 시간을 시인께서는 "푸르릉 하늘을 다녀오는 꿈"이라는 매혹적인 은유로 해석해 냅니다.
달개비꽃은 오후 내내 푸른 창공의 바다에 몸을 담근 채 하늘의 눈 아린 파란 에너지를 비장(秘藏)하는 꿈의 나들이를 합니다. 사람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세상이 보이지만 달개비는 오히려 문을 닫고 눈을 감아야 온 우주가 열리고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역설을 전합니다. 달개비꽃의 손톱만 한 꽃잎은 지상의 미미한 영토이지만 그 속에 감춘 푸른빛은 천상의 광활한 우주이며, 가냘프게 돋아난 꽃술은 밤의 은밀한 정령이자 밤하늘을 수 놓는 별빛입니다. 시인께서는 달개비꽃의 눈 시린 하늘빛과 밤하늘의 노란 별빛을 닮은 꽃수술을 목격했기에, 형태적 부재 속에서도 "앞에 없어도 다 보여!"라는 광경을 시어로 표현합니다. 이는 시인께서 달개비의 눈높이, 잠높이, 키높이, 꽃높이를 맞추어 온전히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시미학의 절정입니다.
“두 발 쭉 뻗으며 기지개 켜며 나오리”와 “온통 하늘 물들어 태양을 가늠하며”의 국면은 부재가 진정한 부재가 아니라 진정한 드러남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수에 잠겼던 달개비꽃은 새벽이 되면 이슬을 흠뻑 머금고 두 다리 가지를 쭉 뻗으며 두 장의 파란 날개를 힘차게 펼칠 것입니다. "두 발 쭉 뻗으며 기지개 켜며 나오리"라는 확신은, 지금의 닫힘은 상실이 아니라 닫힌 개화임을 증명합니다. 마침내 달개비꽃이 다시 지상 위로 고개를 내밀어 손톱만 한 꽃잎으로 "온통 하늘 물들어 태양을 가늠하며" 서는 순간, 달개비꽃은 하늘과 별과 바람의 이야기를 몸으로 속삭이는 이야기꾼이 됩니다.
달개비꽃은 파란 꽃잎으로 천상의 청초함을 열고, 노란 수술로 밤의 별빛을 드러내며 자신의 꽃잎으로 우주의 크기를 설명합니다.
“나와 개미는 서성거린다” 꽃이 깨어난다는 것은 개미와의 동행에서 시작됩니다. 개미에 비해 거대하게 군림하는 인간은 결코 달개비꽃의 이야기를 알 수 없고, 오직 가장 낮은 곳을 기어가는 개미만이 달개비꽃이 몸으로 전하는 하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진정한 달개비의 친구라는 의미 아닐까요.
개미가 아는 우주란 달개비꽃의 파란 색채와 그 한가운데서 속삭이는 노란 수술입니다. 오직 박시인만이 개미에 비해 산 처럼더 큰 손과 발을 다 벗어던진 채 개미와 나란히 엎드려 문을 닫은 꽃의 잠꼬대에 귀를 기울이며 하늘의 비밀을 엿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언어가 권력이 되고, 이 권력으로 세상이 재단되는 공식 속에 살고 있습니다. 달개비꽃은 세상에 대해 반대말 놀이의 따뜻한 미소를 던집니다. 소멸이라고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하여 모두 비천한 것이 아니고, 덜 유명하다고 하여 살맛나지 않은 세상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시인의 꾸미지 않은 담백한 시어는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교언영색적 시표현과 구성법에 반성의 등불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발한 반전의 시어, 아름답고 집요하게 비비 꼬아놓은 은유법들로 유명을 추구합니다. 이 난무하는 시의 문단 세계에 박진규 시인의 야생화 꽃처럼 순박하고 읽을수록 꽃향기 가득한 시를 읽으면 갑자기 숲속의 요정이 된 느낌이며, 이 상황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대자연에 감추어둔 달개비잠의 비밀을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시는 시인의 다정하고 정감어린 시선으로 인해, 도구적 가치 사슬 속에서 나의 웅크러진 영혼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