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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규정이 지배하는 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결을 어루만지고 싶은 날에 어울리는 박종덕 시인의 시집, 『새가 되어 날아가다』를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은 낱개의 시편들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굵직한 줄거리를 품고 흘러가는 서사시의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심청가라는 고전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변주해 낸 점이 돋보입니다.
시집 속 심청은 맹목적인 희생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박종덕 시인은 깊은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깊은 심연으로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한 인간의 치열한 내면을 철학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평소 뇌과학과 심리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던 저에게도, 결국 우리를 움직이는 힘은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에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상실감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지요.
작품 전반에는 심봉사의 관점에서 짙은 안개나 칠흑 같은 밤거리를 헤매는 풍경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눈앞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미세한 파동과 기척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며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목적지가 명확한 행군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 그 자체를 담아내고 있어요. 이 모습은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하며 묵묵히 삶을 잇는 우리의 처지를 깊이 비춰줍니다.
더 나아가 이 시집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시집이 말하는 나는 곧 만물을 알아차리는 존재를 뜻합니다. 세상의 모든 대상은 나의 알아차림을 통과해서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사유를 동서양의 철학과 버무려 문학적으로 녹여냈습니다. 덕분에 독자들은 단순히 시를 읽는 것을 넘어, 삶과 존재의 근원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철학적 훈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섣부른 긍정이나 위로보다는 내면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안아줄 언어가 필요한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복잡한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통제하려 애쓰다 문득 피로감을 마주하셨다면, 고전의 서사와 철학적 사유가 깃든 이 시집을 펼쳐보세요. 어둠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묵묵한 발걸음이 여러분의 팍팍한 마음에도 잔잔한 위로와 해방감을 선사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