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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광주 비엔날레를 다녀와서 였으니까 2년 정도 전이었나 보다. 당일치기라는 빠듯한 시간에 그 넓은 비엔날레 행사장의 모든 참여관을,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많은 작품들을 훑어가듯 감상(?)하고 나서 막히는 고속도로를 꾸역꾸역 달려 집으로 들어와 쓰러지듯이 퍼져 버렸던 우울한 기억. 그리고 며칠 지난 후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이 바로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이 책이었다.
이 책은 많은 미덕과, 또 그 만큼의 많은 악덕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아주 훌륭한 책이다. 사실 전문적인 미술 비평의 관점에서 그의 독설을 비판할 능력은 없으며, 대부분의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도 악덕이 크게 부각되는 것으로 후자에 대한 리뷰는 생략하고, 이 책의 훌륭한 미덕 만을 이야기해 보자.
첫째 미덕은 역시 주눅든 일반 대중의 기살려주기이다. 그 날 광주 비엔날레에 다녀와서의 그 우울함은 비단 피곤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 무수한 현대 설치 미술 작품들을 감상했음 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깃털만큼의 어떤 '느낌'도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탓은 온전히 무감하고 무지한 나에게만 전가된다. 어찌 감히 예술가를, 그것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이런 우울함에 대해 키숀의 글은, 적어도 전부 다 진실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정도의 숨통이라도 틔워준다. 적어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에서 벗어나,반드시 감동 받아야만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한 기분에서 난해한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예술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본다. 아무리 예술지상주의라 하더라도 그 기본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깔려있으며 거기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술에서 '주고받음(커뮤니케이션)'이 배제될 수 있을까? 무엇을 주고 받을까 하는 것에서는 다양한 시도나 실험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여간 뭔가는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 오고 가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현대 미술은 그 주고받음을 포기한 것 같다. 이건 전위의 의미가 아니라 결별의 의미로서 하는 말이다.
두번째 미덕은 미술가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자본과의 관계이다. 미술가 자신에게는 예술적 순수성을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고도로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 사실 프로 비평가나 화상, 큐레이터 등의 순수성은 애초 부터 신뢰하기 어려웠으며 결과적으로 '예술가 집단'에서 '예술가 이해관련 집단'으로 헤게모니가 옮겨가리라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키숀은 그 쪽 분야에서 터져나온 일종의 양심선언이란 점에서 이러한 의혹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어찌보면 가장 큰 미덕은, 비교적 싼 값으로 (이 책은 불과 8,500원이다.) 수 백점의 현대 미술 유명작들을 보여 준다는 점이다. 또한 그 인쇄 상태가 대단히 훌륭하다는 점에서 거의 감동적이다. 이 만한 가격에 이 만한 작품집을 구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키숀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대부분이 가치 없는 쓰레기 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키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책은 더더욱 사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되는 것이다. :) [인상깊은구절] 불평 한마디 없이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삼켜야 합니까? 아무런 저항 없이 예술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저에게 말하는 몇몇 전문가의 명령하는 식의 설명이나 판단에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까? 그들은 근사하고 그럴듯한 말로 저에게 말해 주고 있지만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로 설명을 합니다. 그것은 조그만 어린애에게 가하는 따귀와 같은 것입니다. |
| 저자 에프라임 키숀의 생각은 아마 이것인 것 같다. 상식을 벗어나지 마라! 아니면 상식의 선에서 말하고, 또 상식의 선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하라.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현대미술에 대한 조롱이며, 유머이다. 즉 이해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해서 왜 그렇게 만드냐는 반문인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미술평론가들에게도 오히려 그것이 왜 그렇게 이해되는지를 묻는 반문이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나 같은 전문지식이 없는 대중에게 고매한 예술세계의 허울을 벗기는 기분을 선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하는 또 다른 의심을 낳게 한다. 즉, 이 책은 고발의 뉘앙스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도대체 표현과 해석의 객관성과 상대성은 어디까지인지의 문제를 야기하여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에서 저 그림이 도대체 뭔지를 속으로 끙끙앓는 괴로움이 적어도 두 명의 괴로움 이상이라고 말해주는 저자의 독설은 시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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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야, 석유가 안나오느냐?> (김광윤 역, 한진출판사,1979)<가족> (김창활 역, 지학사[벽호], 1986) <키존 동물이야기> (이계숙 역, 장문산, 1996) <여리고성 앞에서는 고함치지 말 것> (이계숙 역, 장문산,1996) 뛰어난 유태 작가 에프라임 키숀의 책들입니다. 아마 <피카소의달콤한 복수>를 읽고 나면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고 싶을실 껍니다. 해서 참고하시라고..
95년 이었던가요? '제 1회 광주비엔날레'에 무박 2일로 다녀오면서, 전 꼭 2가지를 숙제처럼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는 북한의 천재화가라는 81년생 오은별의 8살때 그림 '싸움(말)'입니다. 그녀가 10살에 친 '참대는곧바르다'라는 '대'역시 충격적이긴 했지만, 저로선 8살의 나이에서 펼처진 검은 먹선을 잊을 수 없었지요. 천재란 삶에 대한 통찰을 타고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지요. 둘째는 '관람객의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대상작품이 '맥주병 위에 나무 배를 올려 놓은' 작품 이
었지요.
어느 신문에선가는 나이든 할어버지가 도대체 뭐가 예술인지 모르겠다는 할머니에게 '저게 바로 인생 이구먼'하는 이야기를 실으면서 당시의 대상작품을 소개하던게 기억이 나네요. 뭐 이래저래 평을 주워읽고 가긴 했지만, 막상 그 대상 작품 앞에선 '평론가의 평'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아무튼 선배, 동기 해서 4명이서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그 난해한 설치미술들 앞에서 당황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부스 3부스 됨직한 전시공간에 실크 잠옷이 달랑 하나만 놓여있는 작품이라던지, 비디오 화면에서 끊임없이 무언갈 짊어 매고 빈터 위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화면, 거울만으로 온통 도배되어 있던 요술의 집같은 전시물..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리저리 구경하던 저희들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이 작품은 이런게 아닐까, 저 작품은 저런게 아닐까 하고 떠들기 시작했지요.
금새. 금새 사람들이 주위로 몰리더군요. 당시 해드폰을 끼면 각각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대상 작품앞에 서면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괴상한 작품들을 이해하기란 일반인들에게 쉽지 않았지요.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꽤 괜찮다고 연일 보도되는 전시장에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답답함'을 조금 덜어 볼수 있을까 해서 주위로 몰렸던 듯 싶네요. 뭐. 저희들도 모르기야 마찬가지였지만 말이지요. 전 그날, 저를 포함한 관람객들의 얼굴을 잊지 못할겁니다. 예술작품이라고 하긴 하지만, 이미 그 해석은 몇몇의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해서 평론가들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작품들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지 못했던 저와 대다수 사람들의 얼굴을 말입니다.
앤디 워홀,이 엠파이어 빌딩을 8시간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카메라 설치로만 촬영해서 상영했던 괴이한 사람이 맞나요? 그리고 그가 바로 '바스키아'의 친구이기도 했었던게 맞나요? 에프라임 키숀,의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라는 곳에 나오는 팝 아트 작가 앤디 워홀은 '약상자 4박스'로 '콘프레이크 상자 1개'로 저 유명한 <브릴로 상자들>과 <캘로그 콘프레이크상자>라는 작품을 만들었지요. 아마 이 대단한 작품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워낙 대단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대작이기 때문이지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풍자 작가 에프라임 키숀 - 전 유명한지 몰랐답니다. ^^: - 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소박하고 분명합니다.
여러 페이제에 걸쳐 비꼬는 식의 논조를 펴고 난 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내가 실제로는 현대 예술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면 어떤 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고철류의 작품들과 마구 휘갈긴 듯한 그림들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만약 이러한 분야에 종사하는 존경할 만한 공예가들이 단지 카펫이나 커튼, 넥타이 등의 참한 무늬를 고안하든지, 쓰레기 더미를 일종의 장난이며 농담이라고 여긴다면 나로서는 그
들이 그러한 일을 계속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122p)
.. 그것이 내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몇 페이지인지 못 찾겠군요. ^^: )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미술의 미는 무엇이고 음악의 아름다움은 또 무엇일까요? 최근에 '현대음악'이란 걸 들어 보았습니다. 한 10분간 "도레미파솔 도레미파솔" 을반복하더군요. 중간에 "미파솔라미 미파솔라미?" 뭐 이런식으로 약간의 변화가 있긴 했습니다만 그 곡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더군요.
그 외 10여분간을 "come out come out"만 하다가 끝나는 곡도 있고 심지어는 연주자가 무대에 서서는 연주가 끝나는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한다더군요. 허. 참... 제가 현대음악이나 현 대미술을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뭐 그럴 만큼 접해보지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 '현대'자 붙은 예술들과는 많은 공감을 같지 못하는 건 무엇때문인지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물론 저 역시 현대 예술가들의 열정과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단지, 어째서 '현대'자 붙은 것들의 감상 앞에 솔직한 내 느낌들을 표현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그런 느낌들을 대중의 일부인 친구들과 이야기 하지 못했던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예술은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지요.
아니면, 예술이란 굉장히 많은 책들과 평들을 읽어야지만 이해가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 아직도 '음악회'가 '전시회'가 사치스럽게 여겨지는 까닭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저의, 제가 바라는 예술은 이러합니다.
1. 공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아니어도
2. 본능적으로 예술가가 전해주는 묵직함에 전율할 수 있는 것.
3. 시간이 흘러도 그 맛을 되새길 수 있는 것.
그러기 위해 꼭 한가지, 누군가를 존경(인정)할 때처럼 그 만큼의 시간을 두고 애정어리게 바라봐야 겠지요. [인상깊은구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내가 실제로는 현대 예술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면 어떤 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고철류의 작품들과 마구 휘갈긴 듯한 그림들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점만을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만약 이러한 분야에 종사하는 존경할 만한 공예가들이 단지 카펫이나 커튼, 넥타이 등의 참한 무늬를 고안하든지, 쓰레기 더미를 일종의 장난이며 농담이라고 여긴다면 나로서는 그들이 그러한 일을 계속해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
| 에프라임 카숀. 미술 아카데미에서 금속 조각과 미술사를 전공한 유태인 에프라임 카숀은 예술이 몰락하는 것에 대한 다수의 분노를 테마로 하여 그의 첫 번째 저서 피카소는 야바이꾼이 아니다를 써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그 후속편으로 현대 미술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높고 있다. 대강의 내용들은 현대미술의 타락에 대한 가장 큰 협력자인 미술 비평가들처럼이나 쉽게 이해되진 않는다. 그가 현대 미술의 방향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고 그런 행태를 비꼬고 있음에 쉽게 그의 의도를 잡지 못하겠다. 그 이유는 그의 개인적 반발심이 감정적으로 보이는 면이 커 보이기에 그러할 수도 있고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뚜렸하나 그 경계는 매우 난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의 비판이 감정적으로 보인다 하여 그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감정적으로 비판을 한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가 그 만큼 확연히 보인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단지 그의 말에도 절대적 공감을 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가 그의 입장과 같이 한다는 침묵하는 다수 중 발언을 하고자 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인용글이 가장 그가 주장하는 예술의 몰락을 이해하기 쉽게 해주었다. 그가 말하는 예술이라는 속임수로 다수와 부르조아를 이용하는 현대 미술의 쓰레기의 정도가 대체 어디서 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그 비평의 대상이 요셉 보이스만은 확실하구나 알 수가 있을 뿐이다. 그는 피카소와 엔디 웨홀에 대해선 그나마 낫지만 역시나 속임수를 쓴 예술가들이라 보는듯 싶고 현대의 비평가들의 비평에 의해 경매가로 구분되는 예술의 입장을 지닌 자들이 아닌 그 이전 이런 흐름을 만든 유명인들에 대해선 그 역시 판단을 내리고 있지 못한듯 싶다. 현대의 이런 모습은 어쩜 예술가와 이를 지켜보는 다수에게 모두 의야스러운 것일런지도 모른다. 유명한 사건이라는 요셉 보이스의 욕조 훼손같은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에 앞서 그리고 돈 많은 작자들의 이상 야릇한 취향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돈이나 시각을 그 이상한 취향을 가진 우매한 누군가라든지, 극적인 평론가들이 매기는 돈에 의해 넘겨지는 일은 조심스럽고 행하기 어려워야 하는 것은 의견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항상 숨은 복병의 반작용은 어려운 일이다. |
| 이 책은 난해한 척하는 현대미술에 대한 독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독설이 가벼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미술에 대한 안목이 깊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그가 탓하는 것은 어느 오브제의 재료가 시장이나 가구점에서 사면 얼마나 하는가 하는 장사꾼적 시각이다. 이 책을 읽고 평론계의 서로 치켜 세워주기를 생각해 본다. 촌평이라는 명목이든 비평이라든 명목이든 사실 말만들어 의미 부여하기가 다인 그런 글쓰기들. 그런 '말만들기'의 예를 정말 재미있게 지적하는 예 하나. 다음의 말을 읽고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 1. "태아에 근접하는 파괴 계수의 폭발을 예고하는 기하학적이고 몽유병자적인 의식의 형태" 2. "멜로디의 과잉에 대한 시각적 거리로서 스케치된 흔들리는 진테제" 답 1. 부풀어 오른 콘돔 2. 뒷면에 작가의 사인이 있는 텅 빈 캠퍼스 1년 전에 클레의 그림을 담은 독일의 바우하우스에 대한 비디오를 구해 무슨말인지도 모르며 그 그림에 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가가 비판하는 대상은 클레나 르네의 그림이 아니라 그 아류작일 뿐. 이 작가는 그 비평능력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았나 보다. 뒷장에 그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몇가지 평을 하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글 하나를 인용하고 여기에 맞지 않으니 잘못된 그림이다 라는 전개는 글을 끝까지 읽게 해주는 코미디다. 좋은 그림책을 하나 가지는 가치는 있는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