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파만파독서모임 #레모 #이렌네미롭스키 #제자벨 #프랑스소설 < 레모출판사로부터 도서지원 받아서 쓴 서평입니다 > 제자벨: 주약성서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세벨'을 프랑스식 발음한 것, 서구권에서 오랫동안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름이다. 1929년부터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1942년까지 단 13년간의 글쓰기를 한 네미롭스키.그 네미롭스키의 '어머니를 향한 복수의 삼 부작' 중 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프랑스 여자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한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악녀 제자벨 '글라디스'의 모습은 다른 프랑스 작품속에서도 간간히 보아 왔던 캐릭터이다. 프랑스와즈 사강의 < 패배의 신호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 셰리 > 에서도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주인공 글라디스는 여성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의 상징인 젊음과 아름다움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언젠가는 늙고 볼품 없어져서 남자들에게 버림받을 것을 죽는 것 보다 두려워 하는 인물이다. 늙어감을 인정할 수 없었던 글라디스는 자신의 나이를 순간순간 속여가면서 남자들을 만난다. 소설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글라디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부분은 마치 하인리히 뵐의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의 장면이나 뮤지컬 <시카고 > 를 떠올리게 한다. 글라디스의 혐의는 살인이다. 자신과 사귀던 20살의 남자 '베르나르 마르텡'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 되었고, 살해의 이유에 대해서 법정에서 수많은 증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면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생각이 난다. 당시 60살이었던 글라디스가 20살이었던 가난한 남자 베르나르를 권총으로 쏘아서 죽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법정의 장면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시간은 과거로 흘러간다. 그러면서 작품은 글라디스의 젊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어떻게 그녀를 파멸의 길로 끌고 가는지 보여준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 그 사건을 계기로 글라디스는 점점 파멸하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중반부까지는 글라디스의 병적인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정말 그녀를 제자벨, 희대의 악녀로까지 생각이 되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신의 아름다움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고 나서는 과연 누가 글라디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늙어감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나조차도 반백년이라는 삶을 살았다는게 믿겨지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과연 내가 50년을 살면서 해온것은 무엇일까? 나의 젊음은 이렇게 파멸되고 마는 것일까? 다시 청춘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글라디스의 상식을 초월한 그 악행들은 어쩌면 그녀를 향한 사회적인 시선이나 규범들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혐오, 나이든 여성의 혐오같은 시선 말이다. 그것은 글라디스가 제자벨이 아니라 글라디스를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을 가진 이들이 진짜 제자벨은 아닐까? 누가 글라디스에게 악녀라고, 제자벨이라고 단정지어서 부를 수 있을까? 193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1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의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되물으며 우리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반부의 미친 전개 때문에 앞부분의 이해 할 수 없는 글라디스의 행보도 참으며?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네미롭스키의 다른 선집들도 꼭 챙겨볼 것이다. 너무 재미있으니 안 본 사람들은 꼭 기회되면 챙겨보길 추천한다. |
|
글라디스에게 아름다움은 삶의 한 부분을 넘어 자신을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였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욕망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통해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그러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일보다 훨씬 가혹하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지고, 그 시선으로 유지해온 자아까지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글라디스는 자신의 나이를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딸의 나이까지 실제보다 어리게 말한다. 딸의 나이는 곧 자신의 나이를 증명하는 숫자이고, 딸의 성장은 자신이 젊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인 까닭이다. 어머니에게 딸은 사랑해야 할 존재인 동시에 자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거울이 된다. 글라디스가 견디지 못한 것은 늙은 얼굴보다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그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글라디스의 가장 큰 적은 다른 여자도, 젊은 남자도, 새로운 사랑도 아니다. 그녀가 평생 맞서온 것은 시간이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이길 수도, 설득할 수도, 돈으로 살 수도 없다. 지나간 계절을 다시 불러낼 수 없듯 한때의 아름다움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글라디스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흘려보내지 못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현재에 붙잡아두려 하고, 변해가는 관계를 이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지우기 위해 딸의 시간까지 지워버리는 행동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자신의 시간을 거부하기 위해 타인의 시간을 훼손하는 것. 유한한 인간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욕망이 얼마나 기묘한 형태를 취하는지를 네미롭스키는 이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글라디스에게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반드시 막아야 할 벽이었다. 그 순간부터 삶은 살아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붙잡는 일이 된다. 그녀의 사랑 역시 이 시간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않다. 글라디스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욕망받는 자신, 누군가의 사랑을 독점하는 자신, 여전히 아름답다고 인정받는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관계이지만, 글라디스에게 사랑은 자아를 확인하는 거울로 기능한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커진다.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대를 붙잡으려는 욕망으로 이어지고,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상대의 삶까지 자신의 욕망 안에 가두려는 방식으로 변한다. 글라디스에게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동시에 잔인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두려운 만큼, 사랑받고 있는 자신을 잃는 일도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의 중심에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이 크게 자리할 때,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감정에서 가장 잔인한 소유욕으로 미끄러져간다. 그런데 글라디스에게 붙여진 이름은 처음부터 그녀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제자벨(Jézabel)’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페니키아 출신 왕비 이세벨의 이름으로, 오랫동안 권력과 우상숭배, 파괴적인 여성성의 표상으로 읽혀온 인물이다. 네미롭스키가 불러온 제자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신의 비극 『아탈리』에서 제제벨은 죽은 뒤 딸 아탈리의 꿈에 나타난다. 죽음을 앞두고도 화려하게 치장했던 모습 그대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유령이다. 네미롭스키의 『제자벨』 역시 이 라신의 장면을 직접 호출한다. 연구자 비엔베니도 모로스 메스트레스는 『제자벨』과 『아탈리』의 관계를 분석하며, 네미롭스키의 소설이 성서의 제제벨과 라신이 다시 만들어낸 제제벨의 형상을 하나의 문학적 계보 안에서 연결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제목 속 제자벨은 한 악녀를 가리키는 이름을 넘어선다. 딸 앞에 유령으로 돌아오는 어머니,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 여성, 그리고 자신의 젊음을 잃는 일을 견디지 못하는 글라디스가 하나의 형상 안에서 포개진다. 제목을 알고 나면 글라디스가 바라보는 거울 역시 오래된 문학적 기억을 비추는 장치처럼 읽힌다. 이 지점에서 『제자벨』은 네미롭스키 개인의 한 작품을 넘어 작가가 반복해서 천착했던 모녀 관계의 계보 안으로 들어간다. 『무도회』와 『적』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네미롭스키는 딸이 여성으로 성장하는 순간과 어머니의 노화가 충돌하는 관계를 집요하게 그려냈다. 테레사 마누엘라 루소네는 이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네미롭스키의 소설 속 이기적인 어머니들에게 딸의 성장은 곧 자신의 늙음을 알리는 징후이자 사회적 위치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양상이 반복된다고 지적한다. 딸이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어머니가 자신의 자아를 지키려는 욕망이 서로 얽히면서 모녀 관계는 애정과 적대 사이를 오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글라디스와 딸의 관계는 훨씬 복잡해진다. 딸은 어머니의 젊음을 이어받는 존재이지만, 글라디스에게 딸은 자신의 젊음이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모녀는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면서 서로의 시간을 확인시키는 존재가 된다. 딸이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할수록 어머니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멀리 흘러왔는지를 확인한다. 그 순간 모성은 보호와 통제 사이에서 뒤틀리기 시작한다.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에게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어른이 되어갈까. 네미롭스키가 반복해서 파고든 모녀의 비극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사람을 반드시 잔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을 잃는 일이 곧 자신의 존재를 잃는 일처럼 느껴지는 사람에게 사랑은 쉽게 집착과 소유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견디지 못한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삶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제자벨』의 글라디스를 단순히 허영심 많고 잔인한 여성으로 읽는 순간 작품의 비극은 오히려 작아진다. 그녀의 선택은 분명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만, 그 선택의 밑바닥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아름답고 싶다는 마음,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행복했던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네미롭스키의 인물들은 이러한 욕망을 극단적인 형태로 품는다. 그리고 욕망이 삶을 움직이는 힘을 넘어 삶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랑했던 것까지 훼손한다. 『제자벨』의 냉정함은 악인을 심판하는 데 있지 않다.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이 어느 순간부터 얼마나 비인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끝까지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화려한 사교계와 가족이라는 친밀한 공간을 배경으로 인간의 허영과 자기기만을 해부하는 네미롭스키의 소설 세계에서, 사랑은 언제든 욕망의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모순이 들어 있다. 행복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일상이 될 것이고, 사라질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한때의 행복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사랑도, 지금의 나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의 반대편에는 불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놓여 있는 셈이다. 행복했던 순간을 붙잡으려 할수록 그 순간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고,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 할수록 지금 살아 있는 시간까지 잃게 된다. 『제자벨』은 바로 그 역설을 한 인간의 삶 전체에 새겨놓는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국 끝을 앞당기기도 한다는 것. 사라질 것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는 순간, 사랑은 소유가 되고 아름다움은 집착이 되며 행복은 자신을 파괴하는 힘으로 변한다. 완벽했던 순간은 언젠가 지나간다. 그것은 행복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이다. 젊음이 지나갔다는 이유로 그 시절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사랑이 끝났다는 이유로 사랑했던 시간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니다. 네미롭스키가 바라보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제자벨』 역시 젊음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소설이라기보다, 젊음이 지나가고 사랑이 변하고 행복이 끝나는 순간에도 자기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방향으로 흐르지만, 그 흐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글라디스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늙음 그 자체보다 행복했던 자신이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비극은 한 여자가 젊음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넘어, 지나간 행복을 현재에 영원히 붙잡아두려 했던 인간이 스스로 그 행복의 자리에서 멀어져간 이야기로 읽힌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자벨』은 한 시대의 상류사회를 그린 소설을 넘어, 시간이 인간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인간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욕망할 수 있는지를 묻는 네미롭스키의 초상으로 완성된다. 행복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조차 시간을 품고 있다. 한때의 젊음도, 사랑도,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도 결국 지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아름다움은 축복에서 족쇄로 모습을 바꾼다.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은 그 변화를 한 여성의 삶과 욕망을 통해 포착하는 소설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자아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의 불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소유와 집착으로 기울어가는 순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자신의 상처를 되돌려주게 되는 인간의 모순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특히 프랑스 문학 특유의 냉정하고 우아한 시선 속에서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해부하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네미롭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레모가 오랜 시간 한 작가의 작품을 한 권씩 국내에 소개해온 여정도 함께 돌아보기를 권한다. 『무도회』에서 시작해 『제자벨』을 거쳐 『고독의 와인』에 이르기까지. 레모가 꾸준히 펼쳐온 네미롭스키의 세계가 이번 선집을 통해 하나의 윤곽을 갖추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여러 권의 책으로 천천히 따라가는 일은 작품 하나를 읽는 것과 또 다른 독서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프랑스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오래된 작품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건네는 레모의 행보 역시 반가울 것이다. 한 사람의 상처가 어떻게 문학이 되고, ,그 문학이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독자의 손에 도착하는지를 지켜보는 일. 레모의 네미롭스키 선집은 그 시간을 한 권씩 이어 붙여왔다. 이번 완간이 더욱 반가운 이유다. ✏️도서출판 레모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
#제자벨 #레모 #이렌네미롭스키 #서평 #일파만파독서모임 (본 도서는 레모 출판사에서 서평을 조건으로 지원해주셨습니다.) 젊은 남자를 살인한 혐의로 법정에 선 여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가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을까. 이 여자의 삶이 하나 둘씩 펼쳐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갈구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무엇도 서슴지 않고 하며, 주변인을 개의치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이여자의 삶 속에서 작가의 배경이 담겨져 있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원하는건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땐 제자벨이 조금은 공감이가고 이해도 갔다가,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하려하는 집착에서는 혀를 내둘렀다가도, 점점 이야기의 끝에서는 기함하게 된다. 외모만이 자신이 사랑받을, 즉 살아갈 이유와 환희를 느끼는 유일한 무기이기에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제자벨.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에 비추어 증오심과 혐오감을 표현했지만 한편으로는 애증의 관계가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자신이 받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 그 사랑이 어머니 자신의 젊음과 외모에 치우쳐있음에 분노하고 증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무엇에 치중하며 사는가. 무엇을 갈구하며 사는가. 어쩌면 우리에게는, 지금 가진 것이 아닌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더 채우려고 할때 불행이 찾아오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류의 소설을 잘 읽어보지 않았고, 작가도 출판사도 처음 접해보아서 생소 했는데 , 다 읽고 난 후에는 작가의 다른 선집들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6월의 시작, 여름을 알리는 이때 술술 넘어가는 독서를 즐기고 싶다면 이렌 네미롭스키의 <제자벨>을 추천하고 싶다! |
|
"한 여자가 어떻게 악녀가 되는가 "
"행복이란 얼마나 잔인한 선물인가 너무나 완벽하고 대단한 행복에도 끝이 있게 마련이다" -이렌 네비롭스키만의 눈부신 악의로 가득한 어머니를 향한 복수 3부작의 절정- - 여자가 아름다워지려는 욕망, 늙지 않고 젊어지려는 욕망은 과연 자연스러운 욕망인가? 미와 젊음에 대한 욕망은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인가? 인간의 욕망 중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은 식욕이나 수면욕 못지않게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가장 근원적이고 강렬한 충동 중 하나이다. 이 책 『제자벨』속 글라디스가 아름다움과 젊음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파국과 비극으로 치달은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의 끝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함께 젊어지려는 욕망 중 어떤 욕망이 더 근원적이고 강렬할까? 인간이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아름다워 보이고, 젊어 보이려는 욕구는 과연 여성 자신을 위한 자기만족일까? 아니면 남성에게 사랑이나 호감을 얻으려는 수단인 것일까? 또한 글라디스의 말처럼 하나의 행복 즉 젊음일까? "결국 세상에는 하나의 현실, 하나의 행복만 존재해요. 바로 젋음이죠" -p. 101 왜 글라디스는 그렇게 아름다워지고, 젊어지고 싶었던 것일까? 어떻게 그녀가 아름다움과 젊음에 모든 것을 걸게 되었고 결국 '악녀' 즉 제자벨이 된 것일까? 작가는 글라디스가 어떻게 악녀가 되었는지, 글라디스의 법정 장면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책의 첫 부분이 결과 부분이 먼저 제시되어서 인상적이었다. 법정 장면에서 그녀가 재판을 받고 형이 선고된다. 작가는 왜 왜 그녀가 젊은 남자를 유인해 살해한 것일까? 그녀가 정말로 그녀를 죽인 것일까?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들을 글라디스의 과거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부와 명예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젊음까지도 모두 가지고 싶었고, 나이가 들어도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고 싶었던 글라디스! 그녀는 과연 악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가 악녀라면 어떻게 그녀는 악녀가 되었을까? 그것이 그녀의 생존 방식이 아닐까? 글라디스가 남성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였고 그것만이 그녀에게 행복을 주었다. 마치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 누가 제일 예쁘니?" 라고 백설공주의 나쁜 왕비처럼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젊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 젊음이 사라지고 미모가 사라지는 것은 절대 그녀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속였다. 그녀 자신의 나이뿐만 아니라 딸의 나이도 속였다. 그녀에게 딸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 자신에게 사랑을 주고 자신을 인정해주는 대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글라디스에게 딸 마레테레즈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어린 소녀같은 존재여야만 했다. 그렇기에 딸의 젊음을 질투하고, 딸의 결혼을 반대하고 결국 딸의 출산까지도 막았다. 자신이 할머니가 되어서 나이 들고 추한 존재가 될까봐. 나이에 비해 여전히 젊고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글라디스는 자신의 '나이'를 부정하고 싶어했다. 심지어는 60살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30대처럼 보이고 싶어했다. 그렇게 여전히 젊어 보이고 싶은 그녀의 욕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거기에는 간순히 젊어 보이고 싶은 욕구 이면에 숨겨진 늙었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게 된다. 여전히 남자들에게 사랑 받고 싶어하는 글라디스에게 그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작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글라디스가 결국 그녀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파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낸다. 나르시시스트처럼 자신에 대한 사랑과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 휩싸인 글라디스의 모습을 통해 계급의 갈등과 균열 등을 아울러 보게 된다. 매일매일 마시고 춤추고 시시덕거리며 빈둥빈둥 살아가는 부르주아의 모습과 병들어도 돈이 없어 죽어가거나 연줄이 없어 공부를 해도 일을 할 수 없는 하층민의 모습이 너무 대조 되어 나타난다. 돈이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모습 속에서 자본주의의 폐해와 계급 갈등까지도 아울러 발견하게 된다.
글라디스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녀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보게 된다. 불안 속에서 향락에 탐닉하는 귀족들,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며 힘든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 기성세대에게 기회와 행복을 빼앗긴 젊은이들 등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전쟁 상황 속 1930년대 파리라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저마다 비극으로 치닫는 인물들의 모습이 긴장감과 불안감을 더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글라디스의 이기적인 집착과 탐욕이 점점 파국으로 치달아가고 결국, 자신의 손자까지 죽이게 되는 살인으로 끝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사랑 받고자 하는 욕망 하나 때문에, 그녀 주변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얼마나 잔인한 선물인가. 세상 만물에 끝이 있듯 너무나 완벽하고 대단한 행복에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p. 100 작가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부유했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글라디스터럼 오로지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두고 딸을 위해 마음을 내어주지도 사랑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오직 자신의 미모와 젊음만을 추구하는 삶을 추구하다가 살인이라는 파국에 치닫은 글라디스, 제자벨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씁쓸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글라디스에 공감하면서도 비난하게 되는 마음,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누가 그녀를 악녀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며 비난할 수 있을까? 그녀가 그런 악녀가 된 것 또한 그녀 스스로 생존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한 인간을 타락 시키고 삶을 망치게 하는지 여실히 깨닫게 되는 책이었다.
#제자벨 #이렌네미롭스키 #레모출판사 #일파만파독서모임 #도서협찬 |
|
#이렌네미롭스키_제자벨 #레모출판사 #일파만파독서모임 #서평지원
“제자벨”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파멸을 부르는 악녀”라고 한다. 주인공 글라디스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서 그 일관성에 박수를 치며 읽었다. (하물며, 이 인물이 이렌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니 ...) 도입부이 재판 장면에서 끝까지 피해자의 정체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아서 누굴 죽인것인지 궁금했는데 왜 말을 안하는지 더더욱 궁금했는데.. 책의 말미에 베르나르의 정체가 드러나고나고 왜? 글라디스가 말을 안했는지 이해가 됐다. 베르나르의 정체를 인정하는 순간 본인이 할머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 결국 말을 안했구나.
미에 대한 집착과 본인의 삶에 대한 애착이 안타깝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해도 갔으며, 종국엔 막대한 부와 대단한 미모가 없는 나는 글라디스가 아니라 그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엔 모자르구나 라고 갈무리했다.
극단적 결핍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비극을 가져온다는 것이 참 인생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렌 네미롭스키의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모습의 주인공이 등장 할지 궁금하다.
100년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세련되고 명쾌한 문장이 정말 맘에 들었던 작품이다. <레모출판사의 지원으로 독서후 작성되었습니다.>
|
|
{도서제공} #일파만파독서모임 #레모 #이렌네미롭스키 #제자벨 #프랑스소설 📌(p.219) “사랑과 감탄을 받고 싶었다. 친구나 아내가 아닌, 애인이나 과거에 빛나던 젊은 여자처럼 모든 여자 중에서 가장 사랑받고 싶었다.” ‘제자벨’은 주약성서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세벨‘을 프랑스식 발음한 것, 서구권에서 오랫동안 ’악녀‘의 대명사로 일컬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젊은 여자처럼 모든 여자 중에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주인공 ’글라디스‘ (현실 감각 제로, 환상에서만 살고 싶었던 여자) 소설은 법정에서 재판받는 글라디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꽤 긴 호흡으로 재판 장면을 보여주는데 장면이 주는 중압감과 이 여자가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얼마나 ‘악녀’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후 글라디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녀가 어떻게 파멸하게 되는지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현실보다 환상을 사랑했고,상실보다 젊음을 붙들고 싶어 했으며,타인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던 여자. 어른의 성숙함보다는 결핍과 허영이 더 크게 보였다. 젋음을 영원히 붙들고 싶었던 이 여자의 욕망이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악녀’ 가 아니었을까 처음 만난 프랑스 문학이었는데,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 일파만파독서모임과함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제자벨(Jézabel)’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흔히 파멸을 부르는 악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작가의 삶 또한 인상적이다.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이렌 네미롭스키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사업으로 바쁜 아버지와 자신만의 삶을 추구한 어머니 대신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1929년부터 1942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까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제자벨』은 작가가 서른세 살이던 1936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무도회』, 『고독의 와인』에 이어 어머니의 몰락을 그린 이른바 ‘복수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주인공 글라디스 아이제나흐는 스무 살 청년 베르나르 마르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애인이 아니라 손자였다. 소설은 재판을 중심으로 글라디스의 삶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자비한 심판관으로 변해버리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p.120) “사랑의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뿐이라는 걸 말이오.” (p.122) 글라디스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녀는 늙지 않는 아름다움, 아니 늙음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원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순간에 안도감을 느끼고,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쉰 살이 되면 할머니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 역시 나이 드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인지 글라디스가 그토록 미모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글라디스는 정말 악녀일까?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을 뿐이다. 물론 그 사랑이 지나쳐 타인을 보지 못했고, 결국 파멸을 불러왔다. 하지만 읽는 내내 그녀가 전형적인 악녀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유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유를 누리던 그녀가 부러웠다. 물론 그만큼 깊은 고독도 안고 있었지만. 베르나르에게서 사실상 “넌 늙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가 무너진 이유도 이해가 갔다. 글라디스에게 젊음은 단순한 나이가 아니라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악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늙음과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 인간의 비극에 더 가까운 작품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가며 지켜내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글라디스에게 그것이 젊음이었다면, 나에게는 무엇일까. 그래서 글라디스의 모습 속에서 자꾸만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