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저자의 죽음에 대한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시각을 보고 싶어서 이 책을 들었으나, 그런 류의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서양미술에 나타난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죽음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변화왔는가를 추적한다. 나 역시 죽음이 '반대물로 전화한'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그럴까? 그림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책읽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죽음을 생각하는데서 오는 긴장감(?)같은 것은 느낄수 없었다. 그것을 기대하고 읽은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위에서 내가 기대한 것과 같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독자적으로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죽음'을 체험할뿐이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체험할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관념 역시 '남의 것'을 보며 얻은 것과 그 관념에 대한 관념이 복합적으로 섞여져서 형성된 것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 할때 죽음은 그 관계들은 끊는 일이 될것이므로, 특정사회마다 각기 가지고 있는 관계맺기의 방식에 따라 죽음의 의미 역시 달라질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수 밖에 없다. 죽음의 사회사. 그리고 책의 제목인 춤추는 죽음. 정말 시대에 따라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춤을 추듯이 변한다. 아무튼역사상 드러난 죽음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쉽고 재미있게 보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을 묻어버린 현대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될지에 대한 반성을 해볼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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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결국은 죽는다는 사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렇게 죽음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데도 우리는 애써 죽음을 외면하려 한다. 죽음은 묵시적인 금기사항이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먼저 고통, 슬픔, 공포등의 부정적인 단어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춤추는 죽음이라니. 언젠가 TV 다큐멘타리에서 본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장례식 장면이 떠오른다. 그곳에서는 죽음을 온 마을 전체가 축제로 맞이한다. 우리와는 너무 많이 다른 모습이다. 시대와 역사, 공간에 따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이 새삼 흥미롭다.
춤추는 죽음 1권은 유럽의 중세시대에서부터 바로크시대까지의 죽음에 대한 시각 변화를 미술작품을 통해 살펴본다. 저자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에 대한 개념분류에 기초하여 다섯종류의 죽음의 형태를 분석하고 있다.
1부는 우리의 죽음으로 중세초기에서 중세전성기 시대의 기독교적인 죽음관을 대표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절대적인 기독교의 영향아래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죽음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지금의 우리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2부는 나의 죽음으로 중세전성기에서 르네상스 시대에는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면서 우리의 죽음이 아닌 나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죽음 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가 조금씩 불안감과 반항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3부는 멀고도 가까운 죽음으로 르네상스에서 바로크 시대까지의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집단적 환상을 잃어버리고 삶이 무상함을 깨닫게 된다. 서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가 그 당시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 책은 유럽이라는 공간적인 제약, 중세에서 바로크시대까지의 제한적인 시기를 다루었다는 점, 그리고 그림을 통해서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해석하려 했다는 것에서 지금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죽음의 대한 시각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그러나 저자의 탁월하고 매력적인 글솜씨와 그림에 대한 쉽고 상세한 설명 덕분에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아직 젊다는 오만에서인지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 책은 관심은 가지고 있지만 깊게 알고 싶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춤추는 죽음 2권은 낭만주의 시대에서 근대, 현대까지의 죽음에 대한 시각을 소개한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내용이 많을 것 같아 궁금한 마음에 꼭 읽어보려 한다. [인상깊은구절] 생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
| 죽음이란 제목은 먼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죽음은 이세상과의 이별을 뜻하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우리의 영혼이 두려움에 떠는 그런 상태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동경은 현재의 사회에서 죽음이 얼마나 개인화되고 터부시되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 진짜로 암흑의 시대였을까? 누구에게 암흑의 시대였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고, 중세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충격적이다. 죽음을 하나의 의식으로 묶어둠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난 중세인들. 공동체를 형성하고,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의식으로 함께 죽음을 맞이함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물론 그것은 면죄부가 통용될때의 말이긴 하지만, 면죄부란 것이 지금의 의미처럼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개인화되고 물질화 된 사회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홀로 맞이하는 죽음, 이승의 재물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죽음은 우리의 현재 모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죽더라도 난 편하게 죽음을 맞이할수 있을까? |
| 진중권의 책은 특유의 독설과 아는척? 때문에 읽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하나의 주제를 통찰하는 많은 정보의 살포 속에서 그가 꾀뚫고 있는 시원한 독설이 나의 알고 싶어하는 욕심을 채워준다고나 할까? 이 책도 그런 이유에서 어려운 주제의 글을 쉽게 그리고 재미나게 그야말로 신나게 읽었다. 처음 만난 진중권의 책이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아니고 미학오딧세이였던 나는 그가 엮어내는 미술의 시각제시가 맘에 든다. 알기 쉽게 보고 좋게 그리고 너무 정답에 치우치는 그런 맛없는 그림보기가 아니라 각각의 살아있는 그림보기를 알려주므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아우르며 서양화속의 사상과 철학 등의 아주 맛나는 섞어 찌게를 끓여낸 그에게 감사해야 겠지? 덕분에 멜랑꼴리라든가 영화제목으로 친숙한 메멘토라는 단어의 의미와 뭐 그런 류의 이즘들에 대해 나 또한 식자인 척 뻐길 수 있었다는 즐거움을 느꼈으니 말이다. |
| 진중권이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논쟁이 있는 장소에서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이다. 그의 이러한 성향이 있었기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류의 책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혀 진중권이 지금 행하고 있는 논쟁의 현장을 느낄수 있는 책은 아니다. 이글은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두려움. 즉 죽음에 관한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도록 해주는 책이다. 인간에게 죽음은 항상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세에서는 그리 죽음이 나쁜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다소 이 책의 내용이 서양의 기준을 가지고, 기독교의 논리에 경도된 서양인의 기준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나 역시 죽음이라는 주제가, 숨이 멎고 몸의 기능의 정지를 의미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과거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성실히 보여주고 있다. 진중권은 그의 전공을 여실히 살려서 서양 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동안 어려워하던 서양 미술에서 이토록 치열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책을 통해서 알게된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새천년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개되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인 '죽음'에 대하여 진중권은 다시한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가 다가올 이 시기에 차분히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 하나의 의미만으로도 이 책은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 나는 이 책을 봄에 읽었다. 봄을 유난히 타기 때문에 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질에 몸도 마음도 설레기만 하는 그 봄에 어딘가 멀리 떠나는 대신 나는 어두운 도서관 한 켠에서 이 책을 뽑아 들고 만 것이다. '춤추는 죽음'.. 제목 속에서는 기묘하게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과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시대와 중세로 넘어가며 변모해가는 죽음의 의미와 제의들을 쫓아가며 나는 아주 먼 여행을 온 이방인처럼 낯설고 신비롭기까지 한 무엇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원기왕성한 학생인 나에게 지금껏 '죽음'이란 주제는 그다지 흥미로운 꺼리가 아니었음에도, 책을 읽는 동안은 익숙지 않은 주제를 전혀 새로운 시간 속을 거슬러가는 여행에 빠지는 듯했다. 죽음과 같은 소재가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혐오스럽게 묘사되기는 커녕, 너무도 달콤하고 감미롭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을까? 사실, 이 책이 준 그런 기쁨만큼이나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함으로 인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단점도 없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한 정보, 새로운 시각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의 가치 역시 충분하다고 본다. |
| 재능있는 저자의 잘 쓰여진 대중대상 교양서는 늘 읽기 즐겁다. 한 사람의 입심좋은 소개에 혹해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미지의 영역을 기웃거려본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나도 그 분야에 폭 빠져 헤우적거려 볼 수 있을 것이고, 안타깝게 운이 안좋다 해도 짧은 독서기간 동안 미지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소득이다. 이 책은 어땠냐고? '죽음'이란 모티브로 남겨진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알게되었고 그중 몇몇은 사랑하게까지 되었다. 미술이라면 바닥을 기던 미술성적의 악몽 밖에 떠올릴 게 없었던 나에겐 장족의 발전이다. 아마도 진중권이라는 탁월한 글솜씨를 가진 사람이 이 책의 저자라는데에도 많은 부분 이유가 있으리라. 그의 글은 언제나 쏙쏙 읽힌다. 빠른 속도감과 넘쳐흐르는 위트와 풍부한 인문교양과 탄탄한 지력. 그럼에도 아주 대중적인 수준. 나같이 미술쪽에 무지하기 그지 없는 사람에게는 그의 일반 독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지... 여러모로 즐거운 책이다. 죽음이라는,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 음침한 수수께끼의 실을 잡고 서양 역사의 긴긴 미로를 통과해나간다. 걸음걸이 마다 거장들의 미술작품들에 발도장을 찍으며 이런 책 저런 이야기, 입담좋은 주인장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주제와 어울리지 않은 흥겨움으로 유럽인들의 죽음의 단면들을 훔쳐본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건 기독교의 역사와 그에 따른 죽음에의 대응의 변천사다. 신앙공동체 속에서의 자기최면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던 중세초의 사람들. 그 후 죽음이 개인의 문제가 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신도 공동체도 가망 없어진 지금, 죽음에 대한 현대인들의 히스테리컬한 공포감. 그러고 보면 신앙공동체가 깨어지고 신이 우리곁을 떠나버린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에겐 두가지 선택지 밖에 없는지 모른다. 극도의 우울함과 공포감에 비명을 지르거나 죽음에 대항할 또다른 자기세뇌꺼리를 찾아내거나. 낭만주의 시대의 "아름다운 너의 죽음"에 대한 변태적인 집착,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두팔 벌려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숭고한 정신. 전자 뿐 아니라 후자마저도 또다른 자기세뇌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스러져간 수많은 숭고한 영혼들에게 오물을 끼얹는 꼴일까? 그리고 죽음과 사랑,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결합. 여기서 최상급의 애로틱을 느끼는 나 역시 변태일까? -_- 하긴, 변태라 한들 같은 류의 변태들이 줄줄이 나와주는 판이니-거기다 그 이름도 유명한 미술계의 거장들이쟎은가- 조금은 안심이다. 역시나 인간은 홀로 있을 때보다 뭉쳐있을 때가 더 편한가보다. 그리고 네크로필리아. 시체애호증. 이소설 저영화에서 등장하는 이 증상의 심리를 엿본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재미있다. 그리고 죽음의 색이라는 청황색, 혹은 청록색. 공교롭게도 가장 총애하는 색이다. 미술작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건만 어릴때부터 그 색깔에서 어두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낀 것을 보면, 색깔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은 사회적, 경험적인 것 이상의 무엇이 있나보다. 꼭 성경의 청황색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미술가들은 시체에 그 색을 입혔으리라. 이 책은 유럽인들의 천년여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변천사를 미술작품을 통해 알아본다..는 지적,미적 유희에 충실하지만,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사실 유희의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유럽인들이 마주했던 그 죽음은 또한 나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죽는 순간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해도 어쩔수 없이 생각해보게 된다. 바로 이점이 이 책의 최대 흡입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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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세에서 받는 느낌은 "향유(香油)"이다. 참기 힘든 냄새가 나고, 그조차도 물처럼 산뜻한 성분이 아닌 잔여감이 남는 기름의 성분. 그것은 내가 처음 접한 중세의 이미지가 유화(油畵)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까? 살덩어리의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 미술품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색한 표정에 사람의 친근감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눈동자를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 자체에 죽음의 이미지를 깔고 있는 것 같다.
처음에 미이라의 모습이었던 죽음은 점차 해골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참 묘한 일이다. 분명 죽음을 그려내려면 육체는 이미 종말을 고했으니 뭔가 다른 표상, 흐릿흐릿한 하얀 덩어리라든지 혹은 완전한 영적인 모습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은 가장 정직한 몸의 골격, 뼈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Cowboy Bebop에 나오는 인디언씨가 한 멋진 말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항상 곁에 있다. 두려워하는 순간, 죽음은 빛보다 빨리 덮쳐올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으면 죽음은 부드럽게 우릴 지켜보고 있을 뿐이야." [인상깊은구절] 생각해보라. 죽음은 그의 존재를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것이다. 그는 이 잔인한 진리를 똑똑히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는 가냘프나마 새 생명의 소망과 믿음도 있다. 눈 앞에 닥쳐온 죽음 앞에서 상반되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것, 이 자아의 분열을 중세인들은 천사와 악마의 싸움으로 극화했던 것이리라. 이 도덕과 심리의 충돌, 그리고 이 충돌을 홀로그라피 같은 3차원 입체 영상으로 묘사하는 것, 바로 여기에 아르스 모리엔디가 주는 매력이 있다. |
| 그림을 앞에두고 보일수 있는 감상자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할 것이다. 비단 그림 뿐만이 아니라 영화, 책, 음악등에 대한 분석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한 그림을 앞에두고 색을 볼 수도 있고 구도에 대한 분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림을 읽을수도 있다. 이렇게 그림에 나타난 상징들을 기호화하는 것을 도상학(Ikonographie)이라 한다. 도상학은 그림속에 내포한 기호, 혹은 상징을 추출해 내어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읽어내기위한 언어를 만드는 방법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적용되는 예가 중세 서양의 종교화이다. 중세 서양의 회화는 예술적인 목적보다는 종교적인목적이 강했다. 문맹율이 높던 시절 종교이야기를 담은 회화는 대중들에게 유용한 메시지 전달 수단이었다. 때문에 보다 쉽게 대중에 접하기 위해 그림속에는 암묵적 합의에 의한 많은 상징들이 채택되게 된다. 낙타가죽을 두른 요한, 열쇠와 함께하는 베드로, 석판을 들고있는 모세등등.. 의미를 알기전에는 그저 흔한 그림들 속에서 알고보면 천차만별의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것이다. 진중권의 '죽음의 춤'은 이 독화술을 통해 서양회화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와 그 사회적 투영에 대해 소개한 책이다. 책을 읽기전 궁금했던 점은 왜 하필 죽음인가 하는 것이었다. 서양회화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가 두권의 책에 묶일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있을까도 의아했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은 곳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담고있었다.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간 죽음은 꺼려지는 논의대상이 되어버렸지만 낭만주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죽음은 시대에 따라 행복한 것, 또는 즐거운 것으로 취급되어지기도 했다.(물론 문화권에 따라서는 현대에도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되기도 한다) 이책은 서양회화를 통해 그들이 받아들였던 죽음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다음의 다섯단계로 구분하였다. 1. 우리의 죽음(중세초기-중세전성기) 2. 나의 죽음(중세전성기-르네상스) 3. 멀고도 가까운 죽음(르네상스-바로크) 4. 너의 죽음(낭만주의) 5. 반대물로 전화한 죽음(현대) 초기 그리스도 시대의 죽음은 집단적 테두리에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의 죽음은 '우리'중 하나가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며 우리 모두가 겪는 공통의 일이었다. 때문에 죽음은 그다지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며 신의 부름을 받았으니 행복한 곳으로의 여행을 떠난것이라 믿겨졌다. 당시의 회화를 보면 죽음에는 항상 모든 사람들이 모여있고 신과 천사가 죽음영혼을 거두어 간다. 그러나 모두에게 행복한 죽음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선하게 산 사람도, 악하게 산 사람도 모두 천국으로 간다니 말이다. 그리하여 생긴것이 지옥의 개념이었고 회화속에는 신을 중심으로 검사와 변호사(악마와 마리아, 혹은 베드로)가 대립하게 되고 심판이 묘사된다. 죽음을 둘러싼 광경도 점차 집단에서 개인으로 국한되고 '우리'의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전이되며 죽음은 내게 심판을 내려줄 무서운 것으로 인식된다. 죽은자의 모습도 깨끗하고 성스러운 모습에서 썩어가는 시체와 살을 파먹는 벌레등 하드코어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한 대중들은 천국에 가기위해 교회에 더욱 많은 재물을 바치게 되고 타락해가는 교회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 시켜가며 부를 축적하고 종교개혁을 부르게된다. 극단적 묘사를 동반하던 죽음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며 묘한 변화를 겪게된다. 네크로필리아 nec·ro·phil·i·a - n. [U] 시간증, 시체 애호증. 유럽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과학적 호기심은 해부학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해부학은 당시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신드롬이 되었고 교양인의 취미로 까지 발전하였다 한다. 부자들의 저택에는 개인 해부실까지 있었다고 하니 마치 클래식 음악감상같은 고급취미였던것 같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모호하게 하여 죽음은 무서운 것이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게 된다. 회화에서 나타난 경향은 먼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동거를 들수 있다. 관능과 죽음의 동시묘사이다. 죽어가는 여인의 표정에는 엑스터시가 번뜩인다. 죽음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에로틱을 느낀다. 모순된 죽음의 투영이다. 그리고 또다른 죽음의 모습은 허무주의. 삶의 덧없음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풍경화, 인물화, 통속화등 곳곳에 몇가지 코드를 안고 나타나게 되는데 주로 땅에 떨어진 해골, 배경에 나타나는 무덤등이 이를 묘사하게 된다. 이 시기를 이 책은 '멀고도 가까운 죽음'이라고 소개한다. -책 서문에 의하면 본문이 참고한 가장 큰 텍스트는 독일의 역사사회학자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죽음의 형태학적 분류에 대한 연구였고 시대구분은 그의 이론을 참조하였다 한다- 이어 낭만주의시대가 도래하면 죽음은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한다. 한 여인이(혹은 한 사내가) 침대에서 죽어간다. 죽어가는 병자의 모습은 정결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위에 둘러싼 친지, 친구들은 비통한 표정을 짓고있고 그의(혹은 그녀의) 죽음은 비장미가 넘쳐흘러 아름답기까지 하다. 죽음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깊은 슬픔은 죽음을 매혹적인것으로 인식시키고 연인의 죽음뒤에 남겨진 사람의 찢어지는 아픔은 죽음에 대한 충분한 대가로 남는다. '너의 죽음'이라 불리운 이 시기에 유달리 자살한 예술가가 많은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맞닥뜨린 첫번째 죽음은 '학살'이다. 양대 세계대전을 거치며 인간을 파멸시킬수 있는 가장 무서운 대상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죽음은 중세의 그것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되어 언급은 회피되어진다. 하지만 회화속의 묘사는 현대에 이르러 보다 다양해진다. 사실 읽어내려가며 내가 가장 흥미있던 부분이 바로 이 현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쟁에 대한 묘사는 극과극을 이루게 된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극한 죽음의 묘사, 그리고 전쟁의 한복판에 내몰기위한 장렬하고 아름다운 프로파간다용 죽음의 묘사. 2000년대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은 전쟁의 참상이 고발당하고 모두가 전쟁을 원치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과연 그러할지 참으로 의문이다. 서양의 회화를 통해 바라본 죽음의 모습은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악마처럼 변해왔다. 책을 덮으며 동양인이 생각하는 죽음을 떠올려봤다.나의 책 여행은 이렇게 또다른 목적지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