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전 비행기를 탔을때의 일이다. 기류가 불안정한 곳을 지나던 비행기가 갑자기 많이 흔들렸다. 20초나 30초 정도의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그때 나는 죽음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어찌해볼 수 없었던 무기력한 상태에서의 그 공포감이란, 정말 무서운 경험이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안돼, 아직, 아니야'를 되내이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갈때 가끔은 흔들림이나 속도감이 주는 공포로 인해 죽음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안정을 찾았을때 그런 불행은 내것이 아니라는 자만심과 함께 어느새 일상의 권태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춤추는 죽음 1권에 이어서 2권을 마저 다 읽었다. 2권은 18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시각을 소개하는것으로 출발한다. 낭만주의시대라고 불리웠던 것에 걸맞게도 그 당시 사람들의 죽음은 '아름다운 너의 죽음'으로 특징지워진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정작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감과 슬픔이었다. 죽음을 그린 작품들 속에는 죽어가는, 혹은 죽은 사람들이 황홀감을 느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중세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원죄의 댓가가 죽음이며, 공동체의식이 강했고, 그리고 사후 영생에 대한 약속을 보장받은 덕분에 죽음에 순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르네상스, 바로크시대에와서는 죽음은 개인적인 일이 되었다. 죽음에 개별적 대항해야 했기때문에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 낭만주의 시대 사람들은 고통없는 아름다운 죽음을 소망하면서 죽음을 미화시켰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대에도 뭉크와 같은 화가들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와 여자형제의 죽음을 경험한 뭉크는 자신도 일생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았던 때문이었을까. 그의 그림에 나타난 죽음 앞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것 같다.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죽음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중세 사람들의 죽음관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의 영향력은 크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낭만주의 시대의 상실감과 슬픔을 경험하고 남은자의 고통을 느낀다. 지금 우리에게 죽음은 또 다시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현대에는 죽음에 대항할 어떤 전략도 부재한다. 이 책을 통해서 여러가지 죽음의 모습들을 보았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각자가 찾아야 할 일이다. 다만 유한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함을 가지고 죽음을 기다려서는 안될것 같다.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은 오히려 일상의 생활에 진지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춤추는 죽음이라는 제목이 내게는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춤추는 죽음 1,2권을 책장에 꼿아두면서 가끔씩 눈길이 갈때마다 내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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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림이 많은 책을 본 것도 몇 쪽 참조, 몇 쪽의 그림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착실하게 잘 따라서 책장 넘겨가며 본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 주제를 다룬 여러 개의 그림들을 쭉 보다 보니 히야.. 명작은 확실히 눈에 다르게 들어오는구나.. 하는 느낌도 갖게 된다. 2권에서는 인간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이 변화했기 때문인지 죽음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그저 자신 개인의 문제로서의 죽음보다는 타인의 죽음을 이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개인적인 욕구 혹은 정치.사회적 이용. 살아있을 때 죽음에 대해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우습다.
죽음의 미학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별로 美를 느끼지 않았다. 반어법적 효과. 이 책을 두 권 이어서 보고 나니 혈색이 발그스레하게 도는 살아있는 인간, 생명체의 아름다움이 새삼 크게 느껴져서 몇 번이나 내 손과 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굳이 죽음의 미학을 얘기해보자면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가 만족하고 눈을 감은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거 아닐까. [인상깊은구절] 시체를 이용한 이 정치극은 역사에 별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다. 가령 영구보존되어 있는 레닌, 마오쩌둥, 김일성의 시체를 생각해보라. 사실 국부의 시체를 전시하는 건 혁명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그저 왕의 몸이 법을 구현한다고 믿는 봉건적 전통의 변종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국부가 없음이 한스러워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자는 정박아들이 있다. 국부가 없으면 없는 거지, 그걸 만들어 섬길 필요는 없다. 만든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독재자를 국부로 만들자는 데엔 뭔가 불순한 구석이 있다. 자고로 국민이 고분고분하면 국가가 버르장머리 없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주인 국민이여, 당통의 말대로 "대담함을, 항상 대담함을!" |
| 비가 오니 모처럼 아침이 즐겁다. 사무실에 앉아 이처럼 딴 짓하며 노닥거리는 것도.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2권을 마저 읽었다 화려한 도판을 동원한 서양에서의 죽음에 대한 차분한 해설이 재미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과정에서 묘사된 고문과 죽음의 기록이 인상적이고. 어떤 순교자의 경우는 배를 가르고, 창자의 끝을 꺼내 막대기에 감고 그 양끝을 돌려, 창자를 말아내는 죽임을 당하는 데, 도판에서 느낄 수 있었던 처참함이 어떤 다른 죽음보다도 더 인상에 남았다. (사람은 창자의 길이가 몇센치 였지?) 보통은 생각하기 힘든 죽음과 죽임이 아닌가. 물론, 서양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왔는 지, 그 방법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저작의 취지는 아니고, 아이리스의 '죽음의 역사'라는 본격적인 인문적 저작을 읽고, 그 에서 얻은 감명을 계기로, 서양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묘사해 왔는 지를 조사해 보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 모든, 나를 포함한, 이들은 자신이 장수무강한 후일의 어느 날, 애용하던 침대또는 방바닥에서, 편히 숨을 거두는 것이 기정된 것이라고 무의식속에서 생각하거나,아니면 최소한, 나에게는, 다른 형태의 죽음이 있을 수 있다고 결코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의 개인적인 죽음이란 결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전의 어린아이처럼, 토막이날 수도 있고, 낡은 누비라 승용차와 함께, 찌그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죽음이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고 느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생명보험 들자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 숱한 죽음의 간접 경험은 나에게 삶의 풍요를 느끼게 한다. 언젠가는 나도 너도 마지막에는 경험을 하게 되어있고, 그 때는 박노항이의 할애비를 안다한들 "면제"는 없다. 그래서, 아이리스의 '죽음의 역사'를 읽어보기로 한다. 풍요해진 김에 내쳐, 떼부자가 한번 되어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