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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사랑과 연애를 다룬 소설은 달콤한 맛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전쟁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면 쓴맛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이 있고 사랑에도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소설을 하나의 맛으로 표현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함정임의 소설집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을 아린 맛이라 말하고 싶다. 그건 단편집 전반에 드리운 상실과 부재,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누구도 그를 언급하지 않은 채 추모하는 표제작 「저녁 식사가 끝난 뒤」뿐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들려주는 아련한 「기억의 고고학―내 멕시코 삼촌」, 양부모의 죽음으로 혼자 남은 주인공이 연인과 이별 후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는 「그는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엔 직간접적으로 죽음이 언급된다. 나머지 단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의 이별이 예정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어디 소설뿐이랴. 따지고 보면 우리 앞에 펼쳐질 생은 이별의 반복일 뿐이다.
결혼식 사흘 전에 사라진 약혼자가 십 년 뒤 남긴 유품의 수첩에 적힌 프랑스 호텔을 여행하며 그와 온전히 이별하는 나미의 여정「어떤 여름」, 결혼과 동시에 멕시코로 떠난 U와의 만남을 통해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꽃 핀 언덕」, 히말라야에서 우연히 만나 가슴에 새긴 한 소녀의 죽음을 듣고 그곳으로 향하는 남자의 이야기 「오후의 기별」엔 정착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기질을 만날 수 있다. 함정임은 영원히 정착할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걸 아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말한다. 그러니 계획된 일상을 뒤로하고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거나 히말라야로 향하는 소설 속 인물의 선택이 불편하기는커녕 그들을 따뜻하게 배웅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불안하기보다는 편안하게 끌린다. 「어떤 여름」에서 나미와 충동적으로 동행하는 장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은 모험보다는 모험 이후의 어떤 흐름, 인생에 관심이 쏠렸다.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의 모든 것.’ (「어떤 여름」, 98쪽)
그러나 여전히 이별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구두의 기원」속 이명을 앓고 삶의 부재를 견디지 못해 힘겨운 소설가의 삶과 다르지 않다. 일요일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는 소설가의 독백처럼 말이다.
‘늙은 엄마에게 손자처럼 자란 너는 늙어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순리를 비교적 일찍부터 터득했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치를 비교적 늦게까지 깨닫지 못했다.’ (「구두의 기원」, 134쪽)
그러니 예전 편집자 J를 찾아 어린아이처럼 기대고 의지하는 심정을 함부로 탓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구두 한 짝은 상실을 채우는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구두를 확인하는 순간, 자신도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반대로 매일 마주했던 구두가 사라지면서 자신도 사라질 수 있다는 엄정한 사실에서 살아 있다는 경이로운 삶의 단면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것이 구두가 아니었다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그것이 정말 구두였는지, 그렇다면 누구의 것이었는지, 또한 그것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너는 아는 것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너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물감의 흔적을 또렷이 새겨놓았고, 이물감이란 소용돌이치며 타오르는 생명력이었다.’ (「구두의 기원」, 139쪽)
반복되는 유산으로 삶과 죽음을 경험하고 견뎌야 하는 「밤의 관조」속 화자와 「구두의 기원」의 소설가는 가슴 깊숙하게 안기는 인물이다. 사라진 존재가 삶의 이유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만 한다.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애도다.
‘나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세계에 걸쳐 서 있었다. 경쾌한 소리, 투박한 소리, 엉기는 소리, 육중한 소리. 그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소음은 걷는 것, 오르는 것,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행위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밤의 관조」,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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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중반부터였던 것 같다. 휴식을 취할 때면 H를 찾는다. 올초에는 함정임 작가를 떠올리며 달맞이언덕을 걸었다. 이른 봄인데도 동백꽃이 곳곳에 만발했다. 내가 H를 찾고 그곳에서 나름의 여행 의식을 치르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저 바람과 파도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다. 바람과 물결은 굳이 그곳이 아니어도 있지만 H가 주는 특별한 평온함이 있다. 사는 일에 닳은 마음을 씻겨내고 귀를 장악했던 소음의 스위치를 꺼 온전히 내 심장소리만 듣는다. 쿵쿵쿵. 두근두근. 억지스럽게 들리겠지만 마술을 빚는 접촉이다. ‘수리수리 마수리, 괜찮다. 다 괜찮다.’ 그 철썩이는 파도와 바람이 함정임의 소설집에도 연신 불어댄다.
책장을 넘기면서 어딘가로 계속 가고 있는 듯했다. 조각배에 누워 불밝힌 초처럼 해를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사이 불현듯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나며 그 시간속 사람과 조우한다. 어떨 때는 비행기나 기차, 자동차에 몸을 싣고 달리던 길에, 또 다른 때는 음악의 선율에 빨려들어 지난 시간 덮어두었던 인생의 책장을 다시 넘긴다. 암울하거나 엄숙하지 않은 여정이다. 그 추억여행에 동반하는 무언가 친근한 사람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잠 못들며 부유한 상태이지만, 돌아갈 곳과 포근히 파고들 침대가 마련된 떠돎이자 비행인 것이다. 마음속 꿈의 집이 건재하다. 석양에 붉게 물든 철길 옆의 집. 바닷가에 면한 언덕 위의 집, 바람에 흰 커튼 자락이 날리는, 오렌지 불빛 부서지는 실내의 이층집. (158) 함정임 작가의 문체는 감성적이거나 과하지 않다. 잔잔하게 흐른다. 그런데도 행간에서 한 번씩 어지럽고 목이 잠기는 건 주인공이 기억을 호출하여 힘겹게 붙잡기 때문일 것이다. 자꾸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려나가는 최근 기억과 달리 점점 뚜렷하게 되새겨지는 옛 장소와 사람에 묶여 그 주위를 서성이게 된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볼 때면 우리가 헤엄치는 그 순간만이 살아있는 증거이고, 그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강물 속으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마음을 헤집어 서글픈데, 함정임 소설집의 주요테마 역시 결국 사람은 가고 추억의 재생, 즉 이야기만 남는 필멸의 인생사를 논한다. 그리고 소녀. 잊지 못할 순간은 몇 번이고 올 수 있지만 운명적인 순간은 오직 한 번, 그녀를 처음 본 그 봄날, 금잔화가 황금빛으로 줄지어 피어 있던 그 오후 한 때뿐이었다... 박은 사랑코트 파일럿의 순정한 꿈이었던 그녀를 생각했다. 단 하루도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는 보내는 날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녀의 존재가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했다. 이대로 일 년이 더 흐르면 그녀는 아예 없었던 사람처럼 그의 인생에서 잊히고 말 것이었다. 박은 지워지려는 자신의 삶을 복원하려는 듯 그녀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려고 애를 썼다. 그는 유리에 대고 안나, 하고 그녀를 불러보았다. (113; 114)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자신만이 아는 것, 그러나 그 아픔과 슬픔이 때로는 누군가의 그것을 알아보게 한다는 것. 비록 그 만남(재회)이 더디게 이뤄지더라도 돌아서서 가본 그 자리에는 좀더 너른 이해와 “위안의 미광”(이소연)을 마주하는 등이 내걸린다. 생명이 꺼지는 암흑에 맞서 내 건 분홍빛 연등이 바람에 자유로이 휘날릴 테니, 우리 어떻게든 다시 만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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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가 끝나면, 무엇을 할 건가요
내가 낯선 작가의 이름을 접하게 되는 경우는 언제일까 고민하게 된다. 가끔 책 쇼핑을 할 때, 작가 이름을 보지 않고 주로 스토리를 보고 구매하기 때문에 정말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작품을 구매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거의 장편에 한한 이야기다. 단편의 경우 하나의 굵직한 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낯선 작가라면 쉽게 구입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내게 함정임은 그렇게 낯선 작가는 아니었다. 역시나 다양한 앤솔로지 덕분이었다. 이번 단편집에 실린 작품 중, 두 작품을 나는 이미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통해서 미리 접했고, 참 공허한 문장에, 허전한 여백의 미가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굉장히 어린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어떤 기본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저 작품만 읽고 20대의 여성 작가가 써내려간 소멸과 추모의 서사가 아닐까, 그런데 어쩜 이렇게 깔끔하게 적어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오산이었다. 내공이 없이 이런 글은 나올 수 없는 듯 하다. 이 단편선의 모든 작품들이 하나 같이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읽는 이의 내면의 문을 두드리는 소소한 여운의 작품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어떤 여름」, 「오후의 기별」을 중심으로 글을 적어내려가보고자 하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무엇을 할 건가요
「저녁 식사가 끝난 뒤」는 P선생을 추모하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희복씨와 순남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실 처음 이상문학상을 통해 이 작품을 접했을 땐 의아한 마음이 들었었다. 대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마음 한 칸에 쩡-한 기분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중심을 잡지 못하는 내 마음을 무슨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책을 다 덮고 작가의 말을 읽다가 깨우침을 느꼈다. ‘소설 쓰기란 추모의 형식’이다. 그렇다. 이 작가에게 작품이란 하나의 추모의 행위였구나, 내가 「저녁 식사가 끝난 뒤」를 읽고 느꼈던 쩡-한 기분은 그 추모에서 오는 서늘함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의 하이라이트는 사실상 가장 마지막 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작 P교수를 추도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P교수의 이야기를 한 번도 나누지 않은 것이 의아하게 느껴진 순남씨는 남편에게 묻는다. 참 이상하다고. 하지만 애초에 이 모임을 계획하고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놨던 희복씨는 조용히 말한다.
(...) 그리고 기다리다 놓치기도 하는거요. 그게 무엇이든. 난 그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ㅡ함정임, 저녁식사가 끝난 뒤, 저녁식사가 끝난 뒤, p. 52.
참, 가슴에 먹먹하게 와닿는 말이었다. 짧은 삶이었지만, 그 짧은 삶을 살면서 나는 참 많은 것들을 기다리기만 했고, 그러다가 놓치는 것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오랜 시간 후회하면서 살아왔다. 그 때, 왜 기다리기만 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내 폐부를 찌르는 대사가 있을까. 살면서 기다리다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을. 소설이란 그런 게 아닐까, 내가 평소에 그렇다고 믿어왔던 가치관이 아닐 수도 있구나, 또 다른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작업, 그것이 소설가가 지향해야하는 지점이고, 독자로서 느껴야 하는 지점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소설에 단 한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 P교수의 존재감이 가장 크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 수식어도 필요 없는, 그저 ‘어떤’ 여름, 그 오후의 기별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신기루처럼 가물가물해져서 싱거운 웃음만 나오는. ㅡ함정임, 어떤 여름, 저녁식사가 끝난 뒤, p. 91.
「어떤 여름」은 정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나미와 장, 장은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고 있는 나미의 독특한 매력에 반해 같은 여행 노선을 잡아나간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행지가 아닌 호텔을 돌고 다니는 나미의 여행 방식에 의문을 가진다. 끝내 그들의 관계, 그들의 여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멸해간다. 그들은 그저 그 ‘어떤’ 여름 우연히, 타지에서 만난 존재일 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김영하의 에세이 『보다』 속 김영하가 만났다던 부다페스트의 여인이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소설의 제목은 그 어떤 여름이 아닌 ‘어떤’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수식어를 붙일 수 없었을테니까. 그들의 관계는 한 장의 종이 위에, 그 종이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버리는 것만큼이나 아무 것도 아니었던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은 일이었을테니까 말이다.
순정? 지나와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돌이켜보니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ㅡ함정임, 오후의 기별, 저녁식사가 끝난 뒤, p. 117.
그리고 여기에는 아주 오래 전, 마음을 품었던 꼬치구이 집 소녀의 장례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도 있다. 그토록 강렬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덮은 이후에 가장 많이 생각이 난 작품 「오후의 기별」. 왜 그런 것일까 생각을 해보니, 청각적 이미지에 있었다. 뱃사공이 배를 저어가는 그 물소리, 그 물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 강렬하게 와닿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순정’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을 것 같았던 나날, 시간이 흘러가면 그것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함정임은 그것을 후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운 날이었노라며 쓸쓸한 어조로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들이 가슴 속 깊숙한 언저리에 놓일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함정임의 작품을 읽어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느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목적이 무엇일까. 참으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재미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엇인가를 얻어가고자 읽는 사람도 있을테다. 하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함정임의 작품에서 두 가지 모두를 찾기란 힘이 들 수도 있다. 엄청나게 재밌는 흥미진진한 서사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엄청난 삶의 철학이 녹아있어 배워갈 것이 흥건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어야하는 작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저 느끼는 것이면 족하다는 내 가치관에 따르자면 함정임의 소설은 이미 그 기준치를 초과했다. 지금 당신이 저녁 식사를 마쳤다면, 이 책을 한 번 꺼내보자. 많은 것을 느끼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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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저녁 식사가 끝난 뒤”를 읽으면서, 어떤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내용과 각자 추모하는 방식에 대해서 아~ 느낌이 왔다. 정갈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는 마무리였다. 이 소설에서 소품으로 등장하는 “몽골 노래를 한번 들어보고 싶구나!”라는 강렬한 욕망이 들었다. 부산 산동네에서 고모의 집에서 얹혀 사는 꼬마에게서 보는 한물간 가수 고모와 그의 연인을 보는 것도 추억할 만하다. 부산의 산동네가 그려지고, 그 시절의 학교에서 한물간 가수가 노래하는 것도 그려진다. 작품을 읽으면서 연관되어 불편함이 있다. 첫째는 이국에 대한 감상적인 모습이다. 중미인 멕시코와 쿠바에 대한 감상이며,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 동네에 대한 서정 등이 그것이다. 뉴욕 타임스퀘어, 네팔. 둘째는 여러 이유로 한국을 떠난 인종이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아스포라?) 입양이나 이주의 고통스러운 삶이 외국에 대한 감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해 본다. 표제작은 정말 깔끔하다. 그리고 멕시코 삼촌과 어떤 여름도 재미있다. 어떤 여름은 마지막에 약간의 반전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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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다닐 때 들었던 비평 수업 하나가 생각난다. 중간고사로 그 해 이상문학상 작품집 소설들을 달달 외우게 하는 수업이었다. 랜덤으로 몇 문장을 가져다놓고 사이사이에 뚫린 빈칸을 채우게 하는. 함정임 작가의 소설을 그 시험으로 처음 보게 되었다. <기억의 고고학 -내 멕시코 삼촌>이라는 소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뒤 이 소설을 함정임 작가의 소설집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소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우기 위해서 읽었던 그때와는 또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춘아 고모의 외로움과 서글픔, 그런 춘아 고모를 생각하는 '나'의 그리움과 아련함까지. 생각해보면 삼 년 전 소설을 외우면서 기계적으로 읽을 때에도, 소설 전체에 녹아든 아련한 분위기는 진하게 느꼈던 것 같다. 나에게는 이런 고모가 없는데도 어쩐지 나까지 아련해진 걸 보면. 춘아 고모의 애인이 멕시코 사람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베사메, 베사메 무초 노래가 나와서였는지도. 그 수업의 교수님은 수업 시간에 이 소설에 대해 강의하시면서 베사메 무초를 틀어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소설을 베사메 무초의 노래가 흐르는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이 소설이 소설집의 가장 첫 번째에 있었던 게 나에게는 다행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이 소설집이 조금 더 친근했고 서술자, 그리고 서술자 뒤의 작가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첫 소설의 분위기가 토속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이국적이었는데, 그러한 이국적인 분위기가 그 뒤의 소설에서도 계속 진행되어서 좋았다. 여행을 다녀온지 반 년도 되지 않았는데 늘 여행이 그리운 나로서는 그런 분위기의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간접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니까. 특히 정말 여행을 소재로 하고 있는 소설들이 그랬다.
언젠가 연애칼럼을 쓰신다는 분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소개팅에서 할 만 한 좋은 대화 중 하나는 여행에 관한 것이라고. 여행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상상력을 일깨워주고, 동시에 서로의 호감을 높여준다고.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여행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불가항력적으로 사람을 낭만적으로, 긍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함정임 작가는 이러한 여행의 이점을 소설에서 최대한 활용한다. 판타지 없이도 인물이 환상을 겪도록, 사진첩 없이도 인물이 과거를 떠올릴 수 있도록. 덕분에 그녀의 소설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환상적이다.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왠지 모르게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고 몽롱하면서도 내가 다녀온 여행지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그런 상태. 여행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던 프랑스와 스페인, 아쉬움이 많이 남아서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이탈리아, 내가 지금 제일 가 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인 미국의 뉴욕과 로스앤젤레스까지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긴 여행을 마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건, 그런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장 덜했던 <저녁식사가 끝난 뒤>였다. 추모하지 않는 것으로 추모를 한다는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추모라는 건 조용히, 소소하게, 행복한 마음으로 할 때 진실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남씨 혼자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결말도 소소하게 귀엽고 아기자기했다. 무엇보다 그 일을 이상하게 여기는 순남씨에게 남편이 한 말이 명대사다.
이 말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건, 우리 사회에 추모할 일이 너무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들도 많고, 놓쳐서 계속 아쉬워하는 것들도 많고. 놓친 걸 아쉬워하고 있다가 다른 중요한 걸 놓치고, 그것을 다시 아쉬워하기를 반복했다. 이 소설은 나에게 그러지 말라고 다독거려주는 것 같다. 얼마쯤은 놓쳐도 된다고. 그래서인지 이제 아쉬워하는 걸 그만두고 진심으로 어떤 것을 추모하고 싶어진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러했듯이, 역시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추모하고 싶은 일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