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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천 시집 『어느 시골 정류장에 앉아 있겠다』를 읽으며
오래전, 시인은 한 편의 시로 문법을 다시 쓰셨다. 「통사론」. 주어와 서술어만 갖춘 문장은 위기도 절정도 빠져버린 플롯 같아서,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에서 정작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우두커니’라는 한 마디였다고.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 먹었다는 것, 거기 눈물과 설렘과 웃음이 있다고. 그리고 시는 이렇게 매듭지어졌다.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고. 그 한 문장을 배운 지 여러 해가 지나, 나는 아직도 부사어를 읽으며 산다. 그러니 『어느 시골 정류장에 앉아 있겠다』를 펼치자마자 나는 조금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 시집은, 사반세기 전의 그 명제를 문장에서 시간으로, 그리고 한 생애로 옮겨 다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장의 목숨이 부사어에 있었듯, 이번엔 삶의 목숨이 부사어에 걸린다. 다만 그 사랑은 이제 순정하지만은 않다. 사랑하던 품사 안에서 시인은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얼굴 하나를 기어이 마주 본다.
사랑할 수 없는 부사 ‘왜’
「왜라는 부사의 폭력성에 관하여」는 「통사론」의 그늘에서 태어난 시다. 아니, 그늘이라기보다 뒷면이라 해야 옳다. 「통사론」의 부사어가 ‘우두커니’였다면, 대상 곁에 하염없이 서서 그 응시를 함께 견디는 말이었다면, 여기 놓인 부사는 ‘왜’다. 같은 품사의 두 얼굴. 하나는 곁에 서고, 하나는 위에 선다. 하나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동반하고, 하나는 상처에게 스스로를 해명하라 요구한다. 시는 첫 행부터 물러섬이 없다. “왜라는 단어는 너무 폭력적이다.” 이 단정 뒤에 이어지는 진단이 예리하다. ‘왜’의 폭력은 그것이 언어와 사물 사이의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 위에서 발화된다는 데 있다. 우는 사람에게 왜 우느냐 묻는 순간, 질문은 눈물이라는 사물을 언어의 법정으로 끌어낸다. 그러나 눈물은 언어보다 먼저 왔으므로 답은 언제나 늦고 언제나 모자란다. 그리하여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의 무기력함”이 발생하고, “그 무기력함 때문에 / 받은 상처는 더 깊어진다.” 상처가 상처를 낳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해명하라는 요구가 두 번째 상처를 낳는다. ‘왜’는 물음의 형식을 빌린 판결이다. 이 지점에서 시는 서정의 관성을 배반한다. 우리는 흔히 시가 ‘왜’라는 물음을 끌어안고 그 심연을 응시하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이 시는 반대편으로 간다. ‘왜’를 응시의 도구가 아니라 폭력의 문법으로 고발한다. “왜 그래? / 왜 그래?”가 반복되고 “왜 사냐고?”에 이르러 되풀이 자체가 매질이 될 때, 시는 자기 형식으로 폭력의 재생산을 시연한다. 물음표가 늘어날수록 대답은 불가능해지고, 부사는 스스로를 복제한다. 마지막 행, “왜라는 부사의 폭력은 계속 폭력을 낳을 뿐이다”에는 어떤 화해의 여지도 마련되지 않는다. 시는 위로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이 비타협이 이 시의 윤리라고 믿는다. 상처받은 이를 대신해 답을 지어내는 대신, 시는 답할 수 없음 곁에 그저 서 있다. ‘우두커니’. 그러니 이 시는 ‘왜’를 부정하면서 실은 「통사론」의 그 오래된 부사를, 응시의 부사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사랑하고 있는 셈이다.
하염없이, 문득, 천천히 부사어로 사는 일
그렇다면 이 시집이 끝내 사랑하는 부사는 어떤 것인가. 표제작 「어느 시골 정류장에 앉아 있겠다」를 펼치면, 답은 문장 곳곳에 조용히 흩어져 있다. 버스를 “한 대쯤 그냥 보내고” 싶다는 마음의 ‘그냥’, 구름을 “잠깐 올려다보다가”의 ‘잠깐’, 오지 않을 버스의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의 ‘하염없이’, 그리고 “문득 아이스크림 하나쯤 사 먹어도 좋겠다”의 ‘문득’. 이 시는 동사가 아니라 부사어로 쓰인 시다. 도착하는 동사, 올라타는 동사, 서두르는 동사를 유예하고, 그 대신 머무름의 부사, 지연의 부사, 무용(無用)의 부사 속에 삶을 재워 둔다. ‘왜’가 시간을 한 점에 봉인한다면, ‘하염없이’는 시간을 풀어놓아 숨 쉬게 한다. 정류장의 화자는 도착이라는 목적을 내려놓고, 지나가는 마을 사람의 “장화 색깔을 부러워하다가”,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건너편 종점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버스를 세며, “이번에 탈까 말까 망설이며 그렇게 / 거기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적는다. 나는 이 망설임이야말로 이 시집의 진짜 거처라고 생각한다. 타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는 자리, 부사어의 자리.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 아직 서술어에 닿지 않은 문장. 도착을 미룬 채 삶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 유예 속에서 시인은 오래전 자기가 세운 명제를 몸으로 산다. 그런데 이 한가로움 속에 슬며시 끼어드는 한 연을 나는 오래 붙들었다. 화자는 뒷산에 “잘 가꿔진 묘”를 떠올리고, “그곳에 피어 있을 꽃들”을 그린다. 정류장의 나른한 오후에 무덤 하나가 아무렇지 않게 놓인다. 이 시집이 노년의 시집임을, 정류장이 실은 생의 어느 정거장임을 여기서 처음 눈치채게 된다. 무위(無爲)의 풍경 아래로 죽음이 잘 손질된 화단처럼 가지런히 깔려 있다. 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애도하지도 않고, 다만 구름과 아이스크림 사이에 나란히 둔다. 이 태연함이 서늘하다.
빈 그릇을 돌려주던 시절
부사어로 사는 일이 가장 따뜻하게 육화되는 곳은 「익산역을 지나며」다. 지금은 익산이 된 옛 이리역, 열차 교행을 기다리는 긴 정차 시간 동안 사람들은 역 구내 가락국수집으로 달려가 한 그릇씩 사 먹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린 화자가 국수를 막 먹으려는 찰나 역무원이 재촉을 하고, 사람들은 그릇째 국수를 든 채 기차에 오른다. 며칠 뒤, 고향으로 내려가던 어머니는 “깨끗하게 씻은 가락국수 그릇을 챙”겨 두었다가, 기차가 이리역에 서자 급히 달려가 그릇을 돌려주고 오신다. 이 장면 앞에서 비평의 언어는 잠시 삼가는 게 좋겠다. 김이 오르던 국수 한 그릇, 뜨거워 두 손으로 옮겨 쥐던 사기그릇의 무게, 그것을 깨끗이 씻어 되돌리려 플랫폼을 달음질치던 한 여인의 뒷모습, 시는 이 감각의 온기만으로 한 시대의 윤리를 통째로 복원한다. “누구나 빈 그릇 하나라도 /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엔 욕심내지 않던 시절.” 빈 그릇조차 제 것으로 삼지 않던 마음, 남의 국숫집 살림 하나를 제 살림처럼 아끼던 마음. 그 마음이 이제는 어느 역에도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그립다”는 소박한 서술어 두 번으로 감당한다. 다만 나는 이 그리움을 향수라 부르고 싶지 않다. 향수가 지난 시절을 위안 삼아 현재를 덮는 일이라면, 이 시의 그리움은 회복 불가능을 정직하게 응시한다. “지금은 어느 역 구내에도 가락국수집은 없다.” 돌려줄 그릇도, 돌려받을 국숫집도, 달음질칠 어머니도 없다. 시는 그 상실을 메우지 않는다. 어머니의 뒷모습을 끝내 되돌려 세우지 않고,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그 자세 그대로 그립다 적을 뿐이다. 위로를 사양하는 이 그리움이야말로 앞의 ‘왜’ 연작과 은밀히 손을 맞잡는다. 둘 다, 채워지지 않는 간극을 억지로 메우지 않는다.
종착역, 혹은 도착의 부사
시집은 마침내 종점에 이른다. 「종착역 여수」에서 고향 여수역은 종착역이다. 마지막 터널을 지나 왼쪽으로 바다가 열릴 즈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종착역 여수”라는 안내 방송, 그리고 경유역에서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짐을 챙겨” 플랫폼에 내려설 때의 “그 충만함.” 여기서도 시의 무게중심은 도착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도착하는 방식에, 곧 부사어에 실린다. ‘천천히 천천히’, ‘느긋하게’, ‘웃는 얼굴로’. 시인이 소망하는 것은 종착역에 닿는 일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닿을 것인가다. 물론 우리는 안다. 종착역이 어떤 종착역인지를. “언젠가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 그 완성된 충만함에 / 웃는 얼굴로 느긋하게 열차에서 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소망은, 한 생의 마지막 정거장을 향한 조용한 기원이다. 놀라운 것은 이 시집이 그 종착을 ‘충만’으로 명명한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결코 손쉬운 완성으로 봉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표제작의 화자는 도착하지 않으려 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있고자 했다. 그런데 마지막 시의 화자는 충만하게 도착하기를 소망한다. 도착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잘 도착하려는 마음, 이 시집은 그 둘을 끝까지 화해시키지 않는다. 정류장의 유예와 종착역의 완성 사이에서 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채 팽팽히 매달려 있다. 나는 이 미봉되지 않은 긴장을 이 시집의 품격이라 부르겠다. 삶이란 결국 어느 정거장에서 “탈까 말까 망설이며” 앉아 있는 일, 그 망설임의 부사어를 끝내 서술어로 닫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시, 부사어를 사랑한다는 일
「통사론」의 시인은 사반세기가 지나 여전히 부사어를 사랑한다. 다만 그 사랑은 깊어진 만큼 어두워졌고, 어두워진 만큼 정직해졌다. 그는 이제 사랑할 수 없는 부사(‘왜’)와 사랑해야 할 부사(‘하염없이’, ‘천천히’)를 나란히 놓고, 어느 편도 위로로 미봉하지 않은 채, 그 사이의 간극을 그대로 살아 내려 한다. 문장의 목숨이 부사어에 있다던 젊은 날의 발견은 이제 한 생의 목숨이 그 삶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있다는 만년의 지혜로 자라났다. 부사어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결말이 아니라 결말에 이르는 자세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부사어를 밥벌이로 읽으며 사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시집이 내게 건넨 것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곁가지에, 수식어에, 하염없음과 천천함과 문득함에 삶의 진짜 무게가 실린다는 것. 그리고 어떤 물음은 답하지 않는 것이 가장 다정한 답이 된다는 것. 종점을 향해 들어간 버스가 저만치 돌아 나오는 것이 보인다. 이번에 탈까, 말까. 나는 아직 그 부사어의 자리에, 시인이 마련해 두신 그 정류장에, 조금 더 앉아 있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