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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을 수없이 많이 읽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대로 이해하며 읽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반백이 지난 지금도 ‘데미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면 ‘아직은’ 이라는 망설임이 있다. 다만, 지식이 늘고 살아온 연륜이 생겨서인지 예전보다는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수록된 ‘수레바퀴아래서’와 ‘싯타르타’는 ‘데미안’과 함께 읽으니 헤르만 헤세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청춘소설 3부작으로 내놓은 이 책, ‘스스로 깨어라’는 엮은 순서도 참 좋았다. 만약 순서가 바뀌었다면 헤세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헤세의 삶과 대비해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작가들의 삶이 파란만장하듯이 책 속에 스며든 고뇌와 아픔, 이혼과 파멸, 그리고 전쟁.... 이러한 모든 것이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 속에 고스란히 ’자서전‘적인 소설 형식으로 조명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 헤르만 헤세는 ‘유리알유희’ 등의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사후 세계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 하나 하나가 너무 유명해서 소개할 필요도 없지만 여기에 소개된 것 이외에도 ‘황야의 이리, 유리알유희 등 수많은 단편집, 시집, 우화집, 여행기, 평론, 서한집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는 세상의 복이다.
책은 세가지 소설, 즉 수레바퀴아래서, 데미안, 싯타르타로 구성되어 있다. ‘수레바퀴아래서’는 주인공 한스가 천재적인 머리로 부모와 주변, 뭇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그 기대에 억눌려 결국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자신 또한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하였다. 시대적인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주인공 한스의 고민이 어쩜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의 입장에서 어떻게 자식 교육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도 얻을 수 있었다. 다음, ‘데미안’은 싱클레어라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어쩜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하리만큼 사상과 개성, 그리고 인생의 의미를 아는 데미안의 모습, 그리고 자신과 데미안의 관계, 또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과의 사랑, 그 속에서 싹튼 이성적 지혜 등 언제 읽어도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이다. ‘싯타르타’는 한때 동양 여행을 통해 가진 종교, 사상을 완벽히 ‘싯타르타’에 담았다는 생각이 든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세속명, ‘고타마 싯타르타’는 책 속에서 고타마는 그대로 부처로, 싯타르타는 또다른 현자로의 길을 찾는 구도자로 파란만장한 삶의 체험을 통해 결국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감동을 주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헤르만헤세의 세 개의 작품을 한권의 책으로 만나볼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고 오래전 읽었지만 이해하지도 못했던 데미안과 싯타르타를 다시금 읽으면서 좀 더 이해하고 그 속의 지혜를 내면화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도 좋았고 돌고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선 지금, 어쩜 내가 그리도 찾고자 했던 무엇인가를 여기서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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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크카페 서평단으로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청춘소설 3부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를 한권으로 엮은 '스스로 깨어라'는 헤세의 방대한 문학 세계 중에서도 청춘의 고통과 성장을 담아내고 수많은 이들의 인생 책으로 손꼽히는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편의 대표작을 한권으로 엮은 ' 스스로 깨어라' 는 한 인간의 영혼이 성숙해가는 단계를 세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고 있으며 각기 다른 배경과 인물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책의 순서대로 ' 수레바퀴 아래서 '는 한 인간이 사회적인 압박에 무너지는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 '데미안'은 자아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청년기, ' 싯타르타'는 모든 갈등을 통합하며 도달하는 성숙기에 이러는 여정을 보여주며 인간의 내면적 갈등의 진화에 대해서 엿볼수 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의 한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한스와 그의 부모와의 모습이 현재 나의 자녀와 내 모습으로 투영되는 느낌이 들어 안쓰럽고 이야기의 비극적 결말을 되새기며 입시라는 현실로 옥죄이는 사회적 압박에 무너지지 않도록 아이에게 좀더 버팀목이 되며 간섭하지 않고 아이를 주체적으로 존중하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에서처럼 싱클레어가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과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는 껍질을 깨는 고통.. 데미안을 만나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모습에서 데미안이라는 내면적 자아를 발견하여 새롭게 깨어날수 있는 용기를 주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싯다르타'를 통해서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에서는 가르침이나 학습이 아닌 본인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접했고 투쟁과 번뇌를 넘어 강물의 흐름 속에서 깨달음을 완성한 그의 수용적인 모습에 진한 감동을 전해받았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주요 작품들을 엮은 ' 스스로 깨어라'를 읽고 싱클레어처럼 성인이지만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는 내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깨달음으로 깊이 숙고할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 고전의 가치를 깨닫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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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포스팅은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명작은 영원하다는 말에 동의는 하지만 왠지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선뜻 손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를 한 권으로 묶은 책이 출간되어서 하나씩 읽어보았습니다. 표지의 날개가 인상적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자신의 알을 깨고 나갈지 궁금해집니다.
수레바퀴 아래에서의 주인공은 한스입니다. 한스 아버지의 마음은 살아가는 동안 변합니다. 어린 시절의 열정은 어느 새 사라지고 갈망은 아이에게 대신 짊어지는 짐이 됩니다. 한스는 작은 마을의 유망주입니다. 한스는 신학교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중압감을 느끼는 한스가 안쓰러웠습니다. 살아가며 크고 작은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한스에게는 신학교 시험이 수능 시험과 같은 느낌이 아니였을까요 더 공부하고 싶지만 신학교가 떨어지면 고등학교는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를 얻지 못해도 또 다른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수능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의 합격조차 확신을 하지 못했던 한스는 이등으로 입학한 소식을 듣습니다. 저라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을 것 같은데 한스는 일등을 하지 못함에 아쉬워 합니다. 자신의 즐거움조차 죄의식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교에 간 한스를 다양한 아이들을 만납니다. 새로운 학교를 가거나 신학기가 되면 교실은 긴장과 기대감으로 차 있게 됩니다. 아이들의 모습에 제 친구들을 만났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습니다. 선망의 대상인 곳에 도착한 한스를 마냥 행복하지만 많습니다. 제 아이의 삶은 제 아이 손으로 결정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는 아이의 의견을 수용하는 아빠가 되리라 다짐했습니다. 아이가 커갈수록 제가 겪었던 불필요한 과정이나 아픔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점점 간섭이 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인지 제 욕심인지 생각해야겠습니다. 신경쇠약까지 겪는 한스를 다독여주고 싶어집니다. 한스와 하일르너의 탈주는 신학교를 뒤흔들게 됩니다. 아니, 뒤흔들릴 것을 염려해서 없는 사람이 되고 없던 사건이 됩니다. 수레 바퀴 아래서는 한스의 뼈아픈 성장통을 읽으며 웃고 울게 됩니다.
데미안은 제 자유의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데미안은 여러번 들었지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데미안을 읽으며 명작은 영원하다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내고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었지만 무거운 소설은 꺼리게 됩니다. 이번에 스스로 깨어라를 통해서 세 편의 소설을 읽으며 제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 예상보다 무겁거나 읽는데 힘들지 않았습니다. 명작은 영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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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을 다시 꺼내 든 건,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오랫동안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막연했지만 분명했다. 책은 <수레바퀴 아래서>,<데미안>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를 같이 엮은 책이었다. 헤르만헤세의 대포작 세 권을 차례로 읽는 동안, 나는 한 인간이 깨어나는 과정을 함께 겪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스스로 깨어라>는 이 세 편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은 책이다. 제목에 담긴 두 겹의 뜻, 잠에서 깨어나듯 자신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껍질을 깨고 세계로 나오는 것은 편집자의 언어가 아니라, 헤세가 세 소설을 통해 일생 동안 탐구한 질문의 핵심일 것이다. 나는 세 권을 다시 읽으면서 그 질문이 얼마나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내 삶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 기벤라트는 모든 걸 갖춘 소년처럼 보였다. 뛰어난 머리, 성실한 태도, 마을 전체의 기대. 그러나 그를 에워싼 것들은 그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갈아먹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공부, 낚시와 산책마저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 그리고 쉬지도 못한 채 이어지는 시험들. 어른들은 그것을 '훈련'이라 불렀고, '사랑'이라 믿었다. 한스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그가 결국 강가에서 발견되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전에, 헤세가 차례차례 던지는 물음들이었다. 왜 토끼를 빼앗았는가, 왜 낚시를 금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쉬지 못하게 했는가. 이 질문들은 한스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향해 있다. '스스로 깨어라'는 말이 한스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게 들렸을까. 그는 깨어날 기회 자체를 빼앗긴 소년이었다. 깨어남 이전에 짓눌려 버린 삶, 그것이 <수레바퀴 아래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첫 번째 진실이다. 깨어나는 것은 때로 먼저 부서지는 일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부서짐이 외부의 폭력에 의한 것일 때,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파괴가 된다. 한스의 비극은 그 차이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는 한스와 달리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생존이 아니었다. 싱클레어는 두 세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갈라지는 고통을 겪는다. 아버지의 세계(빛과 질서, 예배와 도덕)와 그 너머의 세계, 냄새도 말투도 다른, 혼돈과 욕망과 스캔들로 가득한 세계. 그는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흔들렸다. 그때 데미안이 등장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답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싱클레어가 스스로 묻게 만드는 존재다. 카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그의 언어는 기존의 해석을 뒤집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을 낯설게 만든다. 진실은 단순하지 않으며, 강한 자는 두려움을 받는다는 것, 이 뒤집기는 싱클레어의 세계에 처음으로 균열을 만든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다.' 데미안이 보낸 쪽지의 이 문장은, 성장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은유 중 하나다. 알 안은 안전하다. 그러나 새는 그 안에서 죽는다. 껍질을 깨는 일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싱클레어는 그 과정을 에바 부인과의 만남,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차례차례 겪으며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다시 읽으면서 나는 싱클레어의 방황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새삼 느꼈다. 그는 선하려 하면서도 타락하고, 이상을 좇으면서도 현실에 무너진다. 그 흔들림이 있었기에 그의 깨어남은 설득력을 갖는다. 완전한 인간이 깨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그 불완전함을 껴안으며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 그것이 데미안이다. 싯다르타는 처음부터 구도자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그 앎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앎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를, 싯다르타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사문이 되어 고행을 겪고, 고타마 부처를 만나 그의 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세속으로 내려가 카말라 곁에서 쾌락과 욕망을 직접 살아낸다. 싯다르타가 세속에서 겪는 타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고, 스스로 깨달아 그 안에서 빠져나온다. 그가 강가에서 오랜 시간 바시테바와 함께 보내며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깨달음이 얼마나 조용한 형태로 찾아오는지를 보여준다. 강은 모든 것을 동시에 흐르게 한다, 시작도 끝도, 삶도 죽음도, 기쁨도 슬픔도. 그 강물 속에서 모든 얼굴이 하나로 이어지는 환상을 싯다르타는 마침내 이해한다. 고빈다에게 싯다르타가 전하는 마지막 말은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을 언어로 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고빈다에게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게 한다. 그리고 고빈다는 그 순간, 수천 개의 얼굴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지식이 아니라 체험, 교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 그것이 싯다르타가 말하는 깨어남은 그런 것이다. 세 소설을 다시 읽은 뒤,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 깨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것이 쉬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냥 정신 차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헤세의 세 이야기는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과 많은 고통을 요구하는 일인지를 보여준다. 한스는 깨어나지 못했다. 그의 알은 외부의 힘에 의해 으깨졌다. 싱클레어는 오래 흔들렸지만, 마침내 자기 안의 목소리를 따르는 법을 배웠다. 싯다르타는 모든 길을 직접 걷고 나서야, 길 바깥에서 길을 발견했다. 세 개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진실을 가리킨다, 깨어남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겪어내는 것이라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더 남들과 같아야 한다는 압력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한스의 이야기는 그 압력이 얼마나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싱클레어의 이야기는 그 압력을 뚫고 나갈 균열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며, 싯다르타의 이야기는 그 이후에 찾아오는 고요한 지혜를 그린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내가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생각했다. 아직 알 안에 있는가, 아니면 껍질을 깨는 중인가. 그것도 아니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적어도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깨어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소설은 100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 안에 갇혀 있는 인간의 불안과, 그 알을 깨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을 따라 스스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일, 그것이 헤세가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유일한 초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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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헤르만헤세의 대표작 3편이 이 책, 한 권에 들어있다. 스스로 깨어라. 갖혀있는 틀을 깬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의식을 깬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에 수록된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은 읽어본 작품이나 싯다르타는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ㅡ데미안ㅡ 싯다르타는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한 인간이 무너지고, 깨어나고, 결국 이해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어간다. 먼저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가다가 결국 무너진다. 그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기대에 의해 움직였고, 그 결과로 내면이 버티지 못하고 붕괴된다. 이 작품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사회나 타인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것이 어떤 결과에 다다르는지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데미안에서의 싱클레어는 사뭇 그 결이 다르다. 그는 기존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에 의문을 품고, 데미안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배우며 점차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문장처럼, 그는 기존 세계를 깨뜨리고 자기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단계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성장이라기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으로의 성장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싯다르타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싯다르타는 수행과 쾌락이라는 양극단을 모두 경험한 끝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른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이 옳은지 따지지 않고, 모든 경험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된다. 이 세 작품을 관통하는 흐름이 확연해진다. 한스가 수레바퀴 아래에서 짓눌려 무너진 인간이라면, 싱클레어는 좀 더 나아가, 그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스스로 서는.. 성장의 인간이며, 싯다르타는 그 이후 삶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이다. 즉, 무너짐에서 시작해 각성을 거쳐, 결국은 통합에 이르는 여정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헤세는 어떤 메세지를 전하려고 했을까? 인간은 타인의 기준 속에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깨어나 삶을 통과하며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인생의 어떤 정답이 아니라, 결국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방송에서 배우 심은경의 인생책으로 꼽은 데미안.. 10년간 읽어낸 그녀의 독서경험은 또한 시사하는 바가 있다. 10대에 읽는 감흥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작품에서 느끼는 정서는 그 밀도가 달라진다는 것.. 그래서 고전이 아닌가 싶다. ㅡ 네이버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자유로이 작성한 후기입니다 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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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스스로 깨어라 작가명 : 헤르만 헤세 출판사명 : 스타북스
저는 데미안은 예전에 읽었고 수레바퀴 아래에서는 조금씩 읽기 시작했고요 싯다르타는 처음 읽어 보지 못했어요 헤르만 헤세 작품 세 가지를 하나 묶었는데 주인공이 성장하는데 타이든 자이든 영향을 받으며 소년에서 청년으로 제목처럼 스스로 깨어라 깨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자각하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알을 깨듯 껍질을 깨고 나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데미안에서는 싱글레어가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만나는 사람을 따라가는 듯합니다 프란츠 크리머는 만나면서 나쁜 길로 빠진 것을 데미안을 만나서 크리머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게 되고 데미안의 영향을 받고 미지의 연인을 베아트리체라고 부르며 방탕한 생활에서 탈출하고 피스트리우스를 만나 더 성장하고 데미안을 다시 만나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며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죠 수레바퀴 아래서는 한스가 주위 사람들에게 응원을 받으며 시험을 보고 합격하고 잠깐 휴식 기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쉬지 못했는데 목사님이 학교 가기 전에 좀 더 공부를 하라는 것 때문에 주위 부담 때문에 점점 힘들어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말 아쉬운 마음이에요
싯다르타는 아직 읽고 있는 중이라 수레바퀴 아래서 와 달리 불교라는 것 이 리뷰는 문화충전 200%의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로이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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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헤르만 헤세의 고전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그리고 <싯다르타>의 제목(!)은 익숙하다. 학창 시절에 숙제로, 혹은 교양 도서로 선정되어 읽기에 도전했고 완독 성공과 실패의 기억이 있다. 특히, '새'와 '알' 그리고 '세계'라는 키워드만으로도 바로 연상 가능한 데미안의 유명한 문구,
여전히 마음에 자유와 변화를 꿈꾸는 용기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책을 읽으며 그 부분을 제외한 <데미안>의 내용은 사뭇 기억에서 흐려져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생일 때 감동에 오열하고 옮겨적으며 읽었던 부분에 가려져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나누는 대화와 내면의 균열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된 뒤, 솔직히 충격(positive) 받았다. 알고 있다- 고 생각했던 세계가 붕괴되고 새롭게 재조립되는 기분을 느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도 또렷하게 보여 안전하게 느꼈던 세상이 낯설어지고 어지러워지는 감정을 느끼게 한 '데미안'을 통해 스스로를 깨뜨리고 다시 세운다. “알은 세계”라는 상징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성장의 경험이 된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한스 기벤라트와 하일너의 관계가 전혀 다른 결을 보여준다. 하일너는 자유를 향해 흔들리는 존재이고, 한스는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는 인물이다. 그러나 둘의 간극은 서로를 성장시키기보다 더욱 벌어지며, 결국 한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 없었다”는 문장으로 책 너머에 있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마냥 성장만 있을 것 같은 청춘의 또 다른 얼굴. 무너짐의 모습을 목격하는 독자(=나) 마음은 처음에는 안스러움으로 가득 찼다가 지금 나의 삶은 어떤지,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제목만 알고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처음으로 읽어보며 (동양인이라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종교) 제목 때문에 책 내용에 대해 완전히 다른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벌써 몇 번째 깨달음인지....) <싯다르타>는 특정 교리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계와 경험을 통해 스스로 도달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담고 있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 고빈다는 가르침을 따르고, 싯다르타는 체험을 택한다. 이후 그는 “지혜는 전달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다다르는데, 이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도 결국 자기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청춘소설이지만 삶을 살아가며 경험과 관계의 깊이와 색깔이 다채로워진 후 읽으면 학창시절에 읽고 느꼈던 감정과는 또다른 새로운 마음과 시각으로 내용을 음미하게 된다는 점에서 (너무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고전이 왜 고전인지 절절히 느꼈다. 3권의 책을 두툼한 한 권으로 모아서 출판한 점도 매우 마음에 든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다짐만 하고 도파민과 즉각적인 자극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데 휴일이나 휴가에 <스스로 깨어라> 한 권만 들고 가도 이 신비롭고 깊숙한 세 가지 세계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스스로깨어라 #헤르만헤세 #청춘소설 #스타북스 #문화충전 #문화충전리뷰이벤트 #서평이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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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청춘 소설 3부작이라니.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싯다트라> 세 편을 한 권에 묶어 놓았다니. 솔직히 <싯다트라>는 아직 읽지 못했고, 앞 선 두 편은 읽었지만 아직 내 것이 되지 못했다. 이 기회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내 청춘을 돌아보며 후회와 그리움으로 몸부림쳐봐야겠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결국 내가 읽은 이야기에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이야기를 더한 것이다. 지난 달 여기저기서 추천을 받아왔던 '까칠한 재석이' 첫 편을 읽었다. 거기서 뜻밖에 <데미안>을 만나 반가웠다. 1급 장애를 갖고 태어난 덕분에 의사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작가 고정욱의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와 시대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모자 관계라 할 수 있다. 물론 <데미안>에게도, 그 위로 올라갈수록 모체가 될만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대와 세대를 건너며 제 나름의 변신을 하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물음을 남긴다.
1919년 <데미안>에는 싱클레어가 있었다. 2012년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에는 재석이가 있었다. 싱클레어에게는 프란츠 크로머와 에바 부인이, 재석에게는 병규와 보담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킨 재석이는 사회 봉사 명령을 받는다. 이를 위해 찾은 복지관에서 오른쪽 팔을 잃고 왼팔로 서예를 가르치는 노인과 그의 손녀 보담이를 만나게 된다. 보담이는 누가 봐도 재석과 다른 부류였다. 그녀는 <데미안>에 나오는 질서와 평화가 있어 밝은 제 1의 세계 사람이었다. 공부보다 주먹 쓰는 게 쉬웠던 재석은 되는 대로 살다 보니 폭력 서클의 일원이 돼 있었다. 한 때의 객기를 후회하며 암흑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만 비열한 족쇄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싱클레어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날 시간은 많고 할 일 없는 싱클레어 무리는 폐품더미에서 쓸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가 더 나쁜 짓을 했는지 우쭐거리며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제 1세계의 일원이 되곤 하는 싱클레어는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한 가장 그럴 싸한 거짓말을 시작한다. 도둑질이었다. 물레방아 근처 과수원에서 가장 맛있는 레네테와 골든 파르메네종만 골라 훔쳤다고 했다.
프란츠 크로머는 재차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정말이야? 틀림없이 네가 그 사과를 훔쳤어? 하느님과 영원한 행복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크로머가 만족한 듯 웃을 때까지만 해도 싱클레어는 자신의 연기력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스스로를 옳아맬 족쇄가 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크로머는 사과를 훔친 범인, 즉 싱클레어를 신고하고 포상금 2마르크를 받을 계획이었다. 싱클레어의 치밀한 거짓말이 자백이 된 셈이었다. 거짓말쟁이와 범죄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싱클레어는 엄마의 방에 몰래 들어가 저금통을 훔친다. 하지만 고작 65페니히뿐이었다. 크로머는 마치 빚쟁이라도 되듯 나머지 1마르크 35페니히를 받아내기 위해 싱클레어 주위를 맴돌며 목을 조여온다. 싱클레어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악마가 내 손을 붙잡았다고. 어쩌면 평생 나를 괴롭힐 원수가 내 뒤를 바짝 쫓기 시작했다고.
재석은 이름처럼 예쁜 보담이와 제 1 세계에서 어울릴 꿈에 부푼다. 하지만 "너는 책 많이 읽니?"라는 그녀의 물음 앞에 백지가 되고 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석은 서점에 들렀다. 여러 종류의 데미안들 중에서 가장 싸고 얇은 것을 골라 샀다. 담배를 끊고 <데미안>을 읽은 재석은 폭력 서클의 짱인 병규에게 탈퇴를 선언한다. 결자해지라 했다. 재석이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가기 위해 선택한 탈퇴 조건은 엉덩이 삼백 대 맞기였다. 싱클레어의 알 깨기를 도운 것은 전학생 데미안이었다. 숨길 수 없는 성숙함의 지닌 그는 작문 시간에 들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 나름대로 해석해 싱클레어를 뒤흔든다. 그러더니 전 세계로 번질 대전쟁에 참전하면서 싱클레어에게 당부한다. "잘 들어, 싱클레어. 난 곧 여길 떠나야 할 것 같아. 너는 언젠가 다시 나를 찾게 될 거야. 하지만 그때는 네가 부르다고 예전처럼 말이나 기차를 타고 너에게 갈 수 없어. 그때는 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이후 싱클레어는 열쇠를 찾아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내부 세계 깊숙한 곳의 마음의 거울에는 운명의 모습이 비치고, 그 어두운 거울 위로 허리를 굽히기만 하면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거울 속 그 모습은, 친구이자 인도자였던 데미안을 닮았다는 것을. <데미안>을 읽고 나면 싱클레어의 홀로서기도 궁금하지만 데미안의 훗날은 어땠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아쉬움을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로 달래봐야겠다. 그나저나 "사람이 무슨 알에서 깨어 나냐? 사람은 포유류인데."라고 했던 재석이 친구 민성이는 어떻게 지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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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책은 한 번만 읽어서는 반만 읽은 느낌이든다. 첫 독서는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정신없고, 두 번째 독서부터 비로소 문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레바퀴·데미안·싯다르타를 각각 다른 판본으로 한 번씩 읽어본 상태였는데, 이렇게 한 권에 묶인 구성으로 다시 읽으니 신선하게 더 다가오는 느낌이다.
1. 수레바퀴 아래서 재능 있는 소년 한스 기벤라트가 경직된 독일 교육제도와 어른들의 기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이야기. 헤세의 가장 자전적인 초기작으로, 착한 아이였던 독자라면 한 번쯤 심장이 서늘해질 장면이 꽤 많다. 2.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만나며 선과 악의 이분법을 의심하고, 자기 안의 세계를 깨뜨려 나가는 성장의 기록. 헤세의 대표작이자 가장 상징적인 소설로 꼽히는 책. 3. 싯다르타 브라만 계급의 청년 싯다르타가 아버지를 떠나 진리를 찾는 인도 배경의 구도 소설. 가르침을 받는 대신 삶 자체를 스승으로 삼는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불교 창시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만 미리 알아두면 혼란이 적다.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는, 헤세의 청춘소설 세 편을 한 흐름으로 이어서 다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시기에 따로 읽었을 땐 솔직히 수레바퀴는 우울했고, 데미안은 난해했고, 싯다르타는 좀 지루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읽어보니, 내가 첫 독서에서 놓쳤던 문장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깨달았다. 특히 수레바퀴 아래서. 처음 읽었을 때는 천재 소년이 무너지는 이야기 정도로만 기억에 남았는데, 다시 읽으니 한스 옆에 있던 어른들의 언어가 유독 아프게 들어왔다. 응원하는 척 떠미는 말들, 사랑인 척 억누르는 관심들. 그 디테일이 첫 독서엔 그냥 스쳐 지나갔는데 이번엔 문장 하나하나가 멈춰 서게 만들었다. 데미안은 두 번째가 훨씬 좋았다. 처음 읽을 땐 아브락사스니, 카인의 표식이니 하는 상징들이 버겁게만 느껴졌는데, 다시 읽으니 싱클레어가 한 단계씩 자기 세계를 부수는 과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유명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문장 앞뒤에 깔려 있는 맥락이, 두 번째 읽을 때야 비로소 몸으로 이해됐다. 싯다르타는 이번 독서의 가장 큰 선물이었다. 첫 독서 땐 좋은 말이 많은 책이네 정도였는데, 두 번째로 읽으니 강을 건너는 장면들, 뱃사공 바수데바의 침묵, 모든 것이 하나라는 깨달음의 대목이 느리게 스며들었다. 말로 요약하기 어려운, 그런 문장들이다.
스스로 깨어라는 새로운 책이라기보다 오래된 책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해주는 책이다. 헤세를 처음 펼치는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세 작품을 한 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입구가 되어주고, 이미 한 번씩 읽어본 사람에게는 내가 이 장면을 이렇게 안 읽었었구나 하는 재발견을 준다. 나는 후자로서 이 책을 골랐고, 두 번째 독서가 첫 번째보다 훨씬 좋았다는 사실이 내 독서 이력에서 꽤 소중한 기록이 됐다. 한 번 읽고 덮을 책이 아니라 책장에 꽂아두고 시간이 지나 다시 꺼낼 책, 그 자리에 놓기 좋은 합본이다. #스스로깨어라 #헤르만헤세 #헤세청춘소설3부작 #수레바퀴아래서 #데미안 #싯다르타 #스타북스 #송동윤 #독일문학 #세계문학 #재독추천 #성장소설 #고전읽기 #문화충전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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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엔 '수레바퀴 안에서'에서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를 다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해하였다고 하는 점은 단순히 수능 예상 문제정도의 한계가 있음에도 그땐 그나름 이해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40대가 된 지금 2026년 현재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세 작품이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은 "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묻는 건지, 책 속 인물인지 아니면 내안의 내가 묻고 있는 것인지 적어내려가는 알 수 없습니다.
한스는 문제아가 아니라 지나치게 잘하려던 아이로 어른들의 기대가 아이를 망가 뜨리는 과정은 줄곧 겉으론 나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고 속으로는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압박을 느끼게하며 한스에게 감정이입이 휘몰아쳐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조용히 숨죽여 울부짖게 하는 내안에 있던 존재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이 다시 꼬리를 물었습니다. 한스를 무너뜨린 것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없었다는 점에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는 어른인가. 내가 10대에 꿈꾸던 어른이 나는 되었는가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싱클레어는 착한아이가 아닌 자기 삶을 선택하는 존재로 바뀌어가고자 하는데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 바로 성장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부모 시선으로 나는 정답을 주는 부모였던가, 자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모였던가라는 내적 질문에서 한참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결론은 아이가 내 기대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다는 인정을 진정으로 현실로 언젠가는 하리라 그러리라 곱씹어 봅니다. 매일 기도하듯이 '나는 내 아이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있는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을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된지10년은 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싯다르타'는 경험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존재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 작품을 다시 읽으며 아이를 위한 선택이 항상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올바른 길이 항상 정답은 아니며 사랑이 때로는 통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는 부모가 되어야겠습니다. 나의 주변에 왜 데미안같은 사람이 없는지 불평하고 아쉬워하던 한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는 과연 어떤 부모인가', '나는 어떤 인간이길 원하나'에 가장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중 특히 이 세 작품들은 읽을 때 마다 시점이 달라지고 느끼는 부분이 다르게 만듭니다. 고전만이 주는 특별한 감성과 여운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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