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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이 유행이었던 2015년. 프로이트의 제자 중 하나인 오토 랑크의 책이 출간되었다. 칼 융이나 아들러는 많이 들어봤지만, 오토 랑크는 처음이어서 생소했다. 이 정신분석학자는 또 어떤 내용을 주장할 지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먼저, 오토랑크는 누구인가? 오토 랑크(1884-1939)는 프로이트가 '리틀 랑크'라 부르며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랑크는 1935년 미국으로 영구히 이주한다.
한 때, 랑크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1939년 랑크의 치료법에 대해 나치 스타일의 철학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오늘날 랑크의 심리학은 '창의성의 심리학'이라 불린다. 집단적 문제 해결, 팀 구축, 리더쉽 개발과 조직 학습등에서 널리 활용된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위대성은 바로 자기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능력, 또 자신이 소중히 간직해온 이데올로기를 깨부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 랑크의 지론이다.
랑크는 충동보다 의식적인 의지를, 기억이나 역사보다 현재를, 전이보다 실제 관계를 더 중요시했다. 낡은 사고와 감정, 행동과 결별하는 것이 곧 심리적 성장과 발달의 핵심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환자마다 다 다른 이론을 적용했다. 이 책은 그가 사망하기 몇 년 전 출간된 것으로 정신분석학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재밋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일단 그가 내세우는 입장을 살펴보자. 랑크는 '비이성적 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또 행동할지라도 실은 비이성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심리학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회심리학 개념인 집단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개인 심리학이나 집단 심리학 그 너머에 있는 인간 본성의 비이성적인 바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개념에 따라 이 책의 제목, '심리학을 넘어서'가 탄생한다. 이 책은 너무나 방대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가득 담고 있다. 그 중, 오토 랑크가 보는 프로이트, 칼 융, 아들러의 비교 분석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류 역사를 보면 두 가지 변화의 원칙이 서로 번갈아가며 작용해 왔다. 사람의 내면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외적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것. 이 중 어느것이 인간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데 더 나은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 딜레마다. 이러한 화두로 시작하는 그의 1장은 프로이트, 아들러, 칼융에 대한 분석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먼저, 그들이 말하는 '무의식'에 대해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우리 모두가 무의식에서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고 융은 우리 인간이 서로 다른 것은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성격 구조의 맨 꼭대기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찾고, 융은 맨 밑바닥에서 차이를 찾는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융에게는 사람들은 다 다른 존재이다. 한편, 아들러는 사람들의 행동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같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치료 목표는 "사회적 감정"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내면으로부터의 균등화를 추구하는 것인 반면, 프로이트의 '적응'은 외적 일치를 목표로 잡고 있다. 융은 이 둘에 비해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는 좌절된 내면의 힘들을 승화시키는 데서 구원을 찾았다. 이 승화의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종족 무의식에 있는 상징을 이용하며 따라서 자신의 자기 안에서 일종의 집단성을 성취한다. 이제 섹스를 보자. 융에게 있어서 섹스는 이 같은 우주적 결합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아들러는 섹스를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프로이트는 온갖 종류의 억압된 감정의 배출구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이 세명의 심리학자 모두는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즉 우리의 성격을 힘들게 만드는 악은 과도한 개인화라는 결론이다. 따라서 이 심리학자들은, '자기'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와의 정서적 결합이 그 치유법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 결합을 프로이트는 섹스에서, 아들러는 사회적 동료 의식에서, 융은 종족의 집단성에서 찾는다. 이 심리학 체계들은 억눌린 에너지의 이성적 활용을 통해서 힘과 권력을, 한 마디로 말해 남자다운 자질들을 약속한다. 따라서 심리학은 여자에 대한 설명도 남자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오토 랑크는 '여성을 위한 심리학'을 제안한다. 오토 랑크에게 신경증은 사회적 억제의 산물도 아니고 충동의 억압으로 야기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의 의지가 본성을 과도하게 통제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신경증이다. 즉, 신경증은 자연 발생적인 것을 의지로 다스리려 한 결과다.
그래서 심리 치료는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즉 환자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부분은 그가 '사랑'에 대해 말한 부분이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 시대와 유대인의 종교, 기독교를 통해 사랑을 설명한다.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플라톤의 에로스는 3가지 다른 의미를 암시한다. 욕망하는 사랑, "리비도" 자기도취적 사랑. 신성하고 숭고한 사랑. '플라토닉 러브' 마지막 플라토닉 러브는 특히,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향만을 인정한 플라톤의 사랑에게 가장 특징적인 것이다. 사람은 오직 에로스를 통해서만 감각의 세게에서 관념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이 던진 메시지다. 한편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태도다. 아가페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는 사랑이다. 고대와 기독교의 사랑 철학 차이는 강제적인 독점과 양보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유대교의 신은 처벌과 복수의 신인 반면에 기독교의 신은 사랑과 용서의 신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증오의 종교가 사랑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이 사랑의 종교는 개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품도록 만들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사람의 성격은 고집스런 유형에서 사랑스런 유형으로 바뀌었다. 유대교 교리는 정직에 의존했다. 만약 당신이 신의 명령을 따른다면, 당신은 선하다. 기독교 신앙은 신에게 사랑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신의 사랑은 곧 당신을 선하게 만든다. 고대인들은 사랑을 하나의 쾌락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아름다움을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의 한 측면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중세는 사랑이 죄가 되었고 여자들은 파멸의 원인이었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의 여성은 철학적 성찰과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제 사랑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곧 사랑은 즐거울 뿐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랑은 더 이상 에로스도 아니고 아가페도 아니며, '프시케(psyche)'가 되었다.
우리는 내면에 사랑의 두 가지 경향을, 말하자면 남자다운 에로스와 여자다운 아가페를 다 발달시켰으며, 이 경향들이 동시에 표현됨에 따라 인간관계는 이 두 가지의 공생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 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불멸의 자아 탄생 과정, 사회적 자아의 발전, 여성의 심리학과 남성의 심리학 등등. 읽으면서 놀랐던 부분은, 이런 심리학적 주제들이 최근 철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이 던지는 화두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최근 사장되는 분위기지만 그 속에 담긴 철학적인 사색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 하다. 그 이론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한 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여려 정신분석학자들을 분석해준 1장이 참 좋았고, 여성 심리학 내용도 흥미로웠다. 이런 다양한 정신 분석 방법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