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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시도하려면 곧이어 밀려올지도 모르는 파국과 균열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처음 보는 낯선 레시피에 도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요리를 해보기 전까지는 그 음식이 기대했던 맛이 될지, 아니면 입도 대기 싫은 실패작이 될지 알 수 없다. 결과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맛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결국 눈 질끈 감고 스토브 위에 팬을 올려야 한다. 그렇게 해본 도전에서 설사 실패한다 해도 상관없다. 지금 기꺼이 감내한 실패가, 용기를 내어 드러낸 밑천이 앞으로의 식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에게 균열을 내는 일 역시 어떤 모습의 내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만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 책 <나를 균열내기>는 이처럼 자신의 균열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들여다본 문학가들을 다룬 에세이다. 이 책은 뒤라스,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등 여러 작가의 작품 세계 및 작가 정신을 저자만의 시선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각자만의 균열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를 나답게 만든 삶 속 균열은 무엇인가?', 혹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P.23 사랑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관계의 파국을 외면하지 않고, 불가능한 희망을 붙들고, 기울어진 세계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자들은 극단의 절망에 빠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절망을 산다. 해당 책에 등장하는 문학가들은 삶 속 균열을 온전히 직면하고, 자신의 것으로 해석해 소화해낸다. 이들은 균열이 생기는 순간 비로소 다른 삶을 이해하고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기저에 두고 있었다. 각 작가가 자신만의 균열을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여정을 통해, 내가 가진 균열을 내 것으로 체화할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예컨대 책의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마르크리트 뒤라스의 이야기는 삶에 균열을 내는 태도를 다루고 있다. 작품 속 뒤라스의 시선은 자신의 삶에 반복해서 균열을 내며 자신을 망치는 여자들을 향한다. 그러나 이는 무의미한 자멸이 아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균열을 선택하는 이유는 삶의 감각을 선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거듭 확인하고,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건져 올릴 의지력을 기른다. 다음 장에 등장하는 카뮈 역시 자신의 부조리를 직면하는 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는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맹목적으로 삶 속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태도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삶을 살아가며 때때로 마주하게 되는 절망, 균열, 실패, 부조리와 같은 것들도 인생을 계속 흘러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삶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늘이라면, 이를 어떻게 건강한 태도로 마주할지 고민하는 게 우리의 몫이다. P.34 삶에 초월적 구원은 없겠지만, 스스로 의미를 만들면서 순간의 아름다움과 기쁨에 집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카뮈가 그랬듯이 어쩌면 그런 것들이 절망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또한 해당 도서는 삶을 살아가며 서로 다른 정신세계가 충돌해 만들어낸 균열을 응시한다. 책의 2부 ‘해체와 붕괴’에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적어와 모어 사이에서 부유한다. 여기서 적어란 말 그대로 ‘적대적인 언어’, 다시 말해 외국어를 뜻한다. 두 언어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고타의 모습은 자신의 뿌리를 설명할 땅을 갖지 못한 아고타의 삶과 맞닿아 있다. 저자는 그의 글쓰기를 자신을 설명할 근거를 붙들기 위한 아고타의 필사적인 행위로 설명한다. 아고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글로 표현하며 부유하지 않기 위해 그 간격을 메우고자 했다. 모로코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환경에서 자란 레일라 슬리마니의 이야기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저자는 자유와 규범의 충돌을 경험한 작가의 삶을 조명하며, 이런 괴리가 신체적으로 분출되는 데 집중한다. 이처럼 정신적인 상태와 육체적 현실의 괴리를 직면함으로써 작가는 아름답게 미화되기만 했던 ‘모성’을 폭력적인 경험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두 세계의 충돌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온 관념을 새로운 시선으로 조망할 문을 열어준 셈이다. P.65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잃게 되는 것은 언어와 자리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는 것은 ‘나’라고 여기는 것들을 잃는 일이기도 하다. 책의 마지막 장에 다다를 즈음에는 균열이 더 이상 부정적인 단어로 느껴지지 않았다. 책 속 뒤라스와 카뮈가 보여주었듯이, 단단한 벽에 금이 가야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듯, 익숙한 생각에 작은 균열이 생길 때 비로소 새로운 시선을 받아들일 여유가 생긴다. 어쩌면 우리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균열을 만들고 그 틈을 통해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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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채우려 한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비어 있는 자리를 메우기 위해. 신유진님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 없이 가득 찬 상태에 닿고 싶어서. 그 욕망은 순수하다. 아니, 정확히는 순진하다. 책을 읽을수록, 채울수록 오히려 더 많은 모름이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언젠가 책을 읽으면 세계가 해명될 것이라고 믿었다.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을 충분히 흡수하면, 언젠가는 삶이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그러나 뒤라스를 읽고, 카뮈를 읽고, 크리스토프를 읽을수록 퍼즐은 완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빈칸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읽기란 채움이 아니라 발굴이었다. 그리고 발굴된 빈칸들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신유진님은 '균열'을 파괴로 읽지 않는다. 균열은 H라는 알파벳이 내리찍혀 갈라지는 순간, 터져 나오는 비명이다. 쩍, 쨍그랑, 우지끈. 그런데 그 소리는 공허하지 않다. 무언가가 깨진다는 것은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는 뜻이다. 껍질이 깨지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균열은 실패가 아니라 증거다. 뫼르소가 해변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도,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낯선 언어의 불완전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쓴 것도, 그들이 더 이상 온전하기를 포기한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을 정면으로 감당하려 했던 몸짓이었다. 태양을 쏘고 싶었던 뫼르소의 총구는 엉뚱한 곳을 향했지만, 그 행위 안에는 거대하고 무심한 존재에 맞서려는 처절한 의지가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짧고 건조한 문장들은 언어라는 적에게 내어주지 않으려는 마지막 영토였다. 그렇다면 균열은 자신을 잃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속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일이다. 껍질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뒤라스가 말한 글쓰기는 '발현'이 아니라 '해독'이다. 이미 있는 것을 읽어내는 일. 간조의 해변에 남겨진 발자국과 해초와 깨진 조개들처럼, 우리 안에도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쌓여 있는 것들이 있다. 읽기란 그것들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에 비로소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나는 이 생각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채우지 못했을 때, 나는 그것을 결핍으로 읽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미해독의 상태였다. 이미 내 안에 있지만, 아직 읽히지 않은 것들. 간조가 되어야만 드러나는 해변처럼, 어떤 것들은 시간과 고독과 실패를 거쳐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균열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패를 용납하는 것과 다르다. 신유진이 다루는 작가들, 그리고 그들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실패한다. 하지만 그 실패는 포기가 아니다. 끝을 유예하는 일이다. 불이 꺼질 테지만 무대에 남아 있는 것. 생을 조금 더 살아보는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끝내 프랑스어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불완전함을 감추지 않고 글 속에 드러냈다. 그의 짧고 파편적인 문장들 사이의 행간에서 오히려 더 크고 더 진실한 무언가를 만난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들어온다. 몰리나르가 그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고집한 이유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균열의 역설이다. 깨지는 것은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다. 우리가 온전히 채워진 척할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페렉은 사물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존재가 선명해지는지, 아니면 그 속에 파묻혀 지워지는지 물었다. 나는 이 질문을 읽기와 쓰기에 대입해 보고 싶다. 읽은 책이 쌓일수록 나는 더 선명해지는가, 아니면 더 흐려지는가. 신유진의 대답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게 확인하는 읽기는 나를 가두지만,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절대적인 낯섦을 보게 하는 읽기는 나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균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읽기다. H가 내리찍히는 소리.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났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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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균열내기>는 프랑스 문학 번역가 신유진이 사랑한 프랑스 작가들의 생애와 작품 속에 자신의 사유를 깊게 투영한 책이다. 유려한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책 귀퉁이에 적어둔 나만의 사소한 느낌을 정성껏 쌓아 올렸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학적 건축물을 마주하는 듯하다. 흔히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고, 작가의 삶과 소설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아무리 정교하게 창작된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이 작가 개인과 완벽히 분리된 것일 수 있을까. 나는 작품을 읽을 때마다 작가의 내밀한 마음과 생활, 그들의 진짜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나 소설 외에 그들이 쓴 산물을 종종 찾아 읽는다. 그럴 때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어두운 방들이 마치 열린 문처럼 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작품은 결국 작가의 삶이라는 필터를 거쳐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삶과 철학, 인생의 굴곡을 만드는 여러 순간들 앞에서 머뭇거리는 인간의 본질을 건드린다. 우리는 늘 어딘가를 벗어났다 생각하지만, 결국 본질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들이 와닿았다. 뒤라스의 여자들이 안전한 삶 대신 균열을 선택하고 존재를 선명하게 확인했듯, 카뮈가 설명되지 않는 고통 앞에서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했듯 말이다.
하지만 나는 뒤라스도, 카뮈도, 에르노도 아니다. 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문학적 성취로 이끌어낼 힘이 없다. 내 이야기가 타인에게 어떤 흥미를 일으킬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쓰려고 할까? 그 질문의 끝에서 내 안의 오래된 향수를 마주한다. 기억이 가진 소멸성, 분명 가졌으나 허공으로 휘발되고 마는 인간사 전반에 대한 아련한 마음이다. 위선일지라도 따뜻한 마음을 먹고 싶은 사람이라서, 사라지는 것을 문장으로 붙잡아두고 싶어 나는 쓰려 한다. 문학은 슬픔의 터널 끝에서 폐허가 아닌 ’그다음의 이상‘을 꿈꾸게 하니까. 절망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게 하는 힘(p.34)을 건네니까. 이 무모하고 아름다운 도약에 매료되어 쓰고 싶은 것이다. 삶이란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p.56)이며, 자신의 시간을 공간에 새기며 존재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p.165)이다. 글은 그 여정의 가장 정직한 기록이다.
나의 보잘것없는 글쓰기는 역시 매번 거울을 깨뜨리는 부끄러운 경험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도 나만의 사투를 이어간다. 나를 균열 내고 부수는 아픔 역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진짜 내가 되어가는 여정일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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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균열내기 #신유진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나를 균열내기. 신유진 지음. 한겨레출판. 2026. _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우선, 이 책을 가만히 읽으면서, 이 책을 지금보다 더 천천히 한 글자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후루룩 읽어내기에 무척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가볍지 않은 생각의 깊이가 느껴져 더욱 그랬을 수 있다. 각 문학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 본인에 대한 깊은 성찰이 밑바탕이 깔려 있다보니,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동시에 문학작품을 읽은 저자를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에세이를 읽지, 하는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이 소설에서는 대단한 영웅은 존재하지 않지만, 끝까지 자신이 맡을 일을 해내는 인물들이 있다. 거대한 혁명적 제스처가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세계가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그 침묵에 굴복하지 않으며, 부조리를 없앨 수 없지만, 그 조건 속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살기를 택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카뮈가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30쪽) 어찌보면 각 작품들이 담아내고 있던,그리고 그 작품의 작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사상과 철학, 사고와 질문을 소개하고 있는 듯도 싶지만, 사실 그런 소개를 통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문장들의 나열이 우리가 잊고 살아가기 쉬운 소중한 감정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이 갖는 의미와 가치, 그 속에서 나와 문학 간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한 과정이 이 책 곳곳에서 보이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문학과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직접 작품과 그 작품 작가의 삶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려는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저자의 마음을 따라가기만해도 각 문학작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몰리나르가 그랬듯이 악몽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그 꿈속에서 무언가를 길어올릴 수 있다면, 이미 나는 그 악몽에서 벗어난 것이리라.그서기 위해서는 공포와 매혹을 온전히 수락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나를 통과하여, 또 나와 한 몸이 되어 어떤 '있음'을 증명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본성과 싸워 이기는 일이 쓰는자의 몫이니까. 어째서 이러한 수고가 필요한지를 묻는다면, 몰리나르의 말로 다를 대신하겠다. 다만, 내가 되기 위해. '나'를 향한 과정과 방향이 온전히 각 작품들을 통과하며 나오는 결론이어서 좋았다. 마치 나도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 파리의 어느 한 골목에서 이 작품들을 하나씩 만나게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 나라를 걸으며 경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분명 각 문학작품에 대한 이야기이고 또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생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색다른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천천히, 이 책을 음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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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 번역가이자 작가인 신유진의 <나를 균열내기>는 자신과 타자의 삶에서 발견하는 '균열'을 통해 고정된 자아를 ‘해체’하고 ‘유예’의 시간을 거쳐 자아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열 여섯명의 작가를 만난다. 이 작가들이 관찰한 균열-해체-유예-재구성의 지점을 신유진 작가가 짚어낸다. 개인적으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대한 에세이가 인상적이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가 이민자로서 프랑스어를 '적어(敵語)'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생존을 위해 프랑스어를 배우고 쓸수록 모국어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적의 언어'라고 한다. 작년에 이 책을 처음 읽고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이렇게 간결하게 썼다는 점이 놀라웠는데 그 이유가 <나를 균열내기> 이 책에 써있었다. “그는 한 번도 적어에 복종한 적이 없다.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정복한 것도 아니다. 끝까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는 못했으니까. 대신 그는 그 불완전한 언어를 감추지 않고 썼다. 그의 문장은 짧고 묘사는 부연 없이 간결하다. 복잡한 감정 표현도 생략되고 좁은 어휘로 이루어진 단순한 문장들이 이어진다.(p.70)”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썼기 때문이었구나, 라는 점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꽤 벽돌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이 잔인하고 긴 소설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마음에서 일어났을, 균열과 붕괴, 유예, 재구성의 과정이 스쳐지나간다. 이 책의 완성이, 작가에게 ‘다만, 새로운 자신이 되기 위해’ 어떤 의미였을지 회상하게 되는 독서시간이었다. 또,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는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받아 관심있던 책이었다. 모로코 출신의 이 작가에 대해 <나는 불을 가져가리라>의 책과 연관하여 프로메테우스의 불씨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리마니의 불은 세계의 어둠을 가차 없이 비추고, 그 안에는 솔직한 만큼 폭력적인 진실이 있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문명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준 이중적 선물이었듯, 슬리마니의 불도 다르지 않다. 진실과 고통은 언제나 함께한다. 그러니 마지막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이 불을 가져가겠는가.(p.131)” 진실과 고통이 수반하는 이 불에 대해 생각해본다. “몰리나르가 그랬듯이(...)다만, 내가 되기 위해.(p.199)” 이 불을 선택한 이 책 속 열 여섯명의 작가들과 이들의 작품을 번역해온 신유진 작가를 통해 나 자신을 균열낼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웠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불을 내 손에 쥘지 선택하는 것 뿐이다. 이 책은 ‘읽고 싶다’는 마음을 부풀려주는 풍선 같은 책이다. 작가가 한 명씩, 한 명씩 호명하여 통찰하고 마지막페이지에 그 작가만이 가진 통찰을 짚어주며 마무리하는 부분마다 당장 ‘읽고 싶다’라는 마음의 풍선이 점점 더 커진다. #나를균열내기#하니포터#하니포터12기#한겨레출판#신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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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떠날 수 없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숨 쉬는 것뿐이다. 숨을 내뱉는다. 지금 내가 뱉어내야 하는 것은 숨만이 아니다. 그 숨을 꼭 쥐고 있으려 하는 '나'라는 자아, 그것을 함께 비워야 한다. 내 안에서 내가 천천히 빠져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텅 빈 나는 폐허가 아니다. 모든 것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투명한 방'이다. 51" 이상한 책이다. 평소에 생각이 많은 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따져보니 진짜 생각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동안 해왔던 생각들은 지금 이렇게 가벼운 것들, 그날 밥은 무엇을 먹을지, 미리 준비해두어야 할 것은 없는지,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누가 보고 싶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은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조금 먼 미래에는 이런 점을 고치고 더 먼 미래에는 어떤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깊지는 않다. 그런데 '나를 균열내기' 속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이런 생각들을 평소에도 하면서 살고 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달랐다. 그동안 내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던 것들은 대부분 잡생각이고, 뭔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고의 흐름에 붙여야 했구나 싶었다. 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까, 마치 내일 점심은 뭘 먹을까 같은 생각은 좀처럼 해본 적도 없을 것처럼 멋있게. '나를 균열내기' 안에서 어떤 사람과는 부엌에서 마주하고 마르그리트 뒤라스, 누군가와는 옷장을 뒤져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하고 프랑수와즈 사강, 함께 외국어를 배우기도 아고타 크리스토프, 집도 나가고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도 되고 다니엘 페나크, 지금도 좀 더 책의 매력을 잘 살리는 '전략'적 글쓰기를 염두에 두게 되기도 밀란 쿤데라, 연극을 관람하고 장 뤽 라가르스, 사강과 함께 어질렀던 집 안을 둘러보며 정리하기도 하고 조르주 페렉, 내가 왜 그녀 대신 그라고 쓰기를 하고 있는지 설명해주기도 하고 엘렌 식수, 얼마 전 읽었던 바바라 몰리나르의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를 다시 찾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왜 이렇게 늘어놓냐면, 이 중에 당신의 마음을 흔들 주제나 이름이 분명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이 만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왜 사강을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모어를 두번은 적어(외국어 64)를, 말을 가르치는 곳에서 일을 했던 경험 탓인지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통해 들여다 본 언어가 인상적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모어는 미성년을 대상으로 했고, 적어 분야는 성인이 대상이었다. 재밌게도 미성년들은 모르는 모어의 단어를 적어를 이용해 물어보는 일이 잦았는데, 물론 모어를 통해 문학적 감각을 배우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네들에게 있어 내가 규정하는 모어와 적어의 경계나 구분이 매우 흐릿해져 있었다. 프랑스어를 배운지 20년이 넘은 저자가 그럼에도 적어가 자연스럽지 않고, 그 기간만큼 모어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있음을 고백할 때(65)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모어와 적어를 그들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동시에 쌓아가던 잘 교육받은 아이들은 어느 한 곳에 속한다는 감각을 느낄까? 그 안에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상처없이 확신된 존재의 증거가 될까? 잘 돌보아지는/교육받은/만들어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다보니 '돌봄'과 내 안의 불씨에 대해 화두를 던졌던 레일라 슬리마니(123)의 질문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내 안의 불씨를 확인하기 위한 체크리스트 132]의 질문들을 들여다보면 생각에도 말문이 막히는 순간들이 온다. 내가 외면한 것들, 미적지근한 삶의 온도는 타인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이만하면 됐다'는 태업을 미필적 고의로 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개를 돌렸던 자리에는 양심이 죄책감과 뒤엉켜 부채를 쌓아두고 있었다. 더불어 언제나 어려운 이해보다 쉬운 비난이 가깝도록, 사건의 한 면만을 보는 일에 익숙해진 시선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는 점이 불편하게 다가오는만큼 매혹적으로 느껴져 <달콤한 노래>에 대한 궁금함이 커졌다. <달콤한 노래> 안의 루이즈가 품은 두려움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일원이 아니라 언제든 같아 끼울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125)"이다. 마치 무대 위에 오른 배우가 "마지막 대사를 내뱉고 나면, 온 마음을 다해 연기한 인물이, 그의 세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싶(136)"어지는 것처럼, 루이즈도 자신이 이 가정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이 교체/삭제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단적으로 방어한다. 이은경의 <어른이 되는 법>에 "어른다운 관계 형성은 상대방이 너무 멀어지면 버림받을까 봐 두렵고 상대방이 너무 가까워지면 빠져들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어도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관계에 헌신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언뜻 보기에는 이런 두려움이 상대방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 같지만 사실 이런 두려움은 망상이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것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우리를 자극한다." 는 내용이 있다. 루이즈가 품은 두려움 중에는 극복되지 못한 상처도 섞여있었으리라. " 막을 쓰고, 나를 접어두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 나에 대한 평가, 물론 그런 것들도 두렵지만 내가 진짜 두려운 건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얼마큼 울퉁불퉁하고 모난 사람인지 스스로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한다. 6" 저자에게 있어 생각은 스스로를 균열내는 자극의 과정이었다. 이 균열은 낡은 의식을 벗어내 새 의식의 몸으로 다시 성장하는 탈피와 같다. 타인의 내면에서 퍼올린 조각들이 단단히 다져진 것을 보고 자신을 돌이켜보니 그동안 성숙된 사고를 위해 내면을 닦기는 커녕 몸의 살을 찌우려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았던 셈이라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에서 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 길을 좇다보니 거기엔 먼저 자신이 있었다. 나를 알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지 익숙하지 못해 어색한 시작에 따라해보기라도 하고 싶어서 저자는 그동안 스스로와 어떤 식으로 마주했을까 궁금해졌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만나는 과정이 자신을 마주하기 위한 것과 다르지 않았겠구나 싶었다. 깊게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따라해보고 싶은 나를 균열내는, 균열내보자는 신호였다. >>>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게시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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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를 읽는 순간부터 이 책에 빠져들었다. 한 단어, 한 문장을 곱씹으며 오래 마음에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도, 그것을 내 안에 남기는 일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매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더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을 동시에 샘솟게 했다. 『나를 균열 내기』라는 제목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내가 아닌, 본연의 나를 마주하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책 속에서 저자는 여러 문학가를 만나고, 그들의 작품과 삶을 탐색한다. 그러나 결국 그 여정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문학가들의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 역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책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막’이라는 표현이었다. 저자는 자신에게도 매끄러워 보이는 막이 있다고 말한다. 무던하고 모난 곳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울퉁불퉁한 삶을 감추기 위해 뒤집어쓴 막. 뾰족한 자신을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모서리를 접고 또 접다 보니, 오래 접힌 곳은 잘려 나간 것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이 깊이 와닿았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의 나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매끄럽고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자신을 다듬고 감추며 살아왔다. 이 책에서의 균열 앞에서도 나는 나의 매끄러운 막을 걷어낼 용기가 없다. 아마 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게 진정 매끄러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타인을 선망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욕망한다.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가. 접어둔 모서리를 펼치면 어떤 모습이 드러나겠느냐는 질문을 따라가기로 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H에 관한 이야기였다. H는 두 개의 I와 그 사이를 잇는 하나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그것을 내 안에 깊숙이 가둬둔 언어와 그것을 깨부수고 꺼내는 또 다른 언어, 그리고 그 둘을 격렬하게 이어주는 글쓰기로 해석한다. 이 책에서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이나 표현이 아니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내려가는 과정이며, 침묵 속에 묻어둔 언어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행위다. “내려가 봐야 한다. 그래야 그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또 무엇을 부수고 올라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흔히 성장이나 변화가 위로 올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먼저 내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 안의 심연과 마주하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과 두려움을 들여다보고, 감추어둔 것들을 발견해야만 비로소 새로운 자신으로 올라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균열 또한 괜찮다는 위로를 받았다. 나를 숨기고 접어두었던 시간마저도 나의 일부이며, 언젠가 그 모서리를 다시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었다. 또한 이 책은 문학이 정답을 주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일임을 보여준다. 설명되지 않는 죽음과 고통,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 앞에서 문학은 대신 답해주지 않는다. 다만 너무 쉽게 잊히고 사라지지 않도록 질문을 던진다. 기억하지 않는 것은 사라지고, 없던 일처럼 살아가다 보면 정말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는 문장이 오래 남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학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 역시 균열 내기의 한 과정일 것이다. 저마다의 비극과 심연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작품을 읽고도 서로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문학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이 단순한 자극의 언어로 소비되는 시대에, 이 책은 오히려 자신 안의 낯선 곳으로 향하는 새로움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책이 균열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미 균열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저자가 문학가들의 언어를 통해 자신을 마주했듯, 독자 역시 책을 통해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 책 속의 누군가가 저자의 H가 됐던 것처럼, 저자의 글은 또 다른 누군가의 H가 된다.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통해 연결된다. 결국 글을 읽고 쓰는 일은 서로의 H가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H가 되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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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신유진 #나를균열내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줄곧 '읽는 사람'으로 살아오며 수없이 맞닥뜨린(이라기보단 시도때도 없이 처해졌던) 물음 중 독보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왜 읽는가', 그리고, '읽기는 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일 것이다. 한때는 이 물음에, 완전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바닥까지 파헤쳐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삼켜버리고 싶었으므로 읽었다.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을 메워 완벽에 닿기 위해. 읽을수록, 채울수록 더 많은 '모름'을 보았다. 그럼에도 탐욕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읽기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득, 멈춰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아니었을까. 위험만큼 존재를 선명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21)."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고 공고히 하는 읽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높고 깊은 벽을 부숴 그 너머의 타자를, 절대적인 낯섦을, 존재한 적 없는 선-존재를 보게 하는 읽기야말로 나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고. p.7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잇는 이들과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우리'라는 주어를 망설임 없이 쓴다. 우리는 진실을 향해 한 칸씩 내려가는 사람들. 끝없이 내려가 저 밑바닥에 닿아 마침내 진실을 둘러싼 막을 마주한 사람들. 자기 안에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무언가로 그 막을 부수려는 사람들. 우리들, 나는 내가 통과한 책들을 통해서만 나의 '우리'를 만난다. 책 속에 그리고 책 너머의 당신들을. p.89 〈다니엘 페나크〉 인간은 무엇보다 몸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도 없다. (...)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몸의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 아닐까.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말했다. 인간은 세계를 생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사는 존재라고. 어느 정도는, 위험해지려고, 더 모르고, 낯설어지고, 실패하려고 읽는다고. 이상적인 전능은 곧 무능이다. 조금의 모자람도 돌이킬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완전-세계는 곧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고, 변할 수 없으며, 어디로도 확장되고 이동하고 파고들 수 없는 고립이다. 나를 균열낸다. 쓰기는 나를 배신한다. 말과 글은 필연히 미끄러지고 '본질'에 명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빗나감이고, 철회-됨이자, 뒤처짐일 것이다. '나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내쳐진 적은 없다 하더라도. 이 빈 틈, 한계, 균열, 빗나갈 겨냥과 주소 잃은 서신이다. 쓸모랄지, 가치랄지, 문학에 일말의 증명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이 불완전함이다. 그것은 필연히 인간성의 문제로 직결된다. 한강은 물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야기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사람이 이야기가 된 장소, 사람,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있고 배가 고파오는, 허기를 느끼고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그렇게 먹는다는 것엔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고(85). p.6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를 둘러싸던 맥락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후에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망명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 말은 언제나 늦고, 감정은 반토막이 난 채 전달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면, 말로 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일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p.117 〈밀란 쿤데라〉 "매일 개연성 없는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 소설은 그저 모든 판단과 결론을 미뤄둘 수 있는 유예의 장소를 허락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존재에 대한 실험을 감행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진실이나 진리의 엄격한 잣대에 주눅 들지 않고 삶의 하찮음을 말할 수 있다.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를 말하는 일. 소설가는 내게 소설의 쓸모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세상은 다정스레 말한다.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하라'고(97). 그렇다. 읽기는, 쓰기는 언제나 현실에 조금 뒤처지고 벗어나, 적어도 그 당시에 살아 있는 몸과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너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말과 글로 남겨 전할 수 있다면, 적어도 '목격한 일'에 파괴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몸이고, 정신이고, 이유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갖지 못한 존엄과 특권이 아니라 오로지 책무와 우연, 생존 그 자체와 증언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말로, 기억으로, 몸짓과 문장으로 전해지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처럼. 무엇이지 않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 p.100 〈가엘 파유〉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가엘 파유의 말이다. 소설이 사라진 장소, 사라진 사람, 사라진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을까. p.151 〈카멜 다우드〉 어떤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이야기는 고통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문학의 몫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질문할 뿐이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폭력,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신과 예술, 그 무엇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오롯이 인간이 해결할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어쩌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가기 위해 다시-쓰고 토해내어야만 하는 글이,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이, 쓰기가, 읽기가 고발과 목격의 반복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을 도구에 한정짓는 것만큼 문학-하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오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 모두 지금 여기의 나에서 조금 떨어진 혹은 떨어져 보려는 태도다. 듣기와 다르지 않다. 한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방식이 곧 문학이라면, 읽기와 쓰기는 그를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방식이 아니겠는가.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의 혼란한 뒤섞임은 결국 이 말을 하기위함이었다. 읽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고, 그것이 곧 삶이자 이유라고. 해석될 수 없는 고통과흔적을 켜켜이 쌓아 파괴하고 또 공존하기 위함이라고. 이제는 물을 수 있다. 무엇이 당신을 균열-하겠습니까.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 p.166 〈조르주 페렉〉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 p.197 〈바바라 몰리나르〉 어째서 몰리나르는 이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고집했을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다. 존재를 지우려는 의심과 불안, 두려움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글쓰기, 이보다 더 필사적인 저항이 또 있을까. 그러니 나는 이 찢어짐까지가 몰리나르의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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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한국에서 가장 많이 번역한 프랑스 문학 번역가이자 소설과 산문을 발표하기도 한 작가 신유진의 신작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장 그르니에, 아니 에르노, 밀란 쿤데라, 조르주 페렉, 엘렌 식수 등 프랑스 작가들의 문장과 삶을 따라가며 근사한 사유가 펼쳐진다. 글을 쓸 때마다 갇힌 것과 깨부수는 장면을 동시에 상상한다는 저자는 접힌 모서리를 펼치고, 매끄러운 막 아래 숨은 자신을 꺼내면 어떤 내가 나올까 생각하며 이 책을 썼다. 작가의 책을 펼치고, 그와 함께 그의 근원지로 내려가면서 그곳에서 나의 진짜 기억과 마주하고, 나의 수치심을 넘어 타인의 수치심을 만났던 기억이 이 책을 쓰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날카롭게 갈린 언어로 표면의 막을 내리찍어 부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도록. 작가와 작품은 완전히 별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삶을 통해 그 작품을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작품이 허구의 창작물이라 해도, 분명 작가의 삶에서부터 묻어 나오는 부분이 있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작가의 흔적을 따라 그가 태어난 곳부터 살았던 장소들을 찾아가보기도 하면서 실제 그 곳을 느끼고 경험하려고 하는 것일테고 말이다.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제 장소가 아니라, 작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글쓰기의 근원이자 기억의 장소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도 흥미로웠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조건들이 다르게 마련이고, 그것이 어떻게 작용해 문학 작품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따라가 보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한 사람이 끝내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부수고 다시 세울 수 있는지 함께 탐색해보는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뒤라스 사후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레시피를 모아서 출간한 책 <마르그리트의 요리>에 대한 글 뒤에는 뒤라스의 파 수프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고,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에서 태양이 한 역할에 대한 글 끝에는 태양의 성지를 찾아 떠나는 카뮈의 지중해 가이드가 담겨 있다.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의 삶을 오디세우스들의 서사로 풀어낸 글 뒤에는 오디세우스의 항해 일지가, 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를 그려낸 글 뒤에는 다니엘 페나크의 몸 번역 노트와 번역가를 위한 몇 가지 조언이 담겨 있다. 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이루는 저변에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단서들을 찾아내 글로 풀어내고 있어 너무 흥미롭게 읽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는 파 수프가, 아니 에르노에게는 오디세우스의 서사가, 알베르 카뮈에게는 이방인이, 조르주 페렉에게는 장소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는 적어가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어떤 작품을 읽을 때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있는 이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근원지를 찾아 사다리를 타고 깊숙이 내려간다. 뒤라스의 눈으로 여자와 바다를 보자면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반복의 중독이 있고, 카뮈의 부조리는 눈을 멀게 하는 빛과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라는 몸의 감각에서 태어났다. 사강의 사진은 대체로 드레스를 입은 파티걸의 모습이지만, 진짜 좋아했던 것은 미니 블랙 드레스가 아니라 포근한 스웨터라는 사실에서 스웨터는 나 자신과 타자를 감쌀 만큼 온기를 가진 문학적인 옷이 된다. 한 번도 모방과 흉내 내기를 하지 않으며 적어에 복종한 적이 없었던 ㅏ고타 크리스토프의 고집스러운 싸움을 알게 되면 그의 작품 속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그렇게 문학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 다시 나에게로 당도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작가와 문학을 읽어내는 가장 독창적인 방식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