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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휘와 톡휘와 달휘. 우리말 우리글엔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둘러봐도 분명 없다. 처음 들어본 소리요, 처음 읽어본 글자다. 아니 우리말 우리글엔 없었다. 김영승 시인의 광대한 상상력은 표준국어대사전을 바꿀 기세다. 물론 시인에 의해 이젠 과거가 되었으며, 처음 들어본 소리로 다시 태어나는 세계를 맛보게 한다. 물론 낯설게 만난 시집 제목은 시인의 대상을 향한 애정 어린 명명법일 터. 우리가 가장 흔하게 만나는 존재, 더구나 아주 귀찮기까지 한, 만만한 존재 ‘파리’를 발음상 보석 같다는 이유로 ‘팔휘’라 부르다니. 물론 그런 이유로 토끼는 ‘톡휘’가 되고, 다리는 ‘달휘’가 된다.
나는 대추나무 가시 끝으로/ 살구꽃을 본다 나는 현재/ 몸이 아프지만 괜찮다고// 이 아침/ 하늘은 쏟아져 내리지만// 살구야// 나는 한번 불러보았다 <흐린 날 살구꽃> 전문
어쩔 수 없이 시인도 겪어내야 하는 육체의 쇠락과 노화의 감각이 흐린 날 살구꽃을 한번 불러보게 한다. 슬프기도 하고 짠한 마음도 들지만, 어쩌랴, 그게 사는 것임을. 시인은 그렇다고 귀띔한다. 시 한 편에 다 스며들어 있다. 기쁜 일은 시인의 시집《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가 2026 박인환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거다. “정통 문법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를 구성하는 무수한 대극 (對極)의 구조를 시의 행간과 모서리에 깃들게 하는 놀라운 미학적 혁신을 보여준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비가 오니/ 먼 데가 없어서 좋구나// 가까운 데가 없어서 좋구나// 먼 데도/ 가까운 데도/ 없어서 좋구나// 먼 데는 어디고/ 가까운 데는 또/ 어딘가 비가 오니// 하늘도 멀거나/ 가깝고/ 땅도 그렇다 하늘에서// 그 밑에 앉아/ 비를 피하는/사람들은// 머윗잎에건/ 호박잎에건// <비가 오니> 전문
투명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풍경에는 우리들의 삶에 놓여 있는 선과 악이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많은 대비를 둔 채, 단순히 극명히 드러내는 걸 넘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깨달음을 추구하는가 싶다. 분명 시도 나이 든 만큼 성숙 해가는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만만한 게 파리라/ 파리를 기중(其中) 가장 많이 잡았으니/ 팔휘// 그냥/ 그렇게 한번 발음해 본다// 팔휘 하니까 어쩐지……/ 발음상 보석 같지 않은가 팔휘// 쥐도/ 토끼도 마찬가지// 톡휘// 다리도/ 달휘……// (중략) 파리에/ 뒤집어씌워진 그 모든/ 관념과 이미지의 층층/ 그 난공불락의 지층을 걷어내고/ 구각(舊殼)을 탈피하고/ 그냥 파리로// 오늘/ 이 비 오는 날// 파리는 이제 나에 의해서는/ 팔휘로/ 새로 태어났다 그 명명이/ 신생이며/ 영생이다 팔휘는// (중략) <팔휘> 중에서
용한 무당처럼 뱉어내는 주술적 언어의 공감각적인 배치는, 입으로 가만히 낭송해 보면 그 분산되는 발음이 마치 화음 같기도 하다.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 이 희한한 발음 끝에서 만나는 우리 말의, 우리 글의 위엄이라니. 또한 시인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어야만, 시를, 시의 세계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음이라니. 이런 이유로 박인환상 심사위원단은 <파리 팔휘 토끼 톡휘 다리 달휘>에 대해 “대극의 구조 속에서 신성과 세속, 존재와 존재자, 거시와 미시, 전통과 혁신, 역사적 삶과 나날의 삶이 그침 없는 변화를 이루면서 우주적 차원의 길항 운동을 거듭한다”며 “이 시집이 새롭게 구축한 대극의 무수한 길항 운동과 강유상추(剛柔相推)의 우주적 리듬은 시의 전통적 본질과 혁신적 첨단을 동시에 가로지르면서, 그것 전체에 스민 존재론적 통섭 운동을 완결 짓는 빼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시집의 즐거움은 시집 뒤편에 실은 산문 한 편이다. <반가사유상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과 오니기리와 회전 낙법과 피겨스케이팅과 바람과 별과 시와 꽃>이라는 장강처럼 도도하게, 길게 흐르는 제목을 가진 산문이다. 물론 시인의 내적 고백이라서 그의 시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동무다.
4 ……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이리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총체가 나이리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리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시이리라. ……
이 4쪽의 산문만 읽어도 시인이 얼마나 시를 사랑하는 시인이었는지 알 수 있겠다. 다른 것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나 그 다른 것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나는 시인이리라.
11 산책은, 걷기는 발로 하는 필사, 발로 하는 침례, 대지에 몸을 담그는 전신 침례, 거리로, 우리 동네 승기천변으로, 산으로, 우리 동네 봉재산, 청량산 으로 계속 걸었다.
그렇다. 시인은 아마 죽을 때까지도 산책을 할 것이다. 걷는 필사를 이행할 것이다. 삶이 사는 일이 그러하므로. 그러니 걸을 때마다 살아가는 희망이 따라 걷는다. 그러니 잠깐 웃을 수도 있어서 행복하다.
<뒷이야기> 표지 그림은 시인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그린 자화상이란다. 그래서일까, 산문의 내용과 이어지며 시집 전체와 연결성을 엿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