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들려줄까』는 읽으면서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싶었던 책이다. 어렵기도 했고, 내가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을 자꾸 불편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픔을 대체로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장애가 있으면 그것을 극복하거나 적응해야 하고, 힘든 사람에게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생산적이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기준이 너무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당연함’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요하나 헤드바는 자신의 만성질환과 장애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고통받는 몸이 왜 사회에서 끊임없이 설명되고 교정되고 관리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특히 장애와 질병을 단순히 개인의 불행으로 보지 않고, 비장애를 정상으로 만들어놓은 사회의 구조와 자본주의의 생산성 논리까지 연결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읽으면서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우리는 아픈 사람에게 너무 쉽게 “빨리 나아”라고 말한다. ‘쾌차하세요’라는 말도 너무 자연스럽게 건넨다. 물론 선의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히 더 좋은 상태라는 전제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전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계속해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생산성’에 대한 생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할 수 있는 몸, 빠르게 움직이는 몸,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몸이 좋은 몸처럼 여겨진다. 반대로 쉬어야 하는 몸, 돌봄이 필요한 몸, 아픈 몸은 쉽게 뒤처진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아프거나 늙거나 장애를 갖게 된 순간 삶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처럼 여기는 사회라면, 결국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지금 건강한 사람도 언젠가는 아플 수 있고, 나이가 들면 몸의 기능이 달라진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결국 모두 ‘언제 죽을지’를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장애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결국 우리 모두의 몸과 삶에 관한 책처럼 느껴졌다. 나는 특히 ‘몸은 내가 원하는 대로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허약한 믿음인지 생각하게 됐다. 지금의 몸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지만 몸은 계속 변하고, 어느 순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멈춰 세울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달라진 몸과 달라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읽기 편한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하고, 때로는 너무 날카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정상’, ‘건강’, ‘생산성’, ‘독립’이라는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으니까. 결국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다. 누군가를 돌보기도 하고 돌봄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약한 몸을 가진 사람을 예외적인 존재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젠가 경험하게 될 삶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들려줄까』는 나에게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건강하고, 독립적이고, 생산적인 삶만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는 아프고 늙고 약해지는 순간마다 자기 삶을 실패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삶이란 애초에 그렇게 완벽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닐 테니까. 아픈 몸도 삶이고, 느려진 몸도 삶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삶도 삶이다. 그리고 어쩌면 죽음까지 포함해서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삶을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