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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이 책을 개정판 전 읽었다. 사실 개정판이 나오고 우리 대한민국도 유시민 작가도 많이 바뀌었다. 유시민 작가를 좋아한다. 집에 유시민 작가의 거의 모든 책이 있고, 돌베개에서 나온 역사의 역사, 국가란 무엇인가, 후불제 민주주의, 대한민국 개조론,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등 모두 가지고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유시민빠였다. 하지만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 사태를 기점으로 유시민빠는 아니게 됐다. 하지만 작가 유시민은 아직도 좋아한다. 썰전까지 하고 그의 말대로 정치는 정말 은퇴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아쉽다. 물론 이 역시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간다. 그의 최근 정치적 발언 등을 탓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언젠가 어디 대학에서 그가 한 강연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너무 싫고 힘들었다고 한다. 향후 다시 그러한 상황이 오면 이제는 자신의 진영에서 그를 무한으로 믿고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유시민은 결국 자신이 한 말을 지킨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별로 탓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른 많은 그 진영의 사람들에게는 실망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책의 리뷰는 이전 리뷰에 추가된 내용 일부만 더 싣는 수준으로 마무리한다.
이 책은 이전의 1959년에서 2014년까지 그가 살아온 세월동안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 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세월호 사건, 촛불혁명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문재인 대통령 집권 그리고 그 이후의 정치적 상황을 담고 있다. 사실 가독성 자체, 책으로 읽고 싶은 느낌은 이전판이 더욱 좋다. 이번판은 뭔가 조금 더 읽기 좋아지지 않은 듯하다. 이 역시 내 개인적 생각이다.
내가 이 책의 개정증보판을 다시 사게 된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 유시민은 여전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유시민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쉽게 읽히는 문장이면서도 문장속에서 해박함을 한 없이 뽐내는 그의 글을 좋아하고, 둘째로, 인간 유시민이 살아온 과정이 독재에 저항하고, 노무현 정부에서 보여준 실천, 그의 이후 행보에서도 모두 사람 자체를 생각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많은 유시민 작가의 저작 중에서도 이 책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개정판을 읽고 싶었다. 나 또한 1980년대 초반부터(물론 너무 어려서 이 시기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88년 올림픽부터 2014년까지 26년은 그와 함께 시대를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2014년 7월에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는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극심한 반목을 보이는 2019년의 대한민국의 오늘 다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 꺼내들었다.
1959년 7월 하순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난 저자는 역사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떄부터 이순신, 제갈공명, 김유신, 나폴레옹 등 뛰어난 역사 인물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걸출한 개인은 흠모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출세라는 것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했고, 대한민국 최고 대학을 거쳐 정부와 싸우는 일을 하며,복역했고 '유시민 항소이유서'라는 시대의 명문을 남기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30대 형식적 민주주의로 이양된 정부를 뒤로 한채 독일에서 경제학을 다시 공부했고, 40대는 칼럼니스트, 시사방송 진행자 등으로 있다가 그 화려한 언변을 속이지 못하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했으니 출세를 해서 공부하겠다는 꿈은 이뤘을 수도 있다. 전원책 변호사가 썰전에서 우스갯소리로 매번 유판서, 유판서(판서가 지금의 장관급과 유사한 계급 체계이므로)했으니 말이다. 경기도지사 낙선을 계기로 50대는 전업작가, 방송인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내가 작가의 이력을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 한 것은 작가의 삶이 곧 우리 역사의 일부분으로 한 복판에서 치열하게 투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14년의 어지러운 정국도 담고 있다. 이 책을 쓴 이유가 박근혜 정권에서 '뉴라이트 한국사"가 일으킨 역사 논쟁은 매우 감정적이고, 정치적이었다고 평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논쟁이지만, 이 속에는 치열한 정신적,정치적 전쟁이었다.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가 왜 주관적이냐? 지극히 사실 아니냐고 반문 할 수 있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 2019년 오늘날 문재인 정부를 바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한겨레 신문은 같은 사건임에도 전혀 다르게 사실을 바라본다. 한 때 유행했던 시리즈다. 대통령 노무현이 그냥 자장면이 참 맛있다고 발언한 사실에 보수 언론이 노무현 대통령 짜장면만 맛있다고 했다고 하면써 그 진의를 풍자하고 비판한 만화였다.
설사 그 시공간에 함께 있었더라도 자신의 사관이, 주관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하는 것과 그 속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가치 있다고 판단 한 것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고구려의 행위가 민족적 배신이었거나, 고려 시대의 여진 토벌과 동북 9성이 나은 결과 등이 신라의 권력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고, 또는 고려의 소수민족 탄압이라고 의문을 제기하지도, 그렇게 이슈가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문제가 나오면 본인이 살아있기도 하거니와 그 후손, 그와 관련된 당시의 정권의 실세, 사람 등이 모두 소환되서 나오기 때문에 당연히 치열한 다툼이 될 수 밖에 없고, 누군가는 다칠 수 밖에 없다.
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닌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자신의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 역사에서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한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 나는 이 권리를 소신껏 행사했다.
우리 모두는 1959년부터 2019년 오늘까지 60년의 세월을 자랑스러워 하고,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그것이 오로지 빛나는 역사라서가 아니다. 모든 역사는 명암이 있다. 이 명암을 감안해서 우리의 60년을 평가한다면 자부심을 충분히 느껴도 좋다. 1959년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최빈국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세계 7,8위를 다투는 무역강국에 반도체, 조선, 스마트폰에서 세계 1위를 질주하는 산업강국이다. 일제가 그야말로 사람을 뒤집어서 주머니에 있는 먼지 한톨까지 다 털어갔는데다가 3년간의 내전으로 사람은 물론 온 국토가 전쟁의 폐허가 됐는데도 우리는 기적을 만들었다. 독재정권에서 이제는 정권이 그때그때 바뀌고, 심지어 살아있는 권력을 촛불로 바꿔버린 민주적 절차도 갖추고 있다. 1959년 100만명이 태어나는 전후 베이비 붐 시대에 유시민 작가는 태어났다. 당시 우리는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4.19와 5.16이라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처럼 전혀 시대를 다르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역사도 있었다.
우리 현대사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왜 자매가 아니고 하필 형제냐고, 이것도 성차별이 아니냐고 하진 마시라. 자매보다는 형제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경우가 더 흔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4·19보다는 5·16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은 4·19를 좋아하고 5·16을 미워한다. 둘 모두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5·16을 거치면서 무려 18년이나 독재를 한 박정희 정권이 탄생한다. 유시민 작가 시대에 태어난 평범한 우리 국민은 아마 대통령은 박정희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거의 반 왕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함께 추진해 볼 기회를 자기 손으로 봉쇄했다. 물런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실패했을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독재적인 방법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다양하게 해석하고 평가 받을 수 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을 지니고 산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철학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지며, 경험까지 다르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한국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오늘 다녀온 강남처럼 벼략같은 성장 뒤에 '졸부'와 '극빈자'가 동시에 많이 형성된다. 그 강남의 발전을 재수 좋아서 우연히 겪었든, 또는 정권의 일부로 정보를 알아 부자가 되었든 그 갑작스런 부의 독점이 가져온 오늘날 그 아픔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굳건하고 강하게 만들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모든 면에서 유신체제의 불필요한 연장이었다. 당시에는 국제 경제 환경이 무척 좋았던 탓에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그 변화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기는 '3저 호황'의 시기였다. 낮은 달러 가치, 낮은 국제유가, 낮은 국제금리라는 환경에서 한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 호황속에 가려져 국민 경제를 한 번 정도는 개선하고, 재점검하고 바꿔야 했던 우리는 그것을 게을리 해서 1998년 외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금모으기 운동 같은 우리 국민의 저력은 외환위기를 아주 빠르게 조기 졸업하고 다시 제 2의 도약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민주정부인 김대중,노무현 정권때 경제가 엉망이라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도 매우 안정적으로 그리고 산업의 발전이 비약적이었다.
다음으로 유시민 작가는 전공인 경제학보다 더 뛰어나게 잘 아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스스로 민주화를 위해 뛰었던 그 열정으로 민주화 부분에 한 Chapter를 할애해서 꽤 많이 자세하게 민주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설명한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 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안보(독재)국가에서 출발해 발전국가와 민주국가를 거쳐 복지국가로 나아간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보편적인 국가의 변화, 발전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과정을 매우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빠르게 변화하면서 보여준다. 다른 나라에서는 20~30년 또는 100년을 겪으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체계와 역사를 우리는 50년만에 압축 재현한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국가주의 문화양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보정부 막바지였던 2007년에야 정부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국기에 대한 맹세의 문구를 약간 바꾸었을 뿐이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국가주의적 표현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친헌법적 표현으로 수정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를 삭제한 것이다. 헌법상 주권자인 시민 개개인이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토록 지난한 일이다. 남북관계 70년도 돌아본다. 레드 콤플렉스와 그 연장선에서 이석기를 돌아본다. 간첩, Made in Korea에서 독재정권에서 정권의 안보와 유지를 위해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 공안정국을 만든 것을 이야기해 주는 부분은 주먹을 쥐게 만든다.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최초 폭로한 인물은 조갑제 기자였다. 그
아, 그 조갑제 기자가 처음에는 그러했다. 그러고보면 많은 민주주의 열사나 의식있던 노동운동가들이 변절한 것을 많이 보는데 그것은 체계의 잘못인가, 사람의 변심인가를 나는 아직 판단하지 못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경우가 많은지 분명 생각해 볼 일이다.
평화통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며 묵직한(두께의 묵직함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여러의미에서 오늘의 현재를 이야기한 작가의 아프고도 통렬한 이야기 때문) 책이 끝맺음을 한다. 에필로그로 초판에는 당시 가장 큰 사회적 이슈였던 세월호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로부터 6년여가 지난 정치적 상황과 자신이 왜 이 책을 써야 했는가를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70년의 짧다면 짧은 역사에서 전 세계가 보여주지 못한 압축 성장과 민주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 부분 분명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우리는 과거 반만년의 역사 동안 가장 국력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하면서 학력이 높고, 민주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압축성장의 부작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난다. 작가도 말했지만 산업화세력(보수세력)과 민주화세력(진보세력)의 극심한 이념 논쟁, 강남졸부, 재벌로 대표되는 압축 부자와 사회 극빈층, 남녀 갈등, 노동계와 고용주의 대립 등 많은 부분에서 분명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우리는 IMF 경제 식민지도 가장 빠르게 떨쳐냈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발전, 똑똑한 국민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리뷰에서 어설픈 해결책이나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그럴 지혜도, 그런 혜안도 없는 평범한 '시민'이니까.
나의 한국현대사 1959년-2020년은 우리의 아픈 현재사를 돌아보며 미래를 찾는 작업이다. 역사를 배우는 첫번째 목적은 과거에 이랬구나가 아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역사를 알지 못하고서 한 발자국도 미래로 나갈 수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과 욕망과 의지다. 더 좋은 미래를 원한다면 매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좋은 것을 쌓아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야 할 좋은 것의 목록에는 역사에 대한 공명도 있다.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 현대사의 갈피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 야망과 좌절, 희망과 성공, 번민과 헌신, 어리석은 악행과 억울한 죽음이 묻어 있다.
오늘의 하루하루 좋은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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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관련해서 책을 구입하려했는데 마침 개정판이 새로 나온걸보고 주문했습니다. 친필사인본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표지를 열어봤더니 인쇄물이 아닌 실제 작가 사인이 있어서 좋네요. 아쉬운건 구겨지고 지저분한 데가 있어서 양장본이었으면 더 좋았을것같네요. 잘 읽어볼게요. 아래는 책 소개글입니다 30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역사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지켜온 유시민의『나의 한국현대사』가 6년 만에 개정증보판으로 돌아왔다.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을 넘나들며 보고 겪고 느낀 점들을 기록하는 방식을 유지하되, 그간 더해진 시간의 자취를 담아 전면 새로 고쳐 썼다. 초판 출간 당시 주기적으로 데이터를 보완하고 축적된 사실을 되짚겠다던 약속을 지킨 첫 번째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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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 있다. 나는 이 권리를 소신껏 행사했다. 사실을 많이 담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잘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생각을 말하려고 노력했다. 과거를 회고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 - 서문 중에서> 유시민 이름을 보면 자동반사적으로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되는데..이번에도 역시나ㅎㅎ 즐겨보던 알릴레오 북스 13회 또한 작가로 만나는 유시민 이야기여서 즐거워하며 책을 열었어요 1959년 태어난 100만명 중의 한 사람인 본인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시기별로 터졌던 굵직한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먼저 정리하면서, 유시민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고 주장하는가의 방식으로 적어 나가고 있어요. 이전 책에 비해 5년이 늘어난 한국현대사.. 개정 증보판인데 예전 책의 큰 틀은 같고 그 이후 5년이 추가되었어요 제법 무거울 수도 있고 '위험할 수 있는' 한국현대사의 사건사고들을 유시민 개인의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작가 개인의 생각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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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과 ‘산업화세력’
모든 역사는 ‘주관적 기록’이다. 역사는 과거를 ‘실제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저마다 나름의 개성과 취향을 지니고 있어, 각기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비추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역사 서술의 핵심인 사실의 선택과 해석이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저자 유시민이 ‘나의 한국현대사’로 도서명을 정한 것은 이러한 역사의 주관적 해석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 주로 사실의 해석에 있어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의 한국현대사’는 유시민의 입장에서 한국현대사를 해석한다는 뜻이다. 또한 일반적인 역사서와 달리 역사의 현장에 유시민 자신이 직접 서 있다.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겪은 현장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도서명이 ‘나의 한국현대사’인 또 다른 이유이다. 이 책의 역사가 1959년부터 시작하는 것도 유시민이 태어난 해가 1959년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제16·17대 국회의원과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 유시민은 <유시민의 알릴레오> 방송을 통해 진보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지만. 유시민의 책을 읽으면 역시 유시민은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온건함이 묻어난다. 유시민이 이 책의 초판을 발행했을 때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애쓴 노력이 엿보인다는 평을 듣고 뿌듯해 했다는 데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학생운동가 출신인 유시민은 진보 진영 쪽에 좀더 많은 점수를 주고 있다.
저자는 태어난 이듬해에 4·19를, 세 살에 5·16을 만났다. 저자는 4·19와 5·16을 외모와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른 이란성 쌍둥이라고 본다. 1960년 이후 우리의 역사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라 한다.
우리 사회는 크게 4·19 정신을 받들고자 하는 ‘민주화세력’과, 5·16으로 이룬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는 ‘산업화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산업화 세력’은 ‘근대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으로 불리지만 반대편에서는 ‘유신잔당’, ‘5공 잔재’, ‘특권세력’, ‘냉전세력’, ‘수구꼴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은 심하게 ‘적폐’라고 하며 청산의 대상이라고 비난한다. ‘민주화세력’은 ‘민주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진영으로부터 ‘빨갱이’, ‘아마추어’, ‘좌경용공’, ‘종북좌파’라고 비난받는다. 요즘은 ‘문빨’이라고도 한다. 1960년 이후의 시대는 바로 이 두 쌍둥이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갈등과 경쟁의 시대였다.
민족사적 정통성이 의심스럽고 경제적 효율성이 없으며 민주적 정당성을 훼손한 이승만 정부는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지 못했다. 역사의 대의명분을 바로잡고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려면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4·19가 일어났다.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4·19는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혁명이라 주장하지만 5·16은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 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한 쿠데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하고, 독재정권 타도를 외친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을 탄압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발전 초기에 자본이 부족한 기업이 이윤을 극대화하여 자본을 형성하도록 소비자와 노동자를 희생시켰다. 박정희 정부는 또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자본 마련을 위해 한일국교를 정상화하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으며, 독일에 광산노동자외 간호사를 파견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다. 정부는 이렇게 해서 마련한 자본을 기업에 특혜를 주면서까지 제공해서 정경유착의 부패구조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어쨌든 1977년 대한민국 기업들은 100억 달러 넘는 수출실적을 기록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를 넘어섰다. .박정희 정부는 18년의 집권 기간에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 산업사회로 바꿨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고 민둥산을 푸른 산으로 가꿨으며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하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1980년대 중반 한국경제는 ‘3저 호황’을 누렸다. 달러 가치와 국제유가와 금리가 모두 낮은 가운데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중국·동유럽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해 거대한 수출시장을 새로 열었다. 김영상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하고 공직자 재산등록제도를 실시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었다. 김영삼 정부는 냉전시대와 ‘자본주의 계획경제’를 ‘개방형 시장경제’로 전환하려고 외환 거래와 민간기업의 해외 차입 관련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그런데 한국은행의 통화관리 능력이 크게 위축되어 IMF 사태를 불러왔다.
1997년의 IMF는 일시적 유동성에 빠진 우량기업까지 무너지게 했으며, 주식가격이 바닥인 상태에서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해 막대한 국가자산의 손실을 입었다. 기업이 정리해고제를 도입하고 연봉제와 성과급 제도를 확산해 노동조합의 힘이 약해졌고 실질임금이 하락했으며 노동자들은 고용에 대한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무엇보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몰락으로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져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경제위기의 불길을 잡은 데 이어 노무현 정부는 한국경제를 다시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10년의 진보정부 시대에 우리 사회는 양극화의 골짜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정부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형성한 사실을 인정하고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경제 시스템을 수정했고,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복지정책을 확대하고 사회안전망을 강화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부자감세, 부동산 거래 완화, 4대강 사업, 인위적인 환율 상승이다. 이 중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부자감세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으며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4대강 사업은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환율 인상 정책은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 표시 1인당 국민소득이 대폭 하락하였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과 장기요양보험, 보육비 지원 확대 등, 복지지출 확대를 이어간 것 말고는 소득분배를 개선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만한 정책은 없었다. 문재인 정부는 사회복지 지출을 확대해 중하위 소득계층의 가처분소득을 높여 민간소비를 진작하는 한편 공정거래 질서를 강화하고 고용구조를 개선해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고용보험 확대 등이 그런 정책이었다.
저자는 한국현대사를 만든 힘은 대중의 욕망이었다고 말한다. 심리학자 매슬러는 인간의 욕망을 첫째, ‘생리적 욕망’, 둘째, ‘안전에 대한 욕망’, 셋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망’, 넷째, ‘자기 존중의 욕망’, 다섯째, ‘자아실현의 욕망’의 다섯 범주로 나눴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의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도 매슬러의 욕망의 법칙을 따른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하자 대중은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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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와 ‘민주화세력’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 단계를 거쳤다. 5·16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맹아기’였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중항쟁까지 유신체제 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고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라 할 수 있다.
1. 맹아기(5·16에서 10월 유신까지)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 문제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1964년 6월 3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6·3 사태’ 또는 ‘6·3 항쟁’이라고 하는 대중투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차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 기자·교사·대학생 47명을 구속했다. 당시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던 청년들에게는 ‘6·3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과 네 건의 부속 협정문에 외무부 장관들이 정식 서명했다. 부속 협정문 속에는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 2억 달러로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들어 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 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정희 정부가 장기집권을 위해 개헌을 할 때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박정희 정부는 그때마다 공안정국을 만들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해 나갔다. 1967년 6월 국회의원선거에서 개원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부정선거가 행해지고 학생들의 규탄대회가 확산되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한 북한 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인 ‘동백림(東伯林)’ 사건을 터트렸다. 이 때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이 한국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았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1971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을 발표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11월 21일 계엄령 아래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1.5%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유신헌법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서 제8대 그리고 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김기춘 검사였는데, 김기춘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기도 했다.
2. 성장기1(10월 유신에서 10·26까지)
유신 이후 1979년 10월 ‘부마항쟁’까지 7년 동안 대중적인 반정부투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야당, 재야인사, 지식인, 대학생이 구속당하고 박해받은 사건이 있었을 뿐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예방적 차원에서 ‘고려대 침투 간첩단 사건’, ‘고려대 검은 10월단 사건’, ‘전남대 함성지 사건’,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사건’ 등을 터뜨렸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을 때는 중앙정보부가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긴급조치를 발동해 억눌렀다. 주로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영장 없이 체포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했는데, 그들은 1년도 지나기 전에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인 ‘제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고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지하 시인은 『동아일보』에 이 사건의 실상을 폭로하고 재구속 되었으며, 『동아일보』는 백지광고를 내보내야 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인혁당 관련 피고인 8명의 항소를 기각해 사형을 확정하자 정부는 다음날 새벽 지체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국제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서울과 지방 여러 대학에서 소규모 교내시위가 벌어졌지만 신문과 방송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재야인사들과 대학생들의 활동이 억압당하는 동안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힘을 키워갔다. 1976년 가을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는데 농협이 이를 전량 수매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카톨릭농민회는 전라남도 함평군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이 투쟁은 광주를 시작으로 서울과 전국 대도시로 퍼져나가 대규모 농민투쟁으로 변했다.
1979년 8월 YH무역 노동조합원들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며 신민당사에 들어오자, 경찰은 신민당사에 들어가 조합원들을 체포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 와중에 조합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김영상 신민당 총재가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유신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고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을 터뜨렸다. 이 사건으로 시인 김남주가 구속됐고, 홍세화는 프랑스의 망명허가를 받아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됐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생이 시위를 벌이자 시민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0월 18일 새벽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특전단 병력을 투입해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는 마산에서 더 크게 불붙었다. ‘부마항쟁’이었다. 이 ‘부마항쟁’으로 유신체제는 무너졌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3. 성장기2(10·26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가 무너졌지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정호용·박희도·장세동 등의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15일 전국 10만여 명의 대학생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서울역 광장의 집회에 참가했다. 5월 17일 밤에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하고 휴교령을 내려 시위가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5월 18일 김대중 씨가 체포되자 광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과 합류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하자 분개한 시민들이 광주 인근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 무장항쟁을 시작했다. 신군부는 특전사 3개 여단 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 2,000면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집중 투입하고, 5월 27일 새벽 6,000명의 병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 5·18 유족회의 집계에 의하면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 65명, 부상 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었다.
전두환은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철권통치를 능가하는 야만행위를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김대중·문익환·예춘호·이해동·조성우·이신범·이해찬·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을 내란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겨 김대중 씨에게는 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시민 4만여 명을 불법 연행해서 삼청교육대에서 고문하고 학대해, 300명 이상이 죽고 3,000여 명이 영구장애를 입었다.
신군부는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을 내쫓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00% 찬성으로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1981년에는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고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학생운동을 뿌리뽑고 재야 민주화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해 안기부와 보안사, 경찰과 검찰을 동원해 ‘무림사건’, ‘학림(學林)사건’, ‘부림사건’을 만들어 학생운동을 주도한 조직을 와해시켜 나갔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학생운동의 이념과 운동방식은 급진적 변화를 겪었다. 청년지식인들이 민주화를 넘어 사회혁명을 목표로 한 급진적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청년지식인들은 러시아혁명을 모델로 삼아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고 정치적으로 지도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야 한다는 민중민주주의(PD) 노선과,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중산층과 소자산계급을 포함해 각계각층 모든 민중을 반미의 깃발 아래 결속해서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민족해방(NL) 노선으로 결집했다.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서 사회주의자아 주체사상파가 생긴 것은 전두환 정부의 학살과 독재가 만들어낸 ‘이념적 열병’의 부작용이었다.
1986년 학생운동의 흐름을 주도한 NL 계열 학생조직이 자신의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 독자적 전국조직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결성하자 경찰은 결성식을 연 건국대에 최류탄을 쏘면서 진입했다.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사흘을 버텼지만 1,525명이 체포되고 1,228명이 구속되었다. 이른바 ‘건대사태’였다. 단일 사건 신기록을 세운 이 사건은 전두환 정부와 학생운동이 7년 내내 벌였던 기나긴 싸움의 절정이었다.
1987년 국민의 관심이 헌법 개정 여부에 집중됐을 때,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꾼 사건이 터졌다.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비난여론이 들끓자 검찰이 경찰관 두 명을 구속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유감을 표명하면서 치안본부장과 내무부장관을 경질하여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명동성당 ‘광주항쟁 제7주기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씨를 죽인 범인이 구속된 경찰관 두 사람 이외에 더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내각 총사퇴를 결정하고 치안본부의 박처원 치안감과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구속했다. 정당, 재야, 학생, 각계각층의 단체 대표들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1987년 6월 10일 오전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 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국본은 오후 6시 전국 주요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날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연세대생 이한열 씨의 생사문제였다. 6월 9일 연세대생들이 6·10국민대회 참가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씨가 총류탄에 뒷머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신문들은 그가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의 품에 안겨 있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했다.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 시작되었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참여했다. 마침내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8개 항의 시국수습 특별선언(6·29선언)을 발표했다.
4. 성숙기(87년 체제의 명암)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연속·동시다발·전국적 도시봉기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회복하는 민주화운동을 완성했다. 그러나 국민의 의식까지 완전히 민주화가 되지는 못했다. 1987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정권교체에는 실패한 것이다. 김대중, 김영삼 두 호보가 단일화하지 않음으로써 표가 분열된 탓이었다.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 김종필 8.1%로 국민 과반수 이상이 정권교체를 지지했는데도 실패한 것이다.
정권교체의 실패는 단순히 민주주의의 후퇴만을 가져오지 않았다. 1988년 4월 26일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주 대 독재로 양분되어 있던 민심이 대구·경북, 부산·경남, 광주·전남북, 대전·충남북으로 갈라졌다. 1990년 초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들자 4개 지역을 나뉘었던 지역감정은 호남 대 비호남으로 단순화하여 지금까지 한국 정치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저항운동에서 헌법정신을 실현하는 시민참여운동으로 전환했으며 종종 격렬한 반정부투쟁을 전개했다.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하고, 6월에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소년학생축전에 한국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씨가 참가하자 노태우 정부는 살벌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도중 경찰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2,361회나 반정부집회가 열리고 열세 건의 분신과 의문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때 안기부는 ‘유서대필사건’을 만들어 분신한 청년활동가 김기설 씨의 자살을 교사했다는 혐의로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 씨를 구속했다.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거두라’면서 재야와 학생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해 파문을 일으켰다.
김영삼 정부 시절 1996년 12월 26일 새벽, 신한국당 소속의원 154명이 야당에 회의 개최 사실도 통보하지 않은 채 버스를 대절해 국회 본회의장에 몰래 들어가 파견근무제, 정리해고제, 파트타임근로제와 변형시간근로제 등이 담긴 노동관계법을 날치기 의결했다.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대학교수와 지식인의 시국선언, 시민단체의 노동법 개정 요구 성명 등이 잇달았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날치기 행위에 사과했고 국회는 임시국회를 열어 노동법을 되돌려 놓았다. 개정 노동법의 내용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정부가 국회법의 의결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공안정치를 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무너뜨렸다. 2004년 봄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규탄 촛불집회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시민이 현직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야당을 대상으로 투쟁한 전무후무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는 또 다른 의미의 시위였다.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하기보다 국민 모르게 독단적으로 결정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컸다. 그리고 촛불집회는 자발적으로 행동하면서 수평적으로 연대할 줄 아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었다.
촛불집회는 2016년 겨울 절정에 올랐다. 소수의 시민이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면서 광화문 광장 한 귀퉁이에서 촛불을 들고 시작한 집회가 국회의 대통령 탄핵과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결정을 촉구하는 전국적 대규모 집회로 발전했다. 이 집회는 ‘촛불혁명’이었다. 21세기 지구촌에서 현직 대통령의 탄핵과 새 정부 수립을 이토록 질서정연하게 이뤄낸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1959년의 대한민국은 고르게 가난했던 독재국가였다. 1959년 1인당 GDP는 81달러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신체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말뿐인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2019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는 3만 2,115달러가 되고 현직 대통령을 쥐·닭·재앙·공산당이라고 비난해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중산층이 줄어들고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2020년의 대한민국은 고르지 않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됐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독재가 필요했을까?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는 것일까?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중요할까?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독재가 꼭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직 박정희 대통령만이 우리를 가난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면 우리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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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작가의 역사 분야 스테디셀러 <나의 한국현대사>가 개정판으로 돌아왔습니다. 초판 출간 당시 데이터를 보완하고 축적된 사실을 보완하겠다던 약속을 지킨 첫 번째 책. 구판 <나의 한국현대사>를 가지고 있지만 새로 개정된 책에는 세월호 참사와 코로나 19 그리고 일본의 수출규제 등 새로운 내용들이 추가되어 있다길래 구매했습니다 . 2014년 이후의 한국 사회의 굵직한 일들을 유시민 작가는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궁금하더라고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작가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통찰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고요. 작가 개인의 주관적 체험이 녹아들어 있지만 객관적 팩트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한국현대사 기본 교양서로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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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왜곡될 수 있다. 지금 언론이 공정성을 잃었듯 사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하고 거짓을 그럴 듯하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로보게끔 한다. 그러한 면에서 유시민 작가의 글은 편향되어 있지않고 사실을 기반으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혹자는 진보에 편향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슬프게도 사실을 얘기하면 좌파로 몰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의 현대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유시민의 생각과 인사이트를 담은 책이다. 유시민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재를 정확하고 폭넓게 다루면서,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안을 제시한다. 특히, 대한민국이 직면한 분단과 통일 문제, 대외관계, 그리고 선거와 정치 등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며, 독자들에게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유시민의 글쓰기는 매우 직설적이고 생동감 있어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재미있게 한편으로는 슬프게 읽어나갈 수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현재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총평하자면, '나의 현대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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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님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표현의 기술,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 작가님의 책은 전부 소장하고 있습니다. 나의 한국현대사 2014년판도 있지만 더 추가된 내용이 있다길래 바로 구매했네요. 기존에 있던 1959년부터 2014년까지의 기록 이외에 세월호 참사부터 코로나19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었는데 저처럼 초판을 구매하셨던 분들, 다른 책이라 생각하고 다시 구매하셔도 후회 없으실겁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가며 후에 나도 작가님처럼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간결하고도 세련된 문장은 정말 저의 마음을 울리네요.
학창시절 역사란 과목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 배우면 항상 구석기부터 삼국시대정도까지만 열공하고 지쳐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현대사는 잘 몰랐는데 유시민 작가님의 나의 한국현대사 읽으며 현대사의 흐름을 잡고 추가로 한국사 공부를 더 하게 됐습니다. 작가님이 서문에 쓰셨듯이 역사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역사를 배우고 지난 과거에서 현재, 미래에 대한 답을 얻어야합니다.
책을 읽은 후 알릴레오북스도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작가님이 직접 책 소개를 해주시고 책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시는데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요.
책 표지도 예쁜 민트색이라 너무 마음에 들어요. 작가님과 비슷한 연도에 태어나, 같은 역사에 공존하며 함께 걸어오신 부모님께도 선물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몇 년이 더 지난 뒤에 세번째 개정증보판 또 구매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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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이 필요없는 우리시대 최고의 작가.. 유시민~~ 한국현대사를 이렇게 리얼하게 기술할 수 있는 분이 유시민 작가님 말고 또 있을까 싶네요. 가장 치열하게 싸우며 한국의 현대사와 함께 해오신 유시민 작가님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도 유시민 작가님과 동시대를 살아오신 많은 분들의 피땀이 어린 결과라는 것을.. 늘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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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나오기 전부터 계속 구매하려고 했던 책인데 유럽 도시 기행도 아직 완독을 다 하지 못해서 미루고 있었다. 개정판이 나올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신간 알림 소식에 뜨자마자 반가워서 곧바로 구매했다. 유시민 작가의 전작들을 읽은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문체가 간결해서 어려운 글이도고 짧은 호흡으로 구성되어 이해가 쉽다. 역사 책을 잘 읽지 않은 편인데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를 두 번씩이나 읽으면서 만족감이 컸던 기억이 있다. 현 정권과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까지 담아냈다고 하니 지나간 과거와 함께 현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배울점이 많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