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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수많은 여자를 사랑했지만 왜 딸에게는..
"엄마는 수많은 여자를 사랑했지만 왜 딸에게는.." 내용보기
서문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게이비(Gayby)'라는 단어가 눈길을 잡아 끌었다. 쉽게 말해, Gay의 baby를 뜻하는 말이었다. 저자는 레즈비언의 딸로서, 이 단어를 소개하며 "퀴어 가족이 한낱 사회적 이슈가 아닌, 사실은 무척 창조적이며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공동체로 느껴지기 바랍니다."라고 다정한 바람을 전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퀴어 가족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
"엄마는 수많은 여자를 사랑했지만 왜 딸에게는.." 내용보기

서문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게이비(Gayby)'라는 단어가 눈길을 잡아 끌었다. 쉽게 말해, Gay의 baby를 뜻하는 말이었다. 저자는 레즈비언의 딸로서, 이 단어를 소개하며 "퀴어 가족이 한낱 사회적 이슈가 아닌, 사실은 무척 창조적이며 다정하고 유머러스한 공동체로 느껴지기 바랍니다."라고 다정한 바람을 전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퀴어 가족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외도, 방임과 결핍, 그리고 끝내 풀리지 않는 질문에 관한 이야기다.


수많은 여자를 사랑한 엄마는 왜 정작 자신의 딸에게는 다정하지 못했을까?


저자의 엄마는 레즈비언이다. 1956년 대만 농촌에서 태어나 여자를 좋아했지만, 가족에 떠밀려 맞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두 딸을 낳았지만, 술과 도박을 좋아하고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게 시달리며, 남편 대신 일을 해서 생활비를 벌고 딸들을 키워야 했다. 그녀의 직업은 대만의 민속 장례식에서 공연하는 일이다. 그리고 서른두 살에 딸들을 데리고 남편에게서 도망친다.


그렇게 세 모녀의 험난한 인생이 펼쳐진다.


엄마는 부치=톰보이(T)다. 이 부치 엄마는 거침없고 자유분방하며, 사랑에 빠지면 상대 여자에게 지나치게 아낌없이 퍼준다. 수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하고, 그녀들에게 한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이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정작 딸들에게는 무정하다. 애정 표현도, 살가운 돌봄도 좀처럼 없다.


저자는 늘 엄마의 사랑이 고팠다. 만약 엄마가 누구에게나 무뚝뚝한 사람이었다면, 그 결핍이 이토록 깊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엄마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아낌없이 사랑을 쏟는 마성의 부치인 것이다. 그런 그녀는, 대체 왜 어리고 나약한 딸들에게는 그토록 사랑에 인색했던 걸까? 책을 읽는 내내 나 역시 이 질문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모든 가정은 하나의 은하계이며, 가족들은 바로 은하계 속의 서로 다른 별이다. 우리 가족, 엄마라는 행성이 끌어당겨 움직이는 별에는 나 외에 작은 별 하나가 더 있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좌우에 있으며 나와 함께 엄마 행성 주위를 돌고 또 돈다.”(89p)


엄마라는 행성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두 딸. 그러나 맴돌기만 할 뿐 결코 가까워지지 못하는 두 소녀가 가련하기 그지없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것은 연인을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그녀가 이 우주에서 유일한 한 송이 장미임을, 특별하며 총애를 받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우주에서 유일했던 장미가 또 다른 우주와 다른 장미의 존재를 발견하기 전까지.

나나와 엄마가 함께 있었던 9년 동안, 엄마의 외도는 한 번뿐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적어도 두 번이며, 더욱이 두 번의 바람 모두 ‘떠들석했다’고 할 수 있다.”(134-145p)


이 부치 엄마의 사랑은 순결하지도, 순정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바람기가 다분하고, 그녀의 연애는 이성애자

바람둥이의 그것과 다를 것 없이 충동적이고, 실망과 배신과 뻔뻔함이 반복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다. 나는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때로 소수자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그 사랑을 필요 이상으로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내곤 한다. 하지만 이 책 속 레즈비언 엄마는 그런 환상을 가볍게 깨뜨린다. 여자의 사랑의 대상이 여자라는 사실이 그 사랑을 고결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엄마를 비난하고 폭로하는 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철없고 이기적인 엄마를 바라보면서도 저자가 끝내 발견하는 어떤 용기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사랑은 너무나 환상적인데, 내가 현실 생활에서 깨달은 사랑은 너무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구애하고 마지막에는 헤어지는 윤회를 보면서, 엄마가 나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용감하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계속 추구해 가는 용기를 잃지 않길 빈다.”(139p)


딸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연애를 멈추지 않는 엄마의 무모함 속에서도 저자는 자신이 배우고 싶고 리스펙트하고 싶은 무언가를 발견한다. 원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용기다. 저자의 이런 시선이 참 대단하지 않은가? 이 저자는 대체 얼마나 그릇이 큰 사람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엄마를 사랑하고 이해할 이유를 찾아야 했던 걸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아이에게 엄마의 연애는 단순한 연애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든 새여자 한정 사랑꾼 엄마가 자신과 동생을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공포를 확인하는 일이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무서웠던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나와 동생을 버리고, 혼자 집을 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왜냐하면 오래전부터 나는 그 집에서 엄마가 무척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불행했다.”

(178-179p)


저자는 두려움으로 가득찬 유년기를 보냈다고 고백한다. 폐쇄적이고 자존감 없이 위축됐던 청소년기를 지나 성년에 이르기까지, 엄마가 준 공포감은 한 번도 해소된 적이 없었다고.


어쩌면 이 책을 내면서까지도 그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나에게는 적어도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엄마는 딸들의 교육을 방관했고, 남편이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상황에서도 딸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인지, 알고도 외면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딸을 따뜻한 말로 보듬어주지도, 딸의 겪은 고통을 제대로 헤아려주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어쨌든 엄마는 딸들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잘못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다. 매일 반복되는 고난 속에서 충동을 누르며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이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지만, 회사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도전을 해봤냐는 것이다. 그러면 지원자들은 대개 남들이 해보지 않은 특별한 에피소드를 꺼내놓는다. 그런데 난 회사생활을 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정말 어려운 도전은 그런 일회성이나 단기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일 아침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해내고 견디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걸. 그 힘겨운 하루하루가 매일매일 도전의 연속이라는 걸.


자유분방하고 연애에 빠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매일 일상으로 돌아와 두 딸의 곁에 머무는 일. 물론 그것만으로 좋은 엄마였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자신의 방식으로 견뎌내야 했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할 줄 몰랐고,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몰랐으며, 자신이 딸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다만, 엄마의 사랑이란 것이 언제나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를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그렇지만 엄마는 분명 당신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다만 그 사랑의 표현이 당신이 갈망하던 방식으로 도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미움과 원망이 뒤섞인 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비로소 깨달아지는 사랑도 있는 것 같다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이 물음의 대답은 긍정문도, 부정문도 아니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주아주 긴 감탄사다.”(193p)

YES마니아 : 골드 a******3 2026.10.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