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옛이야기를 발음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품이 먼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안겨 옛이야기를 정답게 듣는 장면 말입니다. 그러다 김형경이 쓴 장편소설 『세월』을 읽고 옛이야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여대생이 뼈아픈 ‘세월’을 건너 마침내 가해자를 용서하는 과정을 감동 깊게 그린 소설은 옛이야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드러냅니다. 소설에서 다룬 옛이야기는 누구나 아는 ‘선녀와 나무꾼’입니다. 노루의 목숨을 구한 착한 남자는 아름다운 선녀를 만날 자격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옛이야기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시각입니다. 게다가 선녀를 가정 안에 붙잡아 두고 싶어하는 남성들의 욕망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여성의 처지에서 보면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남성 시각에서 옛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전승되고 있습니다. 다정한 두 친구가 있었다. 한 친구는 살림은 넉넉한데 자식이 없었고, 한 친구는 가난하지만 자식이 많았다. 자식 없는 사람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며 아내 몰래 친구를 침실로 들여보내 임신을 시켰다. 아이가 열여덟 살쯤 되자 아이의 친아버지가 친구한테 그 아들을 달라고 했다. 이 일로 근심이 되어 몸져 눕자 아들이 이유를 물었다. 하도 물어보는 바람에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니 걱정 말라면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열었다. 아이는 사람들에게 윗밭의 무씨가 아래에 있는 배추밭으로 떨어져 자라면 그게 누구네 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기른 사람이 임자라고 하자, 아이는 기른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라고 했다(138 - 139쪽에서 재인용, 원본은 「길러준 아버지를 구한 효자」, 『한국구비문학대계』7-14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61쪽) 옛이야기에서 여성의 시각이 배제되고 철저히 남성 중심의 시각을 갖는 것은 당대 사회의 지배적 이념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린이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옛이야기에 나오는 어린이는 옛이야기의 세계가 기대하는 어린이 모습입니다. 옛이야기의 세계에서 어린이는 있는 그대로의 천진함이나 방해꾼의 이미지 대신 어른들의 결핍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이념적 어린이’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옛이야기 속의 어린이는 어른들의 기대 속에서 직조된 가공의 인간형입니다. 똑똑한 아이는 어른을 이기며, 어른 또한 아이가 자신을 이겨주기를 바랍니다. 아이는 아이다움을 통해 어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미리 획득한 어른스러움(대개는 타락하고 더렵혀진 어른스러움의 때 이른 획득)을 통해 어른을 기만합니다. 영악하고 거짓말에 능한 주인공은 아이 형상을 한 어른이며, 우연한 횡재에 빠진 행운의 존재입니다. 옛이야기 속의 어린이에게는 많은 능력이 부과되지만 어린이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그는 희생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야기 속에는 어린이의 인권이나 자유분방한 감정표현들이 억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옛이야기를 현대의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이기에 앞서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옛이야기는 토론 가능한 형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수요자의 다양한 인식, 판단의 층위와 그 가능성을 인정해왔던 구술문학의 본원적 존재 방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결말을 지향하고 이를 인쇄하여 고정시키는 방식보다는, 독자 - 어린이의 의견 층위를 다양하게 유도하여 수렴할 수 있는 개방적 텍스트가 구상되어야 합니다. 옛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개작할 때 특히 고려해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우연과 횡재의 매너리즘입니다. 우연과 횡재는 아이들의 자기 표현에 덧붙여진 행운이 아니라, 무지와 순종의 조건으로 제안된 부정직한 거래입니다. 우연과 행운은 정직한 방식 속에서 선사되는 즐거운 선물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폭력적인 권선징악과 무방비한 개과천선도 문제입니다. 옛이야기의 선과 악은 격리되어 있으며 양립 가능하지 않습니다. 개과천선과 권선징악은 선악을 온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합니다. 어쩔 수 없는 악행이나 무책임한 선에 대한 고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피엔딩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옛이야기가 한결같이 해피엔딩의 구조를 지향할 때 어린이 독자는 행복의 가치를 현재적 삶의 수동적 감내에서 비롯되는 결과로서 인식하고, 현실세계에 적응하는 데에 만족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삶의 목적에 종속되어 있거나 적어도 연계되어 있는 아이의 삶의 목적도 따져봐야 할 사안입니다. |
|
어린이는 순수하고, 순결한 존재로 생각한다. 어린이들이 영악하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굉장히 낯설어 한다. 어른들 세상이 더럽고, 잔인한 세계이기에 자기와 다른 하얀 종이처럼 깨끗하기를 원한다. 이런 생각은 오늘만 아니라 우리 옛 이야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옛 이야기들은 어린이를 둘러싼 폭력성, 어른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많이 보여준다. 계모의 질투, 가난한 어머니를 꾀어 떡과 옷까지 빼앗고, 어린이까지 잡아 먹는 호랑이, 나이든 부모를 위하여 어린 자식을 죽이는 일 따위를 많이 볼 수 있다. 옛 이야기들을 모아 어린이의 세계와 힘, 의미를 살펴본 책이 최기숙이 쓴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이다. 최기숙은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을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어른이, 어린이를 어떻게 규정하고 거세하였는지 말하고 있다. 거세란 말은 강제성과 폭력성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 방법이란 구전설화를 통한 설명이다. '해와 달 오누이' '여우누이' '달래나보지' '오누이힘내기' '아기장수' 따위가 나오는데 그 중 '아기장수'를 살펴보면 아기와 장수가 어울릴 것 같은가? 대부분 어른이 장수가 된다. 아기장수라 함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아기가 어른보다 힘이 세다. 그럼 그는 제거되어야 한다. 어린이를 자기와 같은 존재, 존엄한 존재, 인격을 지닌 자로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아기장수'라는 단어는 '아기'와 '장수'라는 공존할 수 없는 단어의 조합을 통해 존재론적적 모순을 표상한다. 아가장수는 아기라는 현실태 속에서 장수라는 가능태를 표출하는 존재다. 이러한 아기장수는 가족들에게 위협적이며 동시에 경외로운 존재로 인지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질성은 가족과 주변인들로 하여금 그를 정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수용하지 못하도록 이끈다."(본문 32쪽) 아기장수는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한다. 어른보다 우위에 선 아기는 제거되어야 한다. 어른에 순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어른에 종속되어야만 어린이답다. 아기장수가 기존 사회를 변혁시키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어른, 부모는 수용할 수 없다. 꿈은 사라져버리고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어른이 말하는 바를 따라가야 한다. 어린이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어른이 주체가 되는 사회구조 속에 갇혀 사는 비극적 희생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시대 어린이들도 어른, 부모가 만든 구조 속에 살도록 강요받는다. 어린이는 자기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부모와 어른이 만들어 준 꿈을 이룩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어린이가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꿈을 이루어가도록 하는 것인데 어른과 부모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옛 이야기는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지금 어린이가 어른, 부모가 되었을 때 자기 아이들에게 자기가 읽었던 옛 이야기를 읽게 한다. 자신이 강제적으로 세뇌되었던 어린이 상을 또 다시 강요하는 비극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주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인식을 통하여 어린이가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꿈을 이루어가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강요된 꿈은 또 다른 강요를 낳게 된다. 이는 비극이다. 어른과 어린이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는 존재이다. |
| 각각의 시대마다 그 시대의 교양인, 혹은 일반인의 사유틀을 생산하는 양식이 있다. 즉, 그것이 바로 시대의 에피스테메나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적어도 나의 생각으로는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규정도 역시 그런 차원에서 접근되는 문제라 본다. 다시 말해, 근대까지만 해도 독자적인 지위가 없었던 어린이가 하나의 보호 대상이나 기타 관념으로 포장되게 된 것은 근대를 넘어서 현대로 진입하는 맥락에서 생긴 구조변동의 산물이다. 즉, 어린이에 대한 담론이나 전래동화, 그리고 여타의 이미지들의 형성을 뜯어보면 지금 시대는 어떤 주체양식을 생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어린이가 어른이라는 동일자의 배타적 복제양식이라면 더욱이. 여기에 대해서는 근대적 주체의 형성에 대한 이진경 선생님의 글이나, 그와 관련된 국내의 연구(이들은 푸코를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 그리고 김상환 선생님의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
|
이 책은 ‘어린이’ 라는 명제를 다각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어린이들한테 들려주던 전래동화를 통한 이야기 구조안에서 어린이란 무엇이며 가족 안에서,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밝힌 책이다.
어렸을 적 들었거나 읽었을 전래동화속에 이렇게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이야기가 숨어있을 줄 정말 몰랐다.
동화 속 주인공 어린이는 사회를 반영하고 어른들의 이기심, 욕심, 잘못된 욕망, 폭력성, 추함들을 들추어내 어른들을 정죄한다. 또한 사회나 가족의 안정, 평안이라는 명분하에 어린이들이 잔인하게 죽거나 억압되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생각이나 관념의 틀에 막혀 날개 꺽인 천사들처럼 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소유물인가? 이 책을 읽고 “어린이는 어른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가? ‘착함’, ‘착한 어린이’ 라는 말은 참이고 진리인가 ? 혹 거짓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 겪었던 어린이라는 약점, 약자논리에 밀려 어른들의 불합리하고 부당함에 억울해 하면서도 정작 순응해야 함을 강요 받고 또 그렇게 순종함이 미덕인양 살아왔으면서도 이제 성인이 된 나는 얼마나 약자인 어린이를 억울하게 하지않고 공정하게 대하는가 예전에 내가 당했던(?) 그 부당함을 잊은 건 아닌지 다시금 반성하게 되었다.
‘어린이 이야기, 그 거세된 꿈’은 비록 작은 책이지만 큰 책처럼 읽혔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에게 관심을 갖는 어른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우리에게서 어린이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지되지만, 그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에 미래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다. 이러한 어린이의 가능성은 어른들로 하여금 공포와 기대라는 이중심리를 갖게 한다. P. 24 아기장수 이야기의 어른들은 끝내 고해성사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사라지는 용마의 울음에 전율할 뿐이다. 어른은 무책임하며 그것이 사회적 현존의 사실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날개를 잃어버릴 때 죽어 버린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삶을 바꾸어줄 잠재적인 가능성이며 변화하는 미래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P. 76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말 잘 듣는 아이는 착한 아이’라고 말한다. --- 아이가 어른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그가 ‘순응적’ 이고 ‘순종적’ 이라는 것이지, 도덕성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잘 듣는 아이를 착한 아이라고 길들이는 것은 이러한 모든 사실을 분별해낼 수 없는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거짓말이다. P.141 베텔하임은 실제의 삶은 언제나 밝은 면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린이가 사물의 밝은 면만 보기를 원하는 어른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인간의 본질 |
|
외국의 논리, 특히 유럽 혹은 일본화된 유럽의 논리에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에게 언제나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자신이 어떤 계보에 따라서 글을 쓰고 있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유럽의 논리 중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논리를 혁파?하려는 목적에 따라서 개발된 것이 꽤 있는데, 한국의 전통적인 논리와는 - 어느 정도 겹칠 수는 있지만 - 당연히 정확하게 맞지 않는다.
쉽게 말해 미터법과 피트법이 어긋나거나 비슷한 것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이 책애서도 마찬가지로, 유럽의 논리에 따라서 한국의 논리?를 비판?했는데 뭔가가 썩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1.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유아/어린이가 죽으면 자동 천국행이라는 개념이 있고 따라서 유아/어린이를 천국의 어린천사와 비슷한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2. 유럽의 좌파? 중에는 나이, 성별, 인종 등의 차이를 무시해야 진정한 민주성?/평등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나이, 성별, 인종 등의 차이를 무시하는 행동이라면 어떤 행동이라도, 예를 들면 유아/어린이와 성인 사이의 성행위라도 비난하면 - 혐오 표현이기에 -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마치 어린이의 성행위, 노동 등을 법률적으로 제한하고 윤리/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현실을 비난하는 듯하다.
(혹은 그냥 책 제목을 선정적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유럽/서구의 생각/사상을 속에서부터 알고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겉에서 추측?하면서 지나치게 유럽/서구적인 발상에 따라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푸코가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냥 푸코가 쓴 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리 멀리 가지 않은 듯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좀 뻔하다면 뻔하고,
이렇게 뻔하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점을 크게 보아서 내용 별이 3개이다.
차라리 푸코를 읽어 보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