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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의 저서를 네 권째 읽는데, 이젠 그가 우리글로 처음부터 끝까지 쓴다는 게 그리 신통하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글 쓰는 행위는 그런데, 이런 내용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에 대해서는 다시 놀란다. 이게 그의 전공 분야의 범위 속에 포함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수천 년에 걸친, 전 지구적인 문자와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몇 가지 짙게 남은 잔상을 언급해 보면 이렇다.
첫 번째는, 언어와 문자의 구분이다. 우리는 언어와 문자를 잘 구분하지 않는다. 그건 한국어와 한글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것과 비슷하다. 문자는 언어를 구현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은 맞지만, 언어와 문자는 서로 다른 것이다. 한국어가 오랫동안 민족 단위로 사용해서 지금까지 이른 말의 체계라면 한글은 그것을 물질적으로 구현해 낸 수단이다. 한글이 아니었어도 다른 문자 체계로 한국어를 표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베트남어가 20세기 이후에 고유의 문자 체계를 버리고(상당부분 강요된 것이지만) 라틴 문자를 체택한 것처럼 우리 말을 라틴 알파벳을 이용해서 표기하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물론 한국어가 영어로 대체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가 ‘고유’하다는 인식이 상당히 옅어졌다. 한글만이 ‘창제’된 문자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문자가 만들어졌으며, 실제로 효율적으로 쓰여왔다. 지금도 그렇다. 창제의 기록이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자 체계도 아닌 것 같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로버트 파우저도 인정하지만, 사실은 ‘과학적’이라는 것의 정의도 애매하긴 하다. 한글이 발음 기관과 발음 방식을 상당 부분 반영한 문자 체계라고 배워왔지만, 한글의 문자 전체가 그런 것도 아니고, 또 한글만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한글이 (원래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화에 아주 적절한 문자 체계라는 점이고, 그래서 한글이 오랫동안 남아 사용될 것이란 점이다. 로버트 파우저는 문자 체계의 우열은 없다고 강조하지만, 일본의 문자 체계에 비하면 훨씬 나은 문자 체계란 점도 읽으면 읽을수록 분명해 보인다.
세 번째는, 아직도 그렇게 많은 문자 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크게는 라틴 문자, 아랍 문자, 인도 및 동남아시아의 브라흐미 문자, 그리고 한자 문자, 이렇게 크게 네 개의 문자 체계가 존재하지만, 아주 다양하게 변형되어 존재하는 게 문자다. 정말 희한하게 생긴 문자도 많다는 것을 책 속에 정말 많이 소개하고 있는 사진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문자들은 창제되고, 변형되고, 사용되다 버려지는 과정을 거친다. 거기서 살아남은 문자가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문자의 흥망성쇠가 권력과 종교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도 있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문자를 통해 세계사를 볼 수도 있는 책이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흔한 세계사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