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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여름용 검정원피스를 한 벌 사야겠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사지 못한 상태로 지금, 가을이 시작하고 있다. 곧 입을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하고자 했는데,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던 게 마음처럼 간단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옷 한 벌 사는 일이 무슨 힘든 일이라고 이렇게 몇 달을 미뤘을까 싶다. 생각해보니, 가족들과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의견들에 몸살을 앓았고, 나도 해야 할 일을 계산해보면서 머릿속이 바빴다.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되는 일들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될 텐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마음대로, 일 처리하듯 간단하게 진행되는 건 없었다. 여름이 거의 다 가고 있는 지금, 여름용 검정원피스 대신, 나는 이제 가을용 검정원피스를 잊지 말고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이렇게 그냥 시간이 흘러버리면, 나는 또 겨울용 검정원피스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한창 할 때 만나게 된 소설이다. 제임스 에이지의 자전적 소설인 『가족의 죽음』은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의 짧은 시간을 그렸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화두인 죽음을, 갑작스러운 상실의 감각을, 담담하면서도 경건하게 표현했다. 어쩌면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면, 나와 내 가족도 이런 모습일 수 있을까.
제이는 고향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이른 새벽길을 나선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서는 길이다. 깨울까 봐 잠든 아이들을 보지 못하고, 아내 메리가 챙겨준 간단한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곧, 아버지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게 아니라면 저녁에 돌아와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아내와 헤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던 분위기는 다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확신하여버린다. 제이가 집을 나서고 몇 시간 후,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남자 가족이 와서 제이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메리는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경황이 없었다. 제이가 어떤 상태인지,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지 사망한 것인지 묻지 못했던 거다. 사촌 앤드루에게 도움을 청하고 고모 한나에게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시간.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이제 겨우 서른여섯의 남자 제이는 즉사한 상태로 돌아온다. 슬픈 소식에 하나둘씩 모여드는 가족들. 메리의 친정 부모님과 친척들. 그리고 이어지는, 제이와 그동안의 시간을 꺼내는 기억들이 죽음을 애도한다.
"아빠는 집에 오시지 않았어. 앞으로도 다시는 오시지 않을 거야. 아빠는-하늘나라에 가셔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아. 엄마 말 듣고 있니, 캐서린? 잠은 깼어? 캐서린은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알아듣니, 루퍼스?" (238페이지)
제임스 에이지가 아버지를 위해 쓴 소설이자 자전적 추도사라고 한다. 그의 시간과 기억이 바탕이 되었다는 건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한동안 멍하니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사라진, 아버지의 부재를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견뎌낼 수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나 고모의 말처럼, 죽음은 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고 그냥 겪어내야 할 일이었던 거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며, 장례를 치르고, 남겨진 사람의 몫을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것. 그게 비록 견디는 것이라 해도, 그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게 인생이라는 듯이, 잔인한 처사라고 신에게 부르짖으며 울분을 토해내더라도... 통곡하면서 남편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어 맥을 놓는 메리, 하늘나라로 갔다는 아빠가 왜 돌아오지 못하는지 알 수 없는 어린 캐서린, 뭐가 뭔지 잘 몰라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년 루퍼스. 그렇게 저절로 배워가고 알아가고 있었다. 죽음이란 건, 아버지의 사라진 자리는 그렇게 익숙해져야 하는 거였다.
예상하지 않았던 비극을 마주한 기분은 어떨까. 준비한다고 해서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어느 정도 단단해질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지만, 단 한 순간도 그때 그 시간에 누군가를 잃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면 당황스러울 테지. 당황이라는 말로는 좀 부족하다. 뭔가 더 명확하게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떠올랐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할 듯하다. 시쳇말로 멘붕인 상태니까. 현실로 부닥친 장례 절차부터, 아직은 어린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무엇보다 가장의 빈자리를 채우며 경제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은 견디는 삶의 시작이 되어버린다. 이 불안한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가족을 둘러싼 모든 것은 혼란일 거다. 애도의 시간을 온전하게 채우지도 못하고 현실의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남겨진 사람은 여기,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그들의 몫이므로.
그렇게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잘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한 번씩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슬픔은 어쩔 수가 없다. 강인한 존재로 보였던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어려움을 피하기보다는 맞서는 사람이었다. 변화되고 발전하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려 노력하며 살아오면서도 가슴 속의 따뜻함은 남아 인간애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는데, 가난한 이들에게 온정을 품었던 사람이었는데... 뭔가 큰 기둥 하나가 뽑혀 나간 것처럼 온통 그의 부재가 주변을 감싸고돈다. 그의 부재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비극은 금방 희극이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 어떻게 잘 견디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냥, 겪어내야 하는 일인 것뿐이란 말인지.
너희 아빠는 선하게 사시길 원하고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를 바라셨단다. 너희 아빠보다 더 용감한 분도 없고 더 친절하고 너그러운 분도 없어. 견줄 사람이 없지. 아저씨가 너희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너희 아빠는 이 세상을 살다 가신 훌륭한 분들 중 한 명이었다는 거야." (306페이지)
한 사람의 부재로 많은 기억과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가족과 죽음이란 주제 안에서 그들이 믿어왔고 의지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말하는 장면도 종종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죽음이 화두가 된 한 가족의 슬픔과 변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자리에서 보는 시선을 그린다. 든든한 아빠의 존재를 더욱 떠올리는 소년, 아직 죽음이란 것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소녀, 이제 이 가정의 중심이 되어 더 단단해져야 할 한 여자의 삶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하게 한다. 지켜보고 싶게 한다. 이건 소설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 속에 늘 존재하는, 언제든지 같은 경험을 겪을 수 있는 우리의 문제이니까. 그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견디는 삶을 이어가는 것이므로. 소년 루퍼스가 그 시간을 건너 성장해가듯, 우리도 그 상실의 시간을 건너야만 온전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한집에서 복작대며 살아가는 가족을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아직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가족이 겪고 있는 불안을 생각하면, 그 죽음을 볼 '언젠가'가 멀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그때가 닥치면 당황하지 않고 잘 지나갈 수 있을지,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잊힌 기억으로 온갖 감정이 다독여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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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사랑하는 가족을 갑자기 잃어버린다는 것은 분명 남은 가족에게는 커다란 슬픔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제임스 에이지의 '가족의 죽음'은 동생으로부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떠난 남편, 아버지, 동생의 형인 남자 '제이'가 사고로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제이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 제이를 떠올리며 현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진한 울림이 느껴지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슬로모션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연상되어 마음에 들었던 인상 깊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배우 찰리 채플린을 보기를 원하는 남편의 뜻과는 달리 아내는 찰리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 개인적인 의견을 낸다. 아들 루퍼스와 함께 찰리를 보고 제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위기의 술집을 찾는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에서도 따뜻함을 전해주는 남자 제이... 아버지 제이가 때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함을 어린 아들은 느낀다.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도가 어떠한지 느껴지는 대목으로 가족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와중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남자 제이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이런 아버지를 이해하고 행복하기 위해 시간을 필요함을 느끼는 아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인상 깊게 느껴진다. 아빠가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잠시 집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나뭇잎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봐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아빠의 행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의 행복을 알고 행복의 이유를 이해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 세상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얼마나 더 중요한지 안다고 루퍼스는 생각했다. -p20- 제이는 섬세한 남자다. 동생에게 아버지가 안 좋다는 연락을 받고 아버지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그는 아내를 위해 침대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내가 함께 가지 않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을 보기 위해 저녁에 돌아올 거란 말을 남기며 떠난 제이... 남은 아내는 자신을 편들어 준 시아버지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떠올린 저녁에 낯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 속 남자는 사고가 났다며 제이를 데려가기를 원한다. 제이의 아내는 급히 오빠에게 연락을 취하는데... 싸늘한 죽음을 맞은 제이를 떠올리는 아내의 모습은 내가 만약 이런 일을 당한다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읽다보니 더 몰입되는 부분이 많았다. 랠프 역시 형에게 굳이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부분을 보며 그의 절망적인 심정이 이해가 된다. 이외에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아이들과 아내, 일가친척들이 모습은 충분히 공감이 가고 그들의 아픔이 이해가 된다. "너희 아버지 심정이 어떻겠니" 아들이 밖에 나와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하면?" -p260- "아저씨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야.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평범한 사람. 아저씨는 늘 너희 아빠를 링컨과 많이 닮은 분이라고 여겼단다. 출세한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 거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거기까지 가지 못해. 하지만 너희 아빠만큼 그곳으로 가기 위해 힘든 일과 맞서 싸운 분도 없단다. 너희 아빠만큼 노력하고 그보다 더 큰 꿈을 꾼 분도 없단다. 출세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옳은 일을 말하는 거야. 너희 아빠는 선하게 사시길 원하고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를 바라셨단다. 너희 아빠보다 더 용감한 분도 없고 더 친절하고 너그러운 분도 없어. 견줄 사람이 없지. 아저씨가 너희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너희 아빠는 이 세상을 살다 가신 훌륭한 분들 중 한 명이었다는 거야." -p306- 너무나 사랑하는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의 남자의 죽음은 남겨진 가족에게는 엄청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제이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이 그를 회상하고 슬픔을 견뎌내는 방식은 분명 우리와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죽음이란 상황은 누구나가 맞닥들일 수 있는 일이라 충분히 공감이 된다. 나는 친정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내가 시집가기 전에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시어머님만 계셨기에 아직까지 주변에서 직접적인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적은 없다. 그나마 부모님 대신 어릴 적부터 우리랑 함께 생활한 외할머니의 죽음이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에 엄청 슬퍼했던 우리 자매들은 한 번씩 외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 할 때가 있다. 외할머니의 죽음에도 이런데 부모님, 가족에게 죽음이 닥치다면 나 자신도 얼마나 고통을 받을 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다만 슬기롭고 현명하게 슬픔과 대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살짝 해보게 된다. 너무나 짧은 날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고 있지만 가족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온전히 느껴진다. 자꾸 내 가족과 연관되어 떠올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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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에이지의 자전 소설이며 1958년 퓰리처 상 수상작품인 <가족의 죽음> 작가의 나이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이별을 하게 된 자신의 아버지를 소설로 작가의 섬세한 필체로 쓴 책. 꽤 오래전에 쓴 작품이기에 아마 미국의 중산층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이 책에 나오는 것과는 많이 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고, 크리스찬으로서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네요.
가족의 죽음은 큰 스트레스지요. 그런 슬픔과 상실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 한 가장의 죽음을 두고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만일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일을 당했더라면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가 어렵네요.
올 봄 친정 어머니께서 대수술을 앞두고 계셨을 때 머릿속이 복잡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혹시 지금 당장 이별을 준비해야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홀로 남으실 친정 아버지에 대해서는 딸로서 어떻게 위로하며 어떻게 생활해야하는지 여러가지 생각이 떠올랐지요. 다행히 초기 발견이라 수술은 잘 되었고 6개월 정도가 흐른 지금까지 건강히 생활하셔서 다행스런 마음뿐이지요.
그런데 준비하지도 못하고 언제나 든든하게 의지하고 있던 집안의 가장이 하늘나라로 갔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갑작스런 이별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지에 대해서 담담하게 써내려간 작품을 보면서 많은 사람은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혹여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 수 있겠지요.
큰 일을 겪고 나서 읽었던 책이라 더욱 내 마음 속에 다가왔던 책. 가족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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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처럼 한 가족의 구성원 중 한사람의 죽음을 다룬 내용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일중에 겪지 않았으면 하는 것중에 하나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것을 잃은 듯한 슬픔에 휩싸이고 힘든 시간이 겪게 되지만, 세상은 그런것들과 무관하게 흘러간다. 나의 슬픔을 세상이 다 알아주고 다 같이 슬퍼해 주면 좋으련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흐르는 자연의 섭리는 슬픔의 원인 제공자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 책 「가족의 죽음」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제임스 에이지의 소설이라고 한다. 일반 소설들이 재미를 더하기 위해 극적인 요소나 반전을 가미해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이 대부분이라면 이 소설은 가족 의 가장의 죽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심리상태를 풀어낸 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너무 흥미를 일으키는 스토리 를 많이 읽어서 익숙한 독자라면 이 책이 조금은 지루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다보면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겪고 있는 구성원의 심리를 자연스러우면서도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나타낸 부분을 보면 쉽게 만나지 못한 훌륭한 소설임을 인정하게 된다. 왜 이 책이 미국고전 중 100대 소설중에 들만 한 지 알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겪을 법한 가족 구성원의 죽음을 이겨내기 위한 가족들의 위로와 상대에 대한 격려는 정말 큰 위안과 슬픔을 이겨내는 격려가 된다.
미국 녹스빌에 사는 한 가정의 가장인 제이는 어느날 새벽 아버지의 위중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 가지만, 남편을 배웅한 아내 메리는 그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만다. 돌아오던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죽음을 예상치 못하고 다친것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상과 달리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메리는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고 메리를 둘러싼 주변 친척들은 장례가 끝날때까지 애도하며 같이 슬픔을 나누게 된다. 왜 이런 슬픔을 겪어야 되는지 처음 원망은 신에게 향하지만 결국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소설은 저자 제임스 에이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저자가 6살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담담하게 여러 사람의 눈을 통해 나타나도록 이소설이 구성되었다. 슬픔의 깊이가 점점 사그라들고 그것을 나중에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인간의 내면 심리를 잘 나타낸 소설인것 같다. 저자 역시 40대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지게 되고 친구가 그의 유품과 원고를 모아서 유작을 낸 것이 이 소설이 되었다고 하는데 미국에서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 받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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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가족의 죽음] 퓰리처 상 수상작품이기에 이 책을 읽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고, 책을 읽으면서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쓴 소설임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족에게 찾아온 예기치 않은 비극, 그런 비극을 맞이하여 가족들은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지, 누구에게 죽음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비극이기에 제임스 에이지의 자전적인 이 작품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집니다.
나 역시 기독교인이기에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작품.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느낌을 어린 아이들이라면 어떻게 받게 되는지도 느낄 수 있었지요.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없이 살고 있었던 단란하고 행복했던 미국의 중산층 가족이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죽음)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모습들. 어떻게 그 비극을 차분하게 맞이하며 성장해가는지 [가족의 죽음]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내가 작품 속의 메리였다면, 여섯 살 난 꼬마 아이 루퍼스였다면,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네 살 캐서린이었다면... 가족의 의미와 가족의 부재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책.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과 그 뒤를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잔잔하게 또한 제임스 에이지만의 필체로 만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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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 제임스 에이지 자전소설
이야기이지만 정말로 읽어보면서 담담하면서 아버지의 빈자리에 죽음에 대한 비극으로 인하여 슬픔이 있으나 오히려 극복하면서 노력하는 모습에 상당히 감동적입니다
을 이겨내고 오히려 가족의 대한 사랑과 정을 드러낸다는것은 대단한것으로 저는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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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 제목이 무척이나 우울하다. 제목처럼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가족의 죽음을 각각의 구성원들의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얼핏 보면 우울하고 음산해 보이지만 이야기 속에는 가족의 사랑이 듬뿍 녹아있다. 얘가 내 아들이외다. 따스한 사랑이 전해졌다. 가족을 사랑하면서 외로웠고,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떨쳐내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이들 부분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구절이다. 사실 사랑하는 가족과 살아가면서 때로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가족이라고 해서 완전히 알고 이해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사람을 살아가면서 섬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고는 한다. 그래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갈 때 가장 풍요롭다. 그런 풍요로움이 책에 넘친다. 그런데 그 풍요로움을 가장의 죽음으로 인해 흔들린다. 가족의 죽음은 상실과 단절을 의미하는데, 역설적으로 다시 연결이 된다. 우리나라 장례식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겠다. 장례는 끝이자 시작이다. 더 이상 소통을 할 수 없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남아있는 자들이 서로 다시금 이어진다. 가족의 죽음을 무척이나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전하는 자의 아픔과 받아들이는 자의 슬픔, 분노,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런 감정은 간접적으로 느낀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다면 결코 이런 슬픔을 알지 못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가야하는 거잖아. 삶의 초점이 되돌아왔다. 죽음은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인정해야 삶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인정하지 못 하면 죽음의 그늘에 잡아먹히게 된다. 가족의 빈자리를 인지하는 순간 멍한 상태로 밤을 지세우고는 한다. 그러면 집안이 허전해 보인다. 이제 두 번 다시 죽은 자와 함께 누렸던 일상은 돌아오지 않는다. 가족의 죽음은 추억과 회한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슬픔과 안타까움 속에서 가족들 사이에 용서의 과정이 일어난다. 죽음이란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머리가 멍하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지옥이지. 생지옥, 지옥이 따로 없다. 받아들이기까지 버티기 과정이 있다. 상실의 아픔을 받아들이면서 치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책에서는 이걸 일종의 시험이라고 말한다. 선택이 등장하고, 종교 이야기가 책에 넘친다. 종교 이야기는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어느 쪽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다. 개인적인 면도 있지만 보편적인 면에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에 책이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가장 마음에 든 구절은 ‘집에 갈 시간이구나.’ 이다. 기다려주는 가족이 있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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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 이름은 제이, 그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어찌 보면 어느 가족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다. 가족 중 누군가는 언젠가 죽게 마련이니까, 일반적으로 보면 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한 가정’에게 그 일은 특별한 일이다. 특히 가장인 아버지의 죽음은 가정의 구성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에이지는 그 의미를 끈질기게 파고든다. 왜 그랬을까? 이 소설은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 바로 거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가 겪었던 아버지의 죽음, 그 의미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그 의미를 천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집으로 가는 길 이 책 말미에 실린 <작품 소개>를 보니, 이 책은 저자인 제임스 에이지의 유작인데 출판 이듬해인 1958년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집으로 가는 길 All the Way Hom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와 연극으로도 각색되어 무대와 스크린에 올려지기도 하였다.(441쪽) 이 책이 영화로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하니, 중국 영화 <집으로 가는 길 The Road Home>이 떠올랐다. 장쯔이 주연의 영화.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으로 향하는 주인공. 그 장례과정에서 아버지를 회상하는 영화이다. 그래서 장쯔이의 영화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야기가 아름답게 다뤄지고 있다. 그 영화에서 ‘길’이란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고, 그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표현한 공간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또한 중국 전통장례에서의 길은 '죽은 자가 집으로 오는 길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장쯔지 주연의 영화에서 길은 그런 의미인데, 이 책 <가족의 죽음>을 영화화하면서 왜 ‘길’을 운운했을까 이 책 1장에서 주인공인 루퍼스와 아빠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올 때, ‘날이 완전히 저물었으나 시간은 아직 일렀다’(13쪽)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술집에 들른다. 그리고 다시 거기에서 나와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아주 서정적으로 묘사된다. 이 책의 저자는 왜 그 장면을 맨 처음 도입부에 배치하였을까? 그날, 그렇게 같이 돌아온 바로 그날, 아버지는 잠자는 아들을 두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아버지가 보이지않는 다음날 아침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튿날 아침에 엄마가 아침 식사 자리에 아빠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즈음에는 간밤의 말소리와 소음은 까맣게 잊은 터라, 긴 세월이 흐른 뒤 그 소리가 기억났을 때에는 자기가 지어낸 게 아니라는 확신이 전혀 들지 않았다.”(23쪽) 그 소리란, 아빠가 “잰 걸음으로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살그머니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다. 아빠는 그 소리를 뒤로한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아빠랑 같이 집에 오는 길, 아마 그게 아빠와의 마지막 걸음이었는지라, 영화의 제목을 <집으로 가는 길>로 했을 것 같다. 그러니 장쯔지 주연의 영화와는 같은 제목에 다른 내용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이 모티브가 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 그(아버지) 의 죽음을 듣고 모여든 가족들. 고모인 한나, 어머니 메리, 그리고 아이들 루퍼스, 캐서린은 각각의 모습으로 아버지, 남편의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인 메리는 독실한 기독교인,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 죽음이 뭔지 아직 모르는 아이 캐서린은 아빠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저자의 분신인 루퍼스는 아빠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아픔을 묘사하기 위해 소설 첫머리에 아빠와 함께 돌아오던 그 날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집으로 가는 길” 이 소설은 실상 351쪽에서 끝난다. 그 이후는 ‘이전의 이야기’로 가외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삼촌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이 소설의 실질적인 끝 장면인데,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삼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잠시 후 “이제 집에 갈 시간이구나”라고 말했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둘 다 말이 없었다,>(351쪽) 그런데 실상 이 장면은 삼촌 대신 그의 아버지가 등장하는 그 ‘길’의 반복이다. 따라서 저자는 다시 한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통해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이다. 아버지 생전에 함께 돌아오던 장면, 그 장면에서 저자는 아버지와의 시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둘은 같이 일어섰다. 그 뒤로 집으로 가는 내내 둘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았다.>(23쪽)
그러니 삼촌과 집에 돌아오면서도, 실상은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버지의 죽음은 저자에게 '늘'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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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의 등은 너무도 크고 넓어 밖에서 어떤 일이 있었어도 아버지에게만 달려가면 모든 일이 문제없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만큼 든든했고, 믿음직스러웠고, 때로는 무섭기도 했으며, 가끔은 어려웠지만, 대부분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누군가의 부모가 될 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작고 굽어진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져 가끔 서글퍼진다. 누구나 나이를 먹게 마련이니까. 세월을 당하는 장사는 없으니까 말이다. 가끔 얼굴을 볼 때마다 어깨며, 팔이며 조금씩 수척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할 시간도 오겠구나 싶은 마음에 울컥해지기도 하고,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 아래 보호 받았던 내가 이제는 반대로 아버지를 보살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에 책임감 같은 걸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아직까지 가족 중 그 누구와도 완전한 이별을 해본 적이 없기에, 언젠가는 겪게 될 아버지와의 이별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인 이 책을 읽는 내내 조금 두렵고, 긴장이 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인정하고, 익숙해져야 할 거라는 걸 알기에 말이다.
아빠는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분명 아들과 같이 있는 이 잠시의 여유를 즐기는 것 같았다. 요즘 들어 루퍼스는 구름다리를 다 내려올 무렵이면 이곳에 들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빠와 함께 바위에 앉아 있는 일이십 분 정도가 어찌나 행복한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말로든 생각으로든 그 정체가 무엇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그저 그래 보이고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빠도 여기서는 다른 어느 곳과 달리 유독 만족스러워 보였다. 둘이 느끼는 만족감이 아주 비슷하고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생가기 들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제이는 아버지의 첫 모습을 떠올려 본다. 매부리코에 잘 생긴 얼굴, 당당하고 위압적이던 검은색의 멋진 콧수염. 천성이 워낙 낙천적이고 심성이 따뜻했지만, 어머니에게 무거운 짐을 떠넘겼던,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제이가 분개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 창문 넘어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면서 그는 벌써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제이는 생각한다. 뭐, 누구나 언젠가는 가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다시 삶의 초점이 돌아오자 그는 외출 준비를 한다. 옷을 차려 입고 방을 나서려다 구겨진 침대를 보고는 아내의 자리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이불을 위로 당겨 덮어둔다. 그리고 방문이 살짝 열린 아이들 방 앞을 지날 때는 깨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한다. 메리와 제이는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고, 메리는 아빠가 인사도 없이 가면 아이들이 실망할 까봐 깨우고 싶은 걸 참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되면 생각보다 그가 더 오래 가족을 떠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메리는 바깥양반께서 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한 통 받는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걸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메리의 눈빛이 빛났다. "감당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그저 최선을 다해 견디면서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저절로 풀리게 놔두렴. 그거면 충분해." "전 전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준비할 시간이 너무 적어요." "준비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닌 것 같구나. 그냥 겪어 내야 할 일이지." 결국 그들은 사고 현장에 다녀온 오빠를 통해 제이가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를 전혀 할 새 없이 그저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 이해하고 감당할 수 없어 그저 견뎌내야 하게 되는 일들 말이다. 이제 남겨진 가족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해야만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메리는 종교에 의지하려 하지만, 믿음으로 충만한 자신에게 왜 이런 아픔이 왔는지 감당하기 어렵다. 죽음이 뭔지 아직 모르는 네 살 캐서린은 그저 아빠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여섯 살 루퍼스는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아빠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뿐이다. 특히나 아빠와의 소중한 시간, 그들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 루퍼스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
"저희 아이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세요." 엄마가 나직이 읊조렸다. "은총을 내려 주시고 저희 모두를 지켜 주세요." "아멘." 루퍼스가 예의 바르게 속삭였다. 불편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엄마를 더 꼭 끌어안은 루퍼스는 엄마도 자기를 더 힘껏 끌어안는 느낌을 받았다. 그사이 서글프고 외로워진 캐서린은 돌처럼 딱딱하게 서있었다. 거짓의 아들과 거짓에 속은 엄마, 그리고 깊은 상처를 받은 딸이 그렇게 정물처럼 그 자리에 조용히 있었다.
이 책은 제임스 에이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소설로 쓴 자전적 추도사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그 경험으로 그는 한 가족에게 찾아온 죽음을 어떻게 견뎌내는 지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소설가 겸 시인으로서, 영화 비평가 겸 시나리오라이터로서, 르포라이터 겸 저널리스트로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던 그의 유작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이 책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쏟아 부었는데,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하게 되고 만 탓이다. 죽음은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와 남겨진 이들에게 그저 견뎌내라고 말한다. 최고의 문장가로 명성을 쌓은 작가답게 이 책들의 문장은 매우 공들여 읽고 싶을 만큼 단단하다.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 전부터 그날 저녁,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단 며칠 만에 이들 가족에게 벌어지는 상황과 심리들은 고스란히 감정을 따라가느라 몰입하게끔 매우 밀도가 높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하지만 비 종교인에게도 거부감이 없을 만큼 스토리에 잘 녹아져 있고, 담담하고 정확한 문장들로 표현된 이들의 마음은 마치 내가 그들 가족의 일원이라고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한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언젠가는 나도 맞이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마음 한 켠이 더욱 차분해지고, 정돈되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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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남겨진 자들의 갈라진 마음
여기에 나름 오붓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한 가족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병문안을 위해 새벽에 나갔다가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될까? 충격과 슬픔, 혼란스러움으로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에 가족들이 어떤 혼돈과 마음의 갈등을 겪는지 작가인 제임스 에이지는 그들의 심리를 돋보기로 들여다 보듯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소설이 제임스 에이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 있었다.
남편인 제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아내 메리, 그리고 메리를 위로하기 위해 집에 모인 메리의 부모님과 오빠, 고모 등의 시선과 생각들이 바로 내가 책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손에 잡힐 듯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특히, 제이의 동생인 랠프가 아버지가 위급 상황에 있다며 제이에게 전화하기 전에 겪는 심리적 갈등은 작가인 제임스 에이지가 이런 심리나 정신을 주로 다루는 심리소설을 써도 대단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까지 그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온전히 소개된 적이 없다는 점이 이상할 정도였다.
랠프는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심리적 압박감에 술을 마시게 되는데, 너무 많이 마셔서 조금 취한 상태에 빠졌다. 랠프는 술 중독에 빠진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와 아내를 신경쓰며 미안한 감정과 함께 반발심도 느낀다. 그러면서 심한 갈증을 느끼며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어 한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성을 가로막는 신체의 본능적인 욕구에 심각한 갈등에 빠져 고민한다. 랠프의 알코올 중독은 피해 망상과 부정적 생각을 더욱 부채질하여 그날 밤 형 제이를 부르고 만다. 그 결과로 인해 아버지의 위급 상황은 아무 일없이 무사히 지나게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제이는 교통사고를 내며 죽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주변에서 누군가 죽게 되면,,, 그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특히, 마지막 만남의 순간을 몇 번이나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자신이 놓친 것이 있었는지 찾아보며 의미를 되새긴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의미있게 다가온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말이다. 그때의 말투, 눈빛, 표정, 손길, 대화 내용,,, 심지어는 그때의 날씨, 시간, 바람, 분위기까지도 의미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이걸 극복할 수 있는 걸까?
제이의 아내인 메리에게는 그래도 든든한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있었다. 그랬기 대문에 36살의 젊은 남편을 잃은 메리는 그 신앙의 힘으로 인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세상을 원망하며 울고불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독한 술을 마시며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메리에게는 자기를 걱정해주는 가족들과 자신이 지켜야 하는 두 자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이성을 갖고 가족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뭔지 모를 불안과 불편한 마음을 갖는다. 어쨌든 메리는 이러한 힘든 고난의 시간을 하나님께 의지하여 조금씩 이겨낸다. 이걸 보면 신앙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6살 정도의 어린 루퍼스와 그 동생 캐서린. 루퍼스와 캐서린은 아버지의 죽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에서 한 가족에게 닥친 비극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그 의미는 분명하게 모르지만,,, 어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혼란, 슬픔 등을 눈치 빠르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퍼스는 아버지의 죽음까지도 또래 아이들에게 뭔가 으스대며 자랑할 일이라고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루퍼스는 알 수 없는 꺼림칙함에 불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은 이성적으로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감성적으로는 어둠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사고 전날과 사고가 일어난 날, 그리고 장례식 날과 그날 밤에 대한 얘기만으로 이뤄져 있다. 이렇게 짧은 시간만을 가지고 한 권의 소설로 완성하기는 힘든 점이 있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사건이 많이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한 사람의 심리가 치열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을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고뇌와 갈등과 슬픔 등의 감정들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지,,, 결말 쪽에 '이전 이야기'가 있는데, 이 부분은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단편적으로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큰 흐름의 측면에서 서로 연관성이 낮은 편이라, 그저 작가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적어 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돼서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다.
한 인간에게 한평생 일어나는 일 중에서 부부의 사별이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이 한순간의 사고로 갑자기 죽는 경우에는 그 충격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엄청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예전 기억들이 자꾸 말을 걸어와 마음을 잡아챘다...
* 인터파크 신간 리뷰단으로서 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