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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장황한 불륜스토리와 더불어 농촌 귀족 ‘레빈’과 그 주변 인물들로 표상되는 문명적 전환기를 마주한 인간들의 사상적 혼란과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겪게 되는 혐오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구원과 속죄의 여정으로 읽게 된다.
불륜의 히로인(heroine)인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의 도피와 연인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 자기 연민의 불가항력적 귀결에 이르는 장면들은 당대 여성들, 특히 사교계로 대변되는 귀족 여성들의 사회적 위선과 자기 한계를 노출한다. 작가 톨스토이의 시선은 지극히 기독교적 순결주의의 도덕성에 천착하고 있어 소설 도입부를 장식했던 오블론스키 백작의 외도로 이혼의 위기를 가졌던 돌리의 안나에 대한 관념적 공감과 달리 “그 행위의 원인이 된 사람을 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2-292)”고 반감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안나 또한 시대성이 지닌 여성의 굴레를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사랑이라는 열정에 몰입하여 연인의 신체와 정신을 견고하게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것만이 존재의 의미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귀족 사회 및 남성적 시선에 포획된 언어를 그대로 자신에게 투사하여 “역겹고 추잡스럽고 몰인정한 계집(2-192)”이라는 자기혐오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자기 혐오는 곧 자기 연민의 다른 표현이다.
한편 이와 달리 안나로부터 배신당한 카레닌의 경우에는 “아내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언제까지나 자기라는 존재 때문에 아내로 하여금 고민하지 않도록 해준(2-115)” 결과가 절망감과 슬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경멸받는 고독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연민의 공감으로 나타나고, 나아가서 ‘리디아 공작부인’이라는 귀족 사교계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성으로부터 사랑과 연민을 받는, 즉 사회적 권위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지 않으며, 종교적 구원, 하느님의 고상한 관용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다. 카레닌의 안나에 대한 죄의 물음이다.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하던 안나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그 불의의 자식에 대한 배려의 수치스런 기억과 회한이 그를 괴롭히는 중에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법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혼하는 법이 다를까?(2-137)”라는 본질적 자문을 하는 것이다. 관념적 이상과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시대성의 충돌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징후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성의 역할과 인식에 대한 아주 소박한 변화의 징후는 농촌 귀족 레빈의 아내인 ‘키티 레비나’의 사랑의 지혜로 현현되는데, 형 니콜라이의 임박한 죽음을 대하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두려움 없는 의연함의 지혜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에게 여성, 아이, 농민 등 평민은 복속되어야 하며, 그들에겐 지혜란 것이 없다는 믿음의 미세한 균열이다. 그는 농노제에서 소작농, 임금 및 수확배분 등 다양한 농업 경영 방식으로의 이전에서 부대끼는 당대 농부들의 게으름, 새로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쌓아 나간다. 또한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은 당대 러시아가 봉착한 정치적, 경제적 양상들의 다양한 전시장이 되어준다.
작가는 레빈에게 작품의 축으로서 삶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안기지만, 니콜라이의 죽음으로부터 야기된 존재의 지속 가능성, 이로 인한 삶의 의미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의 구함은 한 농부의 신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라는 우연한 언어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되며 조금은 답답한 고루함을 이어나간다. 사실 오늘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는 레빈의 형으로 상징되는 지식 엘리트, 즉 당대 인텔리겐차의 오만한 무지와의 치열한 논쟁에 있다.
크림반도로 불리는 세르비아, 터키 지역의 전쟁에 동족인 슬라브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는 의용군대에 대한 찬반의 문제이다. 전쟁 참여의 명분은 다분히 자의성을 지닌다. 학자인 형 ‘코즈니세프’는 주장한다. 슬라브 민족이 이교의 사라센 인 멍에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도들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처럼 동포의 고난에 민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러나 레빈은 이를 반박한다.
러시아인이 왜 갑자기 슬라브의 동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더구나 편리할 때마다 사용하는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 막연한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자기 의지를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표명해야 할 사건으로 눈곱만큼도 여기지 않음에도 그들에게 민중의 의지 운운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반론이다. 무고한 터키인을 살해하려는 것, 그리고 죽음의 전장으로 향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이의이다.
여기에 신문이라는 신문은 다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 실재 진실의 목소리는 물론 아무것도 얻어들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신문 즉, 여론을 조성하는 이 인위적 매체의 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레빈은 신문과 민중의 의지라는 언어를 이용하여 복수와 살인의 사상을 대표할 권리를 인렐리겐차가 가지고 있다는 데 결코 동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에 그대로 이식해도 아무런 손상도 없는 담론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상업 권력이 지배하는 오늘의 언론 미디어는 이미 공정한 지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며, 엘리트 지배계급이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나 관심이 있으며, 더구나 전쟁의 선포나 참전의 결정을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은 이제 애국심과 같은 정체성을 획책하는 저열한 악의에 결코 공감을 얻기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우둔, 지혜의 속임수에 대한 레빈의 갈파와 함께 자신의 내적 충동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한 인간으로부터 사회적 조건을 초월한 진리 발견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이성이 발견한 것은 고작 생존경쟁이요, 욕망 만족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증오의 법칙일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이성이 남을 사랑하라는 법칙을 발견할 리가 없다(2-565)”는 레빈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반(反)합리주의 세계관과 많이 닮아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우리들이 근거 없는 의지를 이해하려 할 때 과연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구원, 영혼으로 사는 것, 하느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만 유일한 길일까? 그렇다면 치욕과 불명예로 몸부림치다 열차에 뛰어든 안나의 행위는 죽음에 의한 구원의 의식인가? 아니면 원죄, 불륜의 속죄인가? 나는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이러한 우둔함에 머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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