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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불편한 소설이다. 이야기 전개가 지지부진하다. 수준 낮은 독자로서는 끝까지 읽기 따분하다.
진정 불편함은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 그 진실의 극단적인 결과다.
성당을 생각해보자. 파리의 노트르담이나 사르트르 성당은 빼어난 외관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성당이 존재하고 숭배되는 이유는 높은 첨탑의 위용이나 섬세한 외벽의 조각 때문이 아니다. "성당은 벽이나 문, 창문이 아니라 텅 빈 공간으로 인해서 숭배된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만 시선을 빼앗기고는 한다. 사랑의 모습도 그렇다.
그 사랑의 진실한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녀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찾아야"하는 탓이다. 그리고 나를 찾기 위해서는 "단지 주위를 존경어린 눈으로 주의깊게 돌아보면 된다." 다만, 주위는 지금, 현재다. 과거는 과거일 뿐, 더이상 참조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서 해방될 때, 옛 열정도 되찾을 수 있다.
그 현재는 소중한 순간의 연속이다. 자신의 장례식을 생각해 보면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새삼 소중해진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으로 현재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순간순간이 소중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사랑이다. "슬픔이나 의심 따위를 위한 시간은 없기" 때문이다. 동의한다.
문제는 그 사랑의 모습이다. 코엘료는 충고한다. "매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살아라." 그 사이에 익숙함 또는 평화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에스더가 말한다. "평화는 내가 가진 중요한 것을 파괴한다. 당신과의 관계를." 가장 경멸하는 사랑의 모습은 철로다. 정확히 143.5센티미터 떨어진 채, 철로는 결코 만나는 법이 없는 탓이다.
슬슬 불편해진다. 철로와도 같은 사랑,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하는게 내 생각인 탓이다. 결코 만나는 법이 없지만, 결코 헤어지는 법도 없다. 아주 가까이에서, 언제나 곁을 지켜주되 내 공간은 지켜준다. 제 아무리 뜨거운 사랑이라도 ''나''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내 공간''의 확보야말로 너와 내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전제는 아닐까.
하지만 그 ''내 공간''을 고집하다보면 ''당신''의 존재를 가끔씩은 잊기도 한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말을 붙일 때 매정하게도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내일 얘기합시다.(We''ll talk tomorrow)" 에스더가 코엘료를 떠나간 이유다. 그리고 내가 색시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두려워진다. 동의할 수 없는 코엘료의 사랑 이야기가 내 평화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는 모양이다. 진실을 마주하면 불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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