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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결국은 읽지 못했다. 십 년 넘게 세 번이나 시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몇 년 후 다른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내용은 제대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매번 난삽한 번역문에 막힌 것이다. 몇 번이나 덮고 다시 읽기를 되풀이하면서 급기야는 번역자가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랬을 리야 있었을까마는. 철학이나 신학을 다룬 외서는 하나같이 번역문에서 막힌다. 물론 쉬운 문장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렇기는 하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신학을 이야기할 때 칼 바르트나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함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루돌프 불트만에 관한 책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롭게 알게 된 출판사의 책을 읽어보려던 참에, 그 출판사에서 불트만의 신학을 다룬 책을 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읽기 시작했다. 걱정과는 달리 마지막 장까지 빼지 않고 다 읽었다. 신학책이나 철학책은 매번 도중에 덮었던 기억이 많았던지라. 편안한 번역문 덕분에 모처럼 신학의 내용을 음미하며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성경은 신앙고백서라고 믿는다. 이것은 내 신앙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신앙은 성경이 오랜 시간에 걸친 전승과 편집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기록자의 지식과 이해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성경(text)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록된 배경(context)을 이해해야 하며, 그래서 그렇게 성경을 읽으려고 애쓴다. 불트만 역시 성경의 메시지가 그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이자 신학자인 데이비드 콩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대다수의 신학자는 “복음의 메시지가 탈문화적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불트만이 행한 일련의 작업을 번역이라고 평가한다. 문화적, 역사적 맥락과 연계해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을 번역으로 여긴 것이다. “가장 정확한 번역조차도 다음 세대에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불트만의 확신이 이러한 저자의 평가를 뒷받침한다. 예수의 신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단이라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기는 한데, 나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해석 방식에 매우 동의하는 편이다. 이는 불트만이 따른 빌헬름 부세트의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예수 공동체라는 윤리적 종교)-헬레니즘 그리스도교(헬레니즘 공동체라는 신화적, 신비적 종교)’ 분류 방식 중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는 참된 그리스도교와 아무 상관도 없는 역사적으로 재구성된 예수를 지어낸다고 비판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자유주의자라’는 조롱 섞인 이름을 붙인다. (나도 여기엔 할 말이 많다) 하지만 불트만은 이 두 가지의 그리스도교와 달리 참된 그리스도교는 “신적 은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선물로 받는 현실, 변화되는 것, 자기 본성이 새롭게 창조되어 요구받은 일을 해내려 애쓰는 대신 자기 존재를 그대로 드러내며 사는 것”이며 “신적 은혜에 대한 참된 지식은 시간을 초월한 진리나 과거 사실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그리스도교가 참된 그리스도교와 아무 상관 없다는 저자의 비판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트만의 정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신학에 대해 저자는 체계적으로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불트만은 학문 전체에 걸쳐 일관된 논지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영역에서 내린 결정이 다른 영역에서 내린 결정과 맞물린다고 말한다. 나는 신학이나 철학에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영역의 책을 읽으면서 자기 논지를 시종일관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종종 느낀다. 그래서 일관성을 잃더라도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면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니 학문 중의 학문이라는 철학에서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나로서는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다. 다행히 유려하고 편안한 번역에 힘입어 끝까지 읽기는 했다. 듬성듬성 이해할 뿐이었지만, 공감하고 때론 감동할 만한 글이 적지 않았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의례와 관습이 아니라 말씀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나 세계관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 회개하라는 부르심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소환이요 결단으로의 부름이다. 그러므로 들음은 단지 물리적인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행동이 따르는 순종이다.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곧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은 자는 귀가 있어도 실은 전혀 듣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불트만이 말하는 자기 이해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죄인이었던 자신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아울러 새로운 미래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세계를 선물 받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절기가 본질적으로 강림절이다. 강림절은 무엇보다도 기다림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강림절은 우리가 그토록 쉽게, 그토록 자주 잊어버리는 ‘그리스도인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강림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다. 언제나 계속되는 사건이며,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기대하는 자세로 있어야 하고, 그 기대를 실천해야 한다. 모든 순간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미래에 자신을 여는 기회라는 말이다. 이것이 볼트만의 신학을 ‘강림의 신학’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질문 하나. 불트만은 비록 믿음이 인간의 행위로 일어나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믿음을 거부하는 건 누구의 능력이라는 말일까? 늘 이 부분이 궁금했다. 읽으면서 관련 내용을 검색하다 불트만(1884-1976)이 슈바이처(1875-1966), 칼 바르트(1886-1968), 하이데거(1889-1976)와 친구로 지내도 될 나이란 걸 알았다. 아래위 십 년이면 친구라지 않는가. 실제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도 보이고. 게다가 92세, 91세, 82세, 87세까지 살았다. 그 시대로선 엄청난 장수가 아닐 수 없다. 신학이 장수의 비결인 걸까? 이 책을 번역한 이가 내 뒷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소하 아빠라니 더욱 반갑게 읽었다. 교우라는 게 자랑스럽고. 수요는 지극히 한정되었을 것이나 꼭 필요한 책을 만드는 역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