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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0년 전 쯤 어느 화창한 날 오후 일이다. 선배가 씩씩거리며 학보사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데 손에는 흙이며 음식찌꺼기가 잔뜩 묻은 학보 한 뭉텅이가 들려 있었다. 학생회관 앞 잔디밭에서 낮술을 먹고 있던 한 무리가 떡 하니 학보를 깔고 술판을 벌렸더랜다. 마침 학내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던 선배 눈에 딱 걸렸는데 그게 그렇게 열불이 났다고 한다. 대판 시비를 붙고는 여봐란듯이 깔려있던 학보를 싹 주워가지고 왔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습기자 나부랭이 눈에도 그 선배의 행동이 멋있어 보였다. 감히 우리가 피땀 흘리고 날밤을 까며 만들어낸 신문을 술자리 깔개 취급하다니 용납할수가 없었다. 우리는 비록 대학신문을 만드는 '아마추어' 기자들이었지만, 나름의 사명감과 자존심으로 뭉친 '똘끼' 충만한 '신문쟁이'였다.
신문 만드는 일은 고달팠다. 학업과 기자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주 돌아오는 원고마감과 조판은 피를 말리는 전쟁과도 같았다. 기획, 취재, 마감, 교정, 편집 디자인까지 일주일에 꼬박 이틀은 밤을 새워야했지만, 고된 조판작업을 마치고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의 맛에 취해 또 그 다음 일주일을 버텼다. 힘은 힘대로 드는데 수시로 들어오는 학교측의 원고 검열과 편집권 간섭에 맞서 싸우다 보면 체력이 방전돼 학보사 구석 낡은 소파에 나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 책을 보니 새록새록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학보사 건너편 방에서 교지를 만들던 후배 녀석은 출판 기획자가 되어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프로들의 세계에 비할바는 못되겠지만, 대학 4년 동안의 학보사 기자 경험에 비춰봤을 때 출판 노동이 그야말로 '쌩 노가다'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출판, 노동, 목소리>는 '이상한 책의 나라'에서 '쌩 노가다'를 하며 살고 있는 앨리스들의 이야기다.
'이상한 책의 나라'에 사는 앨리스들
편집자, 마케터, 북디자이너 등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은 11명의 출판 노동자들은 각기 나름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 어떤 가치를 쫓아 입문했든 생업의 필요성 때문에 선택했든지 간에, 시작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노동'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울고 웃으며 매일을 살아내고 있었다.
사실 '출판 노동자'라는 말은 그다지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책은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기까지 투여된 모든 노동의 집합체다. 하지만 출판과 노동을 쉽게 연결짓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홀대되고 그들의 처지에 무관심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언론 노동자들은 잘 조직된 노동조합을 통해 파업같은 단체행동권 행사도 가능한 노동자로 인식되고 있지 않나.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시끌시끌하게 해야 세상은 귀를 기울여준다. 이 책의 의미는 이런 것 같다. 이들의 진솔한 고백은 우리 사회도 이제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는 걸 말해주고 있다.
한편, 출판을 단순히 책이라는 상품을 찍어내는 행위 정도로 여기는 것도 그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책을 만드는 행위란 분명하게도 만드는 이가 추구하는 세계관이나 가치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을 '노동권'이 아닌 '사회혁신'이나 '사회운동'의 연장선에서 접근하려는 시도는 출판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과는 무관하게 '가치'를 앞세워 '노동'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출판의 숙명과도 같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키워드도 '노동'에 있지 않을까.
이제 그들의 '노동'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출판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노동자'로서의 목소리가 정당하게 수용되고 대접받는 출판 환경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좋은 사회'를 위해 책을 만들면서 정작 책을 만드는 회사의 비상식적인 모습에 절망한다. 비교적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출판계에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노동자, 비정규직, 임시계약직 노동자들이 넘쳐난다.
프리랜서 편집자 황현주는 출판계에 노동조합이 보편화되지 못한 것, 좋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이중적 태도, 자신의 노동환경에 대한 무지 등 출판과 노동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173쪽) 의문을 던진다. 어쩌면 출판계에 '노동자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책'이라는 결과물에 모든 것이 수렴되어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내는 과정의 일들이 책이라는 결과물이 나오는 순간 지나간 추억이 되고 다음 책을 기획하는 장정이 다시 시작된다.
편집자 정유민은 "책에 강요된 숭고한 자세를 버리자 머리가 가벼워지고 오히려 모든 문제들이 담백해졌다"(129쪽)고 고백한다.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던 사명의 무게를 내려놓고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 오히려 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더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뫼비우스의 띠지>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정유민은 "출판 노동자들의 고백이 바깥으로 나오자 '책을 만든다'는 그럴싸한 그림에 가려졌던 출판 '노동자'들이 여기 저기서 저요, 저요라고 손을 들었다"며 "사장이나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 관리자 말고 동료와 동료들이 손을 맞잡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 것"(132쪽)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출판 노동권의 회복을 위해 독자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먹거리에 관심을 갖다보면 더 좋은 것, 더 안전한 것을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먹거리가 만들어져 유통되는 과정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책의 생명력은 본디 일방성이 아니라 상호성에 기반을 둔다. 작가는 글을 쓰면 되고 출판사는 책을 찍어내지만, 책은 독자에 의해 읽혀졌을 때 비로소 온전한 생명력을 획득한다. 결과물 뿐만 아니라 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 독자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출판 노동자와 독자들 사이에도 소통할 수 있는 폭이 더 생기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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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이기보단 장인에 가까운, 우리와 다르지 않았던 그들의 넋두리이자 고백이다. 출판업에 대한 관심은 책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당연스러운 관심의 귀결이다. 특별해보이지만 특별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노동이며 예술이었다. 본문에 나온것처럼 이상하리만치 애매한 자본의 추구와 사회적 역활이라는 중추 사이에서 수 없이 흔들릴때마다그들을 지탱해준것은 무엇일까. 상식적인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비상식적인 구조 아래 누구보다 힘쓰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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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평균 독서량이 한달에 1권 미만임을 감안하면 난 꽤 많이 읽는 편에 속한다. 자주 사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는 상위 1%라니, 이젠 당당히 취미가 독서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내게 환상의 세상이 있다면 바로 출판의 세계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물론이요, 한권이 책이 나오기 까지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알길도 없다. 그저 좋은 책을 발견하면 기쁘고, 믿었던 출판사와 저자의 책이 마음에 안들면 조용히 떠나면 그만이였으니까.
대한민국 출판업이 하향길이라는 것은 뉴스를 통해서만 들어왔고, SNS를 하다보면 주변에 책읽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왜 사향길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가기도 했다.
동네서점이 줄어든다는 것, 책 판매량이 줄어들어 수익이 없어서 그렇다는데, 독자로써는 알길이 없다.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면서 책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됐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조금더 저렴하게 책을 구입할 수 있는 인터넷 서점이 정말 반가웠다.
그러다 출판업계에서 도서 공급과 출판업 하향이라는 문제제기로 도서정가제를 시행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결국 법안으로 만들어져 시행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2014년 11월 개정된 도서정가제 이후 책의 구별없이 모든 책에 대해서 할인률은 10~15%로 정해졌다는게 핵심. 이젠 어디서 사든 책값은 똑같아 졌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법안이지만 이미 줄어든 동네 서점들... 결국은 무료배송 해택을보는 인터넷 서점을 주로 이용하게 된다.
출판업이 어떻게 변해 갔는지 흐름에는 관심이 없었고, 개정된 도서정가제는 책값이 올라버린 샘이 됐다. 작년 이맘때 10만원으로 살수 있었던 양보다 지금 10만원으로 살수 있는 책의 양이 줄었다. 결국 책값인상 부담에 도서관을 더 자주 이용하게 되며,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는 읽고 싶은 책들을 담아 뒀다가 도서관에서 읽고 난 다음에야 다시 읽고 싶은 책들만 구입하는 걸로 도서 소비 유형이 바뀌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결국 독자로써 여전히 책을 읽고 있고, 소비자로소 종종 책을 구매 한다.
'책'은 환상이다. 책에 대해 아는 거라곤 저자와 독자가 있다는 것, 간혹 역자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결국 저자와 독자사이에 밀고 당김이 '책'의 역할이며 이런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사는 그저 부수적인 관계일 뿐으로 생각 해왔다.
그럼에도 소위 말하는 좋은 책들을 만들어 내는 출판사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 곳은 얼마나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고 진취적이며 즐거울까? 이정적이고 합리적인 책들이 장점인 출판사 사람들은 책 만큼 이성정이고 합리적이겠지. 뜨거운 감성이 듬뿍 담긴 책들을 만들어 내는 출판사는 역시 감성적인 사람들이 가득 하겠지. 과학서적이 대표하는 출판사는 과학자 만큼이나 괴짜들이 많겠지 같은 상상들로 가득한 곳.
그렇게 신비로운 출판사, 그 현실을 이야기 하는 책이 나왔다. "출판, 노동, 목소리"
이 책은 출판에 대한 이야기 이며,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은 '을'의 목소리다. 11명의 이야기 들의 출판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아니다. 분명 합리적인 곳도 있고, 좋은 곳도 있겠지만. 어쨌든 책에 실린 글은 출판 노동에 대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보게 한다.
출판사도 대형, 중형, 소형 이란 양적인 단위로 구분 할 수 있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처럼. 출판사 역시 결국은 회사다. 그리고 출판업 종사자들은 역시 노동자다. 회사와 노동자. 갑과 을. 좋은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모였다던 처음의 출판사들과 지금의 출판사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출판사도 결국은 회사라는 것. 점점 규모가 커진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이윤창출이 우선시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윤창출의 최우선은 결국 인건비 절약!
거의 모든 회사가 그렇듯이 그 어떤 대의 명분보다 앞선 '이윤창출'앞에서 다른 것들은 무차적인 문제가 된다.
책에 실린 11명의 목소리들은 결국 그것을 이야기 한다. 출판사에 환상은 없다. 출판사도 회사다. 책 판매 부수가 중요하며, 변화하는 기술 트렌드에 따라 책 역시 변화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속에 있는 노동자들, 편집, 디자인, 홍보 등등 '출판'이라는 거대한 이름 속에 작은 분류들로 나뉘어 전문화 되고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역시 '을'이라고, '책'이라는 이름에 갇혀 노동권에 대해 모르고 살아 왔다고.
이젠 노동자 임을 인정하고, 노동자로써 권리를 찾고 싶다는 목소리다.
노동조합 활동, 회사와의 협상, 직장내 성희롱 문제... 아니 그외 다양한 문제들 수당없는 야근과 특근 같은 것 또한 포함이지만 결국 '노동자'로써의 '권리'를 찾고 싶다는 목소리다.
그것은 결국 '사람'답게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목소리 이기도 하다.
<출판, 노동, 목소리>는 출판계의 이야기며, 또 다른 '을'의 이야기다. 대한민국 거의 대 다수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을'이라는 직업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읽었고,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