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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풀거리며 달려오던 봄 주춤하는, 태어나지 않은 꽃의 울음 환청처럼 들리는, 흐린 하늘 아래 인류가 평등하도록 AI에게 고개 숙이고, 그토록
인간은 인간인 것이 숙명이 되어 환란은 기습이 되지 못하고, 이제 오래전 기억을 더듬거리는 것은 아니 더듬거려야 인간, 지나간 일을 정확하게
꺼내는 것은 소름 돋는 다른 것들의 영역이 되고, 주춤했어도 봄은 여전히 달려오는 중이지만...
불면
오래 전에 본 적 있는 그가 마침내 나를
점령한다 창가에서 마른 종잇장들이 찢어져 새하얀 粉으로 흩어진다
몸이 기억하는 당신의 살냄새는 이름 없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여린 꽃잎을 닮았다 낮에 본 자전거 바퀴살이 허공에서 별들을 탄주하고 잠든 고양이의 꼬리에선 부지불식 이야기가 튕겨져나온다 내 몸을 껴입은 그가 밤이 가라앉는 속도에 맞춰 거대한 산처럼 자라나 풍경을 지운다 천체를 머리맡에 옮겨다놓는 이 풍성한 은닉 속엔 한 점의 자애도 없다 온통 가시뿐인 은하의 속절없는 일침뿐이다
자연과 신, 신과 인간을 넘어 인간과 자연으로 이어지던 치열한 이분법은 이제 인간과 기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분법으로 넘어갈
차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을 순환의 순서로 보자면 그 다음에는 기계와 신의 이분법의 시대가 되는 것이겠지, 서툰 불면의 시대는 어느 사이
저물고 완전한 불면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겠지, 인간이 배제되어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리라는 설교를 듣게 되겠지...
“...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여 /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 이 다른 말이라 하는 것도, /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중
봄을 맞이하거나 봄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봄을 스캔하고 봄을 쥐락펴락 한 죄, 오천 년의 축적된 기억을 이 년의 프로그램 된
기억으로 대체해버린다는 벌로 달게 받게 되고, 인공도 지능도 인간의 것이니 인공 지능 또한 인간의 것이어서,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모른
체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우리의 인지 능력 안에서 우리는 서서히 주인의 누락과 도래를 경험해야 할 것이고...
“... 꽃들이 공기를 연인이라 여기고 / 하늘이 새들의 고향 행세를 하는
게 / 이 낡은 별이 끝끝내 망하지 않는 명분이다...” <봄날의 전장> 중
날카로운 언어로 상상력에 침이라도 맞은 듯 읽히는 강정의 시어들이 ‘끝끝내 망하지 않는’ 인간의 마지막 ‘명분’이 되기를
희망해보고, 그러다가 문득 인간처럼 시를 써낸다는 인공 지능을 떠올리고, 그간 우리들 인간의 주인 행세라는 것이 참 고약했어, 쓴웃음을 지어도
보고, 맞아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실리를 쫓다가 이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지, 너무도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인과관계를 떠올려도
보고...
“오래도록 삼키고 있던 과거를 뱉었다 / 그러고 보니 毒蟲이었다 / 뱉어내지
못한 남은 살들이 울고 있었다 / 눈앞의 것들이 백색의 그림자로 지워지면서 / 그때야 비로소, / 배만 부르면 슬퍼지던 까닭을 알 수 있었다”
- <거미인간의 시 - 새로운 식욕> 중 1
그저 컴퓨터들의 연결로 한층 수준이 높아진 프로그램이 등장하였고, 그 프로그램이 인간의 고수 한 명을 이겼을 뿐이라고 여기고
싶지만, 인간의 욕망의 방향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누누이 확인하였으니, 지금까지 꽤나 많은 디스토피아 SF 영화들을 봄으로써 딥 러닝
하였으니, 지금 당신들의 공포가 아무 까닭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들 통할까, 이상하게 슬퍼지는 까닭을 우리가 모를 수 있을까...
강정 /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 문학동네 / 134쪽 / 20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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